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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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그 존재에 치열하게 연연하지 않던 연인이라 할지라도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그렇게 생각날 수가 없더라. 전화가 기다려지고.”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이웃에 살던 사촌은 저녁을 먹으러 놀러 와선 내 방에서 이렇게 속삭이곤 하였다. (…)
안방에는 TV에서 연속극 소리가 요란하고 오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사촌은 새로 데이트를 시작한 의대생에 관해서 쉴 새 없이 말한다. (…)커다랗게 틀어놓은 연속극 소리는 좁은 집 안에 가득하였다.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꿈속에 그리던 황홀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유부남이었다. 아름다운 소녀와 그 남자의 부인은 괴로워하면서도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는데,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밤에는 술을 마신다. 거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남자에게 그의 조그만 딸이 다가와, “아빠 왜 술을 마시는 거야” 하니까 “응, 괴로워서 마신다. 이 세상에 내 괴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너는 나중에 엄마처럼 그러지 말아라” 한다.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주말 저녁에는 언제나 집 안에 그들의 대사가 가득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 안다. 월요일 날 학교에 가면 여자아이들이 강의실에서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시면서 그 연속극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였다. (…)
  “그 애와 결혼하면 참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촌은 투명한 매니큐어를 손톱에 바르면서 말한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내가 어디서 또 그런 애를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엄마도 은근히 좋아한다 너. 전화 오면 빨리 바꿔주고 지난주에는 원피스도 사주더라. 아빠는 데모만 안 하면 누구든지 좋댄다.”
  그러던 사촌은 정말로 그 남자애와 결혼하여서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위대해 보이기도 하고 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남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 출전 :『20세기 한국소설, 50』, 창비 2006

 

 

● 작가- 배수아: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3년『소설과사상』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바람인형』『훌』, 장편소설『랩소디 인 블루』『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시집『만일 당신이 사랑을 만나면』등이 있으며, 한국일보 문학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우미화: 연극배우. 연극 <여름날의 기억> <날 보러 와요> <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등에 출연.

최석규: 연극배우. 연극 <오월의 신부> <산양섬의 범죄> <착한사람 조양규> 등에 출연.

레지나: 연극배우. 연극 <과학하는 마음3-발칸동물원> <마리화나> <시련> 등에 출연.

 

통속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는 표현이 이 대목에 딱 맞는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연속극의 그 남자,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에는 백 퍼센트 공감. 강의실에서 여자아이들이 마시는 ‘종이컵에 든 커피’, 의대생 남자친구에 대해 말하면서 사촌이 바르는 ‘투명한 매니큐어’는 연속극처럼 일회적이면서 또 시대를 넘고 국경을 넘어서 일상에서 재현되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낯선 남같이 보이기도 하지만요.
후일담 : ‘사촌의 그 멋진 의대생은 결혼 후에도 그녀를 사랑하고 꽃과 보석을 프레젠트하고 주말에는 진보적 성향의 연극을 보러’ 다녔답니다. 학교 다닐 때 데모는 안 했다지만.

 

2008. 3. 13. 문학집배원 성석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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