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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운명을 사랑했던 이유는 그것이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것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미영이 그렇게까지 사랑을 갈구했던 이유는 운명을 벗어나고 싶어서였고, 그 처절한 외침이 마침내 실현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고뇌가 더이상 헛것이 아니었음을,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영은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신화화했다.
무릇 사람이란 것은 행복할 때는 불행의 이면을 보지 못한다. 미영 역시 그것의 예외는 아니었다. 미영의 거친 불안은 자기 확신으로 채워졌고, 자신을 속인다는 사실은 조금씩 미영의 정당한 이면 뒤에서 절망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미영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미래를 양분삼아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미영은 다시는 자신이 이만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으로서 최고의 불안으로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미영은 속으로 외쳤다.
'나를 떠나지 마. 우리 관계는 유지되어야만 해. 나의 사랑은 흔한 이야기로 끝날 수 없어.'
미영이 하나의 범부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야 말로 신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미련한 것인가. 그런 다짐이 인간의 사랑을 땅바닥의 모래만큼이나 하찮게 만드는 것을 아는 신에게, 그 외침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였을런지는 정말 소름끼치게 잔인한 것이다.
미영은 그 길로 낚시를 떠났다. 미영은 창가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달래보려 했지만,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미영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만이.
미영이 숙소에 돌아온 것은 그 뒤로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미영은 여전히 인생의 살점을 하나 둘 떼어내고 있었고, 그것은 자신의 의지도 아니요, 동시에 사랑도 아닌, 그저 상황의 결과물이었다. "사랑이 사랑을 퇴색시킨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없던 미영은 뒤를 보며 외쳤다. "인간의 삶을 만든 누군가는 여기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미영은 아주 올곧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할 때는 강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매우 지나친 사람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강하게 자신을 수치스러워했고, 그만큼 그녀를 솔직하고 대담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수치를 느낄 겨를이 없이 옭아매진 삶. 그것이 미영의 삶이었던 것이다.
미영은 막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이상 그녀에게 인간이란 존재는 희석같은 존재가 되었다. 미영은 더이상 인간을 바라지 않았고, 경외 존경 존중 이해와 같은 기만적인 단어는 질색을 하며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굳이 그런 단어로 심장의 고통을 더 짜릿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 미영의 고통은 언어를 넘어설 때만이 그나마 아주 좁쌀만큼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미영은 그렇게 살기 위해, 언어를 버려야 했다.
생각해보자. 누군가 살기 위해 언어를 버렸다는 것을. 미영은 언어 속에 자랐고 언어에 의해 사랑했으며, 언어에 의해 죽고자 했다.
미영은 인간의 언어가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사랑한다 속삭이던 스스로의 마음이 이렇게 좁쌀만큼 변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자신은 그 짧지 않은 인생에 무얼 바라 말을 하고, 무얼 바라 글을 썼으며, 무얼 바라 언어를 익혀왔던 것인가.
무한의 자괴. 그것이 미영이 느꼈던 바닥이었다. 미영은 자신이 쌓은 언어의 금자탑이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산산이 부서진 자신의 모습을 내리깔아 보고 있음에 소름이 돋았다. 가진자의 서랍에 켜켜이 놓여진 비양심의 증거처럼, 자신의 진실역시 그저 하나의 거짓으로서 켜켜이 쌓여진 기만임을 마주했을 때, 그 적나라한 초라함이 미영을 끊임없이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던 것이다. 미영은 하루에도 몇번씩, 그 밑으로 추락하여, 눈물을 쏟고, 그것을 다시 반복해야 했다.
자신의 바닥과 정점응 구별조차 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미영은 다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삶은 속박이어라. 아름다웠던 몸은 더이상 축 늘어진 껍데기마냥 자신의 싸움을 기만하고 있었고, 그 삶을 더이상 지탱해야할 의지도 의미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곁으로 날아가 쉬고 싶었다. 아름다운 파랑새를 따라가 그 곁에 누워 잠들고 싶었다. 바라만 보아도 아름다운 파랑새는, 미영에게 최선의 안식을, 마지막 안식을 전달해줄 것을, 미영은 의심치 않았다.
새까만 건물 사이로 뻗은 도로를 내려다 보았다. 이것은 마치 뫼비우스의 무한적인 시도처럼 언제 이 인간이 목숨을 끊는지 지켜보는 신의 장난처럼 보였다. 미영은 대들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신이 없다고 믿어왔고,이제 더이상 그런 가상의 시도들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여겼다. '곁으로 가리라.' '곁으로 가 의미를 다지리라.' '한톨의 우연도 닿지 않는 세계로 가, 우연을 맞이하리라.' 이것이 미영의 마지막 대화였다.
미영이 잠에서 깬 것은 그 뒤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미영은 마치 철지난 왈츠를 정신없이 치고 난 뒤의 몽롱함에 비로소 자신을 발견했다.
몸은 차갑고 비었으며, 가볍기보다는 무거웠다. 기력도 없었고 그저 적당한 온도의 주변만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낡은 천장과 정리된 책상. 미영은 그 사이에서 숨죽여 울고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미영은 그렇게 자신이 죽지못했음을, 자신의 강한 마음을 질타했다. 자신의 마음은 미영이 보기에 너무나도 부실해 보였던 것이다. 그 부실함은 더더욱 미영의 고통을 즐기듯이 커졌고, 미영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헤치고 자신이 그 곳으로 뛰어든 것처럼 느꼈다. 긴 무덤 속에 침잠한 자신은 더이상 주변을 속일 수 없었다. 미영은 매캐한 연탄 곁에 몸을 뉘였다. 바라건대 이것이 부디 꿈이기를 바라며.
죽음의 행진곡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 미영의 머릿속에는 아니 마음속에는 이미 오래간 그 죽음의 노래라는 것이 틀어져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맬로디 그 자체 였을 뿐 죽음을 맞이하는 직관적 순간은 그저 짧은 희곡과 감상적 바램, 그리고 죽음이 함께하는 것이었다.
미영은 눈을 감고 떠올렸다. 바라건대 한점의 마음의 살코기를 떼어내 올려둘 돌이 있다면, 바라건대 이 고통을 더이상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면, 미영은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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