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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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 잔 부어줄걸 그랬나, 발이 젖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 「선택의 가능성」에 나오는 한 구절.
 
 
시 /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바람의 사생활』『찬란』, 여행산문집 『끌림』 등이 있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함.
 
낭송 / 김근 – 시인.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뱀소년의 외출』『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등이 있음.
출전 / 『바람의 사생활』(창비)
음악 / 자닌토
애니메이션 / 정정화
프로듀서 / 김태형

 

한 사내 생각이 났지요. 저만치 와 우는 새를 바라보는 사내. 그 울음의 단음계를 며칠째 듣고 있는 사내. 울음의 내력을 자상하게 살피는 사내. 그리고 술을 담그는 사내. 열매의 과육 같은 말들을 내부로 다 거둬들인 사내. 그리고 아마 춤곡을 들으며 병을 씻고 있을 사내. 미래의 시간을 미리 가늠해보기도 하는 사내. 식탁에 마주 앉을 사람을 떠올려 보는 사내. 문득 이 시가 물굽이처럼 전환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군요. 그러나 몸이 섞이며 향기 좋은 술로 무르익는 날은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인가요. 새를 부르는 사내. 새가 된 사내. 멋지지 않나요. 이런 사내라면.

 

문학집배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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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년 8 개월 전

이미 읽은 시집 속에 수록된 시인데 왜 놓쳤을까 이 아름다운 시를… 그런 생각을 하며 시집을 찾아봤는데 제목의 인용표시도 없고, 1연의 뒷문장이 좀 다르네요이병률 시인이 퇴고하신건가보죠. 암튼 아름다운 시 재발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7 년 7 개월 전

시공부모임"구들장'에서 이병률 시인의 '바람의 사생활'을 읽었습니다. '가슴속에 이별이야기가 넘쳐나는 시'가 많았는데 대체로 읽기 어려운 시집이였습니다,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지에서 쓴 시가 많은 것 같다. 여행자처럼 삶에 비껴나있는 구경꾼인듯, 그래서 시가 힘있게 느껴지지 않고 읽기 어려웠다. 그래도 읽고 나니, 시집에 여기저기 접힌 곳이 많아 이상했다." , "시 읽기 어려웠다. 모임이 아니라면 혼자 읽기 어려운 시였다. 방송멘트처럼 새련되어서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등입니다. 최근 나온 '찬란'은 좋았습니다.

박한라
7 년 4 개월 전

저희는 세미나때 찬란보다 바람의 사생활 시집이 더욱 좋다고 평가되었는데, 다들 다른가봅니다. ^^아무튼 좋은 시인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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