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호, 『아홉번 떠났다,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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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로 이끈 노란 화살표들이 도미노처럼 반대로 쓰러지는 것을 본다,
내가 사는 삶의 방향으로…

이난호, 『아홉번 떠났다, 산티아고』

저녁 아홉 시를 조금 넘은 시각, 마당 한켠에 내놓인 은색 탁자에 둘러앉은 국적이 갖가지인 순례객들이 캔맥주를 마시며 밝게 웃고 있다. 가게 주인 여자는 빈 맥주캔으로 넘치는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변 새 맥주캔을 가져다 은색 탁자에 놓는다. 그뿐, 마당의 나머지 부분은 씻은 듯 휑해, 은색 탁자 주변이 흡사 추상극 무대 세트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진작 집안으로 들었고 대개의 순례객들도 숙소에서 일기를 쓰거나 독서를 할 것이고 한둘은 가게 안에서 티브이를 볼 것이고 드물게는 저녁미사 끝에 오래된 레스토랑에서 약간 긴 코스의 저녁을 먹을 것이다.
나는 마을 끝까지 걸어가 나직한 성벽 너머로 천천히 지워지는 낙조를 보았다. 해가 지는 쪽은 황량한 들이었다. 낙조는 먼 들녘부터 엷은 어둠으로 조용히 스몄다. 만종이 울리지 않아도 내가 서 있는 시공을 점검하게 됐다. 2014년 10월 1일, 걷기 순례에 나선 지 딱 보름만이다. 문득 어떤 성당 제대 옆에 늘어졌던 ‘우리는 모두 나그네’라는 글귀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순례자에게 나그네적 로망 따위 가당찮아』 하며 돌아섰다. 이번엔 좁은 뒷길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 역시 씻은 듯 비었다. 그곳의 적요는 음습하고 뭔가 함축적이었다. 이 또한 일체의 세트를 배제한, 생의 저편을 형상화한 무대쯤.
허술한 토벽에 착 달라붙은 알전구 아래 배우 둘이 있다.
낮은 추녀 밑에 그들 노인 둘은 쪼그리고 앉아 포도주를 마시다가 세 번째 배우로 등장한 내게 수줍게 웃어 보였다. 세 번째 배우는 단박 감격하여 흠뻑 웃어준다. 흐린 빛으로도 확연한 저들의 꼬질꼬질 때 탄 입성과 낡은 신발짝이 세 번째 배우를 확 당겨갔던 것이다.
노인이 들고 있던 포도주 주전자를 내밀었다. 주전자 주둥이가 두루미 목처럼 길다. 『긴 목은 슬프다!』 세 번째 배우는 유명 시구에 기대어 속말을 주절거린다. 긴 목은 목마름, 배고픔, 구차함, 슬픔의 다른 발음, 얼핏 카미노의 이미지일 수도 있었다. 자기 앞으로 내밀어진 주전자를 세 번째 배우는 그냥 바라본다. 기다리다 못한 노인이 『이렇게! 』하듯이 주전자를 허공에 높이 쳐들어 자기 입을 겨냥하고 포도주를 붓는다. 절묘한 순간에 주전자 주둥이가 수평이 되고 포도주를 머금은 노인의 입이 닫혔다.
세 번째 배우가 맛있게 웃는다. 노인들도 따라 순하게 웃는다. 노인이 주전자 주둥이가 청결함을 온 몸으로 증명해 보였음에도 세 번째 배우는 여전히 난감하다ᆞ. 아니 짠하다. 『저렇게 웃으면 뒤로 뒤로 밀려나는 건데…』 모성이 동한다.
『괜찮아요!』 하듯 세 번 째 배우가 주전자를 받는다. 위로 쳐드는 시늉까지는 따라했다. 더 이상은 어림없다. 고개를 홰홰 저으며 주전자를 넘긴다. 그리고 셋은 아이들처럼 웃었다. 매우 잘 웃었는데 세 번째 배우 목 아래는 여전히 아리다. 영락없이 망령스런 연상. 『뒷전으로 밀려나는 스페인!』 각본에 없는 애드리브였다.
첫 순례 후 10년만에 다시 같은 길을 걷는 동안 스페인 한촌의 환골탈태가 얼마쯤 서운했다. 안쓰럽기도 했다. 전날, 순례객들에게 유독 두텁던 시골 인심이 화폐로 거래되는 것뿐인데, 다만, 폭발적으로 불어난 순례객들을 위해 잠잘 곳을 늘리고 가게를 열고 캔맥주를 내놓을 뿐인데 속이 아릿했다.

작가_ 이난호 – 수필가. 충남 당진 출생. 《계간수필》로 등단한 뒤 카톨릭문인회, 여성문인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국제기구 BI 상담원으로도 봉사하고 있다. 『분홍 양말』 『윤예선 그 사람』 등의 수필집이 있다.

낭독 – 나지형 – 배우. 성우. 연극 ‘9살 인생’, ‘대머리 여가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에 출연.

배달하며

‘짓다’라는 아이디를 쓰는 이 카미노는 칠십대 중반의 나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어보는 것이 평생의 꿈인 인구 절반(?)에게
그녀는 ‘아홉번 떠났다’고 책으로 말하고 있다.
책 어디에도 그것이 자랑인 듯 보이는 기미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이전 삶의 방식으로부터 터닝하는 결단으로 선택된 길이,
이 카미노에겐 기억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음은 감지된다.
공간(일상화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
다시 공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아홉 번 떠났다, 산티아고』(북인)
▶ 음악_ piano-classics n225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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