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오늘의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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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오늘의 혀」

내 혀에 검은 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실을 말하지 않고 살아와
내 혀에 돋아난 푸른 털이 입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돈 몇 푼 버는 일에
인생의 부스러기 시간까지 다 써버려
이제 물을 먹어도 밥을 먹어도
내 혀에 돋은 검푸른 털이 먼저 먹어버린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해도
길게 뻗어 나온 무서운 털이 입술까지 덮어버린다
여보
나는 이제 돈도 없고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그동안 당신을 사랑한다고 한 말은 진실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한 말은 더더욱 진실이 아니다
아직 인간의 사랑을 확신해본 적이 없어
그동안 나의 키스는 다 거짓이다
내 혀를 뽑아 지하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거나
밭두렁을 태우는 봄의 들녘에 나가 불태우기 전에
우리가 처음 나누었던 따뜻한 키스를 다시 한번 해다오
검푸른 털이 담쟁이처럼 뒤덮인
굳게 닫혀버린 내 혀의 문 앞에 고요히 무릎을 꿇고
내가 오늘의 진실을 말할 수 있고
내일의 진리를 노래 할 수 있을 때까지

▶ 시_ 정호승 –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었으며, ‘반시(反時)’ 동인 활동을 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이 짧은 시간 동안』 『포옹』 『밥값』 『여행』 등이 있다.

▶ 낭송_ 노계현 – 성우. 외화 ‘구름 속의 산책’, ‘보통사람들’ 등에 출연.

배달하며

불가(佛家)에서는 입으로 진 죄를 구업(口業)이라 한다. 언어로서 업을 짓는 것이므로 어업(語業)이라 하기도 한다.
꾸며 댄 말, 모르면서 함부로 한 말. 묘한 구절들을 남발한 것을 기어(綺語罪)라 하고 십악(十惡) 가운데 가장 두려운 죄로 나중에 혀를 뽑히는 벌을 받는다고 한다.
정치가들, 장사꾼들이 언뜻 떠오를지 모르지만 실은 작가들이야말로 기어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입속에 돋은 검은 털, 그 검은 털이 결국은 자신을 삼켜 버리는 현실을 통렬하게 투시하는 시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것을 아프게 바라보고 괴로워하는 시인이 돋보인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 『시와 사람』(2016년 봄 여름호)
▶ 음악_ The Film Edge-Reflective slow 중에서
▶ 애니메이션_ 박지영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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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년 3 개월 전

정호승 시인님의
힐링이 되는 시, 잘 감상했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혜린♥
4 개월 10 일 전

사람이라면 어쩔수 없이 하는 거짓말을 혀에 검은 털, 푸른 털이 돋아난다고 표현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였다. 힘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구절 또한 어쩔 수 없는 화자의 거짓말 처럼 느껴졌다. 거짓말로 인해 생긴 검은 털들로 고통받는 화자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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