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스크루턴, 「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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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스크루턴, 「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 중에서
 
 
 
 
  어느날 나는 부르고뉴 와인에 대한 영국 시장의 독점적 권리를 확보하고 있는 런던 판매회사 주최의 전문 와인 시음회장엘 갔다. 나는 병원 같은 시음회장에서 긴 얼굴의 조용한 와인 전문가들 틈에 끼였다. 깨끗이 정돈된 하얀 탁자 위에는 와인 통과 잔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탁자가 있는 각각의 벽에는 와인 나오는 꼭지와 개수대가 있었다. 나는 숙련된 전문가들의 목젖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와인이 입 안으로 들어가 입천장을 적시며 나오는 소리를 놀라움 속에서 들었다. 전문가들이 와인을 개수대에 마구 뱉어냈던 것이다. 수백 모금의 와인이여!
  이때 처음으로 와인평론가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 와인의 가격이 병당 1500파운드라는 사실을 알고 평가판에 ‘매우 좋음’이라고 쓰면서 어떻게 그것을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와인평론가들이 품평을 하기 위해 주택대출금 한달 이자와 맞먹을 와인을 개수대에 쏟아버릴 때 그들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생겨났다. 나는 오랫동안 그랑 에셰조(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적포도주)를 말로 표현하고자 머리를 쥐어짰다. 그때 내게 떠오른 문구는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 2번―바람의 요정같이 베일에 싸인 깊고 오묘한 테너 음조”였다. 적어놓은 그 ‘표현’을 잠깐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식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지워버리고 대신에 ‘매우 좋음’이라고 썼다. 은유와 솔깃한 분석으로 뒤범벅이 된 천박한 와인 품평의 문장들보다 그 ‘한마디’가 더 많은 것을 의미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중략)
  나는 피킨 박사로부터 와인은 쾌락의 원천이 아니라 지식의 원천임을 배웠다. 쾌락은 지식의 토대 위에 있다는 것이다. 식탁에 오르는 다른 먹을거리와 달리 와인은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게 존재한다. (중략) 그가 말하길, 사색은 언제나 체계적으로 해야 하며 와인은 섣부른 평가에 현혹되지 말고 마셔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가치 없는 견해에 지배되는 그릇된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식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_ 로저 스크루턴 – 영국에서 출생. 문학, 음악, 미학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철학자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미학을 강의하고 있음. 지은 책으로 『칸트』, 『성적 욕망』, 『미』 등이 있음.
 
낭독_ 최광덕 – 배우. <만다라의 노래>, <맥베드21> 등에 출연.
출전_ 『철학자, 와인에 빠져들다』(아우라)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인용된 글을 읽으시다가 혹시나 버려지는 와인이 너무도 아까워서 무릎을 치셨다면 당신도 분명 애주가 중 한 분이실 테지요. 언젠가 이 비슷한 시음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볼 기회가 있었지요. 생소하다 못해 기괴스럽기까지 한 광경이었지요. 그들은 단지 맛만을 판별하기 위해 와인을 머금은 볼을 괴상스레 이리저리 부풀리고 거의 목젖까지 넘겼다가 도로 뱉어냈지요. 다행히 저는 그 전문가들이 아니라서 술이 혀를 적시고 식도를 지나 천천히 천천히 몸속으로 퍼지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듯 애주가가 되었지만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소주병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던 동년배 남자들이 그렇게 한심해보일 수 없었지요. 자칫 술잔에 술이라도 넘칠 때면 “아이구, 피 같은 술”이라며 호들갑을 떨던 것도요. 비교적 늦게 술을 시작한 탓에 여기저기 적신호가 와서 금주 선언을 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오래오래 술을 즐길 수 있으니 기쁠 뿐입니다. 언젠가는 이 책의 저자가 도달한 애주가의 다음 단계로도 오를 수 있겠지요. 왜 술을 마시느냐구요? 혹시나 술주정뱅이에 관한 책으로 읽힐까 걱정한 편집자에 의해 제목이 점잖아졌지만, 이 책의 원제는 『나는 마신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랍니다.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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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ous
5 년 8 개월 전

흠.흠. 쾌락은 지식의 토대 위에 있다…

5 년 8 개월 전

이 밤, 나는 제주막걸리를 마시고 내가 오늘 이렇게 존재해서 참 좋다고 생각한다.문제는 상대가 씹는 타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이 어정쩡이 사람사는 모습이 아니냐고 위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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