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감히 핀 꽃」 이혜경,「감히 핀 꽃」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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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경,「감히 핀 꽃」중에서

   여긴 괜찮아. 평일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며 등산하는 사람 많아서 혼자 가도 위험하진 않아. 벤치에 시어머니 또래로 보이는 할머니들이 모여서 깔깔깔 웃고 계시는데, 저 할머니들은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궁금해지는 거야. 내 표정이 좀 그랬나봐. 할머니들이 앉아서 쉬다 가라고 붙잡으시는 거야. 그래서 그 옆에 앉았는데, 날 앉혀놓고 또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거야. 노래도 불러가면서. 그러다 문득 나한테 말씀하시더라. 나중에, 일흔 살 넘어서 그건 별거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 일이라면 별거 아니니 그냥 넘어가라고. 그때쯤 되면, 세상없이 속 썩이던 인간도, 어째 마음을 그것밖에 못 썼을까, 하고 딱하게 여겨진다고. 응, 내가 남편 때문에 속 썩는 여자로 보였나봐. 왜, 형부도 속이야 썩이지. 속 안 썩이는 남편 둔 여자 있으면 어디 얼굴이나 좀 보자고 그래. 사인이라도 받아두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복닥거리고 사는데 어떻게 안 부딪치겠니. 그냥 그게 사는 건가보다 하고 접고 사는 거지.
너 요즘 산에 가본 적 있니? 시간 내서 회사 근처 공원에라도 나가봐. 누런 낙엽 사이로 초록빛이 뾰족뾰족 돋고 있어. 냉이도 있고 쑥도 있고 철 이른 꽃들도 피고, 엊그제까지만 해도 춥다 춥다 했는데 그새 봄인 거야. 요즘 산수유 핀 거 보았니? 산에서 내려오는데,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섶에 노란 꽃이 보이는 거야. 뭔가 하고 들여다보았더니 산수유야. 글쎄, 어른 손가락만한 산수유나무가, 사람 발길만 스쳐도 푹 꺾일 것 같은 그 쬐그만 게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는 거야. 꼭 손가락만했어. 기가 막혀서 쪼그리고 앉아서 한참 보았단다. 그게 왜 그렇게 애틋하던지.
그래? 심은 지 삼 년쯤 지나야 꽃이 핀다고? 그럼 누가 꽃 핀 가지를 꺾어다 꽂아놓은 모양이네. 꼭 거기서 피어난 것 같던데. 이상하다 싶긴 했어. 누가 그렇게 꽂아놓았을까. 예뻐서 꺾었다가 다시 심어놓은 걸까. 난 그것도 모르고 참 죽을힘을 다해서 꽃을 피웠구나, 했지. 그래도, 그런 경우도 있지 않을까. 어쩌다 철부지 같은 어린 싹이, 다들 꽃 피우니까 저도 안간힘을 다해서 꽃부터 피울 수도 있지 않을까.
몰라, 봄이라 그런지 싱숭생숭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자주 하게 되네. 전에 없이 안 보이던 것들도 눈에 들어오고. 산에서 내려오다간 또 늙은 소나무 둥치에 돋은 새순 때문에 시간을 보냈단다. 다른 소나무는 안 그런데, 그 나무만 줄기를 쳐낸 아래쪽, 내 눈높이쯤에서 거죽을 비집고 어린잎이며 순이 비죽비죽 나오고 있더라. 그래봤자 그게 가지가 되어 벋을 것 같진 않았어. 미리 나왔다가 누렇게 말라 죽은 잎들이 있는 걸 보면. 응? 리기다소나무? 내가 보기엔 그냥 소나무하고 똑같았는데. 그 옆에 있는 다른 소나무들은 안 그렇던데…… 그렇구나. 다음에 가면 다시 봐야겠다. 맞아, 전에도 봤을 텐데 그땐 그냥 나문가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겠지. 어쨌든, 리기다소나무든 뭐든 그 딱딱한 거죽 뚫고 나올 땐 저도 마음껏 가지 벋어보겠다는 부푼 꿈을 갖고 있었을 거 아냐.

   ● 작가_ 이혜경- 1960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으며 1982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그 집 앞』,『꽃그늘 아래』, 『틈새』, 『너 없는 그 자리』, 장편소설『길 위의 집』등이 있음.

    낭독_ 박신희 – 성우. <주말의 명화> <과학수사대CSI> 등에 출연.
   ● 출전_ 『너 없는 그 자리』(문학동네)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배달하며

   이혜경의 이번 소설집은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생활의 결이 더 생동하고 화법이 보다 활달해졌습니다. 어디를 꼭 집을 수 없게 전반적으로 피실피실 웃음 나는 가운데 소설의 사연에 닿아서는 혜량할 수 없는 삶이 놓여 있습니다. 중년여성이 친정 여동생에게 여러 차례 전화로 시댁의 사연을 전합니다. 시아버지는 일찍이 아내와 삼 남매를 내팽개치고 시앗들을 전전하다가 말년에 병 깊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홀로 자식들을 키워 다 내보낸 시어머니는 마치 험한 생에 대한 보상이나 위안을 받듯이 남편을 들입니다. 남편을 극진히 병구완하는 간병인까지 붙여주지요. 다시 조각 맞춘 시어머니의 노년은 평안합니다. 이쯤이면 삶은 해피엔딩인데 어디 그렇던가요. 기실 간병인 여자의 정체가 남편이 십 년이나 생을 부린 마지막 정인이 아니겠습니까. 한 쪽의 애틋한 사랑이 다른 쪽에는 끔찍한 배신이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삶의 허방이고 수수께끼지요. 그렇지만 소설의 화자처럼 오인투성이의 삶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자꾸 기울어지는 우리네 심사가 더 수수께끼이지요. 살아내는 힘의 근원 같은 것 말이죠.

문학집배원 전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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