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별의 각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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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각질

이병률

애초 내가 맡은 일은 벽에 그려진 그림의 원본을 추적하여 도화지에 옮겨 그리는 일이었다 부러진 이 가지 끝에 잎이 달렸을까 이 기와 끝에 매달린 것이 하늘이었을까 하루 이틀 상상하는 일을 마치고 처음 한 일은 붓으로 벽을 터는 일이었다 벽에다 말을 걸듯 천천히

도저히 겹치지 않는 다른 그림이 나왔다 누군가 흰 칠을 해 그림을 지우고 다시 그린 것이 아닌가 하여 벽 한 귀퉁이를 분할한 다음 붓으로 다시 열흘을 털었다

연못이 그려져 흐르고 있었다 다시 다른 구석을 닷새를 터니 악기를 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성지기가, 죽은 물고기가 올려진 천칭의 한쪽 모습도 보였다

흰 칠을 하고 바람이 지나면 그림을 그리고 지워지면 다시 흰 칠을 하여 그림을 올리고

다시 흰 칠을 하고 그림을 그려 흰 칠과 그림이 누대를 교차하는 동안 강이 불어나고 피가 튀고 폭설이 내려 수천의 별들이 번지고 내밀한 것처럼 밀리고 씻기고 쓸려 말라갔던 벽

벽을 찔러 조심스레 들어내어 박물관으로 옮기면서 육백여 년 동안 그려진 그림이 수십 겹이라는 사실에 미어지는 걸 받치느라 나는 가매지고 무거워진다 책 냄새를 맡는다 살 냄새였던가

 

● 출처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 詩, 낭송 –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여행산문집『끌림』등이 있으며,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함.

보기 드문, 참으로 매혹적인 시입니다. 상상의 품격이 높고, 감각의 넓이가 그윽합니다. 시종 목소리의 톤을 고르게 유지시키면서도 시적 긴장이 살아 있습니다. 이 시는 한 마디로 시간에 대한 시라 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시간이 어떻게 덧쌓이는지, 그렇게 덧쌓인 시간이 어떻게 나에게 연결되어 있는지, 나라는 존재는 시간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시를 읽으며 성찰하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별이 되기를 원하지만 실은 별의 각질에 불과한 존재들이 아닌지요?

 

2008. 2. 25. 문학집배원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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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년 8 개월 전

참 슬프게도 제 컴퓨터는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하지만,그 덕에 넉넉한 화면가득 원본을 얹어놓고 즐길 수가 있습니다.제 좋은대로 빨리 읽다가 천천히 읽다가 를 계속하며 즐기고 있습니다.제 하는 일은 매일매일 쌓아지는 빨래와 먼지를 털어내는 일입니다.물론 차곡차곡 얹혀지는 그릇도 씻어내야 합니다.이 시를 읽으며…이 분과 나의 하는 일을 비교해 봅니다.매일매일, 지나온 하루들을 들추어보는 일과매일매일, 어제만을 씻어내는 일…어제도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9 년 4 개월 전

흰 칠 위에 다시 그림을 그렸던 순간들이 나의 역사에도 있겠지요.새로 쌓은 감정 위에 새로운 감정을 쌓던 일. 쓰고 지운 종이 위에 다시 연필을 깎아 새로운 내용을 썼던 일. 글씨 자국들이 얽히고 얽혀 처음의 글은 이제 다시 짐작할 수도 없겠지만때론 그걸로 좋은 것… 다만 그 자국들로 인해 저만큼의 시간들이 있었고 그 시간들을 지나왔다는 것. 흰 칠 속에 그림을 굳이 완벽히 복원할 수 없더라도그런 그림 속에서 붓을 잡고 있었던 과거의 시간과 그만한 사람의 숨결이 있었다는 것.

9 년 4 개월 전

시인은 벽에 그려진 육백년의 역사를 그림으로 한 겹씩 벗겨내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흔적을 우리가 오래된 고목의 나이테에서 발견해내듯, 시인은 벽에 그려진 그림에서 현재라는 시간으로 흘러온, 물길을 거슬러 되짚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숨쉬고 피를 튀겼을 때를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때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짐작해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시인은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들의 치열한 삶도,역사도 어쩌면 지구라는 이 별의 각질정도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9 년 4 개월 전

세상에~ 제목부터 멋집니다 별에 각질이 있다니..사람한테만 있다는 아주 일차원적인 생각만 하고 살아왔던 저에게..문화재를 발견하는 그 절묘한 순간을 잘 표현했네요

9 년 4 개월 전

'바람의 사생활' 시집을 읽었는데 이 시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네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문학집배원으로 작품을 '보고 읽고 들으면' 감동이 세 배는 되는 것 같아요. 참 좋네요.

9 년 4 개월 전

육백여 년 동안 그린 수십 겹의 그림과 흰 분칠이 교차한 시간을 부드럽게 되짚어가면 오늘 여기의 나와 손끝 떨리는 대면이 있겠지요. 별 부스러기라도 되어 반짝일 수 있다면 사소한 붓질도 의미있는 손놀림이겠지요.

9 년 3 개월 전

거대한 우주 속의 사소한 지구별의 각질 같은 나.. 그런 각질같은 존재들에게도 겹겹이 쌓이고 쎃인 시간의 깊이가 있겠죠? 우리는 수많은 별들의 각질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별의 각질들이 모여 우주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9 년 3 개월 전

사람은 누구나 감추고,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항상 무엇을 감추려 노력했지요. 그 속에 너무 많은 것이 있어 벅찰때도 있었지요. 그리고 그 속에 아무도 모르는 것들이 담겨 있어 나를 이해하려 해도 할 수 없는 부분들을 너무 많이 만들어 냈죠. 그래서 항상 마음속 깊이 혼자엿고, 그런 혼자인 것에 대해서도 자책하지 않았죠.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약해져갔죠. 아무도 모르게 이제 모든 걸 벗겨내고 보니 참으로 쉬운일이더군요. 이젠 다른 사람의 안도 들여다 보고 토탁여 주는 여유까지 생기고 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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