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주, 「도둑맞을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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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 「도둑맞을 편지」 중에서 
 
 
 
 
  무슨 말인가를 쓰려고 했는데, 잊어버렸다. 아마도 나는 오늘, 어제 읽었던 책의 문체를 흉내 내어 말하거나, 쓰게 될 것이다. 끝까지 읽지 않은 그 책은 지금도, 선반 위, 작고 빨간 나무 상자 위에 놓여 있다. 상자 안에는 양철로 된 담뱃갑이 들어 있는데, 그것의 겉면에는, 흡연이 당신을 죽인다는 프랑스어 문구가 고딕체로 적혀 있다. 담뱃갑 안에는 담배가 들어 있지 않다. 대신 깨끗한 면봉들이 여러 개 들어 있다. 그것들은 여간해서는 사용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면봉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다.
  붉은 나무 함이 다시, 주의를 끈다. 나는 말을 하는 대신, 이 문장들을 쓰고 있는데, 내가 이것을 쓰는 행위에 몰입하게 될수록, 어제 읽다 만 책의 문체를 자꾸만, 자연스레,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의 문체로, 혹은 나의 문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는데, 단언컨대 (나의) 문체 역시도, 누구나 알 만한, 누구나 읽었을 법한 사람들에게서 빌려온 것이기에, 나는 이 글의 문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으로, 전해지는 규칙처럼, 한 페이지 안에서는, 아니 적어도 한 문단 안에서는, 같은 단어나 표현들이 반복되는 것을 최대한 피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빨간 나무 상자를 붉은 나무 함으로, 그것을 다시 적색 목궤 따위로 적는다고 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용할 이 글이,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아무려나, 붉은 나무 함이, 나의 주의를 끌었다. 그것 안에는, 양철 담뱃갑 말고도, 제수용 양초 상자가 있는데, 그 안에는 다리가 하나 없는 목각 관절 인형이 있고, 그것은 손뜨개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손가방을 들고 있는데, 실제 가방처럼 여닫을 수 있는 그 가방 안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인형의 눈알과, 역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모조 지폐 다발이 가득 들어 있다. 그 외에는 더 이상 열고 닫을 수 있는 물건은 없다. 러시아 인형처럼, 하나의 커다란 입이 다른 작은 입을 물 듯, 하나의 커다란 말이 다른 작은 말을 삼키듯, 작고 빨간 나무 상자는, 유연하게 팽창하고 수축하는 감옥처럼, 저보다 몸피가 작은 사물들을 자유롭게 가두고 있었다.
 
 
 
작가·낭독_ 한유주 – 1982년 서울 출생. 2003년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집으로 『달로』와 『얼음의 책』이 있음.
 
출전_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글을 읽다가 슬며시 의문 하나가 생겼습니다. 여기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 ‘붉은 나무함’이 있습니다. 그 안엔 양철 담뱃갑과 인형 등속이 들어 있어요. 담뱃갑 속엔 응당 들어 있어야 할 담배 대신 면봉이 들었구요, 인형의 가방 속에도 무언가 들어 있지요. 그 모든 것들이 붉은 나무함 속에 들어 있습니다. ‘붉은 나무함이 있다’라는 단 한 문장만으로 안에 든 모든 것들까지 다 설명할 수는 없을까요? (속이 무언가로 찬) ‘붉은 나무함이 있다’라는 문장은 (속이 텅텅 빈) ‘붉은 나무함이 있다’라는 문장과는 어떻게 변별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나머진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라는 말 말구요. 인용된 글 중 상자 안에 든 것들을 설명한 대목에 빗금을 칩니다. 나중엔 빗금을 치지 않은 ‘붉은 나무함이 있다’라는 문장만 남아 있습니다. 단 한 문장만 남아 있지만 우린 방금 전 읽은 문장들로 그 안이 잡동사니로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이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지요. 여기 붉은 나무함이 있습니다.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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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년 7 개월 전

붉은 나무함 안에 물건들을 기억하는 건 그래도 그 상자를 추억에서 현실로 확인하며 산다는 걸 말하고 있네요. 우리집 작은 다락에 아주 오래전 뚜껑을 닫아 열지 않고 자고 있는 나무 화구통이 기억 납니다. 그 속에 무엇을 넣었는지 전혀 기어이 안 납니다. 혹시 물감이나 붓을 넣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십년 가깝게 이사를 스무 번쯤 했는데 늘 버리지 못했던 화구통.

Anonymous
5 년 7 개월 전

사물의 단독성과 문체의 무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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