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탄(空砲彈)
- 작성일 200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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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탄(空砲彈)
김형준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홍조를 띤 뺨은 물감을 떨어뜨린 듯 진하게 물들어 갔다. 반쯤 감긴 두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고르던 입에서 오빠, 라는 단어가 가늘게 새어나오는가 싶더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의 두 눈동자가 슬픔으로 금세 젖어들었다. 순간 나는 조급해졌다. 그녀와 하나가 되기 위한 움직임이 박자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조를 띠었던 얼굴이 본래의 빛깔로 되돌아갔다. 위기상황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마우스를 놓고 손바닥에 묻은 땀을 바지에 닦는다.
모니터로 나오는 그녀는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다시금 얼굴이 붉게 변한다. 그녀의 움직임과 숨소리에 맞춰 마우스 왼쪽 버튼을 지그시 눌러준다.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숨소리의 크기가 높아지면서 화면도 같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왼손으로 볼륨을 살짝 줄인다. 스피커 볼륨이 밖에까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잡혀 있었다. 누군가 이 야릇한 소리를 듣는다면 무슨 상상을 할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그녀는 허리를 추켜올리면서 마지막 숨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에코처리가 된 채 울려나온 그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곧이어 게임을 계속하겠느냐는 메시지가 화면에 뜬다. <Yes>라고 된 버튼을 누르려 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오른쪽 눈썹 끝부분이 나도 모르게 올라간다. 전화기는 어서 빨리 받으라며 끈덕지게 벨소리를 뱉어낸다. 수화기 너머 날 찾는 사람이 누굴 지에 대한 궁금증은 지금 이 순간 떠오르지도 않는다. 컴퓨터가 만들어 낸 가상현실만이 나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있을 뿐이었다. 준비된 여섯 명의 여인 중 네 번째까지 정복했다. 이제 다섯 번째 그녀를 만날 차례였다.
전화를 무시하고 <Yes> 버튼을 누른다. 몇 차례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끝나자 이번엔 자동응답기가 작동한다.
“야 이 새끼야!”
나를 찾는 목소리가 자동응답기 테이프에 녹음되기 시작한다.
“손가락이 부러졌냐? 왜 이렇게 연락이 없어? 내일 진수병장 결혼식 하는 거 알고 있지? 일 때문에 늦더라도 연락해. 예식은 못 보더라도 피로연엔 참석해야지. 기다린다. 꼭 연락해.”
날카로운 신호음을 내며 테이프가 멈춰 선다.
다섯 번째 그녀는 비키니 수영복차림으로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조용히 밀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마우스를 움직인다. 1인칭 시점의 모니터 화면은 마우스 조작에 따라 그녀의 몸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움직일 수 있었다. 얼굴 부분을 확대해서 본다. 길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수줍게 미소 짓는 그녀의 뺨에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다.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킨다. 이번엔 밑으로 화면을 옮겨본다. 적당한 크기의 젖가슴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위 아래로 흔들거린다. 내가 직접 선택한 파란색 수영복은 탱탱한 육체를 못 이기고 금방이라도 찢어져 흘러내릴 것만 같아 보인다.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눌러서 화면을 넓게 만든다. 그녀의 완벽한 전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책을 한 거리만큼 백사장에는 발자국이 길게 남았다. 어느덧 하늘빛은 붉게 변하고 있었다.
현실의 시간을 짧게 압축해놓은 가상공간에서 다섯 번째 섹스가 시작되려는 순간, 또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모니터에는 다음 행선지를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떠 있다. 선택할 수 있는 장소는 모두 다섯 군데다. 그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 다섯 번째 그녀와 즐겨야만 레벨이 넘어가고, 마침내 가장 아름다운 여섯 번째 그녀인 여왕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화면에 표시된 마우스 포인터가 가늘게 떨린다.
결혼식 얘긴 충분히 알아들었다. 솔직히 진수병장은 이름만 들어도 얼굴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놈 중의 하나였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8년 전, 부대 훈련 중에 그가 저지른 파렴치한 짓을 목격한 게 화근이었다. 진수병장은 그 훈련이후로 틈틈이 날 찾아왔다. 소대가 다른 고참은 아무리 같은 중대 내에 있는 졸병이라도 웬만한 일론 기합을 주거나 때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미친개였다. 어떤 누구도 미쳐버린 개새끼는 건들지 않았다. 그가 제대할 때까지 3개월 동안 나는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다.
기억의 저편에 묻어버린 이름이 된 지 벌써 8년이나 지났다. 생각해 보면 그도 날 만난다는 게 달갑지만은 않을 것 같이 여겨졌다. 나 같은 거 무시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아무래도 그 날의 주인공이기에 한번쯤은 악수라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전의 불편한 감정이 되살아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라도 그에겐 엄청난 파장의 결과로 마무리될지 누가 알겠는가. 게다가 아직까지도 미친개로서의 성격이 남아있다면 술이 있는 피로연에서 날 죽이려 든다 해도 말릴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게 뻔했다. 결론은 굳이 내가 참석하지 않아도 될 결혼식이라는 거였다.
갈 수 없다고 말해야겠다. 아니, 가기 싫다는 내 의사를 분명히 해둬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결혼이란 게임일 뿐이었다. 끊임없이 타인과의 경쟁을 즐겨온 근현대 사회가 만들어 낸 재미없고 지겨운 게임 말이다. 예식장과 신혼 여행지를 고르고, 아들 혹은 딸을 낳으면 그에 합당한 점수가 주어지고, 별거를 하거나 이혼을 하게 되면 마이너스 점수를 얻게 되며, 직장에서의 성공여부에 따라 노후가 결정되는, 이런 식의 허술한 시나리오로 제작된 게임 말이다. 이 게임에서 나의 역할은 현금 3만원을 준비해 가서 어중간한 시간에 점심을 먹은 후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대부분이었다. 언제나 반복되는 이 역할에 나는 충분히 지쳐버렸다. 이제 전화기를 들고 말해야 할 차례다. 진수병장의 결혼식에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미안한데요, 제가 내일 좀 바빠서 피로연에도 못 갈 거 같습니다.”
나는 송화기에 입을 대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당연히 바빠야지. 정신없이 써도 시간이 모자란 판에.”
내 말에 대꾸를 한 사람은 진수병장과 맞먹을 정도로 재수 없는 영화사 대표 김씨였다.
“얼마나 진행됐냐? 대충 초고는 나왔겠지?”
“뭐, 그럭저럭, 스토리는 만들었는데요.”
빈정대는 듯한 그의 말투에 나는 자신감 없이 대답했다.
“작업 들어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모양이야. 내일까진 초고가 나와야 한다는 걸 몰라서 그래? 결혼식이고 뭐고 간에 남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내일까지 완성시켜 놔. 알았어?”
신경질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놓는 김 대표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배경음악이 이 순간만큼은 서글프게 느껴진다. 다섯 번째 그녀는 여전히 바닷가 백사장을 걷고 있었다. 장소를 선택하라는 메뉴 창을 닫는다. 그리고 키보드의 ESC(escape)키를 누른다. 맑은 신호음과 함께 게임을 저장하겠느냐는 질문이 뜬다. <Yes> 버튼을 누르자 정말로 게임을 끝내겠느냐고 재차 되묻는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두 개의 버튼은 <Yes>와 <No> 뿐이다. 단 두 개의 선택만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갈등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강요받아왔는지 모르겠다. 선택은 항상 두 가지였다. 그럴 것이냐, 그러지 않을 것이냐. 네 개의 보기가 주어졌을 때에도 결국 선택은 두 가지뿐이었다. 내가 찍은 번호가 과연 정답일까, 아닐까.
영화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골치 아픈 것도 결국 선택의 문제였다. 등장인물의 삶을 결정짓는 건 주위환경에서 주어지는 문제에 대해서 그 또는 그녀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달렸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 고민해 보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한 전제(前提)에서 결론지어지곤 했다. 이 작품으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가, 라는 카드를 꺼내게 되면 고민은 사라져버렸다. 물론 이 카드를 먼저 꺼내드는 사람은 언제나 영화사 대표 김씨였다. 면도칼로 그어놓은 듯한 작은 눈이 반짝일 때마다 그의 입에선 투자와 흥행이란 단어가 끝없이 반복됐다. 그런 날이면 시나리오의 등장인물들은 삶 자체가 바뀌기 마련이었다. 어떤 인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야 할 경우도 생겼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의 주인공도 두 갈래 선택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최홍수다.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으로 설정했다. 그는 3류 잡지사에 퍼즐 맞추기 게임을 연재하는 일로 먹고산다. 원래 내가 설정한 그의 직업은 소설가였다. 하지만 김씨는 소설가라는 직업을 너무 많이 써먹었다며 반대했다. 너무 많이 써먹었다? 즉 상투적인 설정이라는 이유였다.
실제로 수많은 소설가들이 영화를 통해 그려져 왔다. 지난 세기 암울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소설가들의 모습은 천편일률적인 지저분함으로 표현됐었다. 마치 모든 소설가가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들은 낡아빠진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 누군가가 피우다버린 듯한 담배꽁초를 입에 물고 거리를 걸어 다녔다. 그 당시의 모든 영화가 다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의 치열했던 삶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소설가뿐만 아니라 시인이나 시나리오 작가와 같이 글을 쓴다고 하는 이들을 표현할 때의 공통된 묘사였다. 그들은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를 노려보며 줄담배를 피워댔고, 그렇게 재떨이에 쌓인 담배꽁초만큼이나 오랜 시간이 지난 요즈음에도 한번 굳어버린 사람들의 편견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바뀐 것은 글을 담아내는 도구뿐이었다. 필기도구가 컴퓨터 키보드로, 원고지가 컴퓨터 모니터로 바뀌긴 했지만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엔 여전히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는 거였다.
이런 기존의 이미지를 그대로 답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구상했던 최홍수는 깔끔한 외모에 힙합을 즐기는 인물로 그려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소설가를 반대했던 김씨는 이것 또한 안 된다며 짜증을 냈다.
“야, 봐라. 영화에서 주인공은 작품을 대표하는 얼굴이야. 알았어? 우리가 하려는 건 공포영화잖아? 너 한번 생각 좀 해 봐라. 힙합을 즐기는 깔끔한 외모의 소설가가 공포라는 장치와 어울릴 거라 생각 하냐?”
김씨는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을 이어나갔다.
“대부분 관객은 자기들이 이미 봐 왔던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는 거야. 공포영화 보러 가자, 결정하는 순간부터 관객들 머릿속엔 그런 이미지들로 가득 차게 되어있어. 삐걱거리는 문이나 마룻바닥, 갑자기 튀어나오는 살인마, 닭살이 쫙 돋는 효과음, 그리고 괜히 음울해 보이면서 분위기 잡는 주인공. 알아듣겠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뭐 그런 모습을 그리란 말이야. 우리도 남들처럼 대박 한번 터뜨려 보자고.”
코를 벌름거리며 열변을 토해내던 그의 얼굴이 모니터에 비쳐 보이는 듯하다. 가지런히 나열된 글자의 배열 속엔 세상과 타협하려는 내 모습이 비겁하게 숨겨져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고개를 돌려 맞은 편 벽에 걸려있는 거울을 본다. 감지 않아 마구 뒤엉킨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아있고 얼굴을 뒤덮은 수염은 보기만 해도 덥게 느껴진다. 금색 안경테 너머의 두 눈동자는 불 꺼진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아 보이고 담배를 문 입술은 바짝 말라 파랗게 질려있다. 거울에 비친 모범적으로 전형화(典型化)된 글쟁이의 얼굴. 소설을 쓰다 지친 저 얼굴의 주인공은 돈의 유혹에 따라 영화시나리오에 발을 들여놓은 지 벌써 6년째 접어들고 있었다.
1000만원이라는 돈에 이끌려 쓰게 된 첫 번째 작품은 3년을 질질 끌다 결국 시나리오개발단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동시에 영화사 대표는 어디론가 잠적해 버렸고, 3년 동안 일한 대가는 겨우 200만원이 조금 넘는 푼돈이었다.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시나리오는 괜찮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시 소설을 쓰려고 할 때쯤 두 번째 작품을 함께 해보자며 다가왔던 제작자가 지금의 김씨였다. 처음부터 그는 유행에 편승한 상업영화만이 돈을 끌어 모을 수 있다고 날 설득시키려 했다.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 영화란 돈벌이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 하나 만들어보자는 얘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뻔했다. 한참을 떠든 그에게 나는 더듬거리며 공포영화를 기획하는 게 어떻겠냐고 내뱉었다. 사실 그때 내가 한 말은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꺼낸 거였다. 뭔가 한마디라도 해서 날 놀라게 해 봐, 그의 눈빛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눅이 든 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에 어떤 말이라도 해야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 챘다. 예상외로 그는 흥분하면서 바로 계약서를 꺼내 보였다. 그 종이에서 내가 알아볼 수 있었던 글자는 단 하나였다. 굵고 기울어진 글씨체로 쓰인 3000만원이라는 아라비아 숫자. 떨리는 손으로 사인을 할 때 그가 말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도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는 완납을 해 줄 형편이 못 돼. 일단 초고가 나오면 투자자를 찾아봐야 되고, 투자가 결정되면 이런저런 스텝들을 모아야지. 물론 자네는 계속해서 작품을 다듬어야 할 거고. 연출이네 촬영이네 조명, 뭐 잡다한 애들 다 소집하고 캐스팅까지 완료된 상태에서도 사실 완성까진 예산이 불안하거든. 최종 편집본 시사를 마쳐야만 안심이 된다 이 말이야. 그때까진 적은 돈이나마 회사 차원에서 도와줄 테니까 작품에만 매달리라고. 모든 게 자네 손끝에 달린 거야. 알았지?”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깍지 않은 손톱에 검은 때가 두껍게 끼어있었다. 니코틴에 중독된 뇌와 세상의 온갖 오염물질을 만지고 다니는 손 중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작품을 쓰게 만드는 것일지 궁금해진다.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본다. 눅눅한 방안 구석에 핀 곰팡이 냄새 같은 것이 코를 찌른다. 내 손바닥에서 나는 이 악취. 굉장히 익숙해진 냄새다. 32년이란 시간동안 손바닥뿐만 아니라 내 몸 구석구석에까지 베어버린 냄새, 맡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맡아야 하는 악취인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딜 가더라도 따라다니며 거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돈의 유혹이 풍기는 냄새였다.
지금의 나는 좀비와 같은 존재다. 돈의 유혹을 쫓아 악취가 벤 손만이 자신의 의지를 갖고 움직인다. 죽어버린 정신은 영혼을 갖지 못한 글만 생산해낼 뿐이었다.
“당신들도 다 똑같아. 그 좆같은 일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왔는지 알아? 괜히 날 위해주는 척, 걱정하는 척 하지 마. 그 아이는, 그 아이는 당신들이 죽인 거야. 난 재수 없게 그 상황에 말려든 것뿐이라고.”
“아가리 부셔버리기 전에 입 닥쳐라.”
“씨발, 방아쇠를 당긴 건 너야. 그 년이 죽은 건 우리 때문이 아니라고!”
“웃기지 마.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어. 당신들도 나와 같이 무섭다는 걸. 억지로 냉정한 척, 아무 일도 아닌 척 연극하지 마.”
“너희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키보드를 누르던 손가락을 멈추고 시나리오가 쓰인 모니터를 가만히 쳐다본다.
군 복무를 같이 했던 네 명 중 한 명인 이봉구는 나머지 세 명이 과거에 저질렀던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한다.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세 명의 과거를 주인공인 최홍수의 대사만으로 전달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군 시절로 돌아가 그때 있었던 일을 직접 보여줄 것인가가 이야기 전개상 해결돼야 할 문제였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꺼진 담배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올라온다. 몸을 숙여 모니터를 응시하던 눈으로 연기가 스며든다. 왼쪽 눈을 질끈 감는다.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눈으로 스며들어온 연기는 내 머릿속을 마음껏 휘저어 놓는다.
그들의 대사와 행동, 시공간적 배경에 놓인 상황, 그것을 헤쳐 나가야 하는 등장인물들,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는 작품의 줄거리,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세부적인 묘사들. 묘사는 결국 돈과 연결된다. 제작비 상승은 나에게 지급될 돈의 액수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하다. 김씨와 맺은 계약서는 글자와 숫자가 적힌 종이에 불과하다. 계약위반이 됐다한들 호소할 데라곤 단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스텝 처우개선을 위한 인터넷 신문고가 무용지물이 된 건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열정적으로 운동을 전개해 나갔던 사람들도 결국은 자본을 갖은 제작자의 힘에 당해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핏발이 선 왼쪽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영 가시질 않았다.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시선은 줄곧 모니터에 박혀있었다. 그들의 대사부터 먼저 살펴봐야겠다.
첫 번째 대사는 작품의 주인공인 최홍수의 것이다. 그의 말을 막으려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물의 이름은 이남철이다. 최홍수와 나이는 같으나 군에 있을 땐 그의 고참이었다. 세 번째로 말한 것은 김철수다. 최홍수와는 군 시절에 동기였다. 다시 최홍수의 대사가 이어진 뒤 이들의 행동과 말에 놀란 이봉구가 말한다.
“너희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봉구는 이남철과 군 시절 동기사이지만 최홍수를 포함한 그들의 과거행적에 대해선 모르고 있다. 이봉구에게 과거 그들의 잘못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풀기 전에 먼저, 그들이 처한 현재 상황에 대해서 다시 한번 꼼꼼히 되새겨 봐야겠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민박집이다. 제법 큰 식당을 함께 운영하면서 식당 건물 뒤편의 넓은 공간을 민박할 수 있도록 만든 곳이다. 민박이 가능한 건물은 모두 세 군데다. 성수기 때에는 가끔씩 식당에 속한 주인아줌마의 방도 손님 차지가 되곤 한다. 민박집 앞에는 등산로가 있다. 그 건너편으로 가면 계곡이 보인다. 계곡은 넓지 않지만 깨끗한 물이 흘러 민박집을 찾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다.
최홍수 일행이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다섯 시 30분이 다 되어서다. 무더운 여름의 태양과 끊이지 않는 매미소리 사이사이로 오랜만의 나들이에 들뜬 그들의 대화가 오간다. 최홍수 일행은 본인을 포함해서 모두 일곱 명이다. 최홍수, 이남철, 김철수, 허재남, 이봉구, 김희숙, 박미란이 그들이다. 허재남은 이남철과 군대 동기이고, 김희숙은 최홍수의 여자친구다. 마지막으로 이남철의 아내인 박미란이 남았다.
박미란. 나이는 27세. 성별은 물론 여자. 키는 163센티미터에 몸무게는 45킬로그램 정도다.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웃을 때마다 반달이 되는 눈이 매력적이다. 결혼 후에도 직장을 계속 다니고 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부부 사이에 아직 아이는 없다. 살인마의 첫 번째 희생자로 그녀가 죽는 시간은 대략 밤 열한 시쯤이다. 계곡에서 저녁을 보내고 식사 겸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고 난 뒤에 일어난 사건이다. 죽은 곳은 화장실. 건물 바깥의 화장실은 식당 바로 옆에 있다. 볼일을 끝내고 나와 손을 씻는 그녀의 등 뒤로 살인마가 다가간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뒤돌아서는 순간, 시퍼런 칼날이 길고 하얀 목에 꽂힌다. 그녀의 목에서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신다.
묽은 액체가 입술 사이로 흐른다. 혀를 내밀어 맛을 본다. 짠 듯하면서도 따스한 기운이 혀끝을 마비시킨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본다. 콧구멍에서 흘러나온 피가 입술을 넘어 턱 밑에까지 이르렀다.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더듬더듬 휴지를 찾는다. 산만하게 어질러진 방안이지만 있어야 할 자리엔 항상 그 물건이 놓여있게 마련이다. 휴지는 언제나 컴퓨터 가까이에 놓아두곤 했다. 그런데 손끝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턱 밑에 매달려있던 핏방울이 발등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 그것이 있어야 할 곳에 없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그것은 휴지와 손톱깎이 같은 물건일 수도 있고 애인이나 친구 같은 사람일 수도 있다. 소설가가 되겠다며 매년 네다섯 군데의 문예공모전에 작품을 응모하고 떨어지길 반복하던 몇 년 전에는 나도 친구라고 불리던 이들과 붙어 다니곤 했었다. 새벽까지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사소한 일로 싸우기도 하고, 어느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해하기도 했던 그들 중 대부분이 지금은 한 가정의 남편이나 아내라는 호칭으로 살아간다. 그렇지 않은 녀석들도 어떤 회사의 대리 혹은 팀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바쁘게 하루하루를 지낸다.
삶의 큰 전환점이 된다던 군대에 갔다 와서도 나의 생활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소설가를 꿈꾸며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은 이미 나에게서 떨어져 저만치 먼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매일 전화를 주고받던 우리는 어느새 1주일에 한번, 한 달에 한번, 1년에 서너 번 정도의 안부전화를 할 뿐인 사이가 되어 버렸다.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볼 때면 나도 문득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을 하기 위해선 어떤 누군가를 만나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만 한다.
나에게는 일단 돈이 없다. 그녀들과 만나기 위해선 평범한 직장생활과 함께 모든 꿈을 버려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먼저 떠오른다. 자신이 꿈꿔왔던 모든 걸 사회라는 이름의 깊숙한 늪 속으로 집어던지는 이들을 난 충분히 많이 봐 왔다. 그 누군가에게 투자한 시간 또한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 날 집어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제대로 된 연예 한번 해보지 못한 나는 막연한 두려움에 지레 겁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컴퓨터 게임 따위에 빠져든 건지도 모른다. 연예 시뮬레이션 게임에서의 나는 그녀들에게 언제나 매력적인 남자로 등장한다. 가상현실에서는 돈도 필요 없다. 시간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 가상의 공간에서 만난 여자 중 한 명이 박미란의 모델도 되었다. 내가 호텔로 가자고 할 때마다 과감히 손을 뿌리쳐 꽤 긴 시간동안 애 먹게 했던 그녀를 나는 작품에 등장시켜 첫 번째 희생물로 삼아버렸다. 김씨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자가 제일 먼저 죽는 것이 공포영화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작품을 쓰면서 예술적 모험 따윈 하지 말자고 나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항상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를 위해 소설을 쓰던 때와는 확실히 다른 상황이었다.
더듬거리던 손에 휴지뭉치가 잡혔다. 얼른 들어 코에 갖다 댄다. 발등에 한두 방울 떨어진 핏방울은 묘한 문양으로 흩어졌다. 핏방울은 발등의 둥근 곡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려 이번엔 방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 핏방울을 내려다본다. 그렇게 찾았던 두루마리 휴지가 그 곳에 떨어져 있었다. 입에서는 아직까지도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았다. 콧구멍을 막았던 휴지뭉치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낸다.
발등에 떨어진 것과 바닥을 훔치고 나서야 내가 집어 들었던 휴지뭉치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피를 닦아내기 전에 이미 무언가를 해결한 흔적이 역력했다. 아마도 게임 속 세 번째 그녀와의 섹스 때 사용했던 것 같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높아지면서 내 손도 바쁘게 움직였고 드디어 절정에 다다랐다고 생각한 순간, 컴퓨터 옆에 있던 휴지를 재빨리 끊어 사용하려던 중에 바닥으로 떨어뜨린 듯하다. 휴지뭉치를 손에 넣어 꽉 쥐면서 모니터를 본다.
한창 말싸움 중인 마당에서 화장실로 장면이 바뀌면, 아까 전에 죽은 박미란을 발견한 허재남이 놀라 바닥에 주저앉아있다. 피로 물든 시멘트 바닥에 엉덩이가 붙어버린 듯 그는 일어설 힘조차 없다.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주춤거리는데 화장실 문이 덜컥 열린다. 낮게 비명을 내지르며 뒤를 보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전기까지 나간 화장실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뿐이다. 천천히 일어서는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피에 젖은 바지가 살에 달라붙는다. 바로 눈앞에 위치한 나가는 문이 천릿길처럼 멀게만 느껴지는데 누군가의 서늘한 손길이 그의 등 뒤로 다가온다. 표정이 굳어버린 얼굴을 돌려 뒤를 보면, 피눈물을 흘리는 소녀의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다.
허재남이 박미란에 이은 두 번째 희생자다. 그가 죽고 난 뒤로 민박집 주인아줌마도 살해당한다. 그제야 최홍수 일행은 사태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군 시절의 그 사건 때문임을 눈치 챈다.
“너희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병장님은 그 시간에 우리와 같이 있지 않았죠. 저 짐승 같은 새끼들의 만행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이미 죽은 목숨이에요.”
“맞아. 이건 그 때 그 아이의 복수야. 우린 다 죽었어.”
“조용히 해. 아가리 닥치란 말이야!”
코를 한번 세게 들이킨다.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코피는 멈춘 것 같다. 손에 쥐고 있던 휴지뭉치를 벽 모퉁이에 던지고 나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놓는다. 방금 전에 떠올렸던 최홍수, 김철수, 이남철의 대사를 옮겨 적는다.
작품 속 인물의 결정이 있기 전에 작가는 극의 흐름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작품을 써 내려가면서 캐릭터가 죽는 장면을 얼마나 충격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만 신경 쓰며 작업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깜짝 효과보다 이야기 속에 공포라는 장치가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해야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공포영화들 봐라. 칼로 쑤시고 자르고, 도끼로 목을 쳐버리잖아. 내가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극장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비명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런데 요즘 애들은 말이야, 인터넷으로 오만 걸 다 내려 받아 본단 말이지. 몇 년 전에 유행하던 엽기 동영상 같은 거 있잖아, 자기 입에다 권총을 쑤셔 넣고 방아쇠를 당기거나 하는 동영상. 너도 봤지? 뒤통수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거 말이야.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세대야, 요즘 세대가. 하얗게 분칠하고 소복 입은 귀신이 통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어. 초자연적인 것도 좋은데 가급적이면 살인마를 등장시키도록 해. 그 자식 손에 칼이든 도끼든 쥐어주란 말이야. 어차피 여름 한철을 겨냥해서 기획하는 거잖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화끈하게 죽여 버리라고. 알았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던 때에 나는 작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사랑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 인물이 아무리 악독하더라도 그 또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 작가는 노력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들을 얼마나 효과적이고 충격적으로 죽여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장르가 공포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변명에 불과했다. 내 임무는 김씨가 최대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써서 그의 주머니에 든 3000만원을 꺼내면 끝나는 것이었다. 붉은 피로 젖어든 내 마음은 그때나 되어서야 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하튼 지금까지 내가 죽인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이들을 죽인 존재는 하나가 아닌 둘이다. 박미란과 민박집 주인아줌마를 죽인 것은 근처 군부대에서 탈영한 최상병이라는 캐릭터였다. 허재남의 죽음은 귀신에 의한 것이었다. 귀신은 최홍수가 이봉구에게 말하려 한 그들이 잊고 싶어 하는 과거, 바로 그 때 희생당했던 소녀의 원혼이다. 김씨의 요구대로 살인마를 등장시켜 별다른 내용 없이 기발한 살해 장면만으로 채워진 작품을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작가적 양심상 그런 저급한 작품에 내 이름 석 자를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얻어낸 결과가 귀신에 홀린 살인마 캐릭터였다. 그리고 한국의 징병제 문화를 살짝 건드려서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 보자는 의견을 덧붙여 보았다.
“좋아. 지금 그 설명만으로도 대충 이야기 하난 만들어지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건, 절대로 애매모호한 예술영환 안 된다는 거야. 장르영화는 이미지가 확실해야 돼. 극장 불 꺼지고 나서 5분 안에 관객들을 사로잡아야한단 말이지. 이 점 잊지 말도록.”
아마도 김씨는 내가 말한 사회적 이슈에 마음을 바꾼 것 같았다. 흥행을 하기 위해선 방송사와 잡지사에 보내는 보도 자료나 광고도 중요하지만 일반 관객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라는 걸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러오는 관객은 대개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 정도일 거라 예상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상 이 정도 나이의 남녀들은 군대 문제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질 거라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내 의견에 동의를 한 이후 어느 날, 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한 주간지에서 영화사로 인터뷰를 하러왔었다. 기자는 김 대표에게 차기 작품에 대한 질문을 했고 그는 한국의 군대 문제를 다룬 공포영화라고 질문에 답했다. 이젠 물러설 곳도 없이 내가 말한 내용의 시나리오를 그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였다.
여전히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그들의 과거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대사만으로 처리하기엔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었다. 역시 가장 올바른 선택은 그 날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이 방법을 쓰게 되면 또 다른 문제점이 생겼다. 그들의 군 시절 회상이기 때문에 부대 건물이며 연병장, 그리고 매복진지와 같은 세트를 비롯해서 보조출연자와 소품에 만만치 않은 제작비가 책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애초에 살인마를 탈영한 군인으로 설정했기에 K2 소총 하나가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세트를 만들어 부대 건물 안을 전부 묘사하기 위해선 최소 스무 정 이상의 총이 더 필요한 상황이 되는 거였다. 한국 액션영화에서 사용되는 특수모형 소총은 거의 다 외국에서 빌려오는 것이었다. 그만큼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 일인데 다만 세부묘사에 사용하려고 이 정도 작업을 벌인다는 건 무모한 짓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자체 제작으로 채워 넣는 방법도 있겠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인력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국방부 정책상 어느 모형도 현재 군에서 사용되는 소총과 똑같이 만들면 안 된다는 형법이 있었다. 게다가 김 대표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데 쓰일 특수효과에 초점을 맞춰서 제작비를 책정하는 듯했다.
그 장면에 쓰일 세트도 문제가 될 게 뻔했다. 군대가 부정적으로 그려질 작품이기 때문에 실제 부대의 로케이션은 어렵다고 보는 게 당연했다. 사실적인 영화 촬영을 위해 총기류를 일정 기간 동안 빌려주는 일도 허락하지 않는 곳이 대한민국 국방부였다.
애당초 작품을 기획할 땐 군부대의 모습이 이 정도까지 직접적으로 그려질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까 흐름상 꼭 필요한 장면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이 장면을 굳이 화면으로 보여주기는 나부터가 찜찜했다. 무엇보다도 그 지긋지긋했던 군 생활을 떠올려가면서 시나리오를 써야한다는 것 자체가 짜증났다.
커서가 씬85 뒤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길게 탄 담뱃재가 키보드 위로 힘없이 떨어진다. 키보드에 묻은 담뱃재를 손가락으로 툭 쳐본다. 허무하게 부서진 담뱃재가 키보드에 착 달라붙는다.
끊임없이 나를 툭툭 쳐대는 누군가가 너무 많이 있다. 힘없는 나도 언젠가는 저 담뱃재처럼 허무하게 부서져 버릴 것이다. 나를 괴롭혀 온 그들에게 한마디 저항도 하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 말이다.
최홍수도 지금 부서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제대 한 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그들에게 최홍수는 마지막 저항을 해보는 중이었다. 역시 이 장면을 대사로만 처리하기엔 뭔가가 부족했다. 직접적으로 보여주느냐, 아니면 간접적인 대사로만 처리하느냐의 두 가지 선택에서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한다.
또 다시 찾아온 두 가지 선택 중에서 결국 첫 번째로 마음을 정한다. 관객에게 그들의 과거를 보여주자고 결정한 순간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부대모습을 다 보여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 경험상 고참에게 맞았던 곳이 내무반뿐인 건 아니었다. 그들을 밖으로 끌어내면 된다. 군대에서 밥 먹듯이 했던 훈련 중 하나가 매복이다. 한 개 분대만 구덩이에 처넣어도 온갖 사건사고가 벌어지는 게 군대라는 조직이었다. 거기에다 훈련을 하는 날이 토요일이라고 설정하면 고참의 폭력은 더욱더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 자리에 없었던 이봉구는 1박2일로 외박을 내보내자. 소품과 세트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것이다.
나 또한 최홍수와 마찬가지로 매복진지 안에서 맞아본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내 몸을 샌드백 삼아 화풀이했던 그들 중에는 다른 소대 고참인 진수병장도 있었다. 한 중대 내에서 100여명의 젊은 혈기가 함께 살아가기에 그 공간은 턱없이 비좁았다. 살 맞대고 생활하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나가자던 전우애(戰友愛)는 이미 썩어 한줌 흙으로 변한 과거의 유물일 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체험한 군대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 허용되는 기괴한 집단으로밖에 기억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다는 놈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물론 나조차도 어쩔 수 없이 가야했던 곳이기에 26개월이란 시간을 허무하게 소비했을 뿐이지만 그들과 같이 그 허무맹랑한 폭력에까지 가담하지는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일이 벌어진 건 내가 일병을 막 달았을 무렵이었다. 내가 속해있던 연대가 다른 사단의 대항군으로 훈련을 나가게 되었다. 여느 훈련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완전군장을 하고 훈련지역까지 트럭으로 이동을 했다. 해가 떨어진 한여름의 산길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두웠다. 병장 계급의 분대장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저희들끼리 낄낄대며 떠들었다. 그들의 주된 얘깃거리는 외박 온 여자친구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따먹었다는 식의 검증 불가능한 체험담과 버스 터미널 주변에 널려있는 다방 중 어디에 있는 누군가가 끝내준다는 식의 소문 등이 전부였다. 그런 그들과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어깨를 부딪쳐가며 목적지를 향해갔다.
우리 중대가 도착한 곳은 언덕 위의 한적한 저수지였다. 훈련계획에 의하면 우리는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가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은 뒤 후퇴하는 역할이었다. 당연히 진짜 박격포 탄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모든 훈련은 계획된 시나리오대로 이동과 주둔을 반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훈련에서 나와 같은 일개 사병은 시키는 일만 잘 따르면 큰 사고 없이 중대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이미 몇 차례의 훈련을 해 본 나는 고참의 지시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여 일을 해 나갔다. 도착하자마자 텐트를 쳤고 분대 고참들의 안락한 잠자리를 위해 텐트 안 물건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텐트와 차량을 위장하기 위한 나뭇가지를 구하러 상병계급을 단 고참과 함께 근처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공포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길고 묵직한 칼로 나뭇가지를 마구 잘라냈다. 나는 잘려나간 나뭇가지를 재빨리 주우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위장할 재료가 한 아름이 되어서야 우리는 주둔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더운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숲 속엔 냉기가 감돌았다. 걸을 때마다 죽은 나뭇잎이 발에 밟혀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작업을 하는 동안 흘린 땀이 한순간에 말라버렸다. 으스스한 몸을 움츠린 채 주위를 살피며 걷고 있을 때였다. 상병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곤 몸을 숙였다. 당황한 나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고개를 돌려 날 보는 그의 눈빛엔 두려움보다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상병의 손짓에 나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나뭇가지가 축 늘어져 땅에 질질 끌려왔다.
“조용히 와, 이 새끼야.”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그가 말했다.
“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은 좆도, 숨죽이고 저기 앞이나 잘 봐.”
들릴 듯 말 듯한 그의 목소리를 따라 앞을 보았다.
수풀로 우거진 곳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리듬감 있게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은 거친 숨소리에 나는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했던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 숨소리는 분명 두 남녀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상병은 내 어깨를 짚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씨버럴 놈, 냄비를 아주 작살내는구먼.”
그가 부러운 듯 투정 섞인 말투로 말했다.
여자의 절정에 달한 듯한 숨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것은 마치 조잡하게 만들어낸 3류 에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연기보다 몸매 때문에 뽑혀 출연하게 된 3류 여배우의 값싼 신음소리. 수풀이 짧은 순간 심하게 흔들렸다. 슬며시 주위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완전군장차림이었다. 어두워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왼손엔 분명 소총까지 들려있었다. 촌스러운 파마머리를 한 여자는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은밀한 속삭임이 오고 갔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 저 남자가 우리 중대 사람이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근처에 군인이라곤 우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중년의 나이로 군인들이 훈련 도중 주둔하는 곳에 나타나 몸을 파는 아줌마일 게 분명했다. 각 부대엔 반드시 작전지역이라는 곳이 정해져 있어서 웬만한 일이 아니면 훈련 도중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특정지역엔 매년 정해진 날짜마다 군인이 와 주둔을 하기 마련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소문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나는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상병이 내 어깨에서 손을 놓은 사이에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군화에 밟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완전군장을 한 남자가 재빨리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누, 누구야?”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에 상병은 용기를 얻은 듯했다. 그는 내 팔을 붙잡고 수풀 쪽으로 걸어갔다.
“인마, 실탄이나 든 총으로 위협해. 겨우 공포탄이나 장전한 주제에.”
남자를 향해 걸어가던 우리는 우뚝 멈춰 섰다. 상병의 거들먹거리던 목소리는 금세 고양이 앞의 쥐처럼 쪼그라들었다.
“바, 박진수병장님. 여, 여기서 뭐하십니까? 헤헤헤.”
비굴한 상병의 웃음에 진수병장은 총을 거두고 우릴 노려보았다. 남자들 집단에 한 명씩 꼭 있다는 미친개. 내가 속한 중대에서 미친개로 통하는 놈이 바로 그였다.
“너희 둘, 가까이 와 봐.”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리를 불렀다. 몸 파는 아줌마는 그때까지도 자리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너희, 2소대 애들 맞지?”
필요한 단어만으로 질문하는 그의 굵은 목소리에 우리는 잔뜩 주눅이 들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기분 나쁘게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자리에 주저앉아있는 아줌마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얘네 둘은 얼마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녀는 손가락 네 개를 펴서 들어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그 손가락을 봤을 때 분명 거부의 몸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진수병장은 주머니에서 4만원을 꺼내 상병에게 주었다. 얼떨결에 돈을 받아든 상병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진수병장은 턱으로 아줌마를 가리켰다. 4만원이 그녀의 손에 막 쥐어질 때였다.
“전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 않겠습니다.”
놀란 상병이 날 쳐다보았다. 평소에 과묵하다는 평을 듣던 내가 군 입대 이후 처음으로 고참의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이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수병장은 자신이 준 4만원을 확 가로채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는 2만원을 주머니에 집어넣더니 남은 것을 상병에게 다시 주었다.
“짝대기 둘, 잠깐 따라와 봐.”
멱살을 붙잡힌 채 억지로 끌려가던 중에 나는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보았다.
전체적인 인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눈 주위가 시퍼렇게 변해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퍼런 멍으로 눈물 맺힌 두 눈동자는 그러나 슬픔이 아닌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었다. 폭력에 길들여진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돈뿐이었던 것 같다.
한참을 질질 끌려가다가 주둔지 근처쯤에서 내동댕이쳐졌다. 흙먼지가 눈에 들어가 따끔거렸지만 험악한 분위기에 나는 재빨리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먼지 때문에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이런 행동이 그를 또 열 받게 했는지 소총 개머리판이 날아와 내 복부를 강타했다. 배를 움켜쥐긴 했어도 쓰러지진 않았다. 쓰러졌다간 군홧발에 짓밟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는 다시 부동자세로 섰다. 겁먹은 날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소총을 들어 내 눈앞에 총구를 갖다대고 겨냥했다. 본능적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눈 떠.”
아까 전의 용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무슨 얘기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실눈을 살짝 떴다. 총구 안의 시꺼먼 어둠이 보였다.
“바, 박진수병장님. 저, 전…….”
“실명되고 싶지 않으면 아가리 닥쳐.”
공포탄도 가까이에서 쏘면 화상을 입거나 할 수 있었다. 살갗도 태우는데 그깟 눈알쯤이야 우스웠다. 나는 아무런 얘기도 못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잘 들어. 오늘 있었던 일은 아무한테도 해선 안 돼. 내가 제대를 한 뒤에도 마찬가지야. 만약에 나 다음에 제대한 어떤 놈한테서 이런 비슷한 얘기가 들린다면, 내가 널 찾아가게 될 거야. 그땐, 실명 정도로 끝나지 않겠지. 그렇지?”
최홍수가 그때의 내 모습이고, 이남철과 허재남이 진수병장과 도무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그때의 상병이다. 여기에 김철수라는 인물을 더하고 아줌마를 소녀로 바꿨다. 약간 정신이 이상한 그녀를 고참과 동기가 집단 강간하게 되고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최홍수가 실수로 쏜 실탄이 소녀를 죽게 한 뒤 사고를 은폐시켜버린다는, 뭐 그런 설정의 공포영화였다.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 사실을 이제야 영화라는 매체에 담아 얘기하려는 것이었다. 무사히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한다면 진수병장이 눈치를 채고 날 쫓아올까, 아니면 자기 얘기인지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영화나 볼까. 어쩌면 영화 같은 건 보지 않는 성격이라서 이런 게 극장에서 하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쓸지 모른다.
아마 그도 삶이라는 괴물에 쫓겨 살아갈 것이다. 제대 후 이러저러하게 살다가, 어떤 회사에 취직해 어느 순간 대리 혹은 팀장이란 직책으로 승진해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지내던 중, 아가씨 하날 꼬셔 연예라는 걸 했을 것이고, 드디어 내일이면 결혼까지 해 바야흐로 한 가정의 가장이란 호칭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 같은 건 그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진 존재일지 모른다. 그 결혼식엔 정말로 내가 필요 없음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낀다.
엉켜버린 실타래도 시간이 지나면 풀리게 마련이다. 가장 어려웠던 문제를 풀고 나니 어느덧 마지막 장면인 씬125까지 진행이 됐다.
그들 중 최홍수와 그의 여자친구인 김희숙만 제외하고 모두 죽게 된다. 그러나 원혼에 홀린 살인마와의 결투에서 최홍수는 김희숙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게 된다. 드디어 살인마를 없애고 홀로 남은 그녀가 아침을 맞게 되는 장면이 마지막이다. 여느 공포영화와 마찬가지로 여자주인공 한 명만 살려놓았다. 이제 장르적 공식대로 마지막 반전을 만들어야 한다. 죽어버린 살인마를 다시 살려내는 건 너무 뻔한 결말이다. 그렇다고 텅 빈 민박집 마당에 홀로 서있는 김희숙을 보여주면서 영화를 끝낸다면 뭔가 허전함이 남을 것 같다. 그들의 과거를 보여준 절정부분이후에는 정신없이 키보드를 눌러댔다. 내가 설정해놓은 여러 가지 중에서 놓치고 지나쳐버린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마우스를 움직여 지금까지 써놓은 글을 재점검해본다.
박미란, 허재남, 민박집 주인아줌마, 그리고 이봉구, 김철수, 이남철, 최홍수 순으로 죽였다. 박미란, 민박집 주인아줌마, 이봉구, 최홍수는 살인마에게 당했고, 나머지는 모두 원혼 때문에 죽었다. 살인마는 근처 군부대에서 탈영을 한 군인이다. 재수 없게도 원혼에 홀려 사람을 죽이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닌 죽은 시체에 귀신이 들어간다는 설정은 어떨까?
마우스를 밑으로 움직여 마지막 장면이 보이게 한다. 마당에 서 있는 김희숙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원혼은 그녀마저 죽이려 한다. 그러나 자신을 직접적으로 해하지 않았던 사람이기에 김희숙의 눈으론 그 원혼을 볼 수가 없다. 그녀가 원혼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단 한가지뿐이다. 다른 사람 혹은 시체에 원혼 자신이 들어가 움직이는 것이다. 마침 떠오르는 캐릭터가 하나 있다.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 남자. 살인마의 공격으로 배가 뻥 뚫려버린 최홍수의 시체로 원혼이 들어가는 것이다.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자 구멍이 난 배로 창자가 흘러나와 바닥에 떨어진다. 한 걸음씩 다리를 움직여 김희숙에게 다가가는 시체. 하늘을 보고 있던 그녀가 인기척을 느낀다. 두려움에 몸을 떨며 앞을 보는 김희숙. 그곳에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남자친구가 자신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고 있다. 살이 파이고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끔직한 효과음과 김희숙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창 밖을 본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나에게 올 전화는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시간이나 알아볼 요량으로 전화기를 든다.
“잤냐?”
“아뇨. 밤샜습니다.”
“그래? 그럼 초고는 대충 나왔겠네.”
“마지막 장면만 정리하면 됩니다.”
“대충 정리하고 가져와봐. 지금 여덟 시 조금 지났으니까, 열한 시까진 가능하겠지?”
김씨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거침없이 시간을 정해버렸다.
“오후 두 시정도에 가면 안 될까요?”
“투자자가 보기 전에 나도 한번쯤은 대충 훑어봐야지. 그러니까 잔말 말고 열한 시까지 와. 알았어?”
전화를 끊는다. 시간은 벌써 여덟 시가 넘었다. 김희숙의 비명소리와 함께 화면이 검게 변한다. 출연진과 스텝의 이름이 자막으로 처리되어 올라가고, 영화는 끝난다.
파일을 저장한 후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종료한다. 깨끗해진 모니터 화면 왼쪽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 있는 아이콘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마우스를 움직여 가운데에 있는 걸 실행시킨다.
경쾌한 배경음악과 함께 여섯 명의 여자들이 손을 흔들어 날 맞이해 준다. 화면 오른쪽에 있는 다섯 개 버튼 중 <Load>라고 쓰인 세 번째를 누른다. 저장해 놓았던 다섯 번째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나타난다.
여기서 회사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50분 정도다. 앞으로 두 시간은 나와 그녀들만의 몫이다.
마우스를 움직여 화면을 넓게 만든다. 바닷가 백사장에서 가볍게 뛰고 있는 다섯 번째 그녀의 전신이 보인다. 아름답게 균형 잡힌 저 몸매가 이제 곧 내 것이 된다.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눌러 공포탄 한 발을 장전시킨다.
(원고지 매수 : 113.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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