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끌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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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끌림」 중에서

 
 
파리에 살 때, 빈민가에 살았던 적이 있었어.
아랍 사람들과 흑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
깊은 밤에 총소리를 두어 번 들은 적이 있었고
11시 넘어 길가에서는 은밀히 마리화나를 팔던 동네.
내가 자주 가는 아랍 가게는 식료품 가게였는데
누가 틀어 놓았는지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야채며, 쌀, 우유 같은 걸 팔았거든.
아랍 가게의 주인 할아버지한테 고향이 어디냐고 물은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고향이 어디라고 대답하는 소릴 들은 적이 없네.
귀머거리 할아버지였어.
두꺼운 안경을 쓴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주 졸고 있던.
아주 작은 일에도 화를 잘 내시던.
근데 어느 날 깊은 밤,
무서운 동네의 찬 공기를 가르며 산책을 하고 있다가 
할아버지가 신문이랑 잡지들을 수레 가득 끌고는
가게로 향하는 모습을 본 거야.
이상할 것도 없었지.
할아버지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트집 잡으려면 끝도 없었으니까.
아무튼 근데!
그 가게의 2층이 통째로 밑으로 무너져 내린 거야.
2층이 통째로 꺼져 내리는 바람에 할아버지가 압사하신 거.
너무 많은 책들이랑 신문 같은 것들을 2층으로 끌어올린 거지.
그 가게 앞을 지나다 그 모든 것들을 보게 됐는데 그만 목이 메더라.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실려 갔겠지만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가게 물건들을 모두 털어가버리는 바람에
휑한 가게가 특히 더 그랬어.
그리고 2층에서 땅으로 쏟아져 내린
그 내장이 터져버린 것 같은 책더미 속에서
내가 읽다가 창밖으로 던져버린 한국 잡지가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부분에선 다리가 풀리더라.
그러니까 잘 살기 위해선 뭔가를 자꾸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배운 거야.
내가 죽더라도 아무도 목이 메게 하거나
다리에 힘이 풀리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은 거야.
그 아랍 가게 할아버지한테서.
 
 
 

작가 / 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 여행산문집 『끌림』등이 있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함.
 
 
낭독 / 장인호 – 배우. ‘위선자 따르뛰프’, ‘갈매기’ 등 출연.
출전 / 『끌림』(랜덤하우스 중앙)
음악 / 최창국
애니메이션 / 강성진
프로듀서 / 김태형
 

 

낯선 곳의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방인. 갑자기 건물 이층에서 책더미가, 마치 내장이 터지듯 무너져내리는 장면. 그 책더미 안에는 바로 자신이 버린 모국어 잡지까지 들어 있고…… 과연 이런 느낌일 것 같아요. 추억을 환기시키는 것도 여행 책의 한 가지 기능이겠죠? 이 책을 읽으며 제가 여행했던 많은 도시의 골목을 떠올렸어요. 모퉁이에서 불쑥 낯선 사람과 마주칠 때의 두려움과 경계심도. 미국에 처음 갔을 때였는데요. 한적한 거리에서, 마주오던 남자가 내게 뭔가 한마디 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걸음을 빨리 했는데…… 지나칠 때쯤에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죠. 'Have a nice day!'였어요. 다들 왜 그렇게 친절한 거야. 누가 총을 갖고 있을지 모르니 일단 비위를 거스르지 말자, 그런 거 같더라구요.
 

문학집배원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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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년 2 개월 전

와~! 정말 대단한 글이에요… 나중에 꼭 이 책 사서 봐야겠어요.. 그런데… 혹시 이 배경음악이 뭔가요? 장엄한게 멋있어요.. 꼭 알고 싶네요. 답변부탁드려요 ^^

8 년 2 개월 전

저 이책 있어요^^제가 산 책중에 가장 아끼는 책이에요 ㅎㅎ

6 년 7 개월 전

정말 좋네요.. 낭송하시는 분 목소리도 참 듣기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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