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그 전날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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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그 전날 밤」 중에서
 
 
 
 
별명이 ‘맹물’이었던 그는 누가 보아도 부인할 수 없는 악필이었다. 알아볼 수 있게 쓰련다는 의도로 똑바로 쓴다는 것이 삐뚤삐뚤하였고 보기에 영 볼품이 없었다. 그러면 판서를 피하는 것도 한 방법일 텐데 시간마다 커다랗게 판서를 해서 거르는 법이 없었다. 아는 것이 없으니 판서로나마 될수록 시간을 때우려는 것일 게라고 짓궂은 아이들은 수군수군하였다. 어느 날 장희수(張熙秀)라는 학생이 판서 글씨를 못 알아보겠다며 뒷부분을 읽어달라고 말하였다. 눌변에다가 말투가 얼마쯤 퉁명스러운 아이였다. 순간 유 선생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앞으로 나오라고 호령을 내렸다. 그는 앞으로 나온 장희수의 두 뺨을 사정없이 갈기기 시작했다. 당황한 장희수는 계속 무어라고 변명을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분이 풀릴 때까지 일방적인 난타전은 그치지 않았다. 장희수가 자기를 야유했다는 것이 유 선생 쪽의 구타 이유였다. 학생들 보기에 그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였다. 확인하기 위해 물어본 것이고 딴 뜻이 전혀 없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하였다. 장희수의 얼마쯤 퉁명스러운 말본새가 생물 선생의 자격지심을 자극하여 선생 스스로 자기 자신을 격분시킨 것뿐이었다. 대학 졸업 후 공무원이 되어 각처의 교육구청에서 근무하던 장희수는 70년대 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 집에 재산도 있는 편이요 딱히 떠날 만한 이유가 없는데 이민 생활을 택한 것은 외아들로서 부모를 모셔야 할 부담을 덜기 위해 그의 부인이 강행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진부는 알 길이 없다. 한 10여 년 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바다낚시가 취미인 그가 근처에 왔다가 연락을 해서 만나보게 된 것이다. 한 20년 만의 만남이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중학 때 생물 선생에게 애매하게 얻어맞았잖았느냐고 얘기를 했더니 그의 반응이 의외로 격렬하여 적지않이 놀라웠다. “그 새끼 그 후에 뒈졌는데 참 잘 뒈졌지.”하고 내뱉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마치 바로 엊그제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어서 이쪽이 도리어 무안해졌다. 옛일이지만 너를 잊지 않고 있었다는 인사로 말을 꺼낸 것인데 그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민망하였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타인에게 받은 신체적 모욕이나 폭행을 사람들은 결코 용서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때 절감하였다.
 
 
 
 
작가_ 유종호 –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1957년 이후 비평활동 시작. 저서로 『유종호 전집』(전 5권) 이외에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시인』 등이 있음.
 
낭독_ 최광덕 – 배우. <만다라의 노래>, <맥베드21> 등 출연.
출전 : 『나의 해방전후』(민음사)
음악_ 자닌토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몇십 년 전에 겪은 일이겠지만, 부당한 폭력의 피해자에겐 여전히 현재형일 수밖에요.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폭력은 쉬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기 마련이니까요.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물음을 받았어요. 잠깐 생각하다가 ‘인간존중’이라고 말했지요. 인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목숨이 서로 존중하는 세상, 문학은 제게 그리로 가는 통로였나봐요.
『정의란 무엇인가』가 지난 연말에 이미 115쇄를 찍었더군요. 정의에 대한 갈망이 그토록 깊은 것은 결국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결핍감 때문이 아닐까요. 정의가 바로서지 못한 것은 어쩌면, 우리가 과거를 너무 쉽게 잊는 데에도 원인이 있는 듯해요. 살아가며 보고 겪은 일들을 되도록 가감 없이 기록하는 것, 그리하여 뒷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것, 그 또한 문학의 힘이 아닐까요.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뒷사람들의 눈엔 어떻게 보일는지.
 
문학집배원 이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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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년 5 개월 전

이 시 약간 공포스러운데요. 2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폭행의 기억이라…그 선생에게서 배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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