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옷보다 못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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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옷보다 못이 많았다」

 

그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처음 집에서는 선풍기를 고쳐주었고 두 번째 집에서는 양장으로 된 책을 한 권 훔쳤다 농을 옮기다 발을 다쳐 약국에 다녀왔다 음력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법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비가 쏟고 오방(五方)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이 흔들렸다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새벽이 지나도록 지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박준 –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남.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음.
 
 
낭송_ 윤광희 – 배우. 연극 〈러닝머신 타는 남자의 연애갱생 프로젝트〉, 〈삼겹살 먹을 만한 이야기〉 등에 출연.

 

* 배달하며

 

 윤달이라는 말, 쓸쓸하게 예쁘다. 인터넷에서 ‘윤달’을 치고 검색해 보니, 19년에 일곱 번 윤달이 있단다. 어떤 이가 1900년부터 2099년까지의 윤달을 올려놔 훑어봤다. 1월과 12월만 빼고 다 있었다. 계속 계산해 보면 1월과 12월에도 걸리지 않을까 싶어 더 검색해봤다. 1392년 태조 1년이 윤12월이다. 윤1월은 없단다. 여분의 남는 달이라 신이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쉰다는 윤달. 그래서 윤달에 결혼하거나 집을 짓거나 이장(移葬)하거나 이사하는 사람이 많단다.(왜 그런 걸 신 몰래 하는 걸까? ‘동티난다’는 말이 떠오르는데, 그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다) 시 속의 ‘그해 윤달’인 어느 봄날, 화자는 하루 동안 이삿짐을 몇 차례나 옮긴다. ‘옷보다 못이 많’은 방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삿짐 나르는 일을 온종일 하니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게 얹힐 정도로 몸이 지치고 마음도 지친다.
 
 ‘옷보다 못이 많은 방’. 옷장도 없이 벽에 친 못에 옷을 걸어 놓고 사는데, 옷가지도 몇 개 안 돼 비어 있는 못들이 많은 살림살이. 선풍기를 고칠 기력도 없고 대신 고쳐줄 사람도 없는, 어쩌면 홀로노인의 단칸방들. 그 가난이 사무쳐 화자는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법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다고 쓴웃음을 짓는다. 윤삼월이면 삼월 지나 또 삼월이니 한 달 살고 두 달치 월세를 물 뻔하지 않았나, 싱거운 농담을 해보는 것이다.
 그해에도 형편이 피지 못해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은 화자. 그러나 자기 아픔이나 힘듦을 구구절절 칭얼칭얼하지 않고, 타인의 애옥살림을 살피다가 ‘오방(五方)이 다 캄캄해’짐을 토로한다. 시인의 가슴에 못을 박은 ‘옷보다 못이 많은 방’들! 그 방들을 순례하고 온 날의 ‘신들이 떠난 봄밤’, 얼마나 텅 비어 있고 쓸쓸한 봄밤인가.
 박준 시를 읽을 때면 시인의 나이를 새삼 떠올려보게 된다. 1983년생인데…… 대체…… 어찌 이다지도 노성(老成)할까……. 이리 의젓하고, 인생의 신맛 쓴맛을 다 본 것처럼 깊고 서럽고……. 소재나 감수성이나, 글쎄……. 내 언니오빠나 이모삼촌 세대 같네.
 젊으나 젊은 시인의 이 맛깔스레 폭 삭힌 시집이라니. 1988년, 스물다섯 살 허수경이 세상에 선보인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생각이 난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출전_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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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사이다
4 년 8 개월 전

제 방에도 걸린 옷보다 못이 더 많은 걸요. 그래도 많이 걸어 놓고 싶지는 않네요. 덤덤해서 특별한 시입니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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