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개밥바라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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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밥바라기별」 황석영

 
마지막 날, 로사 누나와 나는 경기여고에서 덕수궁 뒷담 쪽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위에 있던 어느 집의 막다른 골목 안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큰길 쪽도 캄캄했지만 골목 안은 바깥길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그 집 철대문 아래로 세 단 정도의 시멘트 계단이 있어서 우리는 나란히 대문에 등을 기대고 걸터앉았다. 집 안은 불도 모두 꺼지고 캄캄했다. 동틀 때까지는 아무도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해 보였다.

 

춥지, 누나……?

 

그랬더니 그녀는 내게 한쪽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 좀 녹여줄래?

 

나는 누나의 손을 잡아 내 점퍼 주머니에 함께 넣었다. 그러는데 새삼스럽게 몸이 떨려왔다. 추워서가 아니라 어쩐지 이 어둠 속에 그녀와 단둘이 있다는 것이며 손을 잡고 살을 맞붙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떨렸을 것이다.

 

어떤 연극에서 두 배우가 서로 전혀 다른 대사를 하는 거야. 끝까지 말이 통하지 않는 대사를 해. 그런데 한참 듣고 있다보면 그들은 서로 대화하구 있어. 그리고 관객들만 모르지 자기들끼리는 알아듣고 있었던 거야. 그런 연극 재미있겠지?

 

내가 긴장에서 벗어나려고 얘기를 했더니 로사 누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그거 전위극 아냐? 베케트나 이오네스코 같은……

 

아니, 말하자면 옛날처럼 하인을 가운데 두고 발을 치고 두 남녀가 ‘무엇 무엇이라고 여쭈어라’ 하는 식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도 재미있을 테고.

 

누나가 그제야 좀 알아들었다.

 

중간에 애틋한 감정들은 다 빠져버릴 텐데.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의젓하지. 인디언과 기병대가 협상한 내용을 보면 추장 쪽이 훨씬 근사하대. 중간 중간 빠지니까. 빠진 데는 더 풍부한 상상으로 채워진대.

 

이제 그녀는 완전히 알아듣고 웃었다.

 

으응, 문법 무시된 그런 거로구나. 하지만 어머니하구 사랑방 손님은 답답하잖아.

 

그리고 다시 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침묵. 나는 일어나서 다리운동을 잠깐 하고는 점퍼를 벗어서 누나의 등에 씌워주려고 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팔을 저으며 말렸지만 나는 억지로 씌워주고 앞자락까지 여며주었다. 그런 다음 반대쪽으로 옮겨앉아서 이번에는 그녀의 다른 쪽 손을 잡아 바지 호주머니에 질러넣었다.

 

아아, 행복하구 든든한걸.

 

● 출처 :『개밥바라기별』, 문학동네 2008

 

 

● 작가 : 황석영 –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1962년에『사상계』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함.1970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소설과 희곡이 각각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함. 소설『객지』『장길산』『오래된 정원』『손님』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독 : 홍성경 – 배우. 연극 『황구도』『돐날』『호야』『죽도록 달린다』 등에 출연.
주성환 – 배우. 연극 『달아달아 밝은달아』『말괄량이 길들이기』『침묵의 해협』『세일즈맨의 죽음』 등에 출연.

 

● 음악 : 진진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을 가르쳐드리죠. 봄에 대해서 쓰고 싶다면, 이번 봄에 무엇을 느꼈는지 말하지 말고,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세요. 사랑에 대해서 쓰지 말고, 사랑했을 때 연인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봤던 영화에 대해서 쓰세요. 감정은 절대로 직접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세요. 전달되는 건 오직 우리가 형식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뿐이에요. 이 사실이 이해된다면 앞으로는 봄이면 시간을 내어서 어떤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시고, 애인과 함께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그 맛은 어땠는지, 그 날의 날씨는 어땠는지 그런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쓰세요. 강의 끝.

 

2009. 4. 16. 문학집배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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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년 4 개월 전

대단한 장면이 아닌것 같은데 감동이 물밀듯이 와요.김수연씨의 강의가 큰 도움이 될것 같아요. 고마워요

8 년 3 개월 전

이번에 문장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엇습니다. 책을 보는것 과는 또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네요. 머리속의 상상력으로만 생각하던것을 이렇게 음성과 플래시로 접하게 되니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정말 괜찮은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8 년 3 개월 전

이 책 볼때는 솔직히 별로 재미있는지 몰랐는데 다시 돌아보니까 참 좋네요. 혼돈과 방황에 시달리던 그 아이들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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