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드릴로,「화이트 노이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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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등은 거의 다 꺼졌다. 막사 안의 시끄러운 소리도 잦아들었다.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아직 깨어 있었다. 그는 옷을 다 입고 바닥에 앉아 벽에 기댄 채 적십자사에서 낸 응급처치 책자를 읽고 있었다.(……)

“갑자기 까마득한 과거로 내던져진 것 같아요.” 아이가 말했다. “우리가 지금 석기시대에 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수세기에 걸친 진보의 결과 온갖 훌륭한 물건들을 다 알고 있지만, 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더 편하게 해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나요? 우리가 냉장고를 만들 수 있나요? 냉장고 작동법이라도 설명할 수 있나요? 전기가 뭐죠? 빛은 뭔가요?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매일같이 이런 물건들을 쓰고 있지만, 만일 우리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갔을 때 생활을 향상시켜줄 어떤 물건을 실제로 만들 수 있기는커녕 그것의 기본적인 원리조차 말해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빠가 만들 수 있는 게 있으면 하나만 꼽아보세요. 돌에 부딪히면 불꽃이 생기는 간단한 성냥개비 하나 만들 수 있나요? 우린 스스로 매우 위대하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하죠. 달에도 착륙하고 인공심장도 만드니까요.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고대 그리스 사람들과 대면한다면 어떨까요? 그리스인들은 삼각법을 발명했어요. 그들은 검시와 해부도 했어요. 고대 그리스인이 ‘별 것 아니네’라고 대꾸하지 못할 어떤 걸 말해줄 수 있느냐구요.(……)”

“우린 지금 잘해나가고 있어.”

“우린 지금 커다랗고 퀴퀴한 이 방에 앉아 있어요. 시간을 거슬러 내던져진 것 같다구요.”

“난방도 되고, 전기도 들어와.”

“그런 것들도 석기시대 물건이에요. 그들도 따뜻하게 하고 환하게 밝힐 줄은 알았어요. 그들에겐 불이 있었어요. 부싯돌을 맞비벼서 불꽃을 만들었어요. 아빤 부싯돌을 맞비빌 줄 아세요? 부싯돌을 보면 부싯돌인 줄 아시겠어요? 만약에 어떤 석기시대 사람이 뉴클레오티드(핵산의 기본단위)가 뭐냐고 물으면 설명하실 수 있겠어요? 복사용지는 어떻게 만드는 거지요? 유리는 또 뭔가요? 만일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빠가 중세에 와 있고 그곳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요? 의학과 질병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있다한들 말이에요. 여기는 거의 21세기이고 아빠는 과학과 의학에 관한 수백권의 책과 잡지를 읽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엄청나게 보셨잖아요. 150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사소하지만 핵심적인 한 가지를 그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나요?“

“‘물은 끓여서 먹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해주겠어.”

“좋아요. ‘귀 뒤를 잘 씻으시오’ 하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도 난 우리가 꽤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해. 아무런 경고도 없잖아. 식량도 있고 라디오도 있어.”

“라디오가 뭐죠? 라디오의 원리가 뭐냐고요? 자, 한번 설명해보세요. 아빠가 사람들 무리의 한가운데 둘러싸여 앉아 있어요. 그들은 돌 도구를 사용하고 있구요. 뭔가 먹고 있어요. 자, 라디오가 뭔지 설명해보세요.”

“신기할 게 하나도 없지. 강력한 송신기가 신호를 보낸다, 신호는 공기를 가로질러 날아가고 수신기에 포착된다, 그런 거지.”

“공기를 가로질러 날아간다. 뭐라고요, 새처럼 말인가요? 그들에게 마술이라고 말하지 그러세요? 마술 파장을 타고 공기를 가로질러 날아간다고 하세요. 뉴클레오티드는 뭐죠? 아빤 모르시죠? 하지만 이런 것들이 생활을 구성하는 단위들이에요. 지식이 허공중에 떠돌아다니기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지식은 컴퓨터에서 컴퓨터로 이동하지요. 그것은 매일 매순간 변하고 자라요. 하지만 어떤 것에 대해 실제로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 작가:  돈 드릴로 – 이탈리아 이민 2세의 미국 소설가. 1936년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포스트모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현대 미국사회에 대한 탐구가 탁월함. 장편소설『아메리카나』,『화이트 노이즈』, 『리브라』, 『마오2』,『지하세계』,『코스모폴리스』등과 희곡『데이룸』,『발파레이소』,『사랑, 거짓말, 유혈』등이 있음.

 

* 낭독:  송바울 – 배우. <세일즈맨의 죽음>, <독짓는 늙은이> 등에 출연. 극단 ‘은행나무’ 대표.

남도형 – 성우. SBS <내 친구 해치>, KBS <슬럼독 밀리어네어> 등에 출연.

 

 

* 배달하며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로 여행하는 상상만 하면 어린 시절 참 들뜨기도 했지요. 운동화 신고 야구 모자 눌러쓰고 나타난 소년을 바라보는 조선시대 사람들을 생각하면 신이 났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면? 무비 카메라를 들고 간다면? 아마 그들은 까무러칠 수도 있겠죠. 상상의 끝에는 항상 선의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문명을 전수하는 겁니다. 전기에 대해 알려주고, 텔레비전과 전화기, 자동차와 총의 비밀을 전하는 것입니다. 소년은 조선 최고의 발명가가 되고 인류의 역사는 바뀝니다. 그렇지만 이내 소년은 깨닫죠. 자신이 결코 조선의 구세주가 될 수 없으며 정신병자 취급을 받거나 기껏 잘 풀리면 해독불가의 미래공상소설을 쓰는 서생이 되었겠죠. 개인사라 할 만한 과거가 생긴 지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과거로 여행을 해도 별로 할 일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서 과거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일만큼도. 소설의 세부적인 삶들이 참 미국답게 이질적이다 싶으면서도, 한편 한통속인 세계에 산다는 자각에 무거운 마음 가눌 길 없네요.

문학집배원 전성태

 

 

출전: 『화이트 노이즈』(창비)

음악: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  송승리

프로듀서: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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