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한, 「아홉 시의 랭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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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한, 「아홉 시의 랭보 씨」
 
 
 
 
  그러므로 밤이 깊었다
  내가 사랑한 것은 12월의 어쩔 수 없는 목련이다
  삶이 별건가, 발바닥이 밑바닥을 훑고 가는 것
  이건 가슴이 아니라 심장이 말하는 소리다
  말하자면 여긴 방랑의 서쪽이고,
  낙타 한 점 같은 희미한 저녁이 오는 것이다
  저녁의 모략은 향긋하다
  기약 없이 나는 독한 가루약을 먹고 떠난다
  너의 외로운 구멍을 만지던 손으로 나는 신발끈을 맨다
  아무래도 좋다
  오래도록 나의 삶은 권총과 여자가 흐르는 권태였다
  두꺼비보다 한가롭게, 나는 도처에서 살았다*
  한 움큼의 심장과 한 뼘의 혓바닥으로는
  어떤 흥분도 전도할 수 없다
  똑같은 별에서 40년을 굴러온 한 마리 몽상가는
  마지막까지 혁명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천둥을 음악으로 바꾸려는 음모는 때려치워라
  걷다가 나는 흩어질 것이므로
  나보다 먼저 걸어간 제목은 순교해도 좋다
  객사와 횡사의 행간은 아주 좁아서
  어떤 낭독은 건조함 속에서 길을 잃는다
  벌써 밤이 깊었고, 나는 아주 간략하다
  길의 흉터는 자꾸만 발목으로부터 자란다
  그것은 아물지 않고 곧장 ‘아프다’고 말하는 입술까지 올라온다
  모래의 국경을 넘을 때마다
  가방에 그득한 언덕과 미열이 들끓는다
  구름의 망령은 무수하다
  떠나고 보니 문득 나는 떠나고 싶어졌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구멍보다 담배
  어쩌면 졸려서 은둔할지도 모른다──, 나는
  저녁 아홉 시의 빗방울에 어깨를 맡길 것이다
  여긴 심연의 북쪽이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은
  그저 외롭고 헐렁한 모래일 뿐이다
  그러니 여기가 어디냐고 묻지 마라
  나는 목련의 자국을 따라왔고, 여기서
  눈처럼 퍼붓는 사막의 잔별을 꾹꾹 눌러쓴다.
 
 
 
  * 랭보, 「나쁜 혈통」 중에서.
 
 
 
시·낭송_ 이용한 –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 『안녕, 후두둑 씨』, 『정신은 아프다』, 고양이 에세이 『명랑하라 고양이』,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 여행 에세이 『물고기 여인숙』,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길』, 『바람의 여행자』 등을 펴냄.
 
출전_ 《현대시》 2008년 2월호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12월의 어쩔 수 없는 목련” 때문에 여러 번 다시 읽게 되는 시입니다. 한편의 시를 여러 번 읽을 때,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마음의 무늬를 지켜보는 것은 시 읽기의 특별한 묘미이지요. “낙타 한 점 같은 희미한 저녁”에 퍼지는 향긋한 목련냄새를 맡습니다. “걷다가 흩어지는” 것이 목련그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목련이 자기의 이야기를 낭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봄밤. 작년의 12월이 혹시 이 봄밤 속에 들어있는 것 아닐까. 봄의 ‘나쁜 혈통’을 꽃피우기 위해 겨우내 사막을 걸어온 방랑자를 생각합니다. “심연의 북쪽”에서 헐렁한 모래 한 알과 입술을 벌린 목련 한 송이가 한숨을 쉬며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풍경을 상상합니다. 그러다 봄 하늘에 갑자기 눈처럼 퍼부어진 목련의 만개. 거꾸로 흐르는 봄의 핏물 속에서 누군가 초인종을 누릅니다. “12월의 어쩔 수 없는 목련”이 도착한 이 봄밤, 거리를 헤매는 ‘나쁜 혈통’의 방랑자들에게 이 시를 띄웁니다.
 
문학집배원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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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년 7 개월 전

시를 읽을 때마다 남성형이 강한 시를 읽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 시가 내게 주는 깊이가 무한하다 해도 여성을 비하하는 어떤 작은 단어에도 속이 느껍고 거북합니다. '거리를 헤매는 나쁜혈통의 방랑자'들에게 그리고 시인에게.

Anonymous
5 년 7 개월 전

12월의 어쩔 수 없는 목련이 4월과 만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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