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정체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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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정체성」 중에서

 
다음날, 그녀는 공동묘지에 가서(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그러했듯) 아들의 무덤 앞에 섰다. 그녀는 거기에 가면 항상 그에게 말을 했고 그날도 자신을 해명하고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낀 듯 아들에게 얘기했다.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의 불치의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나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너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암울한 생각이 너에게 어떤 저주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녀가 혐오하는 것에 그토록 쉽게 적응하는 것이 과연 칭찬할 만한 것일까? 두 얼굴을 갖는 것, 그것이 정말 승리일까? 그는 그녀가 광고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이단자, 스파이, 위장한 적,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점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굳이 정치적 용어를 빌리자면 부역자이다. 혐오하는 권력에 자신을 동화시키지는 않으면서 권력을 이용하고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위해 일하고 어느 날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는 두 얼굴을 가졌다고 핑계를 댈 부역자.
 
 그녀는 말했다 :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예요. 쉴새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요.’
 그리고 말을 멈춘 뒤 :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요.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여들까 하는 두려움’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 ‘아니에요,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예요.’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을 거예요. 매일 밤마다.’
 
 
● 작가 / 밀란 쿤데라 –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났으며,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함. 2010년 프랑스 '시몬 앤드 치노 델 두카재단 상' 등을 수상함.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농담』『느림』『정체성』 등이 있음. 
 
낭독 / 박웅선 – 배우. 연극 '오셀로', 영화 '한반도' 등 출연.
윤미애 – 배우. ‘12월 이야기’ ‘늦게 배운 피아노’ 등 출연.
출전 / 『정체성』(민음사)
음악 / 자닌토
애니메이션 / 송승리
프로듀서 / 김태형

 

처음 소설을 쓸 때 쿤데라에게서 배웠어요. 쿤데라를 읽으면서 눈앞이 확 밝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이렇게 쓰면 되겠구나. 내 스타일이야! 매일 쿤데라를 조금씩 읽어가며 첫 장편을 썼지요. 그리고 시간이 지났고, 저는 제가 만들어놓은 것을 부수고 다시 만들고 싶은 욕망을 에너지로 삼아 소설을 써왔어요. 쿤데라를 좋아한다는, 저의 출신성분이 드러나는 말도 점점 하지 않게 되었답니다. 이번 문장은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쿤데라예요. 소설을 쓰던 저의 첫 갈망과 첫 관점과 첫 비관이 떠오릅니다. 고향에 돌아와 울며 아버지께 나의 혼란과 무기력을 고백하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내 자신이 조금 순정해지면서 동시에 칼이 벼려지듯 내 몸에 차오르는 광택을 봅니다. 저는 이런 것이 ‘문장’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으시길! 오래오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문학집배원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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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년 11 개월 전

저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제야 처음으로 댓글 쓰네요.

7 년 11 개월 전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고 읽어보고 싶습니다. 다른 건 다 잊고, 출근해야 된다는 아침 일은 다 잊고, 목요일마다 좋았습니다.

7 년 10 개월 전

세상과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7 년 8 개월 전

이렇게 좋은 글을 배달받다니 문장을 위해 수고해주신 여러분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7 년 6 개월 전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있어요. 참 좋은 문장입니다.

5 년 11 개월 전

1년 반 정도 전에 댓글을 남기고 갔었네요. 지금도 자주 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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