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세상
- 작성일 200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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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색빛 세상 ]
그건 아마 내가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라고 기억한다.
어렸을 때의 난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자신의 손이 닿는 작은 세계가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거라 믿었고, 하루 내내 놀다 지쳐 집으로 돌아오면 나를 보듬어주는 따뜻한 손에 몸을 맡기고 푹 잠을 청하며 행복을 느끼던 평범한 아이. 그저 등이 따스하고 배가 부르고 나를 쓰다듬어주던 따스한 온기 어린 손들, 그것들만 있으면 난 행복했고, 또한 만족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당시의 우리집은 꽤나 부자였었다. 배포가 크고 야심찬 사업가였던 아버진 젊은 나이에 이미 자신의 사업을 크게 부흥시켰고 착하고 상냥한 어머닌 전형적인 현모양처로써 나를 지극하게 돌보아 주었다. 맞벌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갈래머리를 땋은 예쁜 인형도 내 것이었고, 그저 퉁퉁퉁 튀겨보는 것만으로도 자지러질 듯 좋아했던 커다란 피아노도 내것이었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기에, 난 외동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닥 외로움을 느끼진 못했었다.
언제였을까? 어머니의 배는 점점 불러왔다. 그리고 난 남동생이란 존재를 가지게 되었다. 아기를 보고 있는 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다. 차가운 그것들과는 달리 아기는 나와 같이 숨을 쉬었고, 안으면 온기가 느껴졌고, 귀엽게 옹알거리기도 했고, 크게 울음을 울을 줄도 알았다. 나는 그것에 언젠가부터 애착을 쏟기 시작했다. 밥을 먹인다며 채 부풀지도 않은 가슴을 들이대기도 했고 기저귀를 갈겠다고 나서다가 옷핀에 찔린 적도 다반사였다. 아기는 점점 자랐고, 그것은 걸을 줄도 알고 말할 줄도 알게 되었다. 동생은 어머니를 닮았다. 좋은 말로 하면 착하고 상냥했으나 나쁜 말로 하면 심약했다. 사실 어리광쟁이인데다 칠칠맞고 덜렁이였던 당시의 난 동생의 보호자이길 자청했다. 그 아이는 내가 없으면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해 보였기에.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난 어느 새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의젓한 누나’가 되어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주변에게 자랑을 했고 어른들은 장하구나,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그것이 기뻤다. 그래서 나는 더욱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졌고 계속해서 칭찬을 받고 싶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와 함께 자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르는 일도 줄어들게 되었다. 사실은 어리광쟁이였던 주제에. 사실은 고집쟁이였던 주제에. 사실은 칠칠맞은 덜렁이였던 주제에.
사실은, 사실은 누구보다 더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애였던 주제에.
그랬지만 행복했다. 나만의 작은 세계는 여전히 굳건했고 무너질 염려는, 적어도 내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를 구축하는 건 오래 걸릴지라도 무너뜨리는 건 한순간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그 얼마 후였다. 동생이 태어난 지 오년 정도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 일곱 살의 어린애였다. 행복했다. 아니, 행복했었다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작은 세계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었기 에. 바깥세상이 행복할 거란 생각은 무서워서 접어두었기에. 나는 내 안의 세계에서 만족해야 했기에. 시간은 점점 흘렀고 내 유년기를 끝마쳐줄 사건의 흐름도 나를 향해 그 이빨을 점점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깨끗했던 집안이 마구 흩트러졌다.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쌍소리들은 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참으로 적격이었고 거대한 검은 그림자들은 어머니와 우릴 밀쳐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집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느꼈다. 저들은 나의 세계를 잔뜩 망가뜨리고 있었다. 내 세계를 파괴하지마. 내 행복을 송두리째 무너뜨리지 마. 그러나 나는 그들은 저지할만한 힘도, 용기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말 못할 공포심에 그저 눈물만을 흘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내 눈에서 흐르는 무슨 의미인지 모를 눈물을 얼른 닦아내고는 동생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던 아이의 몸은 천천히 진정되어갔다. 얼마 후에 색색대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내 유년기의 종말은 그렇게 천천히 내게로 드리워져 왔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집에서 살 수 없다고도 했고 가지고 싶은 것도 이젠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온통 빨간색의 딱지가 잔뜩 붙은 ‘우리집’에서 우린 쫓겨났다. 그리고 우린 방이 하나뿐인 단칸방으로 이사해야 했다. 예전같은 맛있는 음식은 없었다. 이젠 피아노도 칠 수 없었다. 장난감도 피아노도 아무것도, 우린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모습도 이젠 전혀 볼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 어머니는 일을 나갔다. 더 이상 우리와 놀아주지도 않았고 밝게 미소짓지도 않았다. 그저 피곤이 깃든 힘없는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어머니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우리가 채 깨지 않은 새벽에 어디론가 나가서 우리가 잠에 들고도 한참 후에야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우리의 밥을 챙겨놓고 나가곤 했다. 어떨 때는 며칠씩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도 있었다. 가끔 우연히 단잠에서 깨면 머리맡에 앉아 무언가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고있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던 게 다였다. 나는 그 얼굴만이라도 보는 것을 만족해야 했다. 곱게 자라 여리고 심약했던 어머니는 당시 죽을만큼 괴로웠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기고 온갖 수모를 당해가면서도 그녀가 필사적으로 일했던 것은, 아직 어렸던 우리 남매를 위해서였을 것이리라.
어머니는 점점 변했다. 내가 점점 자라감에 따라 취침시간도 늦어지자 어머니의 모습을 조금 더 볼 수 있었다. 간혹 볼 수 있었던 ‘그녀’는, 짙은 화장에 천박한 옷차림을 하고 술냄새를 가득 풍기고 있었다. 어머니는 변했다. 처음 잠자리에서 몰래 눈물 지으며 아파하던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아침마다 얼굴에 짙게 화장을 하고 가슴을 다 드러내는 노출이 심한 천박한 옷을 입고 나가서 밤 늦게서야 술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조차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우리에게 지어주던 힘 없던 미소조차 더 이상 지어주지 않았다. 우리에게 돈을 던져주고 신경조차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변했다. …아주 많이. 남편의 사업 실패라는, 어디선가 흔히 들을 수 있던 진부한 스토리에 죽을만큼 괴로웠을 그녀가 그렇게 변한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밑바닥까지 타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과정이 아니라, 억눌러 놓았던 인간 자신의 본성이 다시 드러나는 것일 뿐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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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이 곳은 유채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푸르렀던 하늘도 마냥 어둡기만 하고 주변의 건물들도 모두 회색으로 뒤덮여있다. 지붕도, 건물도, 전봇대도 모두 내 눈 앞은 모두 회색으로 덮여있다. 아무런 감정도, 사랑도, 행복도, 웃음도, 생기도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고 하루 벌어 하루를 먹기에도 빠듯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밑바닥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그런 사치스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가기에도 빠듯한 이들에게 그런 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리라. 그들이 어떻게 감히 그런 걸 즐길 수 있을까. 그런 것은 이미 엄청난 사치품이기에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것은 점점 사라져갔고, 또한 내가 누릴 수 없는 사치품으로 전락해갔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무채색, 회색빛 세상의 주민이 되어있었다.
적어도 학교는 집보단 나았다. 구역질나는 술냄새와 방 가득히 어지러진 술병도 없었고 숨쉬기조차 힘든 짜증나는 어두움도 없었다. 그러나 학교엔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친구’란 것들도 있었고 그 곳은 색깔이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그 아이’를 제외한 것들에게서 다른 색깔을 보는 것은. 그 곳에선 아이들이 웃어주면 나도 마주 웃어주고 인사를 하면 나도 인사를 하면 되었고 선생들이 노래하는 공부만을 하면 되었다. 즐거웠다. 아니, 적어도 그때만큼은 즐거웠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리고 그곳도 점점 변해갔다.
너무나도 쉽고 단순한 일상들. 똑같은 일상의 반복. 너무나도 무료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건. 아침에 6시에 일어나 동생이 먹을 밥을 해 놓고 30분정도 걸어 학교에 등교하고 4시즈음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강아지같은 동생녀석과 함께 귀가한다. 숙제며 빨래며 집안 청소를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어느 새 하늘은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있다. 그닥 흥미는 없지만 TV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어차피 조금 뒤적거리고 말 ‘그녀’의 식사를 준비하고는 일찍 잠자리에 든다. 망가져버린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므로. 언제나 다를 것이 없는 하루의 일과는 품에 안겨오는 동생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조용히 끝난다. 이런 일들은 언제까지 반복되는 걸까? 몇 년후? 몇십년 후?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는 이유 따윈 이미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왜 살아있는 거지? 삶의 리얼리티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회색. 회색. 회색.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조차 무표정한 얼굴에 회색빛의 빛깔. 이질적이다. 살아있는 감촉이 느껴지질 않는다. 무서워.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까봐. 나라는 존재를 거부당할 것만 같아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마냥 되어버릴까봐. 나는 마치 로봇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똑같은 일들만을 계속했고 아무런 것도 나의 관심과 흥미를 동하게 하진 못했다. 억지로 살아가는 느낌. 학교에서 느꼈던 처음 감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점점 모든게 다시 회색으로 바뀌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들은 더 이상 신선하고 재미있지 않았다. 내 눈엔 웃는 사람도, 슬픈 사람도, 아픈 사람도 모두 똑같은 사람으로 보여졌다. 꽉 막힌 감옥안에 갇혀 사는 것만 같아 아무런 삶의 의욕도 재미도 찾지 못하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 단 한가지 뿐. 사랑하는 내 동생. 사랑해 마지 않는 내 동생. 한없이 착하고 또 착한 아이. 뭐가 그리도 좋은건지 항상 방긋방긋 미소짓는 아이. 너무나도 여리고 순해서 길가에 널린 고양이 시체만 보아도 눈물짓는 아이. 착하고 또 착했지만 너무나도 약해서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바스라져 버릴 것만 같은 아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위해주는 아이. 이 아이만이 나의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고 삶의 이유였으며 삶의 낙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자신의 색을 잃어 탁한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말갛게 빛나는 색을 가진 아이였다. 그래, 푸르게 빛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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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네 부모님 이혼했다며? 」
「 … 」
난 이 시건방진 계집아이를 알고 있다. 반장이랍시고 이리저리 참견하고 다니는 참 오지랖도 넓은 아이. 얼마전 내게 접근했었던 아이. 무슨 위세라도 떨 듯이 아이들을 잔뜩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는게 맘에 들지 않아 무슨 선심이라도 쓰듯이 친구가 되겠냐는 말에 단번해 거절해보았었더랬지. 그때 저 치의 얼굴은 수치스러움에 붉어진 얼굴이 가관이었다. 혹시 그 일에 대한 보복인가? 그 때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어린애 같았다고 생각한다. 건드려서 좋을게 뭐 있다고 그런건지. 그저 전부 한심해 보일뿐이다.
「 말좀 해보지 그래? 어머, 왜 창피하기라도 한거야? 」
킥킥킥. 나에 대한 악의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진다. 뭐, 미움받는 거야 어쨌든 상관없이 익숙하니까.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어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들이 잔뜩 몰려있다. 웃는 얼굴로. 나를 잔뜩 둘러싸고 웃는 모습들이 마치 무섭게 웃는 피에로의 낯빛같을 뿐이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붉은 그것과는 다른 회색빛이라는 것 정도? 이럴 땐 저급한 저치들이 참으로 부럽다. 적어도 살아가는 이유란게 남을 비웃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 …… 」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자 그들은 자기 기세에 눌려 물러났다. 또 뒤에서 조금 욕하고 말겠지. 나로서는 저들이 어쩜 저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정말 경탄이 나올 뿐이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화장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나자 조금은 개운해진 기분이었다.
「 저, 저기… 」
「 응? 아…. 」
내 키가 그렇게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자아이였다. 동그란 뿔테 안경에 눈을 덮을 만큼 긴 앞머리,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우물대는 소심한 여자아이. 응, 난 이애도 알고 있다. …그래, ‘친구’였었던가.
「 아, 아, 아까는 미, 미안… 」
「 아까? 」
아까라고 하면 그 애들이 몰려왔을 때를 얘기하는 건가? 아아, 알겠다. 그래, 저 애도 거기에 끼어있었지. 아까 눈이 마주쳤었던 게 기억이 났다. 나를 비웃고 있는 무리들 사이에서 왠지 저만 굉장히 불안해 보이더라니 그것 때문이었나? 아아, 난 별로 상관 없는데….
「 미, 미안해! 」
「 아니, 별로 미안할 것 까지는… 」
「 치, 친군데… 나, 난… 」
「 친구? 」
친구? 입안에서 울리는 그 발음이 묘하게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친구라고? 친구가 그런 거였던가? 갑자기 고개를 숙인 채 우물대는 저 여자 아이에게로 향한 짜증이 물밀 듯 밀려왔다.
「 할 말 없으면 이만 가볼게. 」
「 아, 저기… 응. 」
떫은 땡감을 씹은 것처럼 입안에 씁쓸함이 감돈다. 친구가 저런거라면 갖고 싶지 않아. 아니, 애초에 친구란 존재는 어떤거지? 드르륵.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자 뒤엎어진 책상과 널부러진 물건들이 눈 안에 들어온다. 저급한 장난질. …유치해. 작은 한숨과 함께 물건들을 천천히 주워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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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건 어떤걸까? 어떤 느낌이 드는 걸까? 나에게 진심이란 ‘동생에게 통용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가 아니면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으므로. 그렇기에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동생에 대한 나의 ‘사랑’만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이란 감정이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가져본 적이 없는 것들이란 점에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걸까. 남녀간의 사랑이란 것도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걸까? 정말 얼마간이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어 미칠것만 같을 수 있을까? 끊임없이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는걸까? 나는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 받지 않으면 금새 잊어버렸고 누군가 내 곁에서 떠난다고 해도 슬프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공허감’이란 것도 느낄 수 없었고 떠난 사람이 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어느 새 금방 대신했고 금새 잊어버렸다. 아주 어릴 때서부터 나는 그래왔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부터 나는 그랬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버리는 이율배반적인 인간들에게 맞추어 방어본능이 작용한 걸까? 어차피 사람들이 내게서 금방 떠나가 버릴 것을 안 내 몸이 멋대로 적응한 걸까? 애초에 진심이란 걸 가질 틈이 없었다. 끝까지 내 곁에 남아준 동생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떠나가 버렸기에. 생각도, 행동도, 감정도, 모습도 모두 바뀌었고 나의 곁에 남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친구’며 ‘연인’이며 ‘가족’이며 전부 다 ‘동생’을 제외하고는 나에겐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진심으로 대할 수 없었고 그들도 나에게 진심이 아니었으며 내가 진심으로 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곁에 있어줄게’, ‘사랑해’ 따위 감언이설을 늘어놓고는 그들은 언제나 나를 먼저 떠나갔다. 애초에 내가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할 수 없었기에 떠났다는 사실이 미칠만큼 슬프다거나 그런건 아니었지만 혼자 남았다는 게, 나는 버려졌다는게,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나를 버리는게 ‘어느 누군가’여서 슬픈게 아니라, 그저 버려졌다는 사실이 아픈 것이다. 그저 버려졌다는 사실만이 나를 아프게 했다. 버리는 사람이 누가 되었든 그저 그 사실만이 아픈 거였다. 그래서일까? 금새 사람을 잊는 나의 건망증이 심한 이유는. 상처받은 마음을 굳게 걸어 잠근 몸의 방어본능이 아닐까.
나, 불행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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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어? 너? 」
「 …누구? 」
굉장히 반가운 목소리로 누군가 나를 불렀다. …까만 머리의 남자.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남자인데. 누구더라?
「 뭐야, 나 기억 못하는 거야? 」
씨익 웃어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기억 속의 누군가와 겹쳐졌다. 그래, 이제 기억났어.
「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 그럭저럭. 몇 년만이지? 초등학교 때 헤어졌다 대학교 때 만났으니. 」
「 일일이 세고 싶진 않은 걸. 」
「 하하하, 여전하네, 너는. 」
어렸을 적 꽤나 친했던 소꿉친구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 회사가 부도난 후 얼마 있지 않아 소식이 끊겼었는데. 이렇게 만나니까 반갑기도 하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꼭 닯은 너의 여전한 미소는 변하지 않았구나.
「 흐응, 돌아가셨다고? 」
「 아, 응. 아버지랑 어머니 모두. 」
「 그래…. 공부는 잘 돼? 」
「 참, 너도. 여전히 어른스럽다니까. 」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는걸. 동생이 아닌 사람과 이렇게 얘기해 본지 얼마나 됐는지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얘길 해야할지 내가 알 리가 있나. 그나저나 녀석의 부모님이 다들 돌아가셨다니… 좋은 분들이셨는데.
「 너희 어머닌 어떠셔? 」
「 …아아, 그냥 그래. 」
「 그렇구나, 안부 전해드려. 」
어떻게 너에게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고. 나는 녀석이 가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아마 좋았을 기억을 훼손시키고픈 생각은 없었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자 나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 우리, 영화보러 가지 않을래? 」
「 미안해,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서. 」
「 그렇구나. 녀석 귀여웠는데, 잘 있어?」
「 응. 」
「 그래, 그렇게 웃어. 그게 더 잘 어울리는걸? 그럼 가볼게~ 」
나도 모르게 동생을 생각하고 슬쩍 웃었나보다. 하기에 그 녀석일이 아니면 웃을 일은 거의 없으니까. 녀석이 건네주며 연락하라고 적어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가방에 슬쩍 챙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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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변하지 않았다. 푸른 하늘과 꼭 닮은 미소부터 시작해서 평소 하던 습관들과 말투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녀석의 것과 같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것에 안도한 이유는. 밝고 명랑하며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대해주는 남자.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녀석은 너무나도 똑같은 일상에 질려 살아가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때와 똑같은 미소로,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금새 녀석에게 빠져버렸다. 녀석도 힘들었을 것이다. 무척이나 화목했던 가정을 가졌었던 아이가 사랑하는 부모를 잃고 어땠을까. 내게도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분들이기에 어째서 돌아가셨는지 묻고 싶었지만 주제 넘게 너무 나서는 짓 같아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이야기는 녀석에게도 상처가 될 수 있기에. 나는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어째서 녀석은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쩐지 불공평한 마음이 들어 한편으론 녀석이 밉기도 했지만 그런 바보같은 질투심보단 녀석을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의 소소한 취미라던가 버릇 같은 것들을 기억하고 배려해주는 모습과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나를 잡아주는 녀석. 처음 내가 받았던 녀석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할 때에 망설임이 아직 남아있다. 바보같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나따윌 반가워 할 리가 있냐고. 그러나 내 떨림이 바보같을 정도로 흔쾌히 반갑게 맞아주던 녀석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정말 바보같은 짓이지만 나 조금은 기대해도 되겠니, 정말 멍청한 짓이라는 거 알고 있지만 나 너를 좋아해도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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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녀’는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있다. 차라리 예전처럼 술을 처마셔도 좋고 남자를 만나고 다녀도 좋으니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그녀를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내 눈앞에 보이는 그녀는 약에 취해 헤롱대는 천박한 창녀였다. 죽어라 일을 하고 아르바이트며 과외에 돈이 될만한 일들은 모두 해서 이제 통장에 제법 돈이 꽤 모였을 때 즈음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방에만 틀어박혀 나오려고 들지 않았다. 그녀가 약에까지 손을 댔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밖에 없었다. 모르핀이었다. 고가의 마약인데 비해 쉽게 구할 수 있으며 효과는 꽤나 좋다고 하는. 말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동생에게는 정신병의 일종이라고만 말해두고 차라리 내가 그 약을 사다 주어 발작이나 막으면서 제발 가만히 방구석에 처박혀 있길 바랬다. 아직 그녀를 엄마라고 믿고 있는 동생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충격이 될 게 뻔했으니까.
「 걔 알아요? 내 소꿉친구 」
「 ……. 」
알아 들을 리가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약에 취해 헤롱대는 그녀의 앞에 주저앉아 말을 걸었다. 그녀가 내 말을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나는 그저 내 할 말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알아듣길 바라는 것이 아니기에, 아니 알아들으면 더욱 곤란할게 뻔하다.
「 나 그 애랑 만났어요. 그 앤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 」
「 ……. 」
그리고선 괜히 옷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방안을 둘러보자 괜시리 기분이 나빠왔다.
「 안돼… 변했어…, 너도 그 애도… 」
그녀가 뭔가 중얼거린 것도 같았지만 알아 들을 수도 없었고 그녀는 곧바로 잠에 들은건지 정신을 잃은건지 쓰러졌기에 그녀를 방 안에 놔두고 일부러 소리나게 방문을 탁 닫고 나오자 김치찌개의 고소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파란 하늘에 눈을 찌를 듯이 눈부신 햇살, 청명한 공기와 싱그러운 빛깔을 마음껏 뽐내는 가로수들과 자신의 한 몸 다바쳐 여름 내내 울어제끼는 매미들의 합창. 이제는 완연해진 색색깔의 꽃들 하며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선선한 바람까지. 완벽한 신록의 계절이었다.
「 우리, 결혼하자. 」
「 …좋아.」
그리고 내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하나. 세상을 다 가진것만 같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 7월 20일로 하자, 네 생일이기도 하니까. 」
7월 1일. 점점 여름의 길로 치달아가던 그 날에 녀석에게서 청혼을 받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는 승낙했고 부푼 마음에 마냥 즐겁기만 했다. 결혼이라면 다른 나라 얘기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는 그런 일을 거들어줄 사람도 없었기에 솔직히 결혼 준비는 벅찼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잘 해낸게 용하기만 하다. 작은 교회에서 하객 없이 그저 목사님께 축복 받고 혼인신고를 하는 것이 다였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정말로 나는 행복했다.
「 누나, 늦겠다, 얼른 가야지! 」
「 응, 가자. 」
아무리 하객이 없었다고는 해도 동생만은 꼭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미리 녀석에게도 허락을 받아두었다. 날씨가 좋다. 이런 말 어쩐지 부끄럽지만 마치 나를 축하해 주는 것만 같은 좋은 날씨. 결혼식장으로 가는 내내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기에 부끄러웠지만 어떠랴, 나는 이미 사랑을 하고 있는걸. 그것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마음의 소리인걸.
「 …… 」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도착한 작은 교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도 목사님도 아무것도 없었다. 까만 턱시도를 입고 밝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어야 할 그의 모습은 아무데에도 없었다.
「 누나, 이게 대체…? 」
「 …… 」
끼익. 육중한 교회의 나무문을 열리는 소리가 텅 빈 교회에 울렸다. 그리고 그 곳엔 ‘그’가 서 있었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감정의 잔재가 남아있지 않은 얼굴로.
「 왜…? 」
「 아직도 모르겠어? 처음부터 널 사랑한 게 아니야. 」
「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 사랑한다고 했잖아, 응? 」
「 아버진 자살했어, 어머니도. 왜 그랬는줄 알아? 다 너의 그 잘나신 아버지 때문이었어. 너희 아버지의 그 많은 빚쟁이들은 우리집으로 몰려왔어. 내 아버지가 보증을 섰었거든. 집도 빼앗기고 빚쟁이들에게 몰려 도망다니면서도 아버지는 너희 아버질 믿었어. 언젠가 돌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할거라고. 근데,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타나지도 않아. 그 동안 아버지는 창고에서 목을 매달아 죽어버렸고 어머니도 같이 약을 먹고 죽어버렸어.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죽여버리고 싶었어. 복수한거야, 애초에 너따윈 처음부터 좋아하지도 않았어. 전혀 사랑한 적 없다고, 너를 사랑하지 않아. 이제 알아 듣겠어? 」
「 아냐, 거짓말이지? 그러지 마. 사랑한다고 했잖아,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랬잖아, 응? 」
「 몇 번 말해야 알아들어? 사랑한적 없다고, 애초에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 복수를 위해 접근한 거라고. 이제 그만 좀 하지? 」
거짓말.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장난일거야. 곧 미안하다고 하면서 장난이었다고 놀라지 말라고 말해줄거야. 사랑한다고 말해줬잖아, 좋아한다고 말해줬잖아. 너의 따스한 온기를 아직 내 몸은 기억하고 있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걸.
「 이만 가볼게, 다시는 얼굴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참, 너희 어머니 잘 돌봐드려. 그런데 그 약 정말 효과 괜찮지 않아? 」
차가운 표정.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낄수 없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 등돌린 뒷모습. 언제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뒷모습. 너무나 선명하게 자신의 색을 뽐내던 모든 것들이 그가 뒤를 돌아섬에 따라 점차 색이 바래져갔다. 그가 조금씩 멀어져가자 세상은 색이 바래지며 회색빛으로 덮여버렸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 버려졌어. 정말로 사랑했는데.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고 믿었는데.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나는 아직 그 온기를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 사랑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걸까. 그렇게 쉽게 등 돌릴 수 있는걸까. 무서워, 너무나 무서워. 너의 그 차가운 표정. 따뜻하게 대해주던 네가 진짜인거니, 지금의 네가 진짜인거니. 어느 쪽이니.
내가 바보인거야. 사랑한다는 그따위 감언이설에 넘어간 내가 멍청한거야. 정말일 리가 없잖아. 나 따위 어차피 그런 존재였을 뿐.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줄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수도 없이 겪어본 주제에 그걸 믿었던 거니. 사람은 믿을 수 없어. 아니 믿고 싶어도 믿기지가 않아. 너무나 쉽게 바뀌어 버리는 걸. 어차피 내 곁에 남아있어줄 사람은,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는걸. 이젠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아. 아프고 싶지 않아, 그렇게 외쳐봐도 돌아오는 건 텅 빈 마음 속의 공허한 울림 뿐.
시간이 약이다. 지금의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언젠가는 가슴 속에 새겨진 이 상처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흉터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잊을 수 있겠지. 언젠가는 잊혀지겠지. 아니, 잊을거야. 잊어버릴 거야. 이제 절대로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않을거야. 어차피 남겨지는 건 나니까. 아픈건 나니까. 이렇게 아플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마음을 열지 않을래. 버려진 적이 벌써 몇 번째인데 왜 다시 그에게 기댄걸까. ‘영원’을 꿈꾼 나는 바보인걸까. 아직도 이게 꿈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나는 정말 어쩔수 없는 구제불능인걸까.
「 누나… 힘내, 내가 있잖아. 그런 놈은 잊어버려. 」
그래, 내 사랑하는 동생. 나에겐 너밖에 없어. 처음부터 내 곁에 남아준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그렇게 또다시 버려지고 내 곁에 남은 건 동생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 아이에게 지독하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한텐 그 아이뿐이었고 나를 사랑해주는 것도 그 아이뿐이었고 내가 사랑하는 것도 그 아이뿐이었다. 사랑해, 나만의 아이야. 너만은 변하지 않겠지. 너만은 나를 사랑해 주겠지. 너만은 내 옆에 끝까지 남아주겠지.
-
그녀는 죽었다. 사인은 약물 중독.
시간은 참으로 금방 흘렀다. 그에 대한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잊으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잊기 위해 주변의 모든 것을 붙잡고 매진하고 있으면, 몸을 혹사시켜 생각이 나지 않게 하다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어느 새 조금씩 나는 그를 잊을 수 있었고 과거 따위는 뒤돌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 날’ 이후로 이년째 되던 어느 여름의 초입이었다.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볼때마다 허무함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행동도, 표정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련하게 느껴지는 아침커피의 향처럼 그저 살짝 그 때의 느낌이 묻어나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아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용히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두자. 이제 다시는 꺼내보지 말자. 기억해봐야 아픈 건 나야.
「 누우나~ 무슨 생각해? 」
「 그냥 있어. 기분 좋아 보이네? 」
「 헤헤헤, 오늘은 아주아주 기분 좋은 날이니까~. 」
「 무슨 날인데? 」
「 비밀, 비밀이야. 」
「 흐응, 말해주지. 」
녀석은 활짝 웃어 보이더니 혀를 빼물고 어딘가를 잠시 다녀온다며 문 밖을 나섰다. 녀석의 순수하고 천진한 모습이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같아 즐겁기만 했다.
하늘이 맑다. 구름도 하나 없이 새파란 하늘에 시원한 바람. 싱그러운 청록의 기운까지.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찌릿하다. 왜 그러는 거지? 이 느낌은 어딘가 낯설었다. 겪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기에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나저나 동생이 늦는다. 나간지 벌써 몇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닐까?
「 따르르릉 따르르릉 」
「 여보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
「 …동생분께 사고가 났습니다. ○○병원이니 빨리 와주시길 바랍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 」
상대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수화기를 집어던지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는 채 정신없이 달려나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갈 뿐이었다. 병원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 애가 잘못되면 어쩌지? 많이 다치면 어떡하지? 만약… 만약, 죽으면 어떡하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 애만은 나를 떠나지 않을거야, 내 곁에 있어줄거야.
「 사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 」
다급히 달려온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의 조용히 감긴 눈과 그 위로 올려지는 하얀 천, 그리고… 붉게 변해버린 케이크 상자와 포장된 선물꾸러미. 붉게 물든 선물상자 위에는 곱게 접힌 종이쪽지가 끼어있었다.
「 사랑하는 누나의 24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세상에서 누나를 제일 사랑하는 동생이- 」
그래, 어느 새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되었니. 그 날 이후로는 생일이라는 거 딱히 기념할 필요도 못 느꼈고 기념하고 싶지 않아 그냥 넘겨버리고 싶었는데. 그 짧은 글을 가슴에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머리는 새하얗게 바래버렸고 내가 왜 울고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 쪽지를 부여잡고 오열할 뿐이었다. 녀석이 죽어버렸다니, 믿을 수 없어. 다 거짓말이야. 꿈이야. 그래, 이건 악몽일거야. 눈을 뜨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거야. 평소같이 미소지으면서 누나, 하고 불러줄거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되지도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마저 동생의 죽음을 인정해버리면 다시는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까봐. 돌아올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지만 인정해버리면 나는 망가져버릴 것 같았다. 또 다시 혼자라는 걸 자각해버리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꿈만 같았다. 아직도 너의 웃음이 생각나는데. 아직도 너의 온기가 느껴지는데. 아직도 너와의 추억들이 내 안에 아로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주저앉아 너를 그리며 우는 것 밖에는. 미워하고 싶었다, 나를 떠난 너를. 미워할수 없었다. 그러기에 잊고 싶었다. 잊을 수 조차 없었다. 나를 옭죄어오는 너의 기억들과 너의 추억들과 너의 웃음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너를 잊으려 도망가려 하면 도망가려 할수록 점점 더 나를 굳세게 붙잡을 뿐이었다. 삼일 밤을 그렇게 울었다. 그러나 더욱 또렷해지기만 하는 너의 모습들. 예전의 너의 모습들. 왜일까. 왜 나는 영원을 믿었던 것일까? 어차피 쉽게 스러지는 것이 사람이란 것 몸서리칠만큼 잘 알았으면서 왜 영원을 꿈꿨고 왜 그 영원을 믿었을까. 손만 내뻗으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행복했던 그때로. 네가 웃어주던 그 때로. 네가 내 옆에 있던 그 때로. 그럼 다시는 놓치지 않을텐데. 그럼 다시는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텐데. 그럼 정말 잘 할 자신 있는데.
「 조금만 기다려, 곧 갈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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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오후 7시경 ○○병원의 옥상에서 낙사한 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자살로 추정되며 사인은 뇌진탕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자살의 동기는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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