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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일기 -나의 아프로디테여!

  • 작성일 2006-05-07
  • 조회수 350

 




환각일기-나의 아프로디테여!









김재환씨입니까, 하고 다시 한 번 더 물은 뒤 내가 건네준 도장을 도로 건네주며 우편 배달원은 조그만 소포 하나를 내 손바닥에 얹어 주었다. 이곳 ‘청소년의 전화’에 근무하고 처음 받아 보는 소포였다. 보낸 사람은 지나였다. 나의 첫 상담자였던 여고 1년생 지나.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연락이 끊겨 궁금하던 참이었다.


나는 소포의 겉포장을 급히 뜯었다. 그 속에 노트가 한 권 들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냥 노트가 아닌 분홍색 표지의 일기장이었다. 꽃무늬가 그려져 있고, ‘마음을 여기에 담아 보세요!’ 라는 글자가 엠보싱으로 도드라지게 찍혀 있었다. 일기장의 모서리는 지나의 삶처럼 엷게 닳아 있었다. 나는 서둘러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00월 00일


때로 내가 어쩌면 빗줄기나 소리, 혹은 빛의 한 가닥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환상은 언제나 환각 속에서 실행된다. 칼을 든 한 사람이 내게 다가오는 것으로 나의 긴 여행은 시작된다.


그리고 항상 여행의 끝에는 그 사람이 서 있다. 마치 한 순간의 홀로그램처럼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나를 향해 걸어온다. 그의 늘어뜨린 팔에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칼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고, 내가 달아나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으로 나의 환상여행은 끝난다.


그리고 환상에서 돌아오면 광의 방에는 비닐봉지와 말라죽은 벌레 같은 본드의 잔해와 토사물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광은 늘어진 뱃가죽을 드러낸 채 아직 환상여행중이다. 석은 게게 하게 풀린 눈으로 바보처럼 웃으며 맨 칫솔로 잇몸에서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이를 문지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벗어놓은 옷을 입는다. 늘 이런 때를 생각해 난 원피스를 즐겨 입는다. 단 한 번에 입을 수 있는 것이 굳어진 나의 손가락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그러는 동안……


데미스 루소스가 흐느끼듯 부르는 ‘레인 앤 티얼스’가 온 방을 떠다닌다. 빙산처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떠돈다. 몽환이다.





00월 00일


예전의 밤은 무척 아름답고 신비스러웠다. 그런 밤이면 잠들지 못하고 깨어서 시집을 읽곤 했다. 윤동주와 이상, 그리고 이혜인. 그들의 맑고 아름다운 세계를 늘 동경해 왔고, 그들과 함께 있는 밤은 내 작은 가슴에 넘치는 기쁨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이 밤은 견딜 수 없는 고독을 느끼게 한다. 손톱에 연분홍색 봉숭아물을 들이듯 내 가슴속엔 시퍼런 멍이 든다. 청포도 빛깔보다 더 푸른 물이 살을 저미듯 가슴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잠들고 싶다. 죽은 듯이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나면 어쩌면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 있을 것도 같다. 그러면 나는 선생님의 하숙방으로 찾아가 선생님을 야단치고, 선생님의 옷을 빨고, 선생님의 책상을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긴 잠이 드는 것도 두렵다. 잠이 들 무렵이면 늘 그 사내가 다가온다. 한손에 칼을 들고 창백한 얼굴로 뚫어지게 나를 응시하며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변하며 칼을 머리위로 치켜들고 나를 향해 내리친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 텅 빈 방에 나만 혼자 덩그마니 누워 있다. 광도 석도 없다. 차라리 그들이 내 곁에 있다면 덜 외로울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면 또 본드나 가스를 들이킬 것 같고, 이제는 습관처럼 그들과 섹스를 하게 될 것이다.


아!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재환 오빠한테 결혼하자고 할까? 그가 나를 받아줄까? 텅 비어버리고 빈 껍질뿐인 나를.





00월 00일


오늘 먼발치에서 선생님을 보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오랫동안 장기결석을 한 적이 없었다. 선생님이 집에 찾아와 한참 동안 벨을 누르며 서 계신 것을 내 방 창문의 커튼 틈으로 보았다. 너무 반가웠고, 달려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나갈 수 없었다. 너무 변해버린 내 모습에 선생님이 실망하실 까 두려웠다.


벌써 얼굴에 이상한 것이 나기 시작했다. 피부도 윤기가 없고 푸석푸석하다. 식욕도 없고 기운도 없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 마시고 침대에 누워 있다. 너무 누워 있다 보니, 등도 아픈 것 같고, 뒤통수도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묵직하다. 병원에 가보고 싶지만 무서워서 갈 수가 없다. 큰 병이라도 걸렸으면 어떡하지…….


재환 오빠와의 통화도 사실 두렵다. 그가 나의 이러한 모습을 본다면. 그리고 나의 더러운 실체를 알게 된다면?


그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는 않다. 그는 영원한 내 마음의 연인이다.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내 영혼의 샘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를 만날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런 가식에 가득 찬 내 몰골을 그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아! 죽고 싶다. 혀를 깨물까? 날카로운 면도날로 동맥을 자를까? 윤심덕처럼 현해탄에라도 뛰어들까? 꿈마다 나타나 칼을 휘두르는 붉은 얼굴의 그 사내가 현실 속에 나타나 나를 죽여주었으면…….


어머니는 아침 일찍 내 방에 들러 아버지 욕을 한바탕 늘어놓기 시작하셨다.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카세트의 볼륨을 최고로 높여버렸다. 어머니는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소용 없다고 화를 내고 나가버리셨다. 나는 ’레인 앤 티얼스’를 들으며 울어버렸다. 울고 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00월 00일


오늘도 아빠는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냉랭한 표정이다. 말만 꺼내면 아빠에 대한 흉이다. 정말 듣기 싫다. 그래서 엄마가 저녁을 먹자고 해도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엄마와의 대면을 피했다. 그래도 내가 엄마를 위로해야 했는데, 또 엄마 입에서 아빠를 비난하는 말이 나올까 봐 엄마를 자꾸 피하게 된다.


광은 자꾸 내게 본드를 권한다. 처음에는 정말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왔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본드를 하게 된다. 광은 내가 본드를 잘하게 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피자를 두개나 주문하며 즐거워한다. 그가 즐거워하는 것이 나도 좋다. 그는 내게 유난히 신경을 써준다. 나도 그가 좋다. 하지만 그와 섹스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내가 본드를 잘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섹스도 잘하기를 원한다.


나는 사실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본드를 하고 나면 꼭 섹스를 하게 된다. 섹스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본드를 하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본드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00월 00일


강물 속으로 노을이 진다. 처음에는 점점 붉어지더니, 갈색으로 변하고, 결국은 검정색으로 변했다. 짙은 어둠의 빛깔. 나는 검정색이 좋다. 바로 앞에 있는 사물들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밤이 좋다. 그 밤의 향기 속에 나를 묻고 음악을 듣는다.


이상과 이중섭. 독특한 개성으로 자기들만의 예술세계를 살다간 그들이 내겐 마치 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들의 사진이 든 패널을 쳐다보고 있다. 그들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내게 보인다. 평소의 나와 환각 속의 내가 다르면서도 같은 것처럼. 이 패널은 아빠가 내 생일 선물로 사 오신 것이다. 나의 아빠. 이상과 이중섭 이상으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아빠는 조금 전에 어머니와 다투시고 또 집을 나가셨다. 조금 전에 아빠가 거칠게 닫은 현관문소리가 아직도 공명이 되어 내 귓속을 쟁쟁거린다.


싸움.


광이 친구들 사이에서 ‘멀대’라고 불리던 아이의 목을 젓가락으로 찌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교 길에 골목에서 테니스서클의 아이들과 맞닥뜨린 것은 우연이었다. 서로간의 야유와 비아냥거림으로 분위기는 살벌했지만 선생님들의 눈도 있고 해서 그쯤의 말다툼으로 끝났다. 서로들 기분도 그렇고 해서 무엇이든 먹고 헤어지자고 광이 먼저 제의했고, 쫄면을 먹자고 제의한 것은 나였고, 그 분식집으로 데려간 것도 나였다. 일이 그런 방향으로 전개되려고 예정되어 있었던지, 테니스서클 아이들이 먼저 와서 라면과 만두를 시켜먹으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나는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지만 광이 강제로 우리들을 거기로 밀어 넣었다.


 또 서로간의 비난과 설전이 간간이 벌어졌고,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제발 그들이 조용히 음식만 먹고 헤어지길 원했다. 하지만 설전은 욕설로, 욕설에서 주먹다툼으로 사태는 급변하고 말았다. 우리 사이클 서클 여자 셋을 포함해서 아홉 명이었던 반면, 저들은 모두 남자만 열두 명이었다. 탁자가 넘어지고 음식을 먹던 학생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고 일어나고 삽시간에 분식집 안은 난투극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멀대’가 목을 감싸 안으며 앞으로 쓰러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일시에 싸움은 멈추고 모두 놀라 멍 하니 서 있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 광은 퀭하니 들어간 눈빛으로 피 묻은 젓가락을 들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나는 지금도 광의 그 모습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처진다. 하지만 나는 그가 두렵거나 무섭지 않다. 그는 언제나 내겐 물풀 같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그 그리움의 끝에 그가 서 있다. 밖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나를 부르고 있다. 아프로디테스 차일드의 레인 앤 티얼스를 처량한 음색의 휘파람으로 부르고 있다. 엄마 몰래 나가야 한다. 내 그리움의 물풀 같은 그에게로.





00월 00일


비가 내린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인데 온몸이 빗줄기에 축축이 젖어들고 있다. 그리고 그 빗줄기가 몸 구석구석을 뚫고 내 몸 속으로 흘러든다. 그렇게 흘러드는 것은 비만이 아니다. 광이 피우는 담배연기다. 나도 한 모금 빨아보지만, 담배는 별로 내 취향에 맞지 않다. 가끔씩 광이 권하는 바람에 몇 모금 빨아봤지만 혀만 까칠까칠할 뿐이다. 그럴 바에야 본드를 하는 편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청노루의 전화’를 걸고 있을 때만, 나는 내가 지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음악을 좋아하고, 시를 사랑하는 지나라는 소녀가 된다. 그래서 나는 밤늦게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 그리고 나의 상담자를 찾는다. 언제나 부드러운 음성의 재환 오빠가 나를 반긴다. 지나구나! 그의 낯익은 음성은 데미스루소스의 흐느끼는 보컬과 함께 내 귓속에 녹아든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침대로 가서 눕는다. 그리고 그와의 긴 여행을 시작한다. 예전의 지나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나는 수줍은 소녀 지나로 돌아간다. 잊었던 나의 그 모습으로.





00월 00일


광은 유달리 술을 잘 마신다. 앉은자리에서 소주 네댓 병은 혼자서 거뜬히 해치운다. 그리고 오토바이를 몰고 스피드를 즐긴다. 술에 취한 채, 그는 곡예를 하듯 오토바이를 몬다. 머플러를 떼어낸 오토바이는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오토바이를 타는데 있어 그는 거의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언젠가 그의 뒷좌석에 앉아 거리를 달린 적이 있었는데, 나는 너무 겁에 질려 속옷이 축축이 젖도록 비명만 질러댔었다.


처음에는 광의 오토바이를 타고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어둡고 습한 지하 동굴을 빠져 나오듯이 빛의 한가운데로 나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무섭게 질주하는 차들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나의 모습은 외계에서 온 돌연변이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나는 어둡고 더럽고 습기 찬 곳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끼나 곰팡이의 모습으로 한없이 구겨지고 있다. 다 쓰고 난 백지처럼 아무렇게나 찢겨져 이미 휴지통으로 던져진 것이 내 인생인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책 속의 글자가 벌레가 되어 내 몸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벽지의 꽃무늬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물이 되어 나에게로 달려든다.


책에서 보니, 본드에 중독되면 그렇게 된다고 한다. 그런 착시현상이나 환청현상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본드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늘 나는 환각상태를 경험한다. 물론 본드를 하고 경험하는 환상의 세계가 더 황홀하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보니, 한 아이가 본드를 하고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늘 본드를 하면은 아래에서 예쁜 아가씨들이 자꾸 내려오라고 손짓을 한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갑자기 도서관에 가고 싶다. 일요일 새벽 일찍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첫차를 타고, 길게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단어장을 들고 영어단어를 외우며 도서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그 시절,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만이 나를 짓누른다. 아! 죽을 것 같다.





00월 00일


내가 갈망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처럼 하늘을 마음대로 나는 것, 물고기처럼 물속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것, 아니면 치타처럼 빠르게 들판을 달리는 것. 내 허기진 정신이 순례자처럼 방황하며 찾았던 것은 비록 낡고, 초라할망정 항상 따뜻하게 나를 맞아주는 오두막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청노루의 전화’를 걸면 내게 오두막 같은 사람이 있다. 변함없이 늘 내게 깊은 관심을 가져주는 그런 사람이 있다. 김재환. 단 한 번도 얼굴은 본 적이 없지만 목소리 하나만으로 나의 가슴에 지극히 부드러운 평화를 주던 그가 너무 좋다. 그와의 대화. 현재의 지나가 사라지고 소녀 지나가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환각이 아닌, 환상여행을 떠난다. 본드는 아주 빠르게 나를 환각 속으로 빠져들게 하지만, 그와의 대화는 샤워를 하듯 서서히 내 모든 것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리고 환상여행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광을 만나고…….


이제 광을 만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난 주문에 걸린 인형처럼 그를 만나게 된다. 그는 늘 내 주위에 있다. 내 우울과 슬픔의 끝에 그도 역시 그 우울과 슬픔을 매달고 서 있다. 우린 닮음 꼴일까? 하나도 닮지 않은 닮음 꼴이 있다면 우리 둘의 모습이 아닐까?


이젠 전등불조차 싫다. 방안에 불이라는 불은 모두 꺼버리고 벽에 기대어 음악을 듣는다. 곡목은 모르겠지만 아주 잔잔한 음악과 어둠은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 조화 가운데 지나라는 한 아이가 울고 있다. 가만가만 소리 죽여 울어본다. 가슴속 깊이 고여 있는 그 슬픔을 모두 퍼 올릴 수 있다면 밤새 울어도 좋으련만.


갑자기 선생님이 보고 싶다. 즐거이 내 앞에서는 아이가 되곤 하는 선생님. 나는 엄마처럼 막 야단을 치고, 선생님은 아이처럼 다소곳이 꾸중을 듣고, 난 선생님의 하숙방을 청소했었지. 그리고 버너에 프라이팬을 얹고 고기를 구워먹는 재미란 더 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지금 내 행복은 어디쯤 달아나 있을까? 아주 영원히 달아난 것은 아닐까?





00월 00일


오늘은 구름이 잔뜩 낀 날씨다. 집에서 바라보이는 63빌딩이 더욱 멀게만 느껴진다. 날씨 탓이다. 흐린 날은 모든 것이 멀어 보인다. 모두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선 것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이런 날에는 감정이라는 놈은 더욱 움츠러들어 바닥을 기고, 몸은 아이를 한 열 명 정도는 낳은 아낙네처럼 늘어져 꼼짝도 하기 싫어진다. 모든 것이 귀찮고 성가시다. 눈을 뜨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화장실을 가는 것도, 이렇게 숨 쉬는 것도 싫어진다. 이대로 영원히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깨어나지 않고 오랫동안.


아마 나의 예전 꿈은 여류 수필가였던 것 같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필치로 뭇사람들의 가슴을 웃겼다가 울렸다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고 싶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직 어린 계집아이가 예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우습지만, 내가 느끼기에 난 무척 오랜 세월을 산 것 같다. 왜냐면 난 곧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일찍 죽든, 늦게 죽든, 죽는다는 것은 다 살았다는 것이다. 다 살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일찍 죽는 사람은 그만큼 빨리 살았을 것이고, 그만큼 빨리 삶의 허무함을 깨우쳤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아직 난 아무 것도 깨달은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조금은 더 살 것 같다.


오늘따라 유난히 시계의 초침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흐린 날은 비명을 질러야 제 시간을 맞출 수 있는 시계처럼 유난히 크게 귓전을 울린다. 모든 것이 그렇게 느껴진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담요 스치는 소리는 왜 그리 신경을 자극하는지, 가위로 담요를 싹둑 잘라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하긴 요즘 내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어떤 것도 내 눈에 띄면, 내 신경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된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요즈음은 엄마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바다나 바라보며 원숭이처럼 나무열매나 따먹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비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천둥과 번개가 치며 폭포처럼 마구 쏟아져 내린다면 가슴속이 시원하게 트일 것도 같은데…….





00월 00일


눈이 아프기 시작한다. 눈꺼풀 속에 조그만 모래 알갱이가 들어간 것처럼 눈을 찌른다. 손으로 눈 주위를 더듬어 보지만 아무 것도 손에 걸리는 것은 없다. 거울을 보며 눈을 까뒤집어 보아도 보이는 것은 시뻘건 실핏줄뿐이다. 그러고 보면, 피부가 이상하게 뻣뻣한 느낌이다. 안에서 뭐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조여드는 것 같은 팽팽함이 느껴진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속도 메스껍고, 뱃속이 느글느글해서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아니, 아침에 양치질을 하다가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드디어 몸에 이상이 오는 것 같다.


아빠를 만났다. 방과 후, 학교를 나오는데 아빠가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빠는 무조건 자기가 잘못 했다고 하셨다. 아빠는 엄마와 이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빠는 엄마와 지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눈물이 핑 도는 바람에 목에 걸린 피자가 넘어가지 않았다. 난 억지로 피자를 삼켰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피자가 먹기 싫어졌다. 그래서 콜라만 두 잔을 마셨다. 아빠는 드시지 않고 나에게 자꾸 먹으라고 한다. 맛이 없으면 다른 것을 시키라고 한다. 하지만 식욕이 나지 않는다. 목만 자꾸 메일뿐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우리 집은 행복했었다. 가끔 어머니가 부리는 히스테리만 없었다면 아마 나는 우리 집을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히스테리는 시도 때도 없이 생겨나 집안 분위기를 침울하게 했다. 설거지를 하시다가 수세미가 낡았다는 이유로, 외출을 나가시다가 구두약이 없다는 것으로, 전화를 거시다가 전화기에서 입 냄새가 난다는 핑계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어머니의 히스테리는 시작되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그 히스테리는 점점 심해져서 아빠와 나는 집을 나와 산책을 하거나, 내 방에 처박혀 어머니의 히스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빠의 외도가 엄마의 히스테리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아빠를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빠가 다른 여자를 만난 것에 일조한 것이 엄마의 히스테리가 아니었나 싶다. 난, 아빠의 편도, 엄마의 편도 들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구의 편도 되고 싶지 않다. 나는 아프로디테의 편이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편이 되고 싶다. 나는 아프로디테의 아이로 남고 싶다. 그렇게 아름답고 순결한 모습으로 남고 싶다. 그러나 난 내가 아프로디테의 아이가 될 수 없음을 안다. 그것이 아픔으로 나를 엄습한다.





00월 00일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비춰든다. 마치 돋보기로 잡은 빛줄기처럼 반듯하게 내 책상 모서리에 내려앉는다. 비둘기처럼. 창문을 열어젖히고 아침의 향기를 맡아본다. 신선하다. 눈을 감고 입을 벌려 한껏 가슴에 담아본다. 작년에 속초에 갔을 때, 문득 새벽에 잠이 깨서 바닷가로 달려갔었다. 새벽의 바닷가엔 잠이 없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연인끼리 친구끼리 앉아서 새벽의 평온함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즐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실연을 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느낀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듯이. 이렇게 아침의 공기를 즐기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청명한 햇살과 맑고 드높은 하늘을 즐기기엔 내가 너무 타락해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 달고 있는 나무처럼 난 내 모든 것을 다 떨어뜨리어 버린 것은 아닌지…….


처음에는 환각이 두려웠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로 떨어질까 무서웠다.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비록 다른 곳을 여행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자기들처럼 자유자재로. 아인슈타인도 가보지 못했던 그런 환희의 세계가 있다고.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먼 여행을 했었다. 애초에 신이 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그 세계를 탐험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 금역(禁域)의 포로가 되었다. 우상(偶像)을 섬기게 된 신도(信徒)처럼 내 정신은 철저히 그 금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왜 신이 그곳을 통제시켰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난 그 금역의 주민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 미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육체는 이곳에 있는데 정신은 육체를 떠나 제 마음대로 떠돈다. 연기처럼 자유자재로 형체를 바꾸며 부유(浮游)한다. 그 순간만큼은 이 땅과의 단절이다. 그리고 사실 조금씩 이 땅보다는 금역으로 가는 횟수가 늘어난다. 그것이 미쳐 가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느낀다는 것과 즐긴다는 것의 의미를 체험으로 알았듯이 미쳐가면서 나는 미치는 것이 이런 것임을 깨닫는다.





00월 00일


전부터 시다운 시를 한편 써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 동안 끼적거린 것이 몇 편 있지만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없다. 밤새워 쓸 때는 그래도 꼴이 시 같기는 했는데, 막상 아침에 깨어 읽어보면 껌 종이에 끼적거린 낙서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넋두리일 뿐이었다. 한때 내게도 별빛처럼 반짝이는 감성이 있었다. 지금은 네게 그것이 있었다는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단언하건대 내게 그런 능력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를 쓰기 위해 필기구를 들고 있는 이 밤은 단지 불면을 견뎌내기 위한 고육지책일 뿐이다. 그렇게 나는 능력을 잃고 말았다.


집을 나온 지 벌써 나흘째다. 석의 자취방을 찾아들면서 다시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아주 담담하고 우아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잠이 든 것처럼 그렇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잠자다가 깨지 않아 남들이 죽었다고 말하는 그런 죽음을. 한때 사람들은 나에게 공주병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나는 옷 하나, 말 하나, 행동 하나, 신중하게 선택해서 남들에게 보여줄 만큼 용의주도한 센스를 가진 아이였다. 나는 누구보다 돋보이는 아이가 되고 싶었고, 그런 소망만큼 난 철저하게 나를 관리를 했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이 모습은 또 무어란 말인가! 온통 헝클어진 머리며, 푸석푸석한 얼굴, 알코올중독자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이 손,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라곤 없다. 버려진 고철덩어리나 다름없는 이 몸뚱이는 왜 이다지도 세상에 미련이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동맥을 절단하면 피가 줄줄이 몸속에서 빠져나가는 쾌감에 젖어 황홀하게 죽을 수가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다. 또 목매달아 죽으면 남자들은 예외 없이 사정(射精)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자에겐 오르가즘의 절정이라도 느끼게 된다는 얘긴가! 얼어 죽는 것은 졸린 상태에서 죽는 것이라서 자는 듯이 죽게 되어 죽은 뒤의 얼굴 모습도 아주 평안해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산 속에서 얼어 죽으려면 몇 개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아직 얼음이 얼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테니까.


손이 너무 떨려 일기를 쓰기도 힘이 든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경직되어 글씨가 유치원생이 쓴 것보다 더 빼뚤빼뚤하다. 후후. 이제 수시로 본드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드디어 한계다. 일기의 한계고, 나 자신의 한계다. 한계. 이것이 한계인가?





-지나의 유언-


이렇게 제목을 달고 나니, 갑자기 내가 막대한 유산을 물려주려고 고문변호사를 불러 유언을 받아 적게 하고 있는 임종을 앞둔 부유한 노인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난 아무 것도 남길 게 없다. 있다면 생각나는 대로 써 갈긴 한 권의 일기장이다. 언젠가 좋은 작가가 되면 나는 말하려고 했다. 일기를 쓰세요. 그러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어요, 라고.


이렇게 유서라고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어 다소 비장한 느낌을 주지만, 그저 한 편의 수필을 쓰듯 그렇게 쓸 생각이다. 혹시 누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주시길!


내가 사랑한 것은 물빛 머금고 피어나는 뽀얀 안개도 아니었고, 이른 새벽 풀잎에 맺히는 이슬은 더욱 아니었다. 나는 슬픔이 전해주는 노래는 듣기 싫었다. 햇살처럼 눈부시게 싱그러운 꽃밭을 뛰노는 노루의 큰 눈망울처럼 밝고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싶었다.


차이콥스키의 비창보다는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을 즐겨 들었고, 지는 낙엽에 슬퍼하기보다는 맑고 청명한 가을하늘을 그리워하는 소녀였다. 그 소녀가 유서를 쓴다. 막상 죽음에 임박해서는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편지지를 어지럽힌다. 그리고 또 나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르는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렇게 펜을 들었다. 펜을 들었다고 쓰니 전장에 나가기 위해 칼을 든 장수처럼 비장해 진다.


환각의 유혹은 엄청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괴롭고 힘든 일이 생기면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환각이었다. 그것은 도피였다. 슬픔과 고통으로부터의 도피, 현실로부터의 도피, 나 자신으로부터의 도피, 결국은 인생으로부터 도피를 하게 된다. 나는 환각과 환상의 차이를 몰랐다. 탱자와 귤이 다르듯 환각과 환상은 그 뿌리부터 다른 것이라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환상이 선(善)에 기초한 것이라면 환각은 악(惡)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환각 속에서 나는 그것이 바로 환상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서슴없이 다시 그 세계로 나아갔다. 친구를 찾아가듯, 내 집을 찾아가듯, 즐거이 그를 찾았다. 하지만 나중에야 가면을 벗어 던지는 그 가면무도회가 끝났을 때, 나는 알았다. 내가 춤추며 놀았던 파트너가 흉측한 마귀였음을. 그리하여 난 마귀의 신부가 되었다. 오직 그의 뜰에서만 난 자유롭고 그를 벗어나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저주를 받았다.


두 번도 아닌, 단 한 번의 교류로 나는 내 정신의 일부를 잃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와 교접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내 정신을 놈에게 갉아 먹혔다. 그래서 결국엔 뇌가 비어버린 인형이 되었다. 그래서 그가 내게 환각을 불어넣어 주었을 때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것도 그의 지시에 따라.


그 단 한 번이 내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번 정도야 어때? 그렇게 시작한 것이 끝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한 끝장을. 그리고 암흑이다. 모든 세상이 것이 끝장난다.


이 글을 빌어 엄마 아빠 김재환 오빠와 박신제 선생님, 그리고 나의 추악한 면을 모르고 계셨을 저를 아껴주신 분들께 용서를 빈다. 넓은 아량 있기를. 그리고 일기는 나의 긴 넋두리를 언제나 넓은 가슴으로 받아주신 재환 오빠께 바칩니다.





지나 올림.





그래. 이제 이 일탈된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나의 일기를 덮으며 나는 중얼거린다. 언제까지 이런 이중적 구조에 나 자신을 내맡길 수 없다. 나는 열쇠로 닫힌 서랍을 열었다. 본드와 부탄 몇 개가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나는 쓰레기봉투에 그것들을 쓸어 담는다. 쓰레기봉투의 아가리를 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뒤 복도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에 그것을 쑤셔 넣고 사무실로 돌아온다.


갑자기 사무실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 냄새가 내 몸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사무실에 있던 냄새가 내 몸에 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창문을 활짝 열어 본다. 정오의 햇살이 지그시 이마를 찔러 온다. 사람 사는 세상이 눈앞에 있다. 정말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