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사냥
- 작성일 2007-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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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사냥
1.
낮은 기와 집 골목이 촘촘하게 늘어진 골목길을 검은 그림자가 걷고 있다. 달빛에 비춘 그의 모습은 일반사람보다 커 보였고 골격이 굵고 옷이 꽉 끼어 근육이 단단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는 땅을 보고 걸었다. 달빛이 흐르는 구름에 가려 간간히 그의 모습이 검게 변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허리에 찬 긴 칼이 건들거렸다. 칼의 휜 능선을 따라 달빛이 가늘게 앉았다. 걸을 때마다 뒤꿈치가 게다짝에 부딪쳐 바닥을 때려 규칙적인 소리가 울렸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이마에 땀이 맺혀 빛이 났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찍어 닦았다. 그는 눈을 올려 뜨고 골목을 훑어보았다. 눈매가 가늘어 지고 여기가 어딘가 묻는 듯한 눈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몽롱한 상태였다. 골목이 담긴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몸에 냄새가 나는지 끙끙 거리며 맡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잠들 시간인지 그 혼자 긴 그림자를 끌며 골목을 통과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이마로 땀이 흐른다. 팔뚝에서 흐른 땀이 손등을 타고 내려온다. 귀를 덮은 긴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머리가 아프다. 귓속에, 아마 신경성이겠지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귀를 후벼봤지만 여전히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인간들이 두려움에 떠는 소리이다.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소리일지 모른다. 두려움에 떠는 사형수들의 울부짖는 소리 같기도 하고 고국의 시장을 떠도는 장사치 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한 웅성거림은 산을 기어오르는 농민들 소리로 바뀌곤 한다. 왜 그럴까? 그는 그 소리를 잊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의 골수에 맺힌 그 소리는 어김없이 이 밤에 그의 뇌를 후벼 파고 있었다. 아니라고 이를 물고 마음을 달래지만 소리는 커져만 간다. 밤새도록 이 웅성거리는 그들 소리에 그는 고통 받을 것이다. 딴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가 그 소리를 잊으면 잊으려 할수록 웅성거림은 그의 혼을 자극한다.
그의 눈동자가 더욱 흔들린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머리 아픈 것이 더해진다. 더위 때문인가? 그는 목덜미를 닦고 조금 벌어진 입안에서 뜨거운 김을 내 뿜었다. 하루살이 떼가 그를 둘러쌓다. 무더운 여름밤이다. 비라도 쏟아지면 좋으련만.
그는 감각을 잃은 짐승처럼 그르렁 거리며 혼잣말로 욕설을 내 뱉었다. 뭔가를 증오하고 짓이겨 버리지 못함은 안타까워하는 욕설이다. 어쩌면 자신을 탓하는 자책의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는 큭큭 거리며 떠오르는 인간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쉬며 뇌까렸다.
“그때 그 자리에 가지 말았어야 해!” 하는 반문이 골목 안에 퍼졌다. 생각보다 큰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에 비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그런 말을 쉽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자꾸 자책에 빠지면 자신은 쓰러지고 말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때 그 상황을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영혼은 깨진 거울처럼 박살이 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가는 실금이 자욱하게 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막다른 골목까지 왔을 때, 그는 깔끔하게 기와가 얹어진 담 아래에 멈추어 섰다. 그는 그 집 앞에서 침을 꿀떡 삼켰다. 머리의 아픔보다 가슴에 팽팽해지며 긴장감이 들었다. 넝쿨 식물이 기와를 타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모기나 하루살이들이 날아다니는 습기 찬 골목이다. 그는 손을 흔들어 하루살이를 쫓았다. 주변을 잠깐 둘러보았다. 멀리 부엉이 울음이 들리고 족제비가 어슬렁거리는 깊은 밤이다. 인간들은 밤의 두려움에 어둠속에 깊게 숨었거나 낮의 고통에서 벗어나 쉬고 있을 시간이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곳은 바닷물 냄새 속에 국화향 은근한 바람을 기대하기 힘든 곳이다. 그는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열어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자신의 장대한 사내다움이 극에 달한 상상을 했다. 자신은 강하고 잡스러운 일에 연연하지 않는 강한 사내임을 느꼈다. 사무라이, 수십 명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는 초원의 사내를 상상하며 그 부딪쳐 튀는 칼의 불꽃들을 호흡했다. 그 생각들이 도움이 되었다. 숨이 뚫리고 시원한 바람이 없어도 참을 수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참을 수없는 불쾌감들이 사라져 갔다. 머리가 여전히 아프기는 했지만 나아지거니 했다.
그의 굵은 손이 담의 기와를 잡고 담을 넘었다. 기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담 밑을 어슬렁거리다 잽싸게 도망을 쳤다. 그는 손에 묻은 흙을 털며 좁은 마당을 지났다. 달빛이 호젓하게 머문 마루위에 올라섰다. 그는 굵디굵은 손마디로 나무문에 댔다. 문이 마르고 가볍게 느껴졌다. 창호지가 단단하게 발라진 미닫이문을 서서히 열었다. 달빛이 안으로 들어가 방안이 밝아졌다. 곧 방안에 있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는 발을 디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아래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오후에 봤던 그 여인이 틀림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이어도 상관은 없지만. 더위 때문인지 이불을 걷고 엷은 옷을 걸치고 마른 발을 포개어 옆으로 누워 있는 여인을 내려 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요염한 자태의 여인이었다. 적당한 키와 까만 머리를 쪽을 튼, 흰 얼굴과 윗저고리로 앞가슴을 꼭꼭 조인 여인이었다. 그는 칼을 내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이 그의 굵은 가슴과 배 허리 다리를 타고 흘러 내렸다.
여인이 부스럭 소리에 눈을 떴다. 가늘고 큰 눈이 떠지며 괴물 같은 사내가 눈에 들어오고 그녀는 심장이 떨려왔다. 방에 스며든 달빛에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고 있었다. 곧 여인의 눈이 떨리며 죽음의 그림자라도 스며든 듯 흙빛으로 변해갔다. 그는 여인에게 어깨를 움찔해 보였다. 여인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중요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거칠게 호흡을 했다. 머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불편함, 마치 자신이 와서는 안 될 자리에 선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등을 돌려 밖을 보았다. 차라리 뛰쳐나갈까? 아니다, 그는 이를 물었다. 부들거리며 손이 떨렸다. 긴 골목을 지나올 때부터 널린 죽음들의 신음과 어떤 쾌락에 쫓아왔다. 그러나 쾌락은 간곳없고 메스꺼웠다. 왜 그럴까?
여인은 가늘게 소리를 질렀다. 그 두려운 비명에 그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이 소리, 그래 이 소리다. 그의 피가 요동을 쳤으며 급격하게 혈압이 올라갔다. 그녀가 뒷걸음 칠 때, 그의 몸을 감싼 마지막 옷이 벌린 다리로 흘러 내렸다. 땀이 흘렀다. 빌어먹을, 더위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는 굴곡진 벌거벗은 몸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두려움에 떠는 여인을 잡아끌었다.
여인의 얼굴이 두려움에 애원을 하듯 일그러지고 버텼다. 그는 손을 끌며 순순히 오기를 바랐다. 그녀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하며 더욱 몸이 굳어지며 반항을 하자 그녀의 손을 비틀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입술을 물고 비명을 질렀다. 안타깝게 그 비명소리는 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떨어질 것 같은 팔에 끌려 땀이 흥건히 흐르는 마귀의 가슴에 구겨지듯 안겼다.
그녀는 거칠게 반항을 했다. 그의 완력에 쉽게 그녀를 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간단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는 그런 그녀에게 문득 화가 나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그녀를 도망 못하게 하고 한 손으로 더듬어 칼을 찾았다. 그가 팔을 잡고 칼을 들어 그녀의 아기 몸같이 부드러운 몸을 두어 대 내리치자 그녀의 반항이 수그러들었다.
그는 더욱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칼로 자신의 머리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골을 쪼개 공기라도 쐬고 싶었다. 그의 몸에 흐른 땀과 여인의 몸에서 나온 땀으로 서로 미끈거렸다. 여인은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짚고 소리 없이 숨을 쉬었다.
그는 여인의 머리를 당겨 바닥에 짓누르며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인이 버티려고 하다가 사내가 칼을 잡는 것을 보고 끌려왔다. 그는 여인의 옷으로 자신의 몸에 흐른 땀을 닦았다.
“아무 생각을 하지 말자! 아무 생각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방안은 마치 짐승에게 잡힌 여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려움에 떠는 여인의 어깨가 보일 정도였다. 여인의 머리에서 땀과 피가 흘렀다. 사내는 무릎을 꿇고 여인을 바로 뉘였다. 칼을 여인이 잊지 못하도록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는 자신이 지쳐 있다고 생각되었다. 생각도 행동도 살인도, 그래 폭력에 지쳐 있었다. 아니 중독되어 있었다. 원치 않는 일이지만 마약과 같았다. 그래, 그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더위가 몰려올 때, 종로 네거리에서 한 사내를 만나 시비가 붙었었다. 비온 후였다. 질척이고 습기가 기분을 불쾌하게 했다. 그는 칼을 들이대며 사내를 굴복시켰지만 그의 형형한 눈빛만은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의 복부에 주먹을 먹이고 옆구리 갈비뼈를 서너 대를 부러뜨려 주저 앉혔지만 여전히 올려 보았다. 얼굴을 얼마나 때렸는지 주먹에서 피가 흘렀고 얼굴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발로 짓이기고 차고 결국은 놈의 등짝을 물어뜯어 피 맛을 보고서야 멈추었다. 놈은 진흙탕에 피와 범벅이 된 채 반 죽음이 되었지만 끝내 그에게 굴복을 당하지 않았다. 이상한 놈이었다. 불쾌한 놈이었다. 어떤 놈들은 서너 놈을 후려쳐도 아이처럼 엉엉 울며 잘못했다고 비는 데 말이다. 놈을 얼마나 팼나 놈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덤벼들었다. 그는 칼을 던지고 치고받고 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무수한 발질과 몽둥이가 쏟아졌다. 잠시 후, 동료들이 들이닥쳐 그들을 흩어지게 하고서야 그가 그 자리에서 살아 날 수 있었다. 그는 동료들에 끌려 병원으로 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스스로 알아먹을 수없는 고함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런 울음이었으리라.
그때 놈의 눈빛을 이 여인에게서 느껴졌다.
소리 지르기를 두려워하는 여인처럼 범하기 쉬운 것은 또 있을까, 가해자보다 더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니 그녀의 침묵 안에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육욕을 채우고 나왔을 무렵, 그 방에는 더는 인기척이 없었다. 여인이 처참한 모습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마 죽을 지도 몰랐다.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끓을 수도 있다. 말들은 그렇게 하지만 설마 싶었다. 아직까지 그런 여인은 없었다.
그는 떨리는 다리로 지친 듯 마루를 내려왔다. 허리에 찬 장도를 철컥이며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좁고 냄새 나는 골목을 비틀 거리며 걸었다. 그의 몸에서 육욕의 냄새가 가시지 않았으며 살기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끔 그런 자신이 미친 듯이 경멸하기도 했지만, 이곳에서 약한 이들을 보면 자신도 주체를 하지 못하고 담을 넘거나 아무 방이나 밀고 들어갔다. 이곳은 그래도 되는 곳이었고 그게 통했다. 이들은 먹잇감에 불과했다.
K는 다음날 말끔한 정신으로 일어났다. 그는 목욕을 하고 조선인 할멈이 차려주는 아침을 먹었다. 그는 아침을 먹고 녹차를 마시며 철지난 타임지나 한성신보를 펼쳐 들었다. 유럽의 전쟁이야기 등 여러 정세에 관한 소식들이 실려 있었다. 특히 한성신보 사설에서 최근 민비의 형태에 관해 강력하게 비판을 하고 있었다. N이 쓴 사설이었다. 그도 그 사설만큼이나 그는 최근 민비의 처세에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신문을 보고 도쿄에서 친구가 최신 번역본이라며 보내준 괴테의 파우스트를 꼼꼼하게 읽었다. 이상하다 싶은 문장은 줄을 그어 자신의 생각을 써 넣었다. 좁은 정원에 햇볕이 일찍부터 들고 공기가 더욱 더워 질 때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오가 되기 전에 집을 나서 한성신보사에 들렀다. 양복이 꽉 끼고 풀 먹인 깃을 신경이 쓰일 정도로 뻣뻣했다. 맑은 날이었다. 모두 바쁜 듯 일을 했지만 몇은 간밤에 마신 술에 취해 아직 얼굴이 붉었다.
그가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보고 있을 때, 친구 C가 다가왔다. 바짝 마른 몸매에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구두가 반짝 거렸다. 담배를 나누어 피면서 그는 K에게 뜻밖의 말을 전했다. 일본 공관에서 거사를 준비 중이라는 말이었다. K는 발은 꼬고 의자에 등을 묻고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희비가 교차하는 곳이야.” C는 그렇게 말을 하곤 했다. 그는 이곳에서 몇 년간 머물면서 글을 쓰고 싶어 했지만, 정치가 불안한 곳이라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건 K도 같은 생각이었다. 둘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점을 공감하면서 가까워 졌다. K도 글을 쓰는 작가로서 조선을 방문해 여행을 하다가 이곳 정치적인 일에 말려들어 좀처럼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C를 만나러 이렇게 한성신보사에 들러 차를 마시거나 본토 신문사에 기고를 하곤 했다. 그 외에 잡스러운 정치적인 일도 했다. 철도회사의 부탁으로 정세나 경제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중년 R이 차를 들고 들어 왔다. 그는 둘이 무슨 이야기를 소근 거리는 지 알아차렸다. 아침부터 사무실 안에서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거사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는 K가 있는 것을 보고 못마땅한 눈치를 보였다. 살집이 두둑하게 찐 그는 젊은 조선계집을 끼고 살고 있었다. 그녀의 눈웃음에는 개기름 질질 흘렀다. 한번은 그녀가 신문사에 찾아와서 마치 본국의 처 행세를 하는 것에 화가 난 K가 발로 옆구리를 걷어 찬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옆구리를 안고 쓰러져 사무실이 떠나가라고 울부짖었다. 그 후 R은 K를 적을 대하듯 싫어했다.
“거사라니, 과연 일본인다운 생각이군.”
K는 R을 보고 입맛을 다시며 말을 했다.
“자네는 좋겠어. 궁 안에 들어가면 계집을 마음껏 후려도 된다, 이 말이지.”
K는 그 소리에 속에서 부글거림을 느꼈다. 작달막한 그의 키를 더욱 작게 머리를 내려치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에 대해 헐뜯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그것은 말이지.”
그는 R앞에서 허세를 부렸다. 그의 친구 C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살그머니 웃으며 구경을 했다.
“그게 누군데? 민비?”
못마땅한 사내 R이 그에게 비꼬듯 묻는다.
“민비? 땅에 하나밖에 없는 욕망에 뒤틀린 여인, 권력의 맛을 알고 피 맛을 아는 여인, 밤마다 욕망을 주체 못하고 비명을 삼키고, 가슴에 품은 코를 찌르는 사향 냄새가 여기까지 나지 않나? 꼭꼭 숨겨져 저 난공불락의 탑 속에 갇혀 극에 달한 허세를 부리고 있는 여인이지. 내가 가장 밥맛으로 여기는 여인이 그 여자야.”
“이번 일이 자네 성에 관한 욕구나 채우는 그런 일은 아니네. 이건 중요한 일이야. 전쟁이 날 수도 있는.”
제법 의젓하게 목소리를 다듬어 가며 R은 충고했다. 그 말에 K는 의자를 당겨 그와 가깝게 다가가 앉았다.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R에게 침이 튀길 정도로 다가서 말을 했다.
“전쟁, 그거 참 좋은데. 과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 앞에서 그런 헛소리 좀 하지 말아. 누가 전쟁을 일으킨단 말이야. 자기 군대도 없는 이미 허수아비 같은 나라가 대 일본에 대항해 전쟁을 해. 저 썩은 경복궁이 보이지 않아? 여태 그렇게 말해왔는데 무슨 호들갑을, 속보이게 시리.”
“정세는 그리 간단하지 않네. 지금 민비가 우리를 내 쫓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단 말이야. 자네가 여자나 후리고 다닐 때 말이지, 우리는.”
그는 R의 말을 다 듣지 않고 끼어들었다. 마치 다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이라는 듯.
“여자나 후린다고? 정말 자네의 대가리를 이 손으로 뭉개고 싶군. 자네가 내 욕구에 대해서 알기나 해? 이 가운데 다리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악몽 같은, 검은 뭉치의 욕구에 관해서? 자네가 여기 앉아서 펜대나 굴리며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개수작을 떨고 있을 때, 나는 목숨을 걸고 칼을 휘두르고 있었단 말이지. 누굴 위해서? 바로 자네 같은 식자들을 위해서지. 짚단이 베려고 칼을 휘두른 게 아니란 말이지. 그때 내가 시체들 틈에서 뭐를 깨달은 지 않나? 인간이 지겹더군, 바로 너희 같은, 강한 척하는 쓰레기들. 알고 보면 허접하거든, 늘 도망칠 궁리나 하고 뒤통수나 때리려고 연구에 연구를 하고 살지. 진짜 내가 먹고 싶은 여인은 자네들이 끼고 사는 그런 잡년들이란 말일세.”
키가 작은 콧수염이 멋지게 난 R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일어나 피하려다 다시 앉아 물었다.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막말을 참을 수가 없군. 자네는 미쳤어. 다 안다구. 그리고 민비는 그렇게 단단한 년이 아니야. 그녀 뒤에는.”
그가 소리를 치자 다른 사람들이 기웃거리며 그 둘이 있는 방에 들어 왔다. K는 그의 말에 개의치 않았다.
“러시아가 있다고. 전쟁은 조선이랑 하는 게 아니라고.”
“그렇군! 러시아, 러시아, 청나라가 있지. 맞아, 전쟁은 조선 것들 하고 하는 게 아니지. 잊었어. 내가 너무 계집을 쫓아 다녔나봐.”
K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며 낮고 부드럽게 말을 했다. 그는 창가에 서서 잠깐 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피웠다. 친구 C가 불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하던 말을 이었다.
“현명한 당신들은 글을 쓰고 우리는 가서 기관총으로 쏴 대면되겠군. 다 죽이면 되는 거야. 또 당신들은 글을 쓰겠지. 이렇게 했노라고. 그리고 또 저렇게 해야 겠다고 말이지. 그리고 틈틈이 기생집에 가서 끼고 놀아보는 거야. 싸움이 끝난 곳에 가서 비통한 심정으로 글을 쓰고 점령자로서 사명감과 흥분을 느끼겠지.”
“이건 감상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일세.”
“감상? 그렇지, 내가 전쟁을 하기에는 감상적이지. 자네들과 달라. 내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을 때, 내 애인은 울고 있었네. 자네들에게 그런 순수한 영혼을 말한다는 것이 부끄럽지만, 정말 참을 수없는 역겨움이 막 일어나는군. 난 그녀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난 한 번도 그녀에게 수치심을 안겨 준 적이 없어. 근데 내가 작년에, 그 빌어먹을 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 지독한 피비린내나 밤마다 나지. 난 그 농민반란 때 한 인간이 아니라 악마가 되어 있는 것을 본 거지. 어떻게 인간이 백정처럼 그리 살육을 할 수가 있나? 난 그 악마가 되어 멈출 수가 없었네. 계속 살육을 해야 했지. 왜 그랬을까? 난 너희같이 그런 정치욕에 사로잡힌 놈들의 면상을 보는 순간 문득 참을 수 없단 말일세, 사람이 얼마나 악랄해 질 수 있을까? 내가 왜 그런 경우를 당했나? 바로 당신들과 같은 피를 가졌기 때문이지. 내가 누굴 위해서 그랬을까?”
“천왕을 위해서 아니면 자네를 위해서겠지. 누구라도 그럴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하겠지.”
R이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했다. K는 가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멈추다 다시 자리에 가서 앉아 발을 꼬며 말을 꺼냈다.
“그래 그렇겠지. 대일본제국을 위해서 말이지. 하지만 지겹지 않나? 친구! 천황도 일본도, 정치도 인생도. 오늘 말이야. 내가 어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어제 낮에 시장을 돌아다니는데, 왜 있지 않나 어떤 한 여인을 딱 본거야. 더위가 다 가시더군. 어제 밤에 그녀를 찾아 갔지. 한창 옷을 벗겨 잡아 틀고 있는데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군. 난 인간이 아니야. 이미 악마가 되어 버렸다고. 아침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나? 자네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지. 왜 그런지 아나? 그 잘난 천황에게 충성을 하려다 이렇게 됐네. 고깃덩어리처럼 늘어진 인간들 틈에서 그들의 내장을 후려 파다 보니, 이제 아무 느낌도 없어. 그저 주체 못하는 욕구들만 미친 듯이 일어나곤 하지. 내가 그런 폭력을 즐기는 줄 아나?”
K는 깊이 숨을 들여 마시며 오래된 술을 음미하듯 웃음을 지었다.
“자네들이 뭐로 보이는지 아나. 미안한 말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가끔 시체로 보이네. 살아있는 시체들, 생기가 없지. 그저 움직이게 다인. 물어뜯고 싶어 미칠 지경인 내 마음을 아나?”
그는 다리를 벌리고 탁자를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앞의 사내들은 곧 자리에서 뜰 채비를 하였다. 그의 몸에서 막 죽은 자의 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 사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같은 동료가 아니었다면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네는 병적인 데가 있네. 뭔가 집착을 하면 끝을 보고 싶어 하는, 사실 여기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네. 역사 이래로 늘 그랬지만, 지금은 새로운 세기가 열리는 시대네.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네. 그리고 그곳에 불가피한 살육과 전쟁이 있네. 그리고 확실히 자네 말대로 작년 반란 때 가지 말았어야 했네. 가끔 자네가 몸집에 비해 예민한 정서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혹 여기 풍토가 맞지 않는 거 아닌가? 우리는 다 비슷해. 여기에 있는 게 사명감에 들떠 있는 친구도 있지만 괴로운 일도 많네. 우린 여기에 지식인의 신분이긴 하지만, 정치와 군인의 역할도 가끔 해야 해. 자네는 확실히 열이 있어 보이는 군.”
나이가 많은 N이 말을 했다. K는 고개를 끄떡였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머리가 지끈 거렸다. 어제 일들이 떠 떠올랐다. 그녀는 생각보다 몸집이 작았고 요염한 작태는 없었다. 그저 살이 있는 육신이었고 땀 냄새가 너무 났다.
R은 하품을 했다. 밀린 기사를 써야 했다. 그리고 곧 일어날 일들에 대한 자기 할 일을 해야 했다.
C가 허리에 두 손을 찌르고 다가와 은근하게 웃으며 K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마 전, 그녀가 일본에서 온다는 것을 못하게 편지를 했네. 여기서 다른 사람을 만나 산다고 했지.”
K는 양손으로 피곤해 보이는 볼을 문지르고 머리를 감쌌다.
“알아. 들었잖아.”
“그랬나? 가서 술이나 마셔야겠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일어났다.
그날 밤도 더운 비가 내렸다.
밤이 되자 비가 오는 진탕 속에서 K는 싸움을 벌였다. 진고개 앞 파성관에서 그는 조선인 사내 둘을 발로 이겨놓고 피투성이가 된 채 한 어린 기생을 어깨에 메고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땀을 흘리며 욕구를 채웠다. 어린 기생이 감당을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더 소리를 지르라고 그녀의 가랑이를 벌리면서 덜 자란 털을 한 움큼 뜯어냈다. 문밖에 다른 기생과 손님들이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N이 근처에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 그의 등짝에 총을 대고 그만하라고 소리를 쳤다. 그는 총구 앞에서는 이빨을 드러냈고 웃었을망정 반항을 하지 않았다. 그가 실룩거리며 옷을 반쯤 걸치고 파성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조선인 사내들이 피범벅이 된 얼굴로 여러 장정을 모아 막 들이닥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일본경찰 서넛이 총을 들고 그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희 들은 죽은 시체들이야. 감히 어디서 눈알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거야. 이런 개자식들!”
그가 뛰어나가 한바탕 싸움을 벌이려 하자 경찰이 그를 말렸다.
“그렇게 떼로 덤비면 이길 것 같아. 사람이 죽는 것이나 봤어. 망할 자식들, 농사꾼만도 못한 쓰레기들 같으니. 너희들이 양반이야. 이런 망할, 너희 왕에게 가서 고자질을 하란 말이야, 이 개자식들아. 영감과 계집의 품에서 꼼짝 못하는 것들.”
사내들은 눈에 불을 켜고 K가 빗속으로 고함을 치며 끌려가는 것을 보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조선인들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농민 반란을 잠재운 이후 그들 주변에 시시콜콜하게 좋지 않은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소문에 남쪽으로 일인들이 장사를 나갔다가 맞아 죽었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궁에서도 일본인들 때문에 무슨 방도를 내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왕후가 러시아인들과 손을 잡고 자주 궁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K는 그러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광기를 드러내고 무슨 일이고 저질렀다. 이번 파성관 난동도 그렇다. 그 일이 공관까지 흘러 들어가 편집장이 보고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다.
K는 그 일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어떤 운명적인 힘이 의해 역사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본국에서는 자신 못지않게 어떤 광기로 여러 이론을 내세워 대륙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언제 시작하는가가 문제였다. 조선이 가까이 있을 뿐이었다.
2.
이노우에는 대나무밭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극도로 흔들렸다. 명성황후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본국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많은 그림이 스쳐지나갔다.
“여우같은 년!”
대나무 밭이 붉게 물드는 것으로 보였다. 저녁 황혼치고는 지나치게 붉게 타올랐다. 찻잔을 들어 올리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싶었다. 대나무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늙은 하녀가 물을 뿌리고 있었다.
“기어이 명을 재촉하나? 천한 계집년.”
이노우에는 며칠을 두고 머리가 찌근거렸다. 단박에 정리해야 할, 미개한 이곳을 움켜쥐는데 이렇게 시간이 걸리고 있다는 게 한심해 보였다. 본국에서 자신을 보고 험담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조선이란 곳이란! 왕 같지도 않은 것들이 집안싸움을 하고 있는데 봐주는 것도 지겹다. 작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호들갑을 떠는 녀석들을 구해 주었건만 이제 훈련대를 해산시키고 나가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러시아인들이 철없이 날뛰는 조선 것들 뒤에 서서 부축이고 있다. 일 년 내내 청나라를 물리치니 문득 러시아가 발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 실상 아무 능력도 없는 여우같은 계집이 저울질을 하면서 자신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힘없는 자들이 붙어먹고 사는 게 어디까지 가겠는가! 일본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와 맞서면 어찌되는지 보여주겠다는 건가!
“배은망덕한 년!”
눈을 지그시 감고 차를 마셨다. 뜨거운 차가 뱃속으로 스르르 흘러들어갔다. 흥분하지 말자, 냉정해야 한다. 일을 그르칠 수가 없다. 하지만, 더 이상은 뭔가를 수를 내지 않으면 본국으로 소환을 당할 것은 뻔하고 개인적인 일 뿐이 아니라 다른 놈들이 말뚝만 박아도 땅이 되는 조선 땅을 핥아 대는 꼴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한성일보사 사장과 차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우리 같은 나이 먹은 사람들은 말이지 아무래도 많이 생각을 하지 못하나봐! 조금만 생각을 해도 머리가 아프니 말이야.”
그는 만연의 웃음을 띠며 무슨 생각 속에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성깔도 못되거든. 남들은 나이가 먹으면 부드러워진다고들 하던데. 난 갈수록 더하니. 누가 조금만 자극을 줘도 화가 나. 아무래도 무골에 가까운 가 봐!”
그는 숨을 골랐다.
“본국에서 나에게 차나 마시고 대나무나 보러 여기에 나를 보냈겠나?”
이노우에는 혼잣말로 음미하듯 말을 했다. 아다치 사장은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신문사의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 압박감을 느꼈다. 공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가 있었다.
“조선에 공을 들인 것이 얼마나 되나? 조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이것이 조선과 우리의 운명이 아니겠나! 자네 같은 지식인은 잘 알지 않나?”
삼십대 초 아디치 사장은 깡마른 볼을 실룩였다. 이노우에는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비비며 뒷짐을 지며 걸었다. 그는 손을 풀고 서서 손을 보더니 혀를 찼다.
“손가락이 말랐어. 신경을 너무 써서 그런가? 며칠 전에는 놀랐다니까? 흰머리가 생겼더군. 전쟁을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그래 차라리 전쟁이 속 편하지. 여기 날씨는 조금 선선하군. 본국보다 나아! 말년에 이곳에서 편하게 보낼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그는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문가에 서서 밖을 보았다.
“전쟁은 우리 같은 정객이나 군인만 하는 것이 아니네. 부담을 주는지 모르겠군. 자네같은 젊은이가 여기에 있으니 그나마 말벗이라도 되는 군.”
이노우에는 조선에 오자마자 조선 왕족들의 신변 파악과 정세에 신경을 썼다.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상황은 불리했다. 민비같은 여인은 그가 살아오면서 보질 못했다. 특이한 성격에 야망을 가진 여인으로 비쳤다. 어떤 도도함으로 꽉 뭉쳐있으며 자기 집착이나 생각이 너무 강했다. 무엇이 그녀를 저토록 영악하게 만들었지 는 모르지만, 대국의 심리나 정세를 명확하게 바라보는 데는 답답할 정도로 자기 주관만 믿고 있었다. 유능한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왕족이라는 특이한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와 심리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자기 궁 밖의 흐름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지도 못하고 힘도 없었다. 그저 힘있는 장사치들 앞에서 흥정만 붙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귀족들인 줄 안다니까. 푸하하하! 아직 가마에서 내리지도 못한 것들이 말이야.”
이노우에는 호탕하게 웃었다.
귀족들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미개한 것들. 애초 이들은 어쩌면 속국이 더 편하게 생각하는 작자들인 것 같았다. 파벌은 있어도 어떤 원칙이나 내용이 없는 인종들이었다. 마치 고전 마을을 보존해 놓은 나라다. 그래 저 궁전 이래 봐야 동네 골목대장들인 것이다. 보면 볼수록 그랬다. 마치 기생처럼 옷을 차려입고 챙겨주기를 바라고, 그게 안 되면 몸이 달아오르는 것과 같았다. 싸우다 죽은 농민들이 차라리 기개가 있어 보였다. 그들이 모든 것을 꿰뚫는 듯했다. 조선의 운명이 어찌 될는지 그들만이 깨닫고 있었다. 그럴 테지 어찌됐든 영향을 받을 직접 당사자들이니.
만약 민비를 처단 했을 때, 저항이 있다면 농민인 그들에게서 나올 것이 뻔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전쟁을 통해 정권을 잡기도 하는데 그것에 비하면 무혈점령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이 조선에는 너무 많은 내조자가 있지 않나!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민비를, 왕후를 처단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신을 자제했지만 문득 그녀의 도톰한 얼굴과 야망에 서린 눈빛이 은근하게 보일 때는 어떤 치욕이 느껴졌다. 무사의 치욕이었다. 무사의 얼굴에, 칼에 침을 뱉는 여인을 어찌한단 말인가! 훈련대를 없애라고, 감히 농민 반란도 다스리지 못한 것들을 정리해 주니까 이제 어렵사리 키우는 훈련대를 정리하라고 대놓고 강요를 한다니.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여자다. 감히 나에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칼을 잡았다 놓기를 몇 번을 했던가! 감히 여인에게 모욕을 언제까지 당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곧 이노우에는 입국을 하고 미우라를 후임으로 내 보냈다. 그는 단순한 후임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을 실행에 옮길 당사자로서 조선에 들어왔다. 미우라가 들어온 이후 한 달 만에 이노우에는 다시 들어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여우사냥이란 작전은 돌입된 것이다.
삼 개월 후, 이노우에의 결정대로 그의 하수인들이 궁에 쳐들어가 민후의 목을 베고 시신에 불태우는데 성공을 한다. 한 여인을 베고 화장까지 한 것은 양심에 꺼리는 일이었지만 그건 인간적인 일 이전에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늘 어쩔 수 없었었고 회상을 했다. 긴 세월이 지나 그는 그때 궁을 들어갔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 그에게는 잊을 수없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 꺼리였다. 그는 제자들을 앞에 두고 그때를 회상하곤 했다.
그는 종종 강의를 나가 그때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모한 작전이 들어맞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세 가지는 하늘의 뜻이었다. 첫째, 쉽게 궁 문이 열린 것이고 시위대가 도망을 친 것이다. 그게 그럴 수 있나? 어느 나라에서 그게 가능한가? 이미 조선이 국운을 다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어렵사리 왕후를 찾은 것이다. 사실 그 자체로도 얻은 것이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운명 이상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 아닐까? 사람들을 보내고, 연락을 받았지, 그래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는구나 싶었지. 묘한 생각이 들더군. 그래 최선으로 모든 계획이 맞아떨어진 것이야. 가장 두려운 것이 민중들의 보복이었지. 신하들이며 모든 이들이 들고일어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생각보다 잠잠하더군. 있을 수 있는 작은 소요만 있었을 뿐이야.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 난 민비를 쓰러뜨렸다는 말을 듣고 곧 불을 태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소각을 시켜야 누구 짓인지 모를 게 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그 또한 별일이 아니었지. 조선인을 이해할 수없는 여러 가지 점 중의 하나가 그거야. 왕후가 죽었다는 것, 살해당했다는 것, 죽어 불에 탔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는 차라리 그곳에서 그들의 손에 맞아 죽고 전쟁이 일어났으면 했지만, 너무도 평온하게 받아들였지. 인간적 분노, 그것만이 있었지.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모든 감정을 감당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지.”
“후회하지 않습니까?”
한 안경을 끼고 강연을 듣던 청년이 물었다.
“젊은이, 이런 생각이 들어. 사람에게 성격이 있고, 자질이 있고 운명이 있듯 나라에도 그런 것이 있나 싶어. 자, 보라고. 늘 굽실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지. 조선인들을 때려 보았나? 몸집은 우리보다 배가 큰 것 같은데 세워놓고 두드려 패면 맥없이 맞는다고.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조선이 바로 그래.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들은 염치가 없어, 내가 보기에는 그래. 자네가 보라고. 가까이에 있으니, 난 저 땅이 남의 땅 같지가않아, 시대가 중요한 것은 아니야, 언제고 저 땅은 내 땅, 아니 일본인이 가지게 될지도 몰라. 안 그래? 그게 조선의 운명 같아. 그들에게는 정치사상이 필요치 않아. 그것을 이해할 유전인자 자체가 없을지 몰라. 왕후의 죽음은 단지 이야깃거리일 뿐이지. 지나가버린, 단편적인 분노만 있을 뿐, 누구나 스스로 그걸 말하지 않기를 원해. 가끔 그들에게는 무엇일 필요한 것인가를 잊을 때가 있어. 우리와는 다른 그들이지. 그들에게는 다스림이 필요하지. 내 그들을 겪으면서 터득한 지론일세.”
“그날 궁에서 고종을 봤나요?”
“봤지.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지 두려운 게 없고, 무사들이 왜 그토록 정공법을 최고로 치는지 알 것 같더군. 나는 고종을 찾아가 우리 일이 아니라고 했으며, 심심한 위로를 했지. 고종은 두려워하고 있더군. 왜 두렵지 않겠나? 죽음보다 더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생존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지. 그의 뒤편에 선 신하들은 아예 자초한 일이 아니냐 하는 자들도 있었지. 염증, 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곳이 싫더군.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어. 나는 그저 무사일 뿐이었나 봐! 곧 나는 본국으로 송환되었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 나는 그날부터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측은한 생각이 들었지. 나도 왕도 조선인들도. 그뿐일세.”
“이해 할 수가 없군요.”
“우리가,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나? 칼을 뽑고 찌르는 거지. 닥치는 칼을 어쩌겠나. 그 불쌍한 사내, 고종은 자기 처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지. 이 얼마나 이해 할 수없는 일인가! 군왕이란 작가가 말일세. 왕후는 시녀복을 입고 있었다더군. 낭하를 뛰어 가다가 잡혀 밟히고 칼에 난자를 당했다고 해. 난 가끔 꿈속에 낭하를 달리는 여인을 보곤 하지. 그녀는 어떤 운명을 가졌을까? 그녀의 운명을 우리가 이해 할 수가 없지. 그저 그런 권세를 풍미한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주변의 정세가 너무 강력했네. 조선이 500년을 버텼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잘 버틴 것이 아닌가?”
“불을 태운 것은 심한 것이 아닐까요?”
이노우에는 그 질문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강연장이 숙연해 지고 그의 웃음이 길게 늘어졌다.
“자네 전쟁을 아나? 군인을? 나는 정치가 이전에 군인일세. 의전이나 행정보다 전투에 익숙하지. 이건 전쟁이네. 어떻게 이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 자체가 중요하네. 왜냐 하면 다시 하면 되는 토론이나 쓰모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기왕에 하려면 더욱 잔인하게 더욱 강하게 해야 하네. 난 그렇게 배웠네. 내 불만이 지금 대 조선정책이야. 지금보다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저들이 지금은 숙이고 있지만 반드시 일어날 걸세.”
이노우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받았다. 그는 스스로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3.
N은 피로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한성신보에 출근을 해서 나무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정리하였다. 신문사에서 원고를 마무리 하던 N은 당일 날 그 소식을 들었다. 거사가 곧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있었지만 당일인지는 전날 알았다. 그렇게 날이 갑자기 잡히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그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를 번역하고 있었기에 최근 돌아가는 상황에 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공사관 서기나 부무관이 인천으로 갔다는 것도 흘려듣고 있었다. 그들이 왜 갔다가 다시 거사 전날에 온 것을 잘 알지 못하였다. 거사 전날도 밤새워 원문을 번역하고 있었다. 여우사냥이라! 이름을 그럴듯하게 지었다. 확실히 서정적이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한 작전 이름이다. 누가 지었을까 생각을 해봤지만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건 멋진 이름에는 분명하다.
그는 출근을 하면서 번역물을 보자기에 싸서 선반에 올려놓았다. 어쩌면 이 ‘안나카레리나’ 를 번역한다는 것이 너무 무모한 짓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하고 싶었지만, 이제 첫 장을 번역하고 있었다.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몇 년이 가든 끝까지 하고 싶었다. 그는 손을 얹어 원고지 뭉치를 느껴보고 싶었다. 살아있는 주인공 여인의 거친 호흡과 맥박이 느껴지는 듯 했다. 어떻게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번역이라는 길을 통해 톨스토이의 감정을 읽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그는 조선의 사찰과 민간신앙에 관해 연구를 하고 있었다. 책들과 자료들이 그의 서재에 빼곡했다. 그는 방문을 닫고 나오면서 그의 그림자가 아쉬운 듯 길에 방안으로 늘어져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고 서 있었다.
정치란 뭔가? 러시아와 민비의 결탁, 그녀는 왜 그토록 일본을 배척하려 하는가? 어차피 일본이 아니면 러시아고 러시아 아니면 청이 조선을 그냥 놔두지 않는데,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다른 나라들이 일본보다 좀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는가?
N은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오전의 여러 가지 정리를 하고 총기를 받고, 배치를 받고 있을 일에 관해 지시를 받으면서 여러 생각이 오갔다. 이곳에 오려고 배를 탔을 때 이 일을 예상 했었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늘 정치적 위기의식 속에 조선을 돌아다니며 연구를 하고 정치적 기사를 쓰고 정세에 관해 토론을 하면서 시간을 잊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계절이 바뀌면 고향에 관한 묘한 향수를 느끼곤 했지만 어느 덧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은 늙기도 했지만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곳이기도 했다. 일본본토에는 없는 많은 어떤 의지가 담겨 있는 곳이다. 대륙으로 가는 초입이고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열렬히 갈망하고 있었다.
N은 정치가들보다 민중들을 봤다. 젊은 유학자들은 새로운 것을 미치도록 열망하고 있었으며 뿌리 깊은 봉건사회 속에서 거듭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젊은 친구들과 토론하기를 좋아 했다. 밤새 하기도 했으며 함께 그들의 정치 구조에 관해서 논의하기도 했다. 근래에 있었던 정치적 사건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봉건사회의 구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들을 뒤로 하고 그들의 왕후를 사냥하러 나가야 하다니. 그는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10월 7일 저녁 사냥을 위한 출정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N도 우울한 기분으로 나섰으나 점차 그들과 동화되어 갔다. 단순한 인정이 아니라 어쩌면 이것이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자 차츰 취기가 올라왔다.
동료들이 술에 취하자 차츰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그럴 수록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아 취기가 올라오게 했다.
가끔 선택을 해야 한다. 개, 개새끼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보다 못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그럼 나는 무엇을 되어야 하는가? 쓰레기만도 못한, 아니 그보다 못한 개 뭐 같은, 닥치자! 오늘, 그래 오늘 못 마시는 술을 마시고 있다. 차라리 독배를 마시지 못할망정, 광기에 젖어 피에 굶주린, 독배보다 못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칼을 베어 물, 그런데 저, 망할 새끼는 뭐한 건가? 지금 숙녀를, 아니 기생 계집을 옷을 벗기고 있지 않은가? 저런 개만도 못한 새끼, 저런 버릇은, 이 상황에서, 그래 무슨 짓인들 못 하겠는가? 독배보다 못한, 이 잔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잠시 후면, 그래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추운 날씨. 차가운, 이국적인, 이국이 아니던가? 저 빌어먹을 자식, 기억이 여자를 울리고 마는군. 마치 계집의 가죽을 벗겨도 아무 죄가 없을 것처럼, 불쌍한 기생. 모두 오늘 밤은 짐승이 되고야 말겠지. 저 자식 우는 여자를 때리는군. 마치 당장에 성욕을 풀지 못해 미친놈처럼 여자의 살갗을 꼬집고 발갛게 때리고 있어. 시끄러워. 미친 새끼들. 앞에 있는 저 새끼는 이 상황에서 학문을 말하고 있어. 플라톤이 어쩌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쩌고. 벌써 두 시간째 떠들고 있어. 바로 내 턱밑에서 저럴 게 뭐람. 술도 올라오고 몸을 주체하기 어려운데. 이곳을 나갈 때쯤에 이 술을 다 깨야 할 텐데. 노래하는 놈은 또 뭐고. 오늘이 며칠이지? 내일 모래. 손님이 오기로 했는데. 그래 그녀가 오기로 했지. 이곳까지 나를 보고자. 그런데 여기서 술상을 놓고 기생이나 끼고 별 시답지 못한, 악마들끼리 모여서 작당이나 하고 있다니. 아니지 작당이 아니지. 오늘 이 일이 아니면 저 작자 말대로 모든 것이 허사일 뿐이지. 학문, 이 멋진 삶의 의미도 정치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거지. 거사를 하지 못하고 학문도, 내 생명도, 지금까지의 선택도 의미가 없어지겠지. 애초 이게 아니었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어. 후덥지근하군. 모기에 파리에, 이년은 내일 무슨 일을 일어날지 알고 이렇게 술을 따르는 걸까? 알 수가 없지. 나도 모르는데 그걸 이들이 알 수가 없지. 오늘 새벽만 잘 넘어간다면, 그래 그런다면 모든 게 달라질까? 아닐 수도 있지만, 저놈 말대로 어쩔 수 없는 궁극적인 선택인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정치. 학문이고 나발이고 결국 정치적인 의도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거지. 소설도 쓰고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불법도 공부를 해야 하는데.
중년의 N은 술상이 즐비하게 차려진 술상을 긁어대며 턱을 괴고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주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떠들고 노래를 부르고, 계집을 더듬는 놈이 있고, 학문을 지껄이는 놈들이 있었다. 모두 취해 있었고 오늘 이 현실을 잊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로 더 긴장이 되는지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거사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오늘 자신들의 일을 생각하고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될지 모르면서 말이다. 그들 틈에 책임자격인 사내는 술을 마시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만 믿고 있었다. 사실 모든 책임은 그에게 있었으며 이 일을 본국에서 명한 것 이상으로 일을 처리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성공한다는 장담은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못한들 대수란 말인가! 본국으로 송환 정도만 떨어지고 자신은 이곳 인간들이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일은 정공법이 최고였다. 누군가 자신의 목숨에 칼을 들이밀 때, 무사들처럼 정면에서 적이 칼을 뽑기도 전에 배를 가슴을 내밀어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무사이다. 다음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계획대로 된다고 아무것도 장담을 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자신의 의지대로 일이 될 것이라는 느낌은 왔다. 큰 줄기의 일이 될 것 같았고 목표처리에 관해서는 그때 가서 판단하면 될 것이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술 냄새가 그의 옷에 배겨왔으며 식자들인 젊은 친구들이 흔들거리며 잘 놀거나 혹은 N처럼 깊은 고뇌에 빠진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 충분히 자신들의 처지를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일을 잘할 것이라고 믿었다.
파성관의 연회의 자정까지 이루어졌다.
자정이 조금 넘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파성관을 나왔다. 화장실에 다니는 자들이 많았다. 모두 초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기들을 확인하고 마음가짐을 다시 했다.
대부분 술이 깨기 시작을 했으며 10월의 추위에 약한 자들은 옷깃을 여미었다. N은 화장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시간이 어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잘 지나갔다. 회중시계를 꺼내 보자 곧 1시가 되어 갔다. 그는 불안했기 때문에 긴 칼도 허리춤에 차고 가슴에 권총도 찼다. 광화문 쪽을 향해 쳐다보는데 낮은 궁들이 환영처럼 어둠 속에 펼쳐 있었다. 칼이 가볍게 느껴졌고 끝이 끌리는 듯했다.
“오늘 무사 같아요.”
문 앞까지 따라온 자신을 잘 따르던 어린 기생이 어눌한 일본어로 애교떨듯 말을 했다.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기생이 아직 덜 여문 가슴을 내밀며 목에 손을 걸고 안기었다. 보드라운 몸살이 몸에 비벼지면서 여인의 향인 분내가 깊게 빨렸다. 여인의 몸 냄새에 일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문득 인천항으로 들어온다는 옛 애인이 생각이 났다.
그는 그녀의 쳐지는 몸을 만지면서 힘껏 끌어안아 보았다. 그리고는 머릿속에 칼을 들어 이 년의 몸을 쳐대는 상상에 빠졌다. 피가 솟구치고 뒤로 자빠지는 몸체를 아래서 쳐다보는, 그는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짐짓 자신의 칼을 드는 모습을 자각하고 깜짝 놀랐다. 살의, 자신은 작가가 아니던가! 칼을 차고 총을 찼더니 여인의 몸이 살갑게 느껴지지 않았든가 하고 놀라웠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놀라면서도 되풀이되었다. 짧은 순간에 일어난 느낌과 생각들이었다. 그 계집의 허릿살을 꽉 움켜쥐자 앙칼진 소리를 하며 떨어졌다. 이외라는 눈빛이었다. 그는 그 눈과 마주치자 눈을 돌렸다. 얼굴이 붉게 달구어졌다.
그의 주변에서 쳐다보고 있던 젊은 친구들이 정력도 없다더니 주책없다 싶은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N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의 동료인 기지와 작가들을 따라갔다. 10월의 찬바람이 목덜미를 싸하게 어루만지며 자신의 이성을 일깨웠다. 파성관을 하나 둘 나가면서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광화문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대원군의 가마를 보았다. 가마 위에 앉은 작은 몸집의 대원군도 보았다. 노인의 눈은 겁먹고 있었다. 세상의 영욕을 맛본 그인지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시체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가 뒤를 둘러보다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왕족이며 왕의 아버지라는 작자가 저런 초라한 몰골을 가지고 자기 궁전 앞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차가운 날씨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지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거의 새벽 3시가 되었다.
잠시 후,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으며 궁전을 지킨다는 작자들은, 대원군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그건 N, 그의 생각이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미 모든 것은 그렇게 짜여 있는지 몰랐다. 이노우에 공사가 모든 일을 궁 안으로 밖으로 이미 다 그렇게 만들어 놓았고 설사 오늘 일이 잘 못 되더라도 차후 방안이 되어 있을 수 있을 거란 믿음이 가져졌다. 저기 달려가는 대원군의 가마는 어쨌든 어떤 형국이든 저렇게 저 어둠을 밀고 달려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걸을 짐작으로 알았을 뿐이다.
그도 총을 빼들고, 칼도 보다는 그게 안심이 되었다. 달려가기 시작을 했다. 어디론 지는 몰랐지만 그들은 그들의 적인 민비가 있는 처소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긴장되어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발이 땅에 닿는 느낌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호흡을 함성 삼아 달려갔을 뿐이다. 여기저기서 이쪽저쪽으로 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른 문으로도 자신들과 자신들을 지원하는 조선 병사들이 들어와 함성을 지르고 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과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N이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땅에 두어 바퀴 구르다가 몸을 일으켰다. 순간적으로 초긴장이 되었다. 자신이 총이나 뭔가에 가슴이 뚫리는 상상을 했던 것이다. 자신을 일으키는 자가 자신보다 몸집이 커다란 조선인 훈련대였다. 상대가 조선인이라는 게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총을 내밀어 그의 가슴에 대고 갈기려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어둠 속에서 조선 훈련대 소속인 사내는 파랗게 질려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누군가 같은 편이라고 말을 했다. 그 말에 둘러보니 그 사내와 같은 편인 훈련대가 몇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차마 총을 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알 수 없는 화가 자꾸 났기에 그는 발로 그를 걷어차고 권총 손잡이로 마구 두들겨 팼다. 덩치 큰 조선인 사내는 무슨 커다란 죄를 지은 것처럼 거의 울부짖듯 머리를 감쌌다. 얼굴에 피가 터져서야 그는 멈추었다.
“빨리 안 뛰어가!”
그가 고함을 지르자 그들은 부리나케 앞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온몸이 부들거렸다. 마치 벌레들이 자신을 에워싼 느낌이었다.
“감히!”
그는 총을 넣고는 칼을 빼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을 했다. 두어 개의 문을 통과했을 때, 같은 동료가 한 궁녀를 잡아끌고 밟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관복을 입는 사내를 잡고 이마를 기둥에 찧고 있었다. 그는 달려가 관복을 입은 사내 허리에 칼로 찔러 넣었다. 칼이 잘못 들어가 비틀려 그가 넘어질 뻔했다. 누군가 젊은 기자가 그를 말리며 조심하라고 했다. 찌르는 것보다 치거나 그으라고 했다. 그는 그때부터 그렇게 했다. 그의 칼에 피가 묻기 시작했다.
여우사냥은 성공했다. 그는 그 사건이 마무리 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시는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안나카레리나’ 를 완역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 사찰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으나 정수가 담기지 않았다. 학문의 정수를 터득하기에는 그의 운명은 뒤틀려 있었다.
그날 그 이후, 수십 년이 지나 누군가에게 그는 그날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더군. 나 자신이 말이야. 광기, 마치 광기에 홀린 것 같았어. 조선, 조선인이란 말만 들어도, 보이기만 해도 돼지처럼, 아니 그냥 그들은 두려워 도망만 치는 거야. 차라리 똑바로 서 있기만 했어도 모르겠어. 그냥 도망치는 거지. 나는 달려갔고, 밟고 때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칼을 그어 댔지. 그냥 그랬어. 조선인들, 어쩌면 그날 대원군이 왕을 향해 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는 불모였어. 그냥 그들은 이미, 그들의 정신은 죽은 거였지. 정신이 죽다니. 그래 그들의 정신은 죽었지. 적어도 그날은 그랬어. 그들은 광기를 불렀어. 내가 광기를 가졌던 게 아니라! 그곳은 분명한 나라의 궁궐이었어. 아무리 죽어가는 나라라고 하지만. 나는, 우리는 그러면 안 되었어. 하지만, 그날은 어쩔 수가 없었지. 우리는 러시아에 쫓겨날 수 없었고, 조선인은 무기력했지. 마치 강간을 당하거나, 목을 잘 리 울 수형자들처럼. 얼어 있었어. 우리에게는 총이 있었고 칼이 있었지. 그리고 그들도 우리를 돕고 있었으니. 불쌍한 조선인들. 그래도 글을 안다는 나는 그러면 안 되었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지. 우리가 그러면 안 되었어. 그날은 정치의 노예가 되었지. 인간이 아니었어. 그날 우린 무엇을 했지? 왜 거기에 들어갔지? 가끔 그 생각을 하지만, 모든 게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아. 아, 불쌍한 놈들. 이 작은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만 해도 눈을 울먹이는 것들이었지. 마치 순한 양처럼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총 한 방이면 다 도망가다니. 왕비야 죽든 말든.”
N은 그때 생각을 할 때면 머리를 쥐어뜯곤 했다. 그리고 이내 백발머리를 빗어 가지런하게 넘겼다. 기침을 하고 목을 다듬었다.
“비극이 뭔지 아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이미 지난 일에 대한 끝없는 자책이나 수치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가해자보다는 피해자가 더 심하겠지. 그보다 더 큰 비극이 뭔지 아나? 모른다고? 그것은 그게 비극인지도 모른다는 거지. 비극인지도 모른다는, 난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군. 적어도 나는 아니지만 말이지. 내가 죄를 지었나? 지었지. 남의 궁정에 들 들어가 칼질을 한 것, 나는 누가 왕비를 시해했는지는 못 봤지만, 사실 안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을 용인하고 못 지킨 그들의 문제일 뿐이야.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이랬었지. 우린 몰려갔어. 누군가 그게 무슨 궁이었나? 왕비가 있었다고 했지. 누군가 소리를 지르더군. 왕비를 잡았다고. 그것은 죽였다는 의미였지. 나는 다른 이를 잡아 족치고 있었어. 거의 손이 으깨어지도록 주먹질을 하고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약함이 나를 그렇게 잔인하게 만들었어. 그날은 나 자신이 내가 아니더군. 난 피를 흘리는 손으로 달려갔지. 모든 게 끝났나 싶었지. 악마로의 연기가 말이야. 악마의 소임이 말이야. 왕비가 끌려 나오는 것을 봤어. 치마가 올라간 채로 말이지. 두 손과 발이 들려 거칠게 끌려 나왔어. 핏자국이 발에 흐르더군. 땅에 끌려 핏물이 끌렸지. 왕비라니. 누군가 칼로 일을 처리했어. 그것은 슬픈 일이야. 아무리 생각을 하고 말을 해도 나는 잊을 수가 없네. 그들은 잘도 잊고 살더군. 우리 같으면, 황국신민이었다면 반은, 어쩌면 그 이상이 할복을 했을 텐데 말이야. 그만큼 왕족이 신뢰가 없었나? 내가 세상 이치를 다 이해하고 살 수는 없지만, 하여간 이해가 되지 않아. 곧 불을 태워 버렸지. 칼질에, 화형에, 한나라의 왕비를 말이야. 거기 물 좀 주게나.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일이지. 그건 왕비였단 말일세. 왕비. 믿기 어렵지만. 한 나라의 왕비, 그것도 그들의 궁전에서 왕이 있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지. 누군가 그러더군, 그녀는 복도로 도망을 쳤다더군. 살고자 말이지. 바닥이 쿵쿵거리도록, 궁녀복을 입고 있었다는 말도 있어. 고종이 그렇게 시켰다나. 고종 그렇지 그 사람이 있었지. 그의 이마에 진 주름을 봤나? 멸망해가는 왕족의 왕을. 그는 늘 무슨 생각을 했겠나? 왕비가 죽다니. 그건 한 인간에게 슬픈 일이지. 나는 그 자리에 있었어. 죄악이지만, 어쩔 수 없었지. 왕비의 몸에 석유가 뿌려지자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서 불에 타들어갔지. 칼질을 당한 그 몸이 한 나라의 권세를 맘껏 주물렀다는 것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말이 자꾸 헛 나오는군. 난 그날 궁전을 나오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지. 파성관으로 갔지.”
그는 그때 그곳으로 몇 명의 젊은 기자들과 갔었다. 점심이 다 되어 가는데 피로가 몰려왔지만 그대로 쉬고 싶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여인을 품고 싶었다.
파성관에 들렀을 때, 조선의 관인 몇 명이 그때까지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그들은 왕궁에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들을 깨워 궁궐에 왕비가 폭도들에 의해 시해를 당했다고 말을 해주자 부리나케 일어나 가는 자도 있었고 그대로 귀찮다는 듯 곯아떨어지는 자도 있었다.
N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살타는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녹산 소나무 숲에서 나무를 아무렇게 쌓아 비단 천으로 싼 왕비를 올려놓고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검게 그을음이 솟아오르고 모두 그 자리를 피했다.
그는 그날 술을 마시고 어린 계집을 목 졸라 죽였다. 그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건 당시로써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최소한의 수치심으로 늘 죽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지켜줄 군대도 경찰도 스스로 힘도 없었다. 그의 왕후가 그랬듯 말이다. N은 그 사건 이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4.
명성왕후는 문득 빗소리를 들었다. 싸늘한 가을밤에 궁궐 기와를 두드리는 빗소리였다. 그녀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빗소리가 그녀의 의식을 깨웠다.
“비가?”
자세히 들으니 빗소리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 귀 기울여 듣던 대숲을 쓰는 바람소리 같기도 했다. 그녀는 등불의 파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때 대숲을 바로 보며 느꼈던 감정이 밀려왔다. 호젓함, 대숲의 가지런하고 곧은 모습, 그리고 부는 바람에 쓸리는 소리, 그 바람이 그녀의 귀밑머리를 훑고 그녀의 감정도 씻겼다.
아침부터 마음이 꽤나 불안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감이 무디어졌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뭔가 판단이 들어야 했는데,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봐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예리한, 들뜬 뭔가 결단을 해야 할 그러한 흥이 나지 않았다. 그저 아침부터 불안한 마음이 그녀의 기분을 심란하게 했다. 그러던 것이 오후가 지나고 저녁이 되면서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안정되었으나 어떤 판단이나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그녀는 뇌까렸다.
그녀는 살찐 물고기가 헤엄치는 듯한 등불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들이 생각하고자 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잡다한 그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라졌다.
붉은 등불이 창호지 창살문에 비치는 밤에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긴 낭하는 구불거리며 그녀의 발길을 재촉했다. 숨이 차고 발이 공중에 뜬 듯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총을 든 사내 한명이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수치스러운 장면이다. 언제였나? 그래 그때 시녀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불쾌한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살의를 띤 사내들이 감히,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 낭하를 뛰어 오다니. 그 생각을 하니 민비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참을 수없는 수치감이 밀려왔다.
“나는 왕비란 말이다!”
자신은 그렇게 고함을 치고 싶었지만, 당당함 보다는 그들의 살기가 그녀의 의지를 압도했다. 고종은 그녀에게 시녀복을 입으라고 했다. 치졸한 지아비의 모습이었다.
아, 그때 왜 맞서지 못했던가?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느닷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숨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래 지난 일이다. 그런데 그때 왜 시녀복을 입고 살려고 발버둥을 쳤던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자. 기분 좋은 생각을 하자! 그래 그때 어렸을 때 대나무 숲을 거닐었다. 마치 신들린 듯 흔들리는 대나무에 휩싸였다. 그때 어떤 힘이 느껴졌다. 청아한 힘, 깨끗하고 어떤 절대적인 느낌, 그 힘이 그녀의 온 몸을 감쌌다. 그녀는 몸이 날아오를 듯 했다. 대나무 잎이 떨리고 그녀는 그대로 멈추어 섰다. 가슴이 벅찼고 숨을 멈추었다. 이내 내 쉬고 다시 길게 숨을 삼켰다. 왜 그 느낌이 그토록 그녀에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일까?
그 생각도 잠깐 다시 긴 낭하를 달리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어떤 생각이 그녀를 이끌고 있는 듯 했다. 잠깐의 시간이 긴 수년의 지루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공포, 그들의 손은 죽음의 손이다. 무지막지한 손들, 늘 그 손들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기위해 결사적으로 달렸다. 그때 그녀의 앞에 고종이 나타났다. 우울한 눈이었다. 그의 눈 속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얼핏 스치는 두 부부의 반갑지 않는 얼굴. 생사의 길에서 만난, 유일한 자신의 생명일 남편의 얼굴이 초췌하게 보였다. 그가 왕인가! 그랬던가! 그럼 내가 왕후인가! 시녀복을 입고 젊은 유생들을 피해 이렇게 살고자 달리고 있는데. 그때 고종은 무슨 말인가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빨리 도망을 치라고 하는 말 같았다. 그때 그 말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더 달릴 마지막 힘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고종의 손끝이 그녀의 어깨에 허리에 닿아 조금씩 멀어지면서 그녀는 주저앉았다. 무기력한 몸과 긴 낭하와 붉은 불빛들. 나약한 낭군의 목소리.
“당신은 진정 왕입니까? 망할, 다 부질없는.”
그녀의 숙인 이마에 볼에 턱에 손등에 더운 기운과 땀과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거친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그때 파닥거리는 불빛이 그녀의 눈을 깨게 했다 .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 말을 했어야 한다. 그래 무슨 말을 했어야 하나. 국모라고? 마지막까지 죽을지라도. 그래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시녀복을 입고?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띄고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목까지 붉게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그날 이후 한동안 왕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임오년? 그랬나? 그 긴 낭하를 걸을 때는 참을 수없는 수치심이 들곤 했다.
생각을 바꾸자 그녀는 웃음을 지으며 천정을 보고 숨을 들여 마셨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다. 그래,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루에 나와 기와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처마를 타고 쏟아져 내리는 비와 마당에 튀는 물방울들이 마음을 빼앗았다. 그녀의 귀가로 빗소리가 쏟아져 가슴까지 들이쳤다. 그때 한 무리의 사내들이 비를 맞고 마루로 올라섰다. 모두 낭패스런 얼굴 들었다. 그들은 갑자기 내린 비를 맞은 갓이며 도포를 털어 냈다. 그들은 내린 비를 탓하며 파랗게 얼굴이 변해 있었다. 소매에 들어난 파란 핏줄의 약한 손과 진중하지 못한 감정들. 그들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때 그녀는 기와 골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을 손을 내밀어 받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얼굴에 씌웠다. 그리고는 버섯발로 마당으로 뛰어 나가 비를 맞았다. 그녀의 머리위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맑은 하늘과 검은 기와에 쏟아지는 빗물들. 그녀는 입을 벌리고 눈을 감고 팔을 벌려 비를 받았다.
빗소리, 그래 빗소리가 들린다. 버섯발로 뛰어 나가 비를 맞으며 흠뻑 젖은 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때 어떤 희열을 느꼈었다. 사내들은 처마 안에서 묵묵히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들이 싫지 않았다. 빗줄기만큼이나.
그때가 언제였던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 시절이 다시 돌아 올 수는 없지만 지금 비라도 내리면 달려 나가고 싶다. 민비는 그 생각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비를 맞을 수가 있다면.
“사내들.”
그녀는 무의식중에 허리춤을 뒤적였다. 사향이 담긴 주머니다. 사향은 묘한 것이다. 그 안에는 남자들이 담겨있다.
남자들의 눈빛, 그들의 움직임들, 근엄한 척하고 내리까는 말투들, 뭔가 배포가 있는 듯한 얄팍함과 허세들. 그리고 그 안에 꿈틀거리는 집요한 마음들, 그것이 사내들의 약점이다. 그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참으로 다양하지만 여자를 바라보는 눈은 모두 한가지다. 그녀는 사향을 맡았다. 사향은 마력을 지녔다. 긴장을 풀어주고 생각을 자유롭게 한다. 어둠속에 외로이 빛나는 등불이 아직 살아있음을 알리는 몸부림을 친다.
밤에 맡는 사향은 고통과 두려움을 잊게 해 준다. 생각을 단순하게 해주고 남자들을 두렵지 않게 한다. 그들은 그저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일 뿐이다. 사탕 하나씩 물려주면 좋아라하고 조금 멀리하면 죽일 듯 대드는 망나니들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 왜 그리 불안했었지. 민비는 아침의 생각으로 돌아갔다. 분명 무슨 불길한 예감임이 분명했다. 왜 그랬을까? 주변에서 어떤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럴 일이 없다.
그때 멀리 총소리가 났다.
“아, 총소리!”
그녀는 숨이 멎을 뻔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총소리였다. 여느 총소리와 다른 불길한 총소리다. 아침의 불길함이 그대로 연결되는 소리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낭하로 나갔다. 하녀들이 놀라 허둥대고 있었다. 그녀는 옥호루를 떠나 고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마당을 가로 지르다가 문득 멈추었다. 무언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때 시녀복을 입고 쫓기다가 낭하에서 왕을 만났을 때의 그 얼굴이 생각났다. 민비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멈추어 섰다. 멀리 총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렸다. 무언가 검은 구름이 궁궐을 넘어오고 있음 분명했다.
시녀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황태자비도 하얗게 변한 얼굴로 뛰어 나왔다. 그네들이 무슨 말을 했으나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그 대나무 숲에 들어가 서 있었다. 그녀의 귀가에는 대숲을 쓰는 바람소리만 들렸다.
잠깐 서 있더니 그녀는 흥선대원군의 소식을 물었다. 누군가 일본인들과 궁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대답을 했다.
그녀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뒤틀린 운명이로고! 그녀는 대궐 기와 위로 흐르는 구름을 보았다. 그 노부부가 그녀를 입궐 시켰다. 무엇을 원한 것인가! 단지 자신들의 안일과 야망을 위해 다소곳한 꼭두각시를 원한 것인가? 며느리로서 아니면 하수인, 바보를 간택했었나? 무엇을 원했나?
언젠가 대원군이 자신을 노려보았었다. 마치 누가 오늘의 너를 만들었는가!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가! 하고 외치고 있었다. 노망든 노인네, 평생 음흉한 야심이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커서 귀신들린 괴목이 되어 버렸다. 마치 시장판에 굴러다니면서 부를 구축한 거상처럼 마치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의 손짓은 마치 자신을 언제든 죽일 수 있다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땅을 보았다.
“당신의 자만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나직하고 또박또박하게 말을 했지만 실상 나라가 아니라 자신과 고종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당신의 앙상한 손아귀가 내 목을 조이고 있다구요. 난, 저 궁밖에 대숲에서 자유로이 뛰어놀고 싶습니다. 지금이요, 당장, 늙은 여우들이 귀신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사람의 심장과 골수를 빼먹지 않는 자유로운 곳으로요.
그때 시녀들이 그녀의 팔을 끌었다. 그녀는 버텼다. 수치심과 분노가 밀려왔다. 그녀는 시녀들에게 끌리다시피 고종이 있는 곳으로 갔다. 왕세자비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자 불길한 생각이 들어 온 몸을 떨었다.
그녀는 가끔 왕후로부터 대숲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가장 가슴 아팠던 이야기는 그녀가 시집오던 해 대나무들이 모두 말라 죽었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왕후의 두려워하는 얼굴에서 메마르고 색을 잃은 대나무를 보았다. 스스로 버티어 온 지난 순간의 고난들이 오늘은 예사롭지 않았다.
왕세자비 그날 새벽 날이 밝기 전에 차마 겪을 수없는 비극적인 일을 당했다. 왕후가 시해당하는 장면을 고스란히 보았으며 시신으로 끌려나와 녹산으로 옮겨지는 피물 적신 보따리를 보았다. 그 후로 그녀는 죽는 날까지 모진 조선의 거목이 쓰러져 썩어가는 것을 목도했다. 그녀가 임종할 때 들었던 것은 대숲에 부는 바람이었으며 늘 그 바람소리를 들었었다. 임종 직전 그녀의 눈은 초점 없이 흔들렸으며 가냘픈 손은 왕후를 찾았다.
“어머니!”
그녀의 마른 입술은 부르르 떨었다. 사향냄새가 나더니 거짓처럼 왕후가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위엄 있는 왕후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손길이 명성왕후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왕후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잡았다. 백옥처럼 깔끔해진 얼굴, 그랬었나? 아니다 분명 어머니는 칼에 베었었다. 저 태산같이 날이 선 얼굴에 칼에 맞아 피를 쏟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따뜻한 봄볕처럼 병든 그녀의 손을 잡아주시고 계시지 않는가!
어, 저소리 또 악몽이 보이고 들린다. 그날 그 비명소가 말이다.
“어머니.”
왕후는 그날처럼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한다. 서서히 그녀가 사라져가고 일본인들의 고함소리가 악마들의 소란처럼 들려온다. 낭하 앞에서 대신 하나가 일본인을 막아섰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그들이 부르는 왕후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일본인의 칼이 번쩍이더니 그의 손가락 네 개가 잘려 나갔다. 손가락에 검은 구멍이 뚫린 듯 구멍이 뻥 뚫렸다. 그의 손가락에 물줄기처럼 피가 솟았다. 다시 반대편 손가락이 예리한 칼날에 잘려 나갔다. 왕세자비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그때 키 작은 일본인들이 주먹으로 그녀의 뺨을 쳤다. 그녀는 그 순간 그녀에게 주어졌던 모든 지위와 권위 체면은 없어지고 한낱 무력한 희생양에 불과했다. 바닥에 이마가 깨지고 몸집 위로 사정없이 발길이 날아왔다. 대신이 잘린 손가락으로 다시 그녀를 막고 나서자 이번에는 팔뚝에 칼이 내리쳤다. 피가 그녀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다시 발길질이 날아오고 혹시 민비가 아닌가 확인을 했다. 그 순간 대신의 복부에 칼을 찔러 넣고 내실로 밀고 들어가 벽까지 밀어 붙였다. 그녀는 이마를 바닥에 대고 그 광경을 보았다. 혼이 나간 듯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신은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의 잘린 손가락과 팔뚝을 흔들었다. 두 명의 일인들이 대신을 벽에 붙이고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칼을 찔러 댔다.
누군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제쳤다. 얼굴을 돌아가면서 확인을 하더니 아니라고 확신을 하였는지 그대로 놔두고 다시 발길로 걷어차더니 내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녀는 고기처럼 머리채와 멱살이 잡혀 끌려 들어가더니 치마가 걷어 올려졌다. 그녀가 다리를 오므리고 몸을 웅크리자 다리를 밟기 시작했다. 욕설이 퍼부어지더니 피가 질척하게 묻은 치마를 걷어 올렸다. 다시 오므리자 팔과 어깨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고함소리가 났다.
“민비다!”
사내는 그 말을 듣더니 방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 소란이 일더니 누군가 방에 들어와 그녀를 잡아끌고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녀는 시녀들 틈에 쓰러지듯 앉았다. 몇 명의 사내들이 번갈아 가면서 얼굴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왕과 황세자, 대신과 시위대, 군인들 백성들 그 시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궁녀들만 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본 그 대신은 그날 밤 죽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날 있었던 일을 죽는 그날 까지 잊지 않았다. 순종이 즉위하는 그 날도 그녀는 그들의 위선에 치를 떨었다. 일인들이 여전히 그녀를 왕후라고 불렀다. 그것은 모욕이며 참을 수없는 욕설이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그들이 원한다면 머리채를 잡고 옷을 벗길 그런 인간들이었다.
그녀가 서른 넘길 때쯤 종종 그때 왕후의 대숲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고 그녀는 왕후를 보았다.
“어머니.”
그 순간은 왕후도 세자비도 아니었다. 비운의 두 조선의 여인으로서 만났던 것이다.
5.
10월 7일은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은 날이다.
내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한성신보사에 갔을 때가 오전 10시쯤 되었다. 조선인으로서 한성신보사에 드나드는 것이 우쭐거릴 수 있는 멋진 일이니 자주 들락거리지 않았나 싶다. 가끔 그 현관에서 양복을 입고 일인들과 담배를 나누어 피는 것을 즐겼다. 상투를 튼 검은 한국인들이 비실거리며 지나치는 것을 지켜보며 말이다. 그들이 쳐다보면 은근히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눈길을 하며 계단 위에서 슬쩍 내려보았다. 일본인이나 서양인들이 나오는 잡지를 끼고 술집에 가서 밤새 그들과의 새로운 이야기를 했던 것을 되풀이 떠들기도 했다. 한성신보사라는 말을 마시는 술잔만큼이나 들먹이며 나를 뭔가가 다르게 이야기 하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양반이 아니라서, 그들의 우쭐거리는 모습에 질려서, 가난뱅이 상놈들의 진탕을 누비는 삶이 싫어서,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열망해서 어쨌든 그때는 그것이 자랑인줄 알았다.
그날은 한국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일본인 친구를 만나 평양에 놀러 갈 계획을 논의하려고 갔다. 그 일본인 친구는 만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와 조선의 역사와 현실 정치를 깊게 논의하며 친분이 쌓였다. 대게 일본인들은 조선 것들이 천하다고 생각하고 약간 하대하는 말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진지하게 사람을 대했다. 그 작은 마음씨가 은근히 그와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특히 서구의 시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나는 그를 만나 현대시학에 관해 자주 논의 하는 것을 즐겼다. 이 친구를 소개시켜준 사람은 나와 같은 인천 출신인 김승일이었다.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온 김승일과 같은 대학을 다녔던 친구가 한성신보에 있었다. 누구보다 일본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마치 무당이 자기의 신을 따르듯 그는 선진화된 문물을 가진 작은 왜인들을 숭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에 대해 너무 질리지 말라고 충고를 하곤 했다. 아마 그런 말투가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김승일은 한성신보를 자기 회사 드나들듯 드나들며 그곳 사람들을 사귀었다. 나도 김승일을 따라 몇 번 가본 것이 그들을 사귀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김승일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 집의 식객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지고 있던 땅을 처분하고 한양에서 무슨 장사고 시작을 하거나 아니면 일본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종이 장사도 생각을 해 보았다. 어느 날, 조선의 모든 사람이 종이를 쓰는 상상에 사로잡혀 많은 부를 움켜 쥘 수 있다는 환상에 심어준 이도 김승일이었다. 한성신보사의 사람들을 사귀면 뭔가 도움이 될 것 같아 들락거렸던 것이 일은 제쳐두고 서양 문학에 관심을 같게 된 것이다. 당시 나의 형편이 그렇게 좋은 아니었다. 이십대 초에 처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 아이와 함께 죽은 이후에 농사일에 흥미를 잃고 연장을 밭에 던지고 석양을 바라보다 무작정 한양에 올라와 버린 것이다.
한양을 들락거리면서 이십대 후반에서 서른이 다 되도록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뭔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실제로 들 무렵, 경험삼아 일본을 다녀오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런 나에 비해서 김승일은 양반 출신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인천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고 땅도 있어 돈이 많은 집이었다. 그는 한성신보사의 친구들을 이용해 무슨 사업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날, 내가 찾아 가자 일본인 친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뒤로 다른 이들의 야릇한 눈빛이 더욱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런 표정들은 처음이었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남들의 눈치를 살피거나 자기들끼리 무슨 말을 소곤거리면서 주고받았다. 일보다는 어떤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마치 여기는 신문사가 아니라 사무실을 이사 가기 직전의 일손을 논 분위기 였다. 그들의 분위기는 기자가 아니라 공원에서 싸움을 벌이기 직전의 시정잡배들 같았다. 구석에 칼도 보였으며 누군가의 책상에 작은 권총이 보였다. 내가 다가가서 권총을 보려고 하자 그 주인은 어깨로 나를 밀쳤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허세를 부리며 농담을 했지만 나 자신을 더욱 부질없는 놈으로 보여준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무시하고 고개를 숙이며 실소를 하거나 가라는 투로 빈정거렸다. 마음씨 좋은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있다면 다음에 보자고 말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그에게 빌려봤던 책을 돌려주고 다음 기회에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막 나오려는 참에 현관에서 햇살을 등에 업고 김승일이 도착을 했다.
그는 붙임성이 좋아 상대편에게 무슨 말이고 꺼내 놓게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 그는 그들 분위기가 이상하자 그들에게 무슨 일인가를 캐물었다. 그는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그들과 무슨 말을 길게 나누며 놀라거나 호기심많은 눈으로 손을 흔들어 가며 자기 의사를 전했다. 그는 나에게 비해 자기를 표현하는 기술이 보다 숙련돼 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그런 모습에 만족을 했는지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나서 건들거리며 보란 듯이 걸어왔다. 대화는 이렇게 하는 거야,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는 다가와 웃음에 찬 얼굴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오늘 궁궐에 들어가 볼 기회가 생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궁궐 안에 재미날 여러 가지 상황을 이야기 해 주고는 나에게 같이 갈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쁨에 빠졌다. 궁궐을 들어가 볼 기회가 생기다니, 나는 늘 그 담 아래를 지나칠 때면 담 안의 삶들이 궁금했다. 그 말을 듣고 그가 하자는 대로 하자고 했다. 그는 쉽지 않겠지만 친구로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해보겠다는 말을 하고는 그들과 다시 이야기를 했다. 다른 사람이 소개되고 그는 그와 악수를 하고 우쭐되며 나에게 다가왔다. 조건이 있었다. 그들이 한 가지 일을 부탁했기에 그 일을 해야 했다. 그 일이란 흥성 대원군이 다음날 새벽 일찍 궁궐을 들어가는데 호위하여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 일을 승낙했다. 김승일의 어깨너머로 그들이 조롱 섞인 웃음을 들으며 혹시 무슨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지만 김승일은 별다른 일은 없을 거란 말을 했다. 항상 그는 그게 문제였다. 모든 것이 쉽게 될 것이란 믿음이 너무 강했다. 그의 긴 설명에 의하면 간단한 일이며 그것으로 궁궐을 한 바퀴 돌고 흥선대원군까지 가까이에서 볼 기회라는 것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덕으로 나는 그 기회를 잡은 것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나도 그의 기분과 같이 들뜨기 시작했다. 김승일과 나는 궁녀들도 볼 수 있을 거라며 농담을 하며 한층 기분이 날아갔다.
그날 오후부터 승일과 술을 마시고 근처 여관에 들어가 쉬면서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초 저녁쯤 누군가 우리를 찾아왔다. 그는 김승일 친동생 승찬이었다. 마른 형과 다르게 목이 짧고 어깨가 벌어진 친구였다. 옷이 작아 보였다. 그의 굵은 뼈들이 옷을 찢을 것만 같았다. 승찬은 일본인들이 교관으로 있는 훈련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사무라이에 대한 멋진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뜻밖에도 굵은 눈알을 굴리며 낮은 목소리로 오늘 새벽 일본인들이 훈련대를 앞세워 궁궐을 쳐들어간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할 때는 목소리가 떨렸다. 들리는 소문에 왕후를 제거 한다고 하는데 차마 하께 할 수가 없어 도망쳐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악 물고 분노에 찬 말을 하는데 눈을 글썽거리기 까지 했다. 그는 들리는 말에 한성신보사가 주축이 되었다고 하는데 형도 연관이 있을까 싶어 찾아 왔다고 했다.
승일과 나는 일본인들 앞에서 그들보다 더 왕후에 관해 많은 비판해 왔었다. 하지만 이건 비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말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승일에게 어떡할 건가, 물으니 김승일은 동생의 말보다는 일본인 친구들의 말을 더 믿고 싶어 했다. 특히 한성신보사의 하버드까지 다닌 엘리트 지성인이 있는데, 기자로서 그들이 상식에 어긋나는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일을 저지를 리가 없다고 말했다. 더구나 아소전까지 가서 대원군을 모시고 광화문을 통해 들어가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에 승찬은 말을 못하다가 갑자기 불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는 대원군을 모시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데리러 가는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의 고함에 우리는 기가 죽었다.
그는 다시 말을 낮추고 달래기 시작했다. 마치 한참 아래의 동생들을 타이르듯이. 그는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막판으로 몰린 일인들이 음모를 꾸미고 궁궐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다. 훈련대와 왕후와 다툼, 청일 전쟁, 그리고 이번 사건까지. 그는 우리에 비해 흔히 말하는 정세에 관해 깊이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그전에 그에 대해 생각했던 우직한 모습을 털어버리게 했다.
우리는 승찬의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이 사실이기에 그도 몸담고 있었던 훈련대를 빠져나왔을 것이다. 결국, 동생의 만류도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동생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곧 동생은 당부의 말을 하고 자신의 일행과 그 곳을 떠났다. 떠나기 전 집에 가지 않고 다른 곳에 갈 것이며, 그들에게 가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다짐을 물었다.
그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호기심 많은 승일은 사실 여부를 떠나 방에만 웅크리고 앉아 있지 않았다. 나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생각이 많을수록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한성신보사 근처를 가서 상황을 알아보기로 했다.
우리 둘은 자정이 되기 전에 어슬렁거리며 밖에 나왔다. 한성신보사가 있는 곳으로 가며 혹시나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나 술집을 들어가 확인 해보기도 했다. 한성신보사에 가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곳이 두렵게 느껴졌다. 우연히 그 앞을 지나는 포목점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에게 혹시 들은 이야기가 있나 물으니 한성신보사의 사람들이 칼과 총으로 무장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밤에 진고개로 몰려가 술판을 벌이며 뭔가 일을 치르려고 한다고 시장판에 소문이 돈 다고 했다. 우린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그대로 숙소로 돌아왔다. 둘이 집으로 들어와 두려움에 떨었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둘은 약속 장소에 가지 말고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다음날 까지 지켜보자고 했다.
두려움,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이 이른 새벽부터 잠을 설치게 했다. 창밖으로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몸을 뒤척이다 일어나 앉자 김승일도 따라 일어났다. 한편으로 호기심 때문에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우리는 많은 가정을 하고 현실을 바로 보려고 했지만 호기심만 일으켰다. 결국, 둘은 광화문에 대원군 가마가 도착을 했거니 하고 시간을 맞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 외에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둔 골목길을 거닐며 부리나케 광화문을 향했다.
확 트인 광화문 입구에는 일본인들이 오십 여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긴칼을 어깨에 건 자와 허리춤에 칼을 멘 자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말소리를 죽여 가며 두런거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 가마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멈칫 했는데 아는 일인이 손짓을 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얼렁뚱땅 변명을 대고 그들과 섞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비장함이 흘렀다.
우리는 이 안에 대원군이 있나 싶어 앞으로 나아갔다. 역시 가마 안에는 늙고 초췌한 한 노인이 추위에 떠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긴장을 감추려는 듯 의젓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더 우스꽝스러웠다. 양반들의 오만에 넘친 모습일 뿐이었다. 가마 뒤에 서서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가 얼핏 고개를 돌리더니 우리와 마주쳤다. 그는 초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승일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치며 가보라고 했다. 나도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늙고 주름진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 졌다. 그는 우리에게 조선인 인가를 물어보았다. 형색이 일본인처럼 생겼지만 본능적으로 조선인임을 알았는가 보다. 그렇다고 했는데 그는 왜 일본인과 함께 있는가 물었다. 승일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않고 있는데 그는 승일에게 가느다란 손을 내밀었다. 옷깃을 잡더니 더 가까이 오라고 잡아 당겼다. 그는 우리만 알아듣게 작은 목소리로 혹시 누구 아들이 아닌가 물었다. 그는 승일의 부친을 알고 있었다. 승일의 할아버지가 어디서 무엇을 하다 돌아가신 것까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놀라 그의 얼굴을 그대로 쳐다보았다. 그는 상황을 잊은 듯 흡족한 생각에 잠겼다.
그때 크고 무거운 광화문이 서서히 열렸다. 우리는 일제히 그곳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세계가 거짓말처럼 열리며 우리에게 들어 갈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나는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흥분에 떨었다. 대원군의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는 건들거리는 가마 위에서 우리에게 말을 했다. 자신을 따라 오지 말라고 했다. 빨리 집으로 가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와 우리 사이에 일본인들이 끼어들어 노인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대원군을 본 것만으로 친구들에게 누누이 자랑할 무엇을 얻은 듯 했다.
넓은 광화문 안으로 들어가자 멀리 시위대가 나타났다. 우리는 그대로 자리에 서고 말았다. 일본인들도 떨고 있었다. 초 긴장한 상태가 되자 누군가 그쪽을 보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정렬을 하고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때 대원군 가마가 앞에 나서며 시위대는 비키라고 했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초 긴장감 그 자체였다. 밤하늘에 몇 마디 고함이 오고 갔다. 일인들이 대원군의 손자 이준영을 떠밀어 소리를 지르게 했다. 이준영은 마지못해 대원이 앞에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일인들은 더 크게 외치라고 칼 손잡이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준영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그때 한발의 총이 시위대를 향해 발사 되었다. 그 밤하늘을 울리는 거대한 총소리에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를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 두려움과 이질감, 내 뒤에 웅장한 광화문이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다. 나는 빨리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승일에게 그 말을 전하려고 했다. 그때 낯선 일본인들이 욕설을 하며 칼을 뽑았다. 칼 뽑는 소리에 나는 한발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질리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대원군이 더 잘 보이게 하려고 횃불로 가마 주변을 둘러쌓다. 대원군은 흙빛 얼굴로 앞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시위대 군부대신 안경수는 대원군만 빼고 모두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다시 두 번째 총소리가 들렸다. 앞에 서 있던 시위대 훈련대장 홍계훈은 뒤로 넘어졌다. 멀리 보니 빙판에서 뒤로 자빠지듯 넘어가는 그를 보자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가 일변했다.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고 시위대 몇이 쓰러졌다. 다시 2번째 사격이 있었다. 시위대가 흐트러지기 시작하며 단 한발의 총알도 쏘지 못했다. 군부대신 안경수가 먼저 내빼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시위대는 궁 안으로 흩어졌다.
긴장에 넘치던 일본인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궁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일본인과 우리는 거리낌이 없었다. 대원군은 심하게 흔들리는 가마위에서 안 떨어지려고 난간을 움켜쥐고 덜렁 거리며 다른 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넘치며 칼이며 총이며 휘두르며 자기들끼리 뭔가를 쉴 새 없이 지껄여댔다.
나는 뒤로 도망치려는데 그들을 따라 달리던 승일이 고함을 쳤다. 나에게는 광화문이 너무 가깝게 여겨졌지만 그 입구에 총을 든 일본 군인이 굳게 지키고 누구든 나가면 쏴버리겠다는 인상을 받았기에 주춤거렸다. 나의 몸이 승일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며 나도 그들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일인들과 훈련대는 궁을 지키던 시위대를 쫓아가며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았다. 김승일은 내 손을 끌며 앞으로 뛰기 시작을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자신도 그곳으로 뛰는 것이 무슨 짓인지 몰랐을 것이다. 나는 피를 흘리는 시위대 병사들을 뛰어넘어 가면서 총에 맞은 홍계훈을 보았다. 아직 그는 살아 있었다. 누군가 칼로 그의 목을 찌르자 그는 더 몸을 심하게 꿈틀거리며 떨었다.
거짓말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역겨운 냄새를 맡았다. 나는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디론지 숨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더욱 이상한 놈으로 오인 받아 나도 저 모양이 될 것 같은 생각에 빠졌다. 그런 생각이 드니 아는 일본인을 찾아 그에게 바짝 붙어 움직이고 싶었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 나는 대원군을 쳐다보았다. 그냥 그 상황에서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궁금했다. 줄곧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마당을 빠져나가는 동안 그 가마를 따라 왔을이지 모르겠다. 횃불 속에서 스쳐가는 대원군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는 낭패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밀가루로 빗은 인형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그 유명한 전설적인 흥선군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인들이 칼을 철컥거리며 쏠려 들어가며 두 패로 갈려 뛰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마를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나와 승일은 다른 무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웃는 자들도 있었고 고함을 지르며 도망가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는 자들도 있었다. 그것은 광기의 밤이었다. 잘달리는 김승일은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그는 마치 일본인 같았다. 그의 어깨를 나인 하나가 잡고 뭐라고 소리를 지르자 그는 자기 어깨를 밀쳤다. 나이 든 늙은 관인이었다. 훈련대의 한 사내가 그에게 다가가 총을 쏘는 시늉을 하자 그는 두려움에 떠는 눈과 신음을 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훈련대 여럿이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짓밟았다.
훈련대가 몰려가며 총질을 하자 밤하늘에 총소리가 울리며 궁이 광기로 더욱 깊게 뒤덮여 갔다. 김승일과 나는 총에 맞아떨어지는 기와 아래에 서서 몸을 움츠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김승일은 아마 승찬 말대로 왕후를 찾는 것 같다고 했다. 승찬이란 말을 듣자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왕후를 죽인다는 말도 사실인가 싶었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더욱 두려워 졌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갈 길을 알 수가 없었고 이들과 흩어진다면 어떤 골목에서 관인들에게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 중심으로 더욱 가까이 가게 되었다.
나는 승일에게 울상을 지으며 뭔가 이상하다고 말을 했다. 그도 광화문 입구에서 보여주던 웃던 얼굴이 사라지고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뭔가에 홀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도 나처럼 살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한성신보 직원이 궁녀 한명을 잡아끌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궁녀에게 건청궁이 어디냐고 물었다. 말이 없자 그녀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슨 말도 못하고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어쩔 줄 몰랐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치자 우리는 재빠르게 약속이나 한 듯 그 자리를 떠났다.
이십여 명이 몰려 건청궁에 들어가자 이미 그곳에는 훈련대 조선인 병사와 일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왕후가 있다는 옥호루 안으로 들어가 궁녀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나와 김승일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앞에는 횃불이 다니고 궁녀들의 쓰러진 모습이 난무했다. 그녀들은 다친 몸인데 불구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칼을 맞아 쓰러져 피를 흘리는 궁녀와 무릎을 꿇고 신음을 지르며 궁녀들이 엉키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들이 떠는 모습이 횃불아래 선명하게 보였다. 안에서는 일본인들이 왕후의 향방을 묻는 고함이 들렸다. 뜰에서는 반항하는 늙은 궁녀 하나를 소설을 쓴다는 한성신보 직원이 구둣발로 밟으며 등을 칼등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특히 안면을 잔인하게 때렸다. 그녀는 피를 흘리며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튀는 피가 검게 보였다. 그 놈의 폭력은 쉬지 않고 다른 궁녀에게 옮겨갔다. 이미 아무 반항을 못하는 그들에게 그는 왜 그런 폭력성을 보이는 몰랐다. 그를 말려야할 다른 일본인들이 함께 어울려 다른 궁녀를 밟고 옷을 찢기 시작했다. 다른 조선인 훈련대와 나는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때 뭔가 욱하는 것이 밀려 올라왔다. 나는 그만해하고 소리를 쳤다. 승일이 내 소매를 잡았다. 나는 다시 고함을 질렀을 때 그들이 발길질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승일 내 소매를 놓고 한발 물러섰다. 뭔가가 틀렸음을 직감했지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설사 칼에 맞더라도.
그때 옥호루 복도 안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며 왕후를 찾았다고 했다. 갑자기 벌어진 그 상황에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일본인들이 그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나도 뛰어가자 일본인 경찰이 막았다. 복도 안에서 여인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여인의 등이 보이고 칼을 치켜든 사내가 반쯤 보였다. 그의 칼이 번득일 때 여인은 놀라며 손을 들어 칼을 막으려고 했다. 칼이 번뜩이며 사내의 자세가 바뀌었다. 칼의 예리함이 내 몸을 빗금으로 쳤을 때의 느낌을 받았다.
나는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가며 나는 고함을 질렀다.
“안 돼!”
나는 미칠 듯한 어떤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느꼈다. 나는 몸부림을 치며 복도를 뛰어가려고 악을 썼다. 김승일은 급히 내 목을 잡고 나를 넘어뜨렸다. 그는 큰 소리로 내게 무슨 말을 외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의 손을 밀어내고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형형한 눈을 한 건장한 무사가 칼을 짧게 끊어 치 듯 내려쳤다.
두 번의 칼이 왕후의 머리를 내리친 후였다. 나는 마치 내 이마에 칼을 맞는 느낌을 받았다. 젊은 무사는 왕후의 몸에 구부려 음미하듯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몰아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저리 치우지 못해. 이 개자식!”
나는 뛰어들어 그에게 덤비자 그는 짐짓 몸을 뒤로 뺐다. 다른 사람들이 왕후인 것을 확인하려고 함께 밀려들어 좁은 복도가 미어터졌다. 왕후를 둘러싼 그들을 밀치고 쓰러진 왕후를 끌어안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다. 흰 적삼에 피가 물들고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선명한 두 갈래의 칼자국에서 샘물이 오르듯 피가 쿡쿡거리며 솟아올랐다. 피가 갈라 논 양미간 사이의 눈은 뭔가 허공을 응시하며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발끝이 닿는 곳에 일본 무사는 나를 힐끗 노려보며 칼끝에 묻은 피를 툭툭 벽에 쳐서 털어 냈다. 놈이 발이 왕후의 옷자락을 밟고 있었다. 나는 힘껏 옷자락을 당겼다.
내가 왜 그랬을까? 여자라서, 조선인이라서,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왕후라서, 나는 이미 그들 이상으로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붉은 핏물이 흘렀다. 내 이 두 손, 손가락 사이로 마치 기름처럼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 붉은 피는 왕후의 피였다. 체온이 따뜻한 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한나라의 왕후였다. 내 몸은 전율하며 떨고 있었다. 왕후는 내 손에서 핏물만큼이나 살아있는 영혼이 육신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몇 번 깜빡이더니 뭔가를 찾은 듯 떨며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그저 한 여인이었을 뿐인데, 한 사람의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었을 뿐이었는데, 어찌 이토록 잔인한 죽임을 당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피 범벅이 된 얼굴에 내 눈물이 떨어졌다.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흔들리는 횃불과 비명, 고함, 번쩍이는 칼 빛과 살기가 왕궁 복도에 난무한 모습들이 내 머릿속에 흐리게 느리게 펼쳐지더니 하나씩 겹쳐졌다.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 군인들의 광기에 찬 살육, 그들 중 상당부분은 그토록 지성을 사랑하고 학문에 불타오르는 젊은이들이었는데 어찌 그 악마 같은 모습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직 광기였을 뿐이다. 그들의 눈은 그 살육에 굶주린 벌건 눈빛으로 칼을 치켜들고 소리를 지르며 광분해 있었다.
왕후는 죽음보다는 어떤 달아나는 그 숱한 아쉬움을 쫓는 듯했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가는 입술과 볼에서 목으로 흘러내리는 피, 더욱 뜨거워지는 체열, 이 여인은 분명히 왕후였단 말인가!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왕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힘껏 잡았다. 바르르 떠는 입술, 끝이 보이는 흰 이빨, 모든 것은 꿈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인정할 수 없는, 누군가 나를 그녀에게서 떼어 냈다. 왕후의 몸은 방안으로 끌려 들어가 비슷하게 생긴 궁녀들과 둘과 함께 놓였다. 부서진 문틈으로 그녀들을 둘러싼 일본인들이 둘러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끌리다시피 뒤로 젖혀졌다. 나는 돌아서 보았다. 그가 누구인지는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은 광기로 불타 있었으며 손은 떨고 있었다. 나보고 나가라고 일본어로 고함을 쳤다. 나도 그에게 너희는 악마라고 소리를 질렀다. 너희는 악마다, 살육자며 진리를 속이는 자며, 침략자라고 소리를 쳤다. 그의 총을 겨누었다. 나는 쏘라고 가슴을 내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총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는 총을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한발 더 다가서서 민족의 원수라고 악을 썼다. 두 번째 총알이 불꽃이 튀었고 진한 화약 냄새가 났다. 눈이 쓰릴 정도로. 나는 너를 죽이겠다고 소리쳤다. 세 번째 총알이 발사되었다. 아직 나는 살아 있었다. 나는 머리를 향해 쏘라고 손을 들고 그에게 더욱 다가섰다. 나는 위선자, 거짓말쟁이, 살인자라고 소리쳤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서서히 총을 내려놓았다.
그때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아니 느낌이었다. 나는 세 번의 총소리이후 내 목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모든 소리가 차츰 약해지고 기우뚱거리며 복도가 흔들렸다. 나는 쓰러졌다. 넘어지며 뒤를 보니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는 젊은 일본인 친구가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의 내 등을 내리친 것이다. 그는 칼을 세워 내 배를 찔렀다. 나는 일어나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김승일 뛰어들어 그의 몸을 껴안고 말렸다. 김승일은 당황한 얼굴로 비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소리치며 놈을 나에게 떼어놓고 당황한 손으로 나를 껴안아 업고 옥호루를 빠져나왔다.
궁은 미친개를 풀어놓은 듯 일본인들이 날뛰며, 마루 밑까지 기어들어가 사람을 끌어내어 밟고 칼을 휘둘렀다. 일인들을 피해 어두운 담을 따라 나오려는데 기모노를 입은 일본사람들이 그를 막았다. 김승일은 나를 담 밑에 버려두고 흙빛으로 변한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일본어로 그들을 상대했다. 나는 지금 나가지 않으면 상처가 깊어 죽는다고 했다. 그들은 판단을 못 하고 있었다. 김승일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들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이 김승일은 나를 업고 자리를 피했다.
근처에 조선인 훈련대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그들도 미쳐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들은 우리를 그대로 두었다. 어쩌면 우리를 일본인으로 착각을 하고 있을지 몰랐다. 아니면 빨리 빠져 나가라고 못 본 척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끝에 남아있는 왕후의 체온으로 울음이 나왔다. 문득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나를 외면하고 뛰어 갔다. 승일은 나를 달래며 다른 곳으로 들어가서 숨었다. 멀리서 보니 조금 전에 그들이 우리를 찾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이 혼란스러운 주변을 헤매는 사이, 왕후의 시신이 건청궁 밖으로 끌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날이 하얗게 밝아오고 있었다. 희끄름한 안개가 엷게 흐르는 아침 그들은 칼을 끌며 바쁘게 움직였다.
더 밝기 전에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나는 실신을 하였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김승일의 등에 업혀 있었다. 나는 다시 정신이 차츰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김승일은 궁을 빠져나오자 나무 그늘에 나를 내려놓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멀리 경복궁의 처마에 먼동이 붉게 트고 있었다. 김승일의 울부짖는 괴성과 풀벌레 소리가 인간의 광기와 치욕, 살육과 치욕을 슬퍼하고 있었다.
광화문을 빠져나와 민가 속에 숨었을 때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아침이 새로이 시작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나, 나는 아직 살아 있었다.
우리 얼굴을 아는 한성신보사 기자들이 김승일과 나를 찾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왕후 시해를 직접 목격한 김승일과 내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김승일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를 수원 어느 기방에 데려다 주고 홀로 잠적했다.
나는 죽을 운이 아니었나 보다. 등에 맞은 칼이나 배에 찔린 칼이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이 베이고 많은 피를 흘려 기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찬바람이 부는 가을이 지나고 겨울 새떼가 나르는 한강에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내 정신은 갈수록 우울하고 불안한 정신상태가 계속 되었다. 의원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너무 충격적인 일로 반쯤 미쳤다고 했다. 어린 기녀 삼월이는 나를 보고 ‘의원이 미칠 거래요’ 말을 하곤 했다. 나이 든 기녀들이 그녀를 나무랐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사실 나 스스로 내가 미쳐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곤 했으니, 남이 보면 당연히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 그날에 대한 악몽을 자주 꾸었다. 그날 자체가 악몽이긴 하지만.
6.
눈이 며칠째 쏟아져 내렸다. 내가 머무는 수원 북문 근처의 작은 처소 담벼락과 마담에 수북이 눈이 쌓였다. 가끔 때가 되면 밥을 내오는 발자국만 찍힐 뿐, 마당과 나무에는 눈이 하얗게 쌓였다. 밤이면 멀리 거문고 소리나 흥청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렸다. 가끔 문을 두드리는 취객들이 있었으나 그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끔 삼월이가 들러 바깥소식을 들려주었다.
두 주일쯤 지나자 두 사내가 나를 찾아왔다.
그날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한 여인이 울고 있었다. 그녀는 왕후였다. 어둠 속에 도망을 치고 있었다. 나는 뒤쫓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그녀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사냥꾼처럼 한곳으로 그 여인을 몰고 있었다. 여인은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며 어디로 도망갈지를 모르고 횃불 사이로 뛰어다녔다. 그녀의 절박한 발소리가 심장이 뛰듯 쿵쿵거리며 들렸다. 모두 그녀를 향해 조소와 같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다른 이들처럼 그녀를 쫓고 있었다. 철컥거리는 칼 소리가 났고, 공중으로 쏘아 대는 권총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그녀는 여전히 뛰어다니다 결국 모두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일본인들이 칼로 그녀의 머리를 내려쳤다. 칼이 두개골에 박히고 잘 빠지지 않았다. 긴 비명과 구토, 나는 공포에 떨었다. 살기가 넘실거리는 전율, 두려움이 나를 엄습했다. 두 번째 칼도 그녀의 머리 위에 박혔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았다. 나보다 열댓은 더 먹은 여인이 붉은 피가 흐르는 얼굴로 파랗게 질려 서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빛은 처량했다. 살집이 두툼한 몸집은 흰 적삼을 걸치고 있었다. 어디를 또 칼에 찔렸는지 허벅지와 장딴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당신은 왕후가 맞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질 못했다. 그녀는 출구가 없는 한 방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은 이럴 수는 없다는 듯한 눈이었다. 살려달라는 눈빛이기도 했다. 뭔가를 쫓는 눈이기도 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렇게 묻는 파리한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나도 무슨 말이고 하고 싶었지만 목에 메여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서서히 무릎을 굽히고 쓰러졌다.
그녀와 나는 마당에 있었다. 주변에는 갑자기 나타난 일인 청년들과 콧수염을 기른 관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그들의 원하는 바를 이룬 것은 승리하는 함성을 질렀다. 나는 잘못했다고 일인들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들은 총을 쏘아 대며 나를 둘러쌓고 죽으라고 소리쳤다. 혹은 도망치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왕후는 이내 사라졌고 나는 숲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쫓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김승일이 웃고 있었다. 넘어 지지마! 그렇게 소리치곤 했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아무도 없는 숲을 달리기도 했으며 긴 회랑을 뛰기도 했고 구불거리는 낭하도 뛰었다. 나는 어디로 뛰지? 그들은 보이기도 했지만 아무 소리도 없이 쫓기도 했다. 그럴 때가 더 두려웠다. 난 두려움이 극에 달하면 소리를 쳤다.
“난 아니야. 왕후가 아니야!”
그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어디론가 내몰았다. 석유 냄새가 났다. 소나무가 있었고 조선인들이 처참한 몰골로 울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피가 묻어 있었고 나뭇더미 위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보지 않고도 알았다. 나는 공포에 떨었다. 울어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참을 수 없는 울음이 나오고 절규나 나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공포와 분노가 극에 달할 때쯤 나는 잠을 깨곤 했다.
그날도 악몽을 꾸고 눈을 떠보니 그들이 와있었다.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김승일이나 그의 동생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 말에 의하면 김승일이 일본인 자객들에게 암살되었다고 했다.
난 그의 죽음을 듣고 친형제가 막 죽은 소식을 듣듯 오열을 했다.
당분간 그들이 거처를 옮길 때까지 그들이 나를 보호해 주겠다고 했다. 배에 찔린 상처는 좀처럼 낫지 않았다. 상처가 조금 낫는가 싶더니 겨울로 들어오면서 열과 통증이 심해졌다. 신열로 거의 누워 지내기까지 했다. 두 사내는 나를 한양으로 옮길 생각도 했지만 일본인들이 나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함부로 옮길 수도 없어 걱정을 했다.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린 다음해 정월이 되어서야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 상처부위가 차츰 나아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그 두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인간적으로 많이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동학군 출신으로 일본을 물리치기 위한 운동을 본업으로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 둘은 우금치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그 처절한 싸움에 치를 떨고 있었다. 그들은 옆방에서 잠을 잤는데 가끔 악몽을 꾸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젊은 친구는 우금치 때 입은 충격이 너무 커 낮에도 포화소리와 농민들의 비명이 들린다고 했다. 그는 가끔 무의식중에 손을 코에 대고 피 냄새를 맡곤 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왜 내가 여기에 있지? 그거 있잖습니까? 항상 드는 생각이. 나는 생각이 많았던 게 탈이었나 봅니다. 일을 할 때도 늘 생각에 잠겼습니다.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들 있잖습니까? 주인은 할 일 없이 먹고사는데, 우리네는 소처럼 일을 해야 하지요.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럴까? 내 아는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마님의 손을 잡았다가 치도곤을 당해 죽었잖아요? 그때부터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요. 분명히 마님이 넘어지시는 걸 도와주려고 손목을 잡았는데 잡아다 멍석을 말아 패게 했거든요. 제, 제가 때렸습니다. 저도 미쳤지요. 그런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는 때려야 하거든요. 사실 죽을 만큼은 아니었는데 결국 형님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겨울이었는데 마당에 버려뒀거든요. 다음날 새벽까지 뜬 눈으로 있다가 나가보니까 파랗게 머리가 부어 있었어요. 저는 안 때렸거든요. 머리를 때리다니요. 제가 왜요. 얼마나 그 형님을 좋아 했는데요. 마님이 그랬어요. 형님이 끝까지 잘못했다는 말을 안했거든요. 마님은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마님은 내 몽둥이질이 어설펐는데 마님이 대신 뺏어 때리다가 머리를 쳤어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다 정신이 없었거든요. 난 그 자리에서 서서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마님이 바로 앞에서 기우뚱거리며 쓰러지는데 어떻게 했을까? 하고요. 손을 내밀었을 겁니다. 마님을 위해서요. 당신도 그랬을 겁니다. 왜 안 그랬겠어요. 다 그럴 겁니다. 형님이 그랬듯이요. 아마 그랬다면 내가 죽었겠지요. 지게로 그 형님을 내다 버리던 날 저는 그 집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형님 집에 가서 시체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그냥 무작정 걸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었지요. 한 닷새쯤 걸었나 싶습니다. 그러다 저 형님을 만났어요. 저 형님은 황토연이라고 하는 곳으로 간다고 하데요. 산길에서 쭈그려 앉아 물도 없이 주먹밥을 먹고 계셨는데 반쪽을 주더군요. 생명의 의인이 따로 없었어요. 저는 밥을 받으면서 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 형님을 따라 가야겠다고요. 그렇게 맛난 음식은 아직 먹어보지 못했다니까요. 나는 형님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가자고 했지만 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미 저는 죽었을지 모르는 몸이니까요. 그래서 그곳에 함께 갔다가 처음으로 살아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거 있잖습니까? 봄 산천에 풀이 자라고 안개가 끼고, 비 온 다음 날 고사리가 피는 것. 뭐 그런 살아있는 것, 저는 마치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봄을 느꼈다니까요. 이런 봄이 아니라 몸에서 오는 봄 말입니다. 그곳에는 다른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자들이지요. 나는 형님과 늘 함께 다녔습니다. 많이 배웠고 관인들과 싸움도 했습니다. 싫증이 날 만큼요. 난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습니다. 얼마 후에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여동생이 그 집에 나 대신 노비로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당연한 겁니다. 내가 도망쳤으니 누군가 그 신세는 갚아야 하니까요. 그 말을 듣고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료와 그곳에 가야지 마음을 먹었습니다. 한번 혼내주려고요. 그리고 묻고 싶습니다. 마님, 그때 왜 그 양반 왜 머리를 때렸어요? 하고요. 내가 죽어도 묻고 싶습니다. 왜? 몽둥이로 머리를 때렸느냐고요. 다 이해합니다. 마님 손을 잡았으니 기분이 나빴겠지요. 그래서 멍석을 말았겠지요. 그래서 때리라고 했겠지요. 하지만,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그 형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지게로 거의 오리를 걸어 산에 버렸을 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길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요. 아마 일본인들만 아니었다면 그 양반을 찾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날, 우금치에서 일본인들만 아니었더라면 저는 마님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물었겠지요. 여동생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을 죽이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저는 대답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직 못 갔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꼭 갈 겁니다. 마님이 살아 계시기 전에 가야지요. 일본인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졌지요. 일본인은 작지만 그들은 무섭습니다. 덜덜 떨리는 그런 무서운 것이 아니고, 왜 아시잖습니까? 그들의 눈빛, 든 총, 이빨,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나기도 하고요. 왜 그들이 거기에 있었을까요. 왜 그들은 불을 뿜고 거기에 있었을까요. 저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들만 아니었더라면 저는 아마 분명, 자꾸 말해 미안하지만 해남 바다가 보이는 고향에 갔을 겁니다. 친구들하고 말이에요.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을 데리고 올라왔겠지요. 어머니 이제 그들을 위해 일을 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우리 땅을 일구어요. 했을 텐데. 일본 군인들이 있었던 거예요. 우금치 언덕 숲 위에 놈들이 관인들과 있었던 겁니다. 난, 우리는 도망칠 수가 없었어요. 어디로요? 마님에게요? 관가로요? 그래서 어떻게 하게요? 다들 그런 생각이었어요. 돌아갈 길이 없었어요. 죽어도 거기서 죽고 싶었지요. 우린 우리 싸움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우금치만 넘으면 한양으로 올 수가 있었던 거예요. 한양 광화문 앞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분명 우리가 멈출 곳은 우금치는 아니었지요. 일본인 때문에. 그곳에서 많은 친구, 형님들이 죽었지요. 난 동학이 아니에요. 그저 머슴일 뿐이었지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형님들이 피를 흘리며 바람 앞에 풀처럼 푹푹 쓰러져 굴렀지요. 우린 그저 우직한 소처럼 위로 올라갔고요. 그들은 총을 쏘았어요. 마치 볏짚에 대고 발길질을 하듯 쓰러뜨렸지요. 그만 했을 때, 이 형님은 저를 끌고 내려갔어요. 도망을 친 거지요. 저는 식구들 피가 식기도 전에 줄행랑을 쳤습니다. 녹두장군이 어찌 되었든 누가 죽었건 말건 저는 도망을 쳤습니다. 두 손에 식구들의 피를 씻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저는 도망치며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습니다. 저도 죽었어야 했는데 하고요. 저는 밤마다, 아저씨처럼 꿈을 꾸어요. 총소리가 들려요. 귀가 울리도록, 가끔 동생이나 어머니의 울음소리도요. 황토연의 함성도, 우금치의 비명, 저 지독한 저승에서 오는 사자들의 총소리도요. 온몸이 피로 물들어요. 늘 그 소리를 들어요. 우시는 군요. 울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미칠 지경입니다. 그 생각만 하면 저도 제 정신이 아니지요. 저는 제 몸이 그들의 함성이나 울음, 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저는 이미 예전의 땅을 파던 그 머슴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반드시 그곳에 돌아가도록 하겠지만, 이번 일을 마치면 말입니다. 그때 분명 저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마님이 살아계실 때. 마님은 무슨 말이고 하겠지요. 그 말이 듣고 싶어요. 아마 무식한 놈이라고 하겠지요. 말이 많았군요. 그만 우시지요.”
나이보다 더 성숙해 버린 청년은 스물다섯이었다. 그는 자기 몸이 자신이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을 때, 어쩌면 그럴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날 우리는 마루에 앉아 마주보며 소매가 적시도록 함께 울었다.
그는 왕후가 살해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자기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해 달라고 했다. 그날 내가 본 것을 소상히 이야기했을 때 다음날 새벽 일찍 방으로 건너와 울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반드시 자기 손으로 복수를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나는 나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는 그러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만이 아니라 이미 자기 조직이 있음이 분명했다. 몇 명 아는 것이 아니나, 그들은 은밀하여 굳이 말을 하지 않지만 연계 조직이 있어 어떤 목적에 따라 나를 잡아 두는 것 같았다. 그 연계 조직에 관해서는 한마디로 하지 않았다. 젊은 사내에게 물어봤는데, 나를 위해서 그런다고 했다. 그건 묻지 말라고 했다. 어느 날, 밖을 다녀온 나이 든 사내가 곧 거처를 좀 더 은밀한 요사채로 옮기자고 했다. 한성신보 직원 하나와 험상궂게 생긴 사내 둘이 총을 차고 수원시내의 기방을 돌아다니며 내 행방을 캐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칼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사내는 곧 그들이 나를 찾아낼 거라고 했다. 그들이 그냥 이곳에 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 거처 자체를 옮길 수가 없다고 했다. 수원에서는 그나마 이곳이 제일 안전하다고 했다. 며칠만 기다리자고 했다. 어디서 연락이 오면 한양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눈이 까맣게 내리는 날이었다. 내가 있는 처소 문이 열리더니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서툰 조선말을 하는 일본인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며 몸을 움츠리며 옆방의 그들을 부르려고 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도 이미 어디론가 도망을 쳤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놈은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왔다고 했다. 곧 마루로 한 명의 그림자가 보이더니 문이 열리며 바람을 타고 눈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를 보자, 김승일 처참하게 죽어가는 환영이 보였다. 나는 공포에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을 던지고 유일한 문이 있는 그들에게 뛰어들었다. 그들 뒤에 문 입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그들을 발로 걷어차고 냅다 뛰어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들은 훈련이 잘된 사내 들이었다. 더구나 나는 환자였다. 그들은 내 손을 잡아 돌리며 발을 걸어 마당으로 나를 집어던졌다. 나는 마루에서 고꾸라지며 마당에 쌓인 눈밭에 굴렀다.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고 했는데 밖에는 두 명의 일본 자객들이 서서 나를 에워싸고 막 칼을 빼 들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마루에 서 있던 한성신보 직원이 등을 펴고 목을 움켜쥐며 마당에 쓰러졌다. 그의 목에 뭔가 박혀 있었다. 어두운 처마에서 젊은 사내가 나타났다. 또 한 번의 바람 소리가 나더니 자객 둘이 그대로 멈추어 섰다. 그들의 목에 짧은 화살이 관통한 것이다. 자객이 화살을 맞고 다시 움직이려 하자 몇 개의 화살이 날아와 그들의 가슴과 다리 꽂혔다. 곧 작은 활을 손아귀에 움켜쥔 사내 서넛이 화살을 겨누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모든 것은 삽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한 자객은 그대로 멈추어 서서 칼을 땅에 꽂고 서서 경력을 일으켰고 다른 사내는 뒷걸음치며 담벼락에 기대어 섰다. 그들의 몸에서 나온 피가 눈밭에 뿌려졌다.
“김승일을 살해한 자들이요.”
나이 든 사내는 내 손을 끌며 대문을 나갔다. 항상 둘만 봤는데 다섯이나 나타났다. 나는 그의 손에 끌려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나갔는데 오금이 저리고 턱이 떨렸다. 곧 뒤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조금 후에 내가 머물던 처소에서 불길이 솟았다. 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내 팔짱을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왕후를 살해한 자들입니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7.
그날 밤, 수원 근교에서 말을 타고 어둠을 틈타 날이 새기 전에 한양으로 올라갔다. 배를 타고 마포나루로 올라서 다시 말을 타고 서대문 어디론가 따라갔다. 민가에서 며칠을 묵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에 검은 관복을 입을 사내들이 나타냈다. 나는 그들의 손에 끌려 집을 나왔다. 그저 따라오라고만 했다. 그 사내들은 서대문 밖에서 비밀리에 양복을 입게 하고 어두운 밤이 되자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가는 것을 곳을 보니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간만에 걸어보는 거리였다. 두려움 속에 가슴이 트이는 것 같았다. 공사관에서 한 사내를 만나 차대접을 받았다. 그는 러시아 황제 특사로 와 있는 사내였다.
“우리가 초면은 아닐 겁니다.”
사내는 웃으며 친근하게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 말뜻을 알 수가 없었다. 후에, 그가 경복궁,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몇 가지 그날 있었던 일을 묻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얼굴을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조선이 걱정되고 일인들이 침략의 목적을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 자신에게도 이 조선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당시로써 내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주절거렸지만 대부분 러시아 말이 섞이어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조선인 관리가 와서 나를 오라고 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곳에 은밀한 방에 생각지 못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 고종 임금이 앉아 있었다. 나는 놀라 엎드려 절을 하였다. 나는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다. 어떤 공포로서가 아니라, 그는 새삼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조선에 대한 감정이 일순간 일어난 것이다.
그는 울먹이는 나에게 울음을 멈추고 일어나게 했다. 곧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나가고 둘만 남아 있게 되었다. 고종은 내가 왕후의 최후를 본 유일한 조선인이라고 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는 나에게 그때 상황을 자세하게 듣고 싶어 했다. 나는 고종에게 그 상황을 본대로 설명을 해 주었다. 고종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려다 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차를 따라 주고는 자신의 말을 했다. 노쇠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난 복수를 할거네.”
그는 나직이 말을 하였다.
“내가 왕인가? 한나라의? 오백 년 전왕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이런 일이 있었나? 한번 말해보게? 이런 일이? 궁에서 하루아침에 시위대는 다 도망을 치고 문을 따주어 내전에 들어와 왕비를 참소하는 일이? 그러고도 나는 왕인가? 내가 왕인가?”
그는 자기 말을 하다가 흥분했다. 빠르게 말을 하며 주먹을 쥐고 부들거리며 떨었다.
“아, 그때 비가 시해를 당하던 날, 나에게는 뺄 칼도 없었고, 놈들의 먹을 딸 힘도 없어. 늘 붙잡혀 있어. 누군가에게 말이야. 왕비, 그래 왕비도 그랬지. 항상 나를 질책했지. 나는 할 말이 없었어. 아버지도 그렇고 늘 그들은 나를 붙잡아 흔들었지. 신하들도 그저 웃을 뿐이야. 내게 말을 하지 않았지. 그들끼리 수군덕거릴 뿐이었다. 마치 장송곡을 부르듯 말이야, 조선을 망해야 해, 하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끼리 있을 뿐이었지. 나는 뭐였나? 그저 그들이 잡아 주는 소매에 끌려 명하고 이끄는 대로 걸어 다닐 뿐이었지. 나는 그들의 생각이었고 사상이었고, 짐이었지. 특히 왕후는 늘 소리쳤어. 내 앞에서 말이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대원군이 어쩌고저쩌고. 나중에는 말도 하지 않더군. 하지만, 그녀가 결국 죽었지. 내가 그랬나? 자신이? 대원군이? 이제 그 모습도 그립군. 그날 나는 소리쳤지. ‘도망치시오!’ 라고 큰소리로 말이야. 그게 다였어. 내가 한 일이 말이지. ‘도망치시오!’ 마치 당신이 이 나라의 미래요 하는 말처럼. 그런 왕인데 어찌 왕비가 목숨을 구할 수 있겠나? 엉! 수치, 수치, 나는 여기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사관에 갇혀 있는 걸세. 여기는 조선이 아니라, 이미 간신과 공사관의 나라가 되었어. 민비와 아버지도 나도 이 땅의 주인이 아니지. 이제야 그걸 알겠군. 오! 민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허둥댔는지? 애초 아버지의 손을 따라 궁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어. 아버지는 운명이라고 했지만, 아니지. 그게 아니었어. 왕후도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자네도, 나도 그저 시장 통에 굴러다니는 시정잡배가 돼야 했었어. 이런 비굴한 삶은 면했을 텐데. ‘도망치시오!’ 라니, 솔직히 왕이 할 소리는 아니었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겠네만, 그건 왕이 할 소리는 아니었네. 자네 앞에서 못할 소리를 했네. 이번 일은 너무나 슬프고 통탄할 일이네. 다시는 조선에 나 같은 불분명한 왕이 나서는 안 될 걸세. 그게 내 유언이자, 전왕들에 최소한의 사죄가 될 걸세.”
그는 자리에 앉아 진정을 하고 차를 들었다.
“왕후를 위해 무엇을 할까?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했네. 이대로 치를 수가 있겠나? 아, 왕후는 구천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네. 그의 날카로움 음성이 내 사지를 떨게 하여. 수치스러운, 수치스러운 일이지. 사는 게 수치야. 곧 적들에게 포살령을 내릴 걸세. 자네가 할 일이 있을 걸세.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하겠지만 살아 있으면 밀서가 갈 걸세.”
그는 이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나를 나가라고 했다. 문을 나올 무렵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곧 어둠을 통해 다른 이들과 러시아 공관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을 따라 제물포로 근교의 시골로 들어가 다시 그 두 사람을 만났다. 젊은 사내는 고종을 만나고 왔다는 말에 너무도 부러워했다.
우리 셋이 다시 한강을 건넜다.
한강은 내 눈물처럼 흘렀다. 멀리 삼각산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나는 복받치는 눈물로 소매를 적셨다.
나는 당분간 몸을 숨기고 살았다. 그 겨울이 다 갈 무렵, 다음해 2월에 나는 그곳 사내들과 강화도 산에 올랐다. 며칠 후, 한양으로 들어오는 배편에서 고종에 의해 왕후 시해 공모자들에 들에 대한 포살령이 내려진다는 밀서를 받았다. 그날 이후 나는 여러 동료와 어울려 지체 높은 관료들 몇을 찾아다녔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도망치는 매국노의 목을 치기도 했고 잡아다 껍질을 벗기는 것을 보기도 했다. 불도 태웠으며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1897년 그해 겨울, 나는 한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11월 말경에 있는 명성황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거의 2년 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개석상에 고종의 친견까지 허락을 받았다.
나는 밀사에 의해 그에게 다가갔다.
고종의 표정을 참을 수 없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은 얼굴 속에 있는 얼굴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지금 서서히 기우는 한 시대의 끝을 보는 왕으로서 또 다른 시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간단한 안부를 묻더니 이내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내 모습이 어떤가?”하고 물었다.
“건장하십니다.” 내가 말했더니 그는 잠시 침묵을 하더니 살짝 슬픈 미소를 짓더니 노쇠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그럴까? 그러나 나는 왕후를 지키지 못했네.”
그 날은 화려하지만 우울한 날이었다.
“가끔 나는 조선의 기운이 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하네.”
그는 인파가 끊임없이 모여들고 장례식을 준비하는 광경을 쳐다보며 말을 했다. 나는 그의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떨리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백성은 살길을 잃고, 신하들은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있네. 저기 외국인들을 보게. 웃고 있잖나.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궁전에서 아직 멀쩡하게 법도가 살아 있는데 왕비가 살해당했으니 이보다 우스운 일이 어디겠나? 저들이 보는 내 모습이 어떻겠나?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비통한, 비통한 세월이네.”
그는 돌아서서 내 손을 잡았다.
“자네라면 그날 어찌했나?”
“일인들의 포악성에 누구도 어쩌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 나만 빼고 다들,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네. 아무리 바보 같은 사내라도 말이야. 그래 내가 그날 함께 죽었어야 해. 내가 어찌 한 나라의 임금이 될 수 있는 건가? 안 그런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고종임금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극도의 슬픔을 가누고 있었다.
“오늘은 왕비의 장례식이네. 슬퍼하세. 부끄러운 날이네.”
그는 돌아서 한동안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와 줘서 고맙네. 그날을 잊지 말게. 왕후가 시해당한 그날을. 자네가 내 백성이라면.”
나는 왕의 친견을 마치고 나와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뒤로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미 내 얼굴을 본 적들에게 더는 노출이 되는 것은 좋지 않을 듯싶었다.
장례식장을 부지런히 빠져나오는데 나를 쫓는 낯익은 사내 몇이 있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틈을 비집고 그들은 내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두 명은 한성신보사 기자들이었고 나머지 서넛은 무사들같이 건장했다. 눈빛은 내 얼굴을 각인하려는 듯 살기를 띄고 죽일 듯 노려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내 손을 꼭 쥐고 은밀하게 말을 전했다.
“자네가 여태 살아 있다는 게 놀랍군.”
그들은 웃으며 얼굴을 실룩였다.
“어쩐 일인가?”
“국모 장례식에 참석을 하는 게 백성의 도리가 아닌가?”
“그렇군. 그런데 슬퍼하는 눈치가 아니군.”
“난세가 사람의 감정을 메마르게 하더군.”
주변에 건장한 일본인들이 급히 몰려들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세.”
내 옷소매를 잡으려는 손을 뿌리치고 소리를 질렀다.
“명성왕후 시해범이 여기에 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을 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들도 더 이상 따라오지 못했다.
사흘 후,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제물포 항구에서다.
한성신보사 직원 셋이 일본으로 출항하는 여객선에 배를 타려고 포구를 거닐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줄 곧 그곳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묘한 시선이 교차했다. 그들은 지난 2년간 나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는데 다시 사흘 만에 항만에 나타내자 적잖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얼굴이었다.
“묘한 일이군.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여기에 나타나니 말일세.”
“이런 게 세상 일 아니겠나?”
“그냥 나타났을 리는 없고, 목적이 있을 텐데.”
“오늘, 그날 왕후의 명을 거두어간 K란 친구가 이 배를 탄다는군. 그 친구에게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불가피하게 답례를 하려고 여기에 왔네. 성질대로 배를 통째로 불태우고 싶지만, 이젠 피 보는 일도 지겹군. 이번 일만 마치면 나도 잠깐 쉬어야겠네. 자네들처럼 말이야. K를 불러 준다면 자네들을 놔주지.”
“거절한다면.”
“마음대로 하게. 배가 불타고 자네들도 일본 땅을 밟지 못하겠지.”
내가 멀리 있는 마차에 손짓을 하자 짐이 쌓인 포장이 걷어지며 작은 대포 포신이 살짝 보였다.
“저거 작지만 진짜네.”
“본국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지난번에 민비였지만 이번에는 고종이 될 걸세. 자네가 정치를 잘 모르고 날뛰고 있지만.”
“그건 관료들의 일이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자네들은 어차피 이곳을 그냥 놔두지는 않을 테니, 나는 상관이 없네.”
배는 곧 출발을 서두르고 출발할 시간이 다 되어 선원이 나와 신호를 했다. 그들 중 하나가 총을 꺼내 내 머리를 겨누었다. 나는 바다를 등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려달라고는 하지 않겠네. 나는 단지 그 녀석을 보낼 수 없다는 것뿐이야. 자네들 같으면 내 처지에서 어떻게 하겠나? 그리고 일본에 건너가 꿈도 이루어야 하지 않나. 글도 쓰고 저술도 하고, 학문을 어찌하려고 하는가?”
또 손짓을 하자 마차를 지키고 있던 사내 하나가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는 총을 내렸다. 배에서 사람들이 내다보고 웅성거리기 시작을 했다. 배의 출항이 지연되는 것에 두려운 얼굴들이었다. 그때 배 안에 있던 일본인 K가 나타났다. 그는 왕후를 직접 시해한 범인이었다.
“저 얼굴 죽어도 잊을 수가 없군.”
나는 묘한 흥분에 빠졌다. 그의 목에 칼을 그어 머리 껍질을 벗기는 상상을 했다.
“오랜만이군.”
나는 그에게 밝은 목소리로 손을 흔들며 소리 쳤다.
“나를 기억하나? 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죽였지. 내가 자네를 잡으러 왔네. 어디에 있다가 그렇게 말없이 떠나려나.”
나는 벅찬 마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가 만주에 갔다는 말을 듣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아래로 주춤거리며 내려왔다.
K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한성신보사 직원 둘이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그와 스쳐 배에 올라탔다.
“자네가 조선 여자를 무척 좋아하고 꽤 짓밟았다더군. 내 말이 아니고 저들이 그런 말을 하더군. 늘 여자를 품고 있다고. 어떤 여자를 원하나? 엉! 아줌마? 궁녀? 처녀? 여염집 아낙? 어떤 볼기짝을 내 줄까? 엉!”
두 일본인이 멋쩍은 얼굴로 멈칫 하더니 이내 배에 올라탔다. 배는 출항을 알리는 부저 소리를 내고 그 사내와 나는 항구에 남았다. 곧 마차가 움직이고 근처에 있던 사내들이 몇이 모여 들었다. 사내들은 K를 앞세우고 어두워지는 항구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멀리 강화쪽 바다에서 기러기들이 나르고 바닷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는 한동안 서서 배가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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