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430-75337_poem20120430_550x400 한용운, 「알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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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루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_ 한용운 – 충청남도 홍성 출생.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용운(龍雲)은 법명이며, 만해(萬海)는 법호.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으며 16세경에 고향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 그 뒤 1905년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계를 받아 승려가 됨. 『불교대전』과 『조선불교유신론』을 편찬하여 한국 근대 불교의 혁신운동을 펼쳤으며,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가로 활동. 1926년에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인 작품 『님의 침묵』을 발표함.
 
낭송_ 구본석 – 배우. 연극 <하얀 자화상>, <가마솥에 누룽지> 등에 출연.
출전_ 『님의 침묵』(미래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정정화
프로듀서_ 김태형
 
 
 

 
  문학에 뜻을 둔 이가 아니었던 사람이 어느 날 깊은 산에 박혀 피를 토하듯 한권의 시집을 쓴다면, 그때 쓰인 시는 ‘문학적이다 아니다’ 등의 평가를 넘어서는 어떤 진실에 육박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우리 문학사에서 명징하게 보여준 이가 만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승려와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의 삶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 진심과 진실의 깊이 말이지요. 시집 『님이 침묵』을 쓸 때 그는 3.1운동 참여 후 옥고를 치르고 나온 40대 중반의 승려였습니다. 시쳇말로 문학청년기의 감수성과는 멀어도 한참 먼 중년의 시기에 그가 써낸 절절한 사랑의 시편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파격입니다. 승려의 신분으로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을 운운하는 파격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무소의 뿔처럼 성큼성큼 나아간 만해의 열정을 사랑합니다.
  이 시 「알 수 없어요」를 읽을 때면 입가에 미소가 서립니다. 오늘날 창작되는 시들에 비하면 어딘지 좀 덜 세련되었으나 전해지는 진심의 깊이는 무량하고 섬세한, 언어의 기교를 훌쩍 넘어선 마음의 파동.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노을”의 풍경은 어딘지 좀 촌스러운 듯 어리숙한데, 희한하게도 그 어리숙함 속에 영롱하게 빛나는 진심의 빛이 느껴집니다. 입술 끝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온몸을 모두 울리면서 꺼내어 놓는 말이기에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강력한 역설과 비약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대여, 시가 가진 이런 신비한 힘을 우리가 아직 신뢰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괜찮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우리들 낱낱은 “약한 등불”이겠으나 “그칠 줄 모르고 타는” 착한 열정을 끝내 간직할 수만 있다면!
 
문학집배원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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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년 8 개월 전

기타소리, 음악소리, 음악 같은 시, 서귀포는 지금 캄캄한 세상, 비와 안개가 참혹한 아침에 시 같은 그림과 그림 같은 글, 그리고 희망을 두드리는 목소리.

피어라상상력
4 년 8 개월 전

…이렇게 따듯한 봄날아련한 첫 키스의 순간을 피워 올리는 시구를듣고 또 들어봅니다.이렇게 애련한 시구는 어떻게 하면 지어낼 수 있는 겁니까?읽고 남은 시구를 또 다시 음미합니다.

Anonymous
4 년 8 개월 전

노통 서거 때 교과서 속을 뛰쳐 세상으로 나온 "님의 침묵"이란 시를 보고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의 힘과 깊이를 새로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김선우 시인의 글을 읽고 또한 그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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