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세풀베다, 「지구 끝의 사람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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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세풀베다, 「지구 끝의 사람들」 중에서
 
 
 
 
  배가 출항한 순간부터 주방 보조인 나에게는 날이 예리한 칼이 쥐어지는 것과 동시에 감자 껍질을 벗기는 일이 주어졌는데, 내가 항해 중에 껍질을 벗긴 감자를 무게로 환산하면 족히 수천 킬로그램은 되었을 것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취사를 돕고 승무원들의 식탁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주로 감자 껍질을 벗겼으니 말이다. 나는 접시와 냄비를 씻은 뒤에 감자 껍질을 벗겼고, 화장실 청소가 끝나고 난 뒤에도, 스테이크 기름을 제거한 뒤에도, 엠파나다에 들어갈 양파를 썰고 난 뒤에도 감자 껍질을 벗기고 또 벗겼다. 그랬기에 내가 뱃사람들의 삶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시간은 승무원들이 교대로 지친 잠에 곯아떨어진 휴식 시간이 전부인 셈이었다.
  브란도비치 선장이 나를 불렀다. 엿새째 되는 날, 아침 식사가 끝난 시간이었다. 감자를 벗기느라 굳은살이 박인 것도 뿌듯한데, 호출까지 하다니.
  “견습 승무원,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
  “열여섯 살이지만 머잖아 열일곱 살이 됩니다, 선장님.”
  “견습 승무원, 저쪽 좌현에 빛나고 있는 게 뭔지 아나?”
  “등대입니다, 선장님.”
  “저건 파체코 등대라고 하는데, 여느 등대들과는 다르지. 우리는 지금 그루포 에반헬리스타스 앞을 항해 중이지만 이제 곧 마젤란 해협을 통과할 터이니 말이야. 견습 승무원. 자네는 이번 항해를 통해 손자들에게 들려줄 얘깃거리를 만들었군.” 이어 선장은 나의 존재를 잊은 사람처럼 조타수에게 지시를 내렸다. “좌현으로 45도, 중속으로!”
  열여섯 살의 나이에 짜릿한 행복감에 휩싸인 순간이었다. 아울러 그날은 오후에도 행운이 뒤따랐다. 감자 껍질을 벗기기 위해 주방으로 내려갔는데, 조리사가 그날 메뉴를 바꾼 바람에 할 일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작가_ 루이스 세풀베다 – 1949년 칠레 출생. 피노체트의 독재를 피해 망명, 수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며 다양한 일을 하다가 1980년 독일로 이주함. 『연애 소설 읽는 노인』, 『귀향』, 『감상적 킬러의 고백』 등을 출간함.
 
  낭독_ 백익남 – 배우. 연극 <영원한 습관>, <예술하는 습관> 등에 출연.
한규남 – 배우. 연극 <들소의 달>, <강철왕> 등에 출연.
  출전_ 『지구 끝의 사람들』(열린책들)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박지영
  프로듀서_ 김태형
 
 

 
  인용한 이 짧은 글은 마치 제가 좋아하는 몇 개의 단어들로 만든 한 편의 ‘설정’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예요. 배와 신출내기 선원, 곧 닥쳐올 모험 그리고 손자들에게 들려줄 얘깃거리. 출항이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는 건 평생 어부로 살았던 조부의 영향일 테지요. 한때는 서너 척의 배를 부렸다지만 제가 철이 들 무렵엔 해안가에 묶인 작은 배 한 척뿐이었지요. 조부로부터 바다에서 만난 인어 이야기를 들을 땐 정말 흥미진진했어요. 바다 위 둥둥 뜬 통나무 위에 걸터앉았다가 조부와 눈이 딱 마주치자 바다로 뛰어 들어 사라졌다는. 그런데 그 모습이 우리가 알고 있던 인어와는 영 딴판이었지요. 물에 젖어 거무스름하고 이상한 광채까지 띠고 있었대요. 물 비린내가 코를 찌르구요. 그래서요? 그래서요? 우리가 하도 꼬치꼬치 캐묻는 게 귀찮았던지 조부는 한 마디를 던지고는 입을 다물었죠. “억수로 짧았다카이.” 조부의 말처럼 먼바다는 아니었을 거예요. 조부의 조각배는 파도가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요동을 쳤을 테니까요. 하지만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늙은 어부들이 뛰어난 이야기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조부를 통해 알았네요.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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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ous
5 년 8 개월 전

"견습 승무원, 자네는 … 손자들에게 들려줄 얘깃거리를 만들었군."

5 년 8 개월 전

루이스 세플베다, 번역된 그의 작품은 죄다 읽었지요. 최근 나온 '알라디노의 램프'까지. 특히 '갈메기에게 나는법을 가르쳐준 고양이' '연애소설 읽는 노인' 오래 기억하고픈 책이었습니다. 루이스 세플베다, 멋진 환경운동가. 가고싶은 파타고니아. 죽일놈의 싹쓸이 포경선 니신마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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