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옹기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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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옹기전」 중에서
 
 
 
 
  항아리를 주웠다. 사금파리인 것처럼 바닥으로부터 한 귀퉁이 드러나 있던 것을 파냈다. 조그맣고 귀여운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깨진 데도 없이 온전했다. 부모님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가져왔다. 항아리를 주웠어, 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재수없다고 말했다. 귀신이 붙는다고 난리였다. 어느 집에서 어떤 것을 봉해 묻어두었을 줄 알고 가져왔느냐며 당장 갖다버리라고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다. 매도 맞았다. 맞은 것이 분하고 멀쩡한 항아리를 이제 와 버릴 수도 없어서 내 방에 숨겨두기로 마음먹었다. 닦고 보니 항아리는 반질반질 빛났다. 나중에 넣어둘 것이 생기면 넣어두어야지. 부모님이 뭐라든 나는 항아리를 주운 것이 기뻤다. 책상 밑에 넣어두고 발을 그쪽에 두고 잤다. 밤에 그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서쪽에 다섯 개가 있어.
 
  (중략)
 
  잠들지 않은 참이라 분명히 들었다. 뒤집어쓴 이불을 내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깥에서 들어온 가로등 불빛으로 머리맡 벽과 천장 일부가 비스듬하게 붉었다. 나머지 벽들은 어두웠다. 틀림없이 이 벽들 안에서 누군가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일단 바깥을 의심했다.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니 밤이 고요한데 두개골만한 것이 발치에 솟아 있었다. 설마 저것이 말했을까 싶어 창을 열고 골목을 내다보았다. 안개가 밤 불빛을 흩어놓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안개를 들이마셨다가 코가 젖었다. 안개에서 성냥을 문대는 듯한 냄새가 났다. 창을 닫고 항아리 앞으로 돌아왔다. 항아리가 진했다. 무서워서 잡고 싶진 않았으나 지금 잡아서 항아리라는 것을 확인해두지 못하면 더 무서울 것 같아 두 손으로 항아리를 잡아보았다. 달랑 들어올려졌다. 거칠고 굵은 알갱이가 박힌 항아리 속을 엄지로 쓸어보았다. 도로 내려놓자 잘강, 하고 밑바닥에서 항아리가 작게 울렸다.
  뭐야 항아리네.
  이불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누웠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 밤에 항아리가 말했다.
  서쪽에 다섯 개가 있어.
 
 
작가·낭독_ 황정은 –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 열차』와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가 있음.
 
출전_ 『파씨의 입문』(창비)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
 
 

 
  동네 슈퍼 앞을 지나는데 여섯 살 난 둘째가 묻습니다. 쇼윈도에 커다란 수박 사진이 붙어 있었거든요. “엄마, 수박은 누가 낳았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죠. 수박 안에는 수많은 씨앗이 있고 그 씨앗을 땅에 심고 물을 주며 기다리면 수박이 열린다, 라는 대답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네요. “정말 이상해, 이상해.” 그러고 보니 그 작은 씨앗 안에 하나의 우주가 들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해요. 축소되고 축소된 그 씨앗 안에 이른바 수박의 DNA 지도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는 거지요. 아이의 그 질문처럼 가끔 소설은 어떻게 씌여지냐는 난감한 질문을 받습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이 고되지 않느냐는 질문도요. 하지만 「옹기전」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드네요. 우리의 첫 이야기도 이렇게 시작된 것 아니었을까요.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구요, 어느 날 땅 위로 비죽 올라와 있는 그것이 당신 눈에 띄고 그것을 캐내었을 때 비로소 당신의 이야기(傳)도 시작되었을지 몰라요. 그 다음엔 잠시 귀 기울이는 일만 남았죠. 그것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요.
 
문학집배원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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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년 7 개월 전

어는 날 땅위로 비죽 올라와 닜는 그것이 당신 눈에 띄고 그것을 캐내었응ㄹ때 비로소 당신의 이야기도 시작 되었을지,,,,다시 써보며 님의 그 생각을 공감해봅니다.오늘 아침 화엄경에 나오는 "하늘엔 구슬로 만든 그물이 걸려있다"는 이야기를 발견하듯이,,이렇게 님의 글이 제게 전해주는 공명의 울림이 다시 그대로 써보게 되는군요,감사합니다.

Anonymous
5 년 7 개월 전

작가의 목소리와 문체가 닮았네요.

5 년 7 개월 전

단감이나 홍시를 먹을 때마다 까만 감 씨앗을 반으로 쪼개 그 속에 있는 하얀 싹의 눈을 들여다 보곤합니다. 신기한건 내 딸도 그러더군요. 볼때마다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냥 씨눈인데. 아이일 때도 그렇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 하얀 숫가락 모양의 씨눈은 신기합니다. 내 딸 속에 내가 있다는 걸 보게되는 순간이지요.

5 년 7 개월 전

'서쪽에 다섯개가 있어' 울림처럼 들려오는 항아리. 별것 아닌 물건 하나 주워다 신기한 듯 들여다 보는 어린 때가 나도 있었는데…온갖 이야기와 사연을 붙여 특별한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말을 걸었던 때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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