최영철,「홍매화 겨울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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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겨울 나기

 

 

최 영 철(낭송: 도종환)

 

그해 겨울 유배 가던 당신이 잠시 바라본 홍매화
흙 있다고 물 있다고 아무데나 막 피는 게 아니라
전라도 구례 땅 화엄사 마당에만 핀다고 하는데
대웅전 비로자나불 봐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막 몸을 부린 것 같아
그때 당신이 한겨울 홍매화 가지 어루만지며
뭐라고 하셨는지
따뜻한 햇살 내린다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데나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건 맺을 생각도 않는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내 알몸 다 보여주고 온 것 같아
매화 한 떨기가 알아버린 육체의 경지를
나 이렇게 오래 더러워졌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같아
수많은 잎 매달고 언제까지 무성해지려는 나
열매 맺지 않으려고
잎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올리는
홍매화 겨울 나기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

 

 

– 시집『일광욕하는 가구』, 문학과지성사, 2000

흙 있고 물 있다고 아무데서나 꽃 피우지 않는 꽃이 있다는데, 우리는 아무데나 몸을 부리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요? 햇살 내리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데나 속내 보이지 않는 꽃이 있다는데, 우리는 알몸 다 보여주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요?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건 맺을 생각도 않는 꽃이 있다는데, 우리는 열매부터 생각하며 무성하게 서 있는 건 아닌지요? 홍매화. 겨울 홍매화.

문학집배원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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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년 11 개월 전

'기생들의 일생' 이 아닌가 싶네요향은 널리 내 품돼 열매맺기는 거부하는 힘든 사람들

Anonymous
7 년 7 개월 전

도 시인 아찌 너무 멋있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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