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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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작품 출처 : 복효근 시인, 창비청소년시선 05 『운동장 편지』, 창비교육, 2016.

 

 

■ 처음 인사드리는 그대여. 한때 저는, 제가 살던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개살구 익는 강가의 아침 안개와 미루나무가 쓸어내린 초저녁 풋별 냄새와 싸락눈이 싸락싸락 치는 차고 긴 밤, 넣을 봉투를 구할 재간이 없어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하여, 아쉬운 맘 달래보자고 마당 입구에 빨강 우체통 하나 세우고는 이팝나무 우체국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 작은 우체국 뜰에서 시엽서를 쓰고 시배달을 나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풀벌레 소리처럼 떨려옵니다.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려오는 그대여, 그대에게 있어 가장 따뜻했던 저녁은 언제였는지요? 내가 멘 가방 지퍼를 닫아주는 척 붕어빵을 넣어주던 선재를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져 옵니다. 은근, 기분이 좋아져 옵니다. 가장 따뜻한 저녁이 그대에게 당도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우체국 마당 구절초가 가는 목을 빼고 그대 향해 피었다는 소식 전하면서 이만 총총합니다.

 

 

 

문학집배원 시배달 박성우

– 박성우 시인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강마을 언덕에 별정우체국을 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마당 입구에 빨강 우체통 하나 세워 이팝나무 우체국을 낸 적이 있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거미』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 동시집 『불량 꽃게』, 청소년시집 『난 빨강』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윤동주젊은작가상 등을 받았다. 한때 대학교수이기도 했던 그는 더 좋은 시인으로 살기 위해 삼년 만에 홀연 사직서를 내고 지금은 애써 심심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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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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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뒷방, 그 은둔처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다.

몽테뉴,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병은 결코 자신에게서 이탈하지 못하는 마음에 있다. (호라티우스)

그러므로 마음을 끌어내어 제 자신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외롭고 쓸쓸함이다. 이것은 도시의 한복판이나 왕들의 궁전에서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따로 떨어져서 더 잘 자기를 누린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살며 사람들과 교섭 없이 지내려고 하는 만큼, 우리에게 만족이 매여 있게 하자, 우리를 타인에게 얽매이게 하는 모든 연결을 물리치고, 정말 홀로 살며 편안하게 살아갈 능력을 얻기로 하자.
스틸폰은 자기 도시의 화재를 피해 나오며 거기서 아내도 어린것들도 재산도 잃었다. 데메트리우스 폴리오클레테스는 그가 조국의 그 참혹한 파멸에 처하여 얼굴빛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손해를 본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없다고 대답하였다. 고마운 일로 자기 것은 잃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철학자 안티스테네스가 사람은 물 위에 뜨는 장비를 가지고 난파할 때에 헤엄쳐 나갈 차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농담조로 말한 것은 바로 이 뜻이다.
실로 이해심 있는 사람은 자신을 잃지 않으면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다. 놀라 시(市)가 야만족들에게 파괴되었을 때에 그 곳 주교이던 파울리누스는 거기서 모든 것을 잃고 포로가 되어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주여, 이러한 손실을 느끼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왜냐하면 그들은 내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음을 주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 그를 부하게 만들던 재산, 그를 착하게 만들던 보배, 그런 것들은 모두 온전하였다. 이것이 진실로 손실을 면할 수 있는 보배를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보배를 아무도 갖지 못하는 곳에 감추는 방법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도둑질해갈 수 없는 보배이다.
할 수만 있다면 아내, 아이, 재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을 가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행복이 거기에 매여 있게까지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남이 침범하지 않는 아주 자기 고유의 것인 뒷방을 가지고, 그 속에 진실한 자유와 은둔처를 마련해 둘 일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과의 일상의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사사로워서, 외부와의 어떠한 관련이나 교섭도 그 곳에는 미치지 못하게 할 일이다.
아내도, 어린애도, 재산도, 다른 사람도, 하인도 없는 듯 그곳에서 혼자 생각하며 웃고 지내며, 그런 것들을 잃는 경우에 부딪혀도 그런 것들 없이 살더라도 아무런 별다름이 없게 할 일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들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자기를 동무 삼을 수 있다. 마음은 공격할 거리, 방어할 거리, 줄 거리와 받을 거리를 가졌다. 이러한 고독함 속에서 할 일 없이 괴롭다고 오그라들까 두려워 말자.

고독함 속에 그대 자신이 한 군중이 되라. (티블루스)

▶ 작가_ 몽테뉴 – 목사, 문필가. 남프랑스 페리고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귀족으로 몽테뉴 성의 성주. 2세 때 가정교사로부터 라틴어 학습을 받음. 13세 때 명문 기엔느 중학을 졸업한 후에도 철학과 고전을, 툴루즈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했다. 35세 때 부친의 사망으로 성주가 됨. 43세 때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새겨넣은 초상을 주조시킴. 44세 때 나바르 왕실 봉직 목사가 되었고, 54세 때 『에세이』 제3판을 출간. 만년에는 역사 철학 서적을 애독하다 59세에 영면.

▶ 낭독_ 박웅선 – 배우. 연극 ‘오셀로’, 영화 ‘한반도’ 등에 출연.

배달하며

사랑하는 친구가 나를 매이게 한다면
나는, 내 안에 피가 고이더라도, 그 끈을 끊겠다.
그를 놓아주고, 그가 나를 놓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한층 깊이 사랑하는 방법이므로.
다시 푸른 흙 속에 깊이 파묻혀 홀로 살찌는
고구마로 돌아왔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동서문화사)
▶ 음악_ song bird av212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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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늙은 신갈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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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늙은 신갈나무처럼」

몸을 침범하는 벌레를
중심을 어지럽히는 곰팡이를
속을 갉아먹는 나무좀을
그 속에 둥지 트는 다람쥐나 새를
용서하니
동공이 생기는구나
바람을 저항할 힘을 선사하는

양선희 – 1960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7년 계간 《문학과비평》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가 당선되었다. 시집 『일기를 구기다』, 『그 인연에 울다』와 장편소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를 펴냈으며, 이명세 감독과 영화 의 각본을 공동으로 집필했다. 에세이로는 『엄마 냄새』, 『힐링 커피』가 있다.

낭송 – 나지형 – 배우. 성우. 연극 ‘9살 인생’, ‘대머리 여가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에 출연.

배달하며

지난여름은 지독한 불볕이었다. 그 중에도 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은 불길하고 끔찍한 뉴스들이었다. 세상 어디를 손가락으로 찔러 보아도 더러운 악취가 새어나왔다. 시정신이 없는 혼탁한 기회주의 시인을 향해 어떤 시는 “이 땅은 방부제도 썩었다”라고 탄식했다.
신갈나무는 도토리가 달린 참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그 이파리를 짚신의 신발창처럼 갈아 쓴다하여 신갈나무라 불렀다고 한다. 참나무 잎으로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할 것 같다. 온갖 설익은 말, 벌레 먹은 말, 끔찍하고 억지스러운 말, 다 가리고 크게 다시 숨 쉬고 용서하고, 가을 밤 하늘에 새로 떠오르는 처녀별 같은 그런 시가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폭력적이고 기형적인 언어의 흙탕물 속에서 싱싱한 생명의 시를 골라 배달하겠다고 했던 첫 인사말이 떠올라 가슴 아릿하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 『그 인연에 울다』(문학동네)
▶ 음악_ Tune ranch-orchstral-2 중에서
▶ 애니메이션_ Alice Jiyu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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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호, 『아홉번 떠났다,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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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로 이끈 노란 화살표들이 도미노처럼 반대로 쓰러지는 것을 본다,
내가 사는 삶의 방향으로…

이난호, 『아홉번 떠났다, 산티아고』

저녁 아홉 시를 조금 넘은 시각, 마당 한켠에 내놓인 은색 탁자에 둘러앉은 국적이 갖가지인 순례객들이 캔맥주를 마시며 밝게 웃고 있다. 가게 주인 여자는 빈 맥주캔으로 넘치는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변 새 맥주캔을 가져다 은색 탁자에 놓는다. 그뿐, 마당의 나머지 부분은 씻은 듯 휑해, 은색 탁자 주변이 흡사 추상극 무대 세트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진작 집안으로 들었고 대개의 순례객들도 숙소에서 일기를 쓰거나 독서를 할 것이고 한둘은 가게 안에서 티브이를 볼 것이고 드물게는 저녁미사 끝에 오래된 레스토랑에서 약간 긴 코스의 저녁을 먹을 것이다.
나는 마을 끝까지 걸어가 나직한 성벽 너머로 천천히 지워지는 낙조를 보았다. 해가 지는 쪽은 황량한 들이었다. 낙조는 먼 들녘부터 엷은 어둠으로 조용히 스몄다. 만종이 울리지 않아도 내가 서 있는 시공을 점검하게 됐다. 2014년 10월 1일, 걷기 순례에 나선 지 딱 보름만이다. 문득 어떤 성당 제대 옆에 늘어졌던 ‘우리는 모두 나그네’라는 글귀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순례자에게 나그네적 로망 따위 가당찮아』 하며 돌아섰다. 이번엔 좁은 뒷길로 들어섰다. 좁은 골목 역시 씻은 듯 비었다. 그곳의 적요는 음습하고 뭔가 함축적이었다. 이 또한 일체의 세트를 배제한, 생의 저편을 형상화한 무대쯤.
허술한 토벽에 착 달라붙은 알전구 아래 배우 둘이 있다.
낮은 추녀 밑에 그들 노인 둘은 쪼그리고 앉아 포도주를 마시다가 세 번째 배우로 등장한 내게 수줍게 웃어 보였다. 세 번째 배우는 단박 감격하여 흠뻑 웃어준다. 흐린 빛으로도 확연한 저들의 꼬질꼬질 때 탄 입성과 낡은 신발짝이 세 번째 배우를 확 당겨갔던 것이다.
노인이 들고 있던 포도주 주전자를 내밀었다. 주전자 주둥이가 두루미 목처럼 길다. 『긴 목은 슬프다!』 세 번째 배우는 유명 시구에 기대어 속말을 주절거린다. 긴 목은 목마름, 배고픔, 구차함, 슬픔의 다른 발음, 얼핏 카미노의 이미지일 수도 있었다. 자기 앞으로 내밀어진 주전자를 세 번째 배우는 그냥 바라본다. 기다리다 못한 노인이 『이렇게! 』하듯이 주전자를 허공에 높이 쳐들어 자기 입을 겨냥하고 포도주를 붓는다. 절묘한 순간에 주전자 주둥이가 수평이 되고 포도주를 머금은 노인의 입이 닫혔다.
세 번째 배우가 맛있게 웃는다. 노인들도 따라 순하게 웃는다. 노인이 주전자 주둥이가 청결함을 온 몸으로 증명해 보였음에도 세 번째 배우는 여전히 난감하다ᆞ. 아니 짠하다. 『저렇게 웃으면 뒤로 뒤로 밀려나는 건데…』 모성이 동한다.
『괜찮아요!』 하듯 세 번 째 배우가 주전자를 받는다. 위로 쳐드는 시늉까지는 따라했다. 더 이상은 어림없다. 고개를 홰홰 저으며 주전자를 넘긴다. 그리고 셋은 아이들처럼 웃었다. 매우 잘 웃었는데 세 번째 배우 목 아래는 여전히 아리다. 영락없이 망령스런 연상. 『뒷전으로 밀려나는 스페인!』 각본에 없는 애드리브였다.
첫 순례 후 10년만에 다시 같은 길을 걷는 동안 스페인 한촌의 환골탈태가 얼마쯤 서운했다. 안쓰럽기도 했다. 전날, 순례객들에게 유독 두텁던 시골 인심이 화폐로 거래되는 것뿐인데, 다만, 폭발적으로 불어난 순례객들을 위해 잠잘 곳을 늘리고 가게를 열고 캔맥주를 내놓을 뿐인데 속이 아릿했다.

작가_ 이난호 – 수필가. 충남 당진 출생. 《계간수필》로 등단한 뒤 카톨릭문인회, 여성문인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국제기구 BI 상담원으로도 봉사하고 있다. 『분홍 양말』 『윤예선 그 사람』 등의 수필집이 있다.

낭독 – 나지형 – 배우. 성우. 연극 ‘9살 인생’, ‘대머리 여가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에 출연.

배달하며

‘짓다’라는 아이디를 쓰는 이 카미노는 칠십대 중반의 나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어보는 것이 평생의 꿈인 인구 절반(?)에게
그녀는 ‘아홉번 떠났다’고 책으로 말하고 있다.
책 어디에도 그것이 자랑인 듯 보이는 기미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이전 삶의 방식으로부터 터닝하는 결단으로 선택된 길이,
이 카미노에겐 기억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음은 감지된다.
공간(일상화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길이,
다시 공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아홉 번 떠났다, 산티아고』(북인)
▶ 음악_ piano-classics n225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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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세실리아, 「갠지스강, 화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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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세실리아, 「갠지스강, 화장터」

다홍 천 턱까지 끌어올리고
장작더미에 누운 여자
기척도 없다
불길 잦아들도록 끝끝내 이글거리던
가슴뼈와 골반
회(灰)가 되어 허물어진다 한 때
소행성과 대행성이 생성되고
해와 달과 별이 맞물려
빛을 놓친 적 없던
여자의 집,
감쪽같이 철거당했다
한우주가 사라졌다

시_ 손세실리아 – 북 정읍에서 태어나, 2001년《사람의 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기차를 놓치다』, 『꿈결에 시를 베다』와 산문집『그대라는 문장』이 있다.

낭송 – 나지형 – 배우. 성우. 연극 ‘9살 인생’, ‘대머리 여가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에 출연.

배달하며

힌두(Hindu)의 삶은 갠지스에서 시작되고 갠지스에서 끝난다. 갠지스 성스러운 물에 몸을 담그는 세례로 시작하여 그 강에 회로 뿌려지는 것으로 끝난다. 물로 시작하여 불로 끝을 맺는 제전이다.
이 시는 장작더미에 누워 화장을 기다리는 여자의 자궁속의 해와 달과 별이 맞물리는 윤회와 인연을 포착하고 있다. 그녀의 자궁 속에서 진행되던 생명의 달거리, 소행성과 대행성을 품었던 생명 원류로서의 여자의 집! 이 시는 그것이 장작더미 불길에 의해 감쪽같이 철거되고 한우주가 사라졌다고 했다. 하지만 걱정 말라! 갠지스에 뿌려지면 죄는 사라지고 다시 생명으로 돌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 장엄한 회귀를 위해 그녀의 발목에 화장의 삯으로 은발지가 걸려있었을 것이다.

문학집배원 문정희

출전_ 『기차를 놓치다』(애지)
음악_ 07-A Simpler Time 중에서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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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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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우스-수수께끼, 이제부터 이 무명의 하인을 주목해 볼 일이다.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그의 주변에는 날개를 달고 속삭여대는 지식들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 대신 무엇인가가 그의 내면에 들어 있다. 그는 그 무엇 위에 가만히 있고, 그리고 그 무엇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는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누군가를 속이거나 헐뜯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이 수선스럽지 않음을 나는 교양이라고 부른다. 수다스러운 자는 사기꾼이다. 그가 매우 친절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모두 뱉어내지 않으면 못 배기는 그의 단점은 그를 비열하고 나쁜 친구로 만들 것이다. (중략)
그는 재능들로 빛나지는 않지만, 타락하지 않은 선한 마음의 미광을 내비치고 있다. 그의 촌스럽고 소박한 몸가짐은 거기 수반되는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아마 인간 사회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움직임과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 크라우스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를 재미없고 못생겼다고 생각할 여성들에게서도 그렇지만, 그를 무심하게 지나쳐버릴 이 세상사에서도 말이다. 무심하게? 그렇다. 사람들은 결코 크라우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하는 그가 별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 바로 그 점이 경이로운 것이고, 계획으로 충만한 것이며, 조물주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신은 이 세상에 심오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내주려고 크라우스와 같은 인간을 보낸 것이다. 그 수수께끼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봐라, 사람들이 단 한 번이라도 수수께끼를 풀려는 노력을 보이는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크라우스-수수께끼는 너무나 훌륭하고 심오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누구도 그 수수께끼를 풀고자 애태우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 숨 쉬는 그 어떤 인간도 이 무명의 초라한 크라우스에게 그 어떤 과제 수수께끼 혹은 그토록 심오한 의미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하기 때문이다. 크라우스는 진정한 신의 작품이며, 무(無)이며, 하인이다. 크라우스는 교양 없고, 매우 고된 일을 수행하기에나 적합한 자로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기이한 것은, 그런 판단이 틀린 데 없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크라우스는 겸손함 그 자체이다. 순종의 왕관이자 왕궁인 크라우스. 그는 진정 보잘것없는 일들을 수행해나가기를 원한다. 그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또 하고 싶어 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누군가를 돕고 복종하고, 시중을 드는 일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곧 알아차리고는 그를 착취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착취한다는 사실 안에는 환하게 빛을 발하는 자비와 광명으로 빛나는, 금빛 찬란한 신의 정의가 들어 있다. 그렇다. 크라우스는 거짓 없는, 아주, 아주 단조롭고, 단순하고 명료한 존재의 초상이다. 어느 누구도 이 사람의 단순함을 오인할 수 없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성공하지 않을 것이다. 난 그것이 멋지고, 멋지고, 또 멋지다고 생각한다.

작가_ 로베르트 발저 – 소설가. 1878년 스위스 빌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열네 살 때부터 은행에서 견습생활을 하다가 엔지니어 조수, 은행원, 사서로 일하며, 그 누구와도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것은 글쓰기와 걷기였다. 걸을 때 그는 의미의 질식에서 해방된 몸이었다. 1906년 『탄너일가의 남매들』 『조수』 등 대표작을 출간. 카프카, 무질, 헤세, 벤냐민 등이 그의 작품에 찬사를 보냈다. 자진해서 들어간 정신병원에서 20여년간 지내다가 1956년 12월 산책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낭독_ 박웅선 – 배우. 연극 ‘오셀로’, 영화 ‘한반도’ 등에 출연.

배달하며

‘크라우스’는 신의 정의를 내포한 관점이다.
‘오직 누군가를 돕고 복종하고, 시중드는 일’이 지니는
거짓 없고 단순명료한 겸손. 그 겸손은 스스로 높은 자의 교만을
어둠 되게 하며, 자비로운 광휘를 발한다.
성공과 출세를 거부하고 선의(善意)를 착취당하라.
‘하인’이 되어 신의 정의를 실현하라.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

문학집배원 서영은

출전-『벤야멘타 하인학교』(문학동네)
음악_ 11-Voice Redo B 중에서
애니메이션_ 박지영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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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허공 모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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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허공 모텔」

꽁무니에 바늘귀를 단 가시거미 한 마리, 
감나무와 목련나무 사이 모텔 한 채 짓고 있다  
저, 모텔에 세 들고 싶다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들여 
꿈 속 집같이 흔들리는 그물 침대 위 
내 깊은 잠 풀어놓고 싶다

매일매일 줄타기하는 가시거미처럼 
그 사내 걸어 온 길 칭칭 동여맨다면
나, 밤마다 그 길 들락거릴 수 있으리  

그 사내, 쓰고 온 모자 벗어버리고
신고 온 신발도 벗어던져
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

그 죽음 자랄 때까지
빵처럼 그 죽음 뜯어먹으며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 옷 한 벌
자을 수 있으리

저, 허공 모텔에 들 수 있다면,

시_ 강영은 – 1956년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했으며, 시예술상, 한국시문학상 수상 및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시집으로 『녹색비단구렁이』, 『최초의 그늘』, 『풀등, 바다의 등』 등이 있다.

낭송_ 권나연_ 배우. 연극 ‘갈매기 2013’, ‘리어왕’ 등에 출연.

배달하며

거미줄로 만든 허공 모텔? 그곳은 기억과 상상력의 공간이다. 집이 아니라 굳이 모텔인 것은 삶의 공간이 아니라 떠돌이 노마드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가 시인에게는 어쩌면 시(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꿈속 집같이 흔들리는 그물 침대인 거미줄에는 모기나 날파리나 하루살이 정도가 걸려들기 도 한다. 소나기 지난 후 이슬이 걸리고 이슬 속에 하늘이 영롱하게 걸려있을 때도 가끔 있지만.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 『녹색비단구렁이』(종려나무)
▶ 음악_ guitar SFX 중에서
▶ 애니메이션_ 송승리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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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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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은 단 한번 휘두른 검(劍)이다."

히라노 게이치로, 『달』

『그렇지, 내 목숨은 큰 바다의 파도가 밀어올린 물거품이 내쏘는 단 한순간의 반짝임이오. 거목에 무성한 잎사귀 한 잎에서 반짝인 찰나의 명멸이오. 언젠가 잃을 것이라면, 지금 이곳에서, 당신 앞에서!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소. 당신이 나에 대한 추억을 생각할 때, 꿈 꿀 때, 왜 내가 소생하지 못하겠소! 죽은 달이 다시 빛나기 시작하듯, 그때마다 나는 소생하오, 참되게 다시 태어나오.』
『안 됩니다 산을 내려가시면 다시 몇 번인가 마음 저릴 만남도 기다리고 있을 터. 』
『내려가면이라구요?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일 따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소? 내일을 기약하고 이 한순간을 버리라는 거요?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소. 』
마사키 말투는 거세어갔다.
『내 사랑은, 제발 들어주시오. 내 사랑은 단 한 번 휘두른 검이오. 달군 불길이 그대로 남은, 거세게 달구어져 번쩍번쩍 빛나는 붉은 검이오. 그러나 이전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칼집 속의 검이었을 뿐이오. 뽑아서 휘두르면 사람도 단번에 베었을 것이오. 그러나 헛되이 그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검이라면 반드시 그 속에 죽음을 감추고 있을 터. 일격에 죽일 죽음을! 칼집의 매듭은 그저 한 번 풀면 족하오. 베지 못할 검이라면 그저 그것으로 끝일뿐! 지금 나는 그 검을 뽑았소. 당신 앞에 뽑아 보인 것이오. 칼집은 일찌감치 내던졌소. 다시 집어넣을 수는 없어요! 당신은 그저, 그 칼자루를 쥐고 내 가슴팍에 서기만 하면 되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담아 찌르면 되오! 깊게, 깊게, 저 먼 곳으로 뚫고 나갈 만큼!』
다카코는 흐느껴 울었다. 말[言語]은 마사키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나가 될수록 진실하고, 하나가 될수록 허무했다. 말은 스스로 찢어지고, 가루로 부서지고, 쉽게도 초월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침묵은 가득 차 넘치고 있었다. 암자가 멀리 희미해져가고, 마사키는 숲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앚는다. 두통이 밀려온다. 벽을 짚은 두 손에서 시들고 말라빠져 버서석 부서지는 담쟁이넝쿨의 감촉이 점점 사라져간다. 정강이의 상처가 아프다. 목이 마르다.
모래사장에 건져 올려진 해파리처럼, 마사키의 배 아래로 차디찬 물결이 배어든다. 파도가 다가왔다 사라질 때마다 조금씩 주변의 모래가 무너져가듯, 이윽고 몸뚱이가 땅속으로 삼켜져가는 것 같다. 밤은 짙다. 두견새가 소리 높이 운다. 초조감은 귓속에서 종을 난타하고 있다.
관자노리에 맺혔던 땀 한 방울이 눈에 스몄다. 마사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눈앞에 뜬 달에 그러모았다.

▶ 작가_ 히라노 게이치로 – 소설가. 1975년에 태어났다. 교토 대학 법학과 재학중인 1999년 첫 소설 『일식』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일본열도에 ‘히라노 열풍을’을 불러일으켰다. 『달』은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을 능가하는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 낭독_ 서윤선 – 배우. 연극 ‘오셀로’, ‘고도를 기다리며’ 등에 출연.
권나연_ 배우. 연극 ‘갈매기 2013’, ‘리어왕’ 등에 출연.

배달하며

의식이 희미해질 때,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
영원한 침묵에 들기 전,
당신의 가슴에 남을 마지막 말은?
또는 당신이 만나게 될 첫 번째 말은?…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달』(문학동네)
▶ 음악_ orchestral mood 중에서
▶ 애니메이션_ 김은미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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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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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시_ 안도현 – 196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났다.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등이 있다.

▶ 낭송_ 서윤선 – 성우. 연극 ‘백치, 백지’, 영화 ‘줌 피씨 월드’, 애니메이션 ‘ 명탐장 코난’ 등에 출연.

배달하며

매미는 오랜 시간을 땅속에서 참고 기다린 끝에 겨우 한 철을 짧게 살다 간다. 길게는 17년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다. 한 여름 땡볕 속에서 매미들이 내지르는 울음소리가 사뭇 열광적이고 절박한 것은 매미의 깊은 인내와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언젠가 소월의 천부성을 부러워하며 자신은 시를 쓰는 것 보다 만드는 것을 먼저 배운 후천성시인이라고 겸허하게 말했지만 기실 그는 타고난 천부의 시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천부의 시인이어서 시를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므로서 천부성이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인간다운 삶을 꿈꾸게 하는 시의 힘을 믿는다는 시인의 사랑이 매미처럼 열광적인 목청으로 더 쏟아지기를…

문학집배원 문정희

▶ 출전_ 『제1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문학사상사)
▶ 음악_ song bird av212 중에서
▶ 애니메이션_ 제이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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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아진, 「불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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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마음이 집을 비웠을 때 불이 꺼진 것 같은 상태이다."

심아진, 「불안은 없다」

K와 나는 중학교 동창이다. 내가 있는 듯 없는 듯 묻혀 있는 인간이었다면 K는 전교 일 이등을 차지하던 수재였다. 하지만 너무 공부를 잘해 법대에 들어간 것이 그녀 인생의 화근이었다. 늘 일차는 붙고 이차나 삼차에서 떨어지는 통에 K는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고, 애꿎은 기대만을 뜯어먹으며 이십대를 보냈다.
공부하느라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K에게 나는 이상적인 남자 친구였다. 그녀의 모든 시간을 배려하고, 아껴주며, 위로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시간을 사랑해주는 나를, 마침내 그녀도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K의 마음을 얻기까지 나는 온갖 굴욕적인 짓을 다했다. 너는 내 취향이 아니야. 그녀는 내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는 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K의 메말라 보인 영혼이 나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가 실제로 메말라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메말라 보인다는 사실에 강하게 끌렸다. 결코 자연스럽지 않고 안간힘을 쓴다는 느낌. 꼿꼿하기 위해 손가락 한 마디도 힘을 빼지 않는 K의 기운이 내게서 존경심을 우러나게 했다. 그녀가 완강할수록 나는 점점 더 그녀에게 끌렸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완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친구하자.
나는 그렇게 K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친구인 나는 늘 그녀의 어딘가를 만지고 싶어 했고, 더듬다가 떠밀림을 당하거나 따귀를 맞기도 했다. 나는 무릎을 꿇기도 했고, 자해 같은 것을 해버리겠다는 암시를 주기도 했다. 온갖 비굴한 방법을 다 썼고,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남발하기도 했다. K가 좋아하지도 않을 이벤트를 준비했고, 그녀로서는 관심도 없을 이런저런 선물을 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아마도 K는 내가 그녀를 위해 쏟아붓고 다니는 시간이 갸륵했을 것이고, 자신이 나를 상대하느라 버리는 시간이 아까웠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나를, 아니 내 시간을 거두어주었다.
K는 나오지 않으면 고시원 밖에서 소리쳐 그녀를 불러내겠다는 내 문자 메시지를 받은 후 마지못한 듯 나온다. 내가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아침보다 훨씬 파리한 얼굴이다. 위염이 도진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충격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하게 끊어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녀가 말끝을 계속 흐리고 있었다.
한두 해 봐온 것이 아닌지라 나는 K의 목소리만으로도 그녀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분명 실연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도 그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를 많이 좋아하게 되어버린 K를 보며 나 역시 충격을 받는다. K는 쓰러지려는 이성을 붙잡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내게 화를 내지도 못한다.
『나 이제 정말 그만둘 거야. 고시 같은 거 아예 잊고 취직이나…』
『그러지 마라. 내가 벌어다 줄 테니, 너는 그냥 계속 공부해.』
K는 울음을 터뜨린다.
『왜 그랬니? 왜 그랬어? 너 같은 게 왜 내게 그랬어?』
나도 K와 같이 운다. 고시 공부가 피곤하고, 그 고시로 얽힌 세상이 피곤했을 그녀가 너무나 애처롭다.
왜 그렇게 힘겹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면서 우리는 살고 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오기를 부리면서 위안거리를 애써 만들어내고는 잠깐 숨을 쉬는 사치를 부렸으니 이제 충분하다고 완강하게 믿는다.

▶ 작가-심아진-소설가. 1991년 고대 신문방송학과에 다니면서도 문과대 근처를 기웃거리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졸업 후 삼성정신문화연구소에서 잠시 근무했고, 마침내 1999년 『21세기문학』을 통해 등단. 200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주, 잠시 살다가 귀국해서 『숨을 쉬다』 『그만, 뛰어내리다』를 펴냈고,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에 살면서 장편소설 『여우』를 펴냈다.

▶ 낭독_ 서윤선 – 배우. 연극 ‘오셀로’, ‘고도를 기다리며’ 등에 출연.
▶ 권나연_ 배우. 연극 ‘갈매기 2013’, ‘리어왕’ 등에 출연.

배달하며

자기 안의 결핍감을 아프게 직시하지 못하면,
남의 결핍감을 채워주려는 헛된 망상에 끌려 다니게 된다.
사법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져 지쳐있는 K에게
위안을 주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 만큼,
더 크게 입을 벌린 그 자신의 결핍감은, 이제는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U, K, J, Y, L, 이란 여성의 결핍감을 망상의 제물로 삼는다.
자기를 속이는 것이 습관이 된 이 남자의 불안은
망상에 뜯어 먹힌 피폐함에서 온다.

문학집배원 서영은

▶ 출전-『여우』 (실크로드)
▶ 음악_ Small Triumph
▶ 애니메이션_ 신문희
▶ 프로듀서_ 김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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