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 「풀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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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풀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날 풀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놀란다
 
풀들에게 눈이 있었다, 계속 풀을 뽑아 던지자 풀들이 눈치가 생겼다
풀들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어딘가로 숨는다, 나는 처음엔 은유를 알지 못했다
 
풀들은 나의 발소리를 들으면 지금도 두려움에 떤다
 
풀들을 찾는다, 풀들이 보이지 않는다, 풀들이 사라졌다, 풀들은 영민해지고
나의 눈은 어리석어졌다, 낮 속에서 풀들은 밝아지고 나의 눈은 어두워진다
이 둘은 끝없이 도망하고 추적한다
 
나는 풀들에게 모든 것을 노출한 채 잔디밭에 앉는다, 한숨 쉰다
풀들은 광선 같은, 어둠속 눈부처의 움직임에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 법을 그들은 체득했다, 나는 제자리걸음이다
 
나는 이제부터 이 끊음의 제자리걸음으로 버틸 작정이다
 
풀들은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보다 민감하게 움직인다
그러니까 풀들은 나의 눈에서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풀들이 어딘가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 나이, 이제 풀의 소리를 듣는다
 
 
 
시_ 고형렬 – 1954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1979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대청봉 수박밭』, 『성에꽃 눈부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밤 미시령』,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등이 있음. 백석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송_ 노계현 – 성우. 외화 <구름 속의 산책> <보통사람들> 등에 출연.
출전 :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비)
음악_ 배기수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뽑아도 뽑아도 풀이 없어지지 않고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밭일 하면서 풀을 뽑아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실감할 거예요. 며칠 있다 보면 전혀 손대지 것처럼 어느새 다시 자라있으니까요. 풀의 강인함과 끈질김과 생존 본능은 동물적이죠.
사람 눈치를 보기도 하고 달아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풀에서 더듬이가 예민한 동물의 움직임이 느껴질 것 같습니다. 보이는 곳에서 자라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더 많이 자라는 풀들의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살짝 드러날 것 같기도 합니다. 시인의 감각으로 보니 풀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보다 늘 한 발짝 앞서서 궁리하고 빛처럼 움직이는 이상한 식물성 동물이기도 하고 만물의 이치를 감추고도 시치미 떼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자연은 은유를 무궁무진하게 품고 있지만, 그 풍부한 은유를 읽으려는 시인의 어린이 같은 맹렬한 호기심 앞에서는 조금씩 들켜주기도 하네요.
 
문학집배원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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