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목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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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돈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 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 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 원을,
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
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평소의 내 경제관으론 목돈이라면 당연히 땅에 투기해야 하지만
거기엔 턱도 없는 일, 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
황홀히 황홀히 그저 방황하는,
주머니 속에서, 가슴속에서
방문객 앞에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
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 출처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문학과지성사 2005

 

● 詩, 낭송 – 장석남: 1965년 경기도 덕적에서 태어나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새떼들에게로의 망명』『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함.

불현듯 목돈 300만원이 생긴다면 나도 장석남 시인처럼 쩔쩔맬 것 같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주머니에 돈을 넣어두고 황홀하게 그저 방황할 것 같습니다. 시인은 근사하게 비유하기 힘들다고 겸손해 하지만,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라는 멋진 비유는 이 시의 꽃이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내야 할 책은 높은 ‘정신’의 산물인데, 계약금 300만원과 그 쓰임새를 궁리하는 것은 ‘빤쓰’처럼 얇고 속된 일이라는 뜻이겠지요. 이런 쩨쩨함에 대해 나무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쩨쩨한데도 쩨쩨하지 않은 척하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낫습니다.

 

2008. 3. 10. 문학집배원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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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년 8 개월 전

음악과 시인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참, '바싹바싹' 마르지 않게, 경쾌하게 들었습니다. 목돈, 애인의 빤쓰, 그처럼 요긴하면서, 약간은 부담스러운 목돈 같은 게 제겐 뭘까? 생각하는 한주일을 보내겠습니다.

9 년 8 개월 전

제발 하루에 편지가 한 통씩만 오게 해 주십사~같은 내용의 배달 편지 기본 배달이 세 통이니, 이제 짜증날 때도 되었습니다. 남 모르게 두근거렸을 애인의 빤스를버릴 때도 있겠지요…..

9 년 8 개월 전

웃음이 큭큭…소박함이 묻어나는 시인의 마음.

9 년 8 개월 전

사업하는 아내는 비상금이 있어야 한다고, 힘들때 아버지가 쥐어주신 목돈 천만원을 손에쥐고 안절부절 못할때가 있었지요.. 자금난으로 허덕이는 남편의 눈빛을 보며 "이돈을 줘야 하나..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나 " 장롱속의 돈은 애간장이 타듯 바싹 바싹 말라가고 있었지요 ..결국 그 돈은 남편사업자금으로 사라졌지만 ..마음은 편했지요..

9 년 8 개월 전

사람사는일이라는것이 조금은 세속의 얇팍한 통수를 쓰며 살아가야하는때가 있는것 같습니다. 그것이 세상살이라는 자조섞인 자위성 말을 하면서요…..

9 년 8 개월 전

저 같으면 그림 한점 사겠습니다.매일같이 보고 또봐도 항상 새로운 느낌을 가질 수 있는그런 멋진 그림을먼 훗날 나의 자식에게 물려줄랍니다.

9 년 7 개월 전

덜 가진자들의 고민이네요쓸 곳도 많고, 해야 할일도 많고가족들이 모두 가난뱅이여기도 주고 싶고, 저기도 주고싶고목돈이 생겨도 망설이다 몇날이 가고이 웬수 돈이 시인의 마음을 알것 같네요

9 년 7 개월 전

고달픈 현실의 시 인것 같아요 ^^

9 년 4 개월 전

나에게 목돈이 생기면 과연 뭘할까??하고 싶은게 너무 많지만..나보다는 가족을 위해 쓰고 싶다.

9 년 4 개월 전

황홀히 황홀히 땀에 절어가는 300만원…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애인처럼 귀히 여기며 만지작거리기만 할 것인가? 옷도 사고 맛있는 음식도 사먹고, 통장에 넣어 다음 기회를 찾을 것인가. 행복한 고민에 고민을 하게 한다.나에게도 공돈이 생겼으면 좋겠다.공짜로 시집을 받았으면 좋겠다

9 년 4 개월 전

전 목돈이 생기면 이를 하고 싶네요. 교정한 게 잘못 되서 안 좋아진 이를..

9 년 4 개월 전

정말 목돈이 생기면 쓸데가 왜그리 많은지요허긴 목돈이 있지도 않지만요 서글프네요

9 년 3 개월 전

저에게도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돈이 생긴다면..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들을 위해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 가서 기도를 하고 싶네요..

9 년 3 개월 전

그건 돈이 아니라 행복이겠지 즐거운 행복, 행복을 손에 쥐고 어쩔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겠죠. 그런 어린아이의 마음이 10년이가도 지워지지 않도록,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9 년 3 개월 전

방문객 앞에서 엉겁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스처럼, 누구 앞에도 선듯 내 놓을 수 없어 이궁리 저궁리 하며, 없어 졌을까봐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소중한 목돈 300만원, 놓치고 싶지않은 행복, 쓸 수는 없어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마음.

9 년 3 개월 전

땀에 절어가는 황홀한 목돈을 다 써버릴 즈음엔 그보다 더 황홀한 글을 써버릴 것만 같네요. 얄팍하고 속된 빤스보다 몇 겹은 더 두꺼운정신의 황홀한 글을 말이죠.

8 년 3 개월 전

목돈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현실적이고 재밌는것같아요 ㅎㅎ

7 년 3 개월 전

이 시가 더 감동으로 다가 올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진솔함에 시에 묻어나 있기 때문이겠죠.그 속에서 유머러스함이 나타나서 이 시가 더 살아나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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