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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든 사과

  • 작성일 2011-05-23
  • 조회수 675

 

멍든 사과

 

 나는 화장실 변기통 위에 팔을 걸치고 널브러져 있다. 샤워를 하기 위한 알몸 상태지만 행동할 의지가 없다. 이제 곧 지진이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게 흔들리며 부서지고 무너져 내릴 것이다. 콘크리트 따위에 맞으면 꽤 아프겠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되도록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몸을 바닥으로 옮겨 기어간다. 수도꼭지를 돌려 욕조에 물을 받는다. 이럴 때 소리는 도움이 된다. 생각을 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 지난 세월 지나치게 많은 생각들을 하며 살아왔던 게 사실이다. 책임지지 못 할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이때 갑자기 바닥에 미동이 인다. 세면대 위의 컵이 내 무릎 위로 툭 떨어진다. 무릎에 금이 간 것만 같다. 눈물이 고인다. 한참을 끙끙대고 욕조에 물이 흘러넘치고 아픔이 조금 가신다. 나는 몸을 일으켜 욕조 안으로 몸을 옮긴다. 따뜻한 물은 좋다. 몸에 힘이 풀리며 소변을 내보낸다.

 사과를 껍질째 깨물고 싶어진다. 찐득찐득한 즙이 턱을 타고 흘려 내려가도 좋겠다. 세잔이 사과를 그리는 동안 세상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한 친구는 대답했다. 세상은 모르겠고 다른 사과들은 중력 때문에 떨어지고 있었다고. 재수 없는 뉴턴 같으니.

 화장실 입구에는 벗어놓은 캐주얼 정장이 놓여있다. 곧 지진이 찾아오면 이 화장실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건물들이 다 주저앉고 말리라. 사람들의 비명소리 따위엔 관심 없다. 하찮은 사람들. 뭔가가 되고 싶어서 죽도록 열심히 알람 소리에 맞춰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 그렇게 매일같이 야근을 해도 나라는 불황이란다. 쾅쾅쾅.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나는 벌떡 일어나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대충 닦고 문 앞에 놓인 캐주얼 정장을 입는다. 오랫동안 몸에 배인 습관 같은 움직임이다. 그리고 현관문을 연다. “자장면 시키셨죠?” 지진은 오지 않고 주문도 하지 않은 자장면이 도착했다. 돈을 지불하고 자장면을 받아든 채 거실 소파에 앉는다. 다 불어터진 자장면을 먹는다. 가죽 소파에 물이 스민다. 나는 감기 기운을 느낀다. 위층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온다. 적어도 열세명은 되는 거 같다. 저 소란이 괴로워 주말마다 이사를 가고 싶었다. 나는 리모컨을 찾다가 포기하고 직접 TV 브라운관에 다가가 전원을 켠다. 볼륨을 최대치로 올린다. 요가 프로그램. 자장면을 바닥에 내려놓고 요가를 한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을 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인도에 간 친구는 잘 지내고 있을까. 여자 혼자 가면 위험하다고 하던 데. 어차피 서로 다시 볼 기회는 없을 테지만. 갑자기 갈증에 메슥거림이 더해진다. 콜라가 필요하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나서 콜라를 마셨던 기억이 났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 메슥거림이 더 심해진다. 쾅쾅쾅.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린다. 조급히 TV를 끄고 나가 문을 연다. “너무 시끄러워요, TV 소리 좀 줄여주세요.” 한 손에 콜라 500ML를 든 젊은 백인이다. “아닌데요. 여기엔 TV가 없어요.” 백인은 잠시 말이 없더니 콜라를 한 모금 마신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콜라 한 모금만 마셔도 될까요?” 백인은 더 잠시 말이 없다. “TV 소리 다시는 크게 안 할게요.” 백인은 그 말을 듣더니 콜라를 마시면서 가버린다. 나는 감정을 담아 문을 세차게 닫고 들어온다. “개새끼가 한 모금이 아까워서.” 혼잣말을 하며 뭐 먹을 게 있나 냉장고를 열어 본다. 눈에 들어온 건 광어회 한 접시. 꺼내서 잠시 내려다본다. 도저히 날 것은 현재로서 못 먹겠다는 심정이다. 쾅쾅쾅. 또 누가 현관문을 두드린다. 광어회 접시를 든 채로 나간다. 문을 여니 자장면 배달부가 서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음식을 드시고 그러세요?” 아닌데요, 라고 말하기엔 입술을 둘러싼 춘장 딱지들이 민망하다. “죄송합니다. 이거 광어횐데… 어떻게, 이거라도 좀…” 배달부는 광어회 접시를 받아 철가방 안에 넣고 떠나간다. 신발장 위에 놓인 망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망치를 들어 올려 있는 힘껏 초인종을 내려쳐서 박살낸다. 아무도, 더 이상 제발 아무도, 방문하지 말라는 뜻이다. 후련한 마음 뒤에 생각해 보니 사실 아무도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었다. 그들은 직접 문을 두들겼다. 그래, 앞으로는 응답하지 않으리라.

 이제 곧 지진이 올 텐데, 내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정(情)없는 관계였어도 이 세계와의 이별에 대한 개인적인 마무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젠장, 이미 괜찮은 기회는 날아간 것 같다. 변기 위에 널브러진 채로 잠이 들거나 욕조 속에서 따뜻하게 있다가 물이 미지근해지고 추워질 때쯤 얼굴을 수면 아래로 담그고 숨을 참아 기절해 버리면 좋았을 텐데. 뭐, 아무렴. 타로카드 술사의 말에 따르면 오늘이 가기 전에 이 세계의 바닥은 흔들리고 갈라지고 솟아나서 표면의 각질들을 모두 제거해 버릴 것이다. 더 이상의 지리멸렬함도 이것으로 끝이다. 조금 더 게으르게 살지 못 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두두두두두두두두. 드디어 왔다.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쿵! 천장 어딘가의 일부였던 콘크리트 한 조각이 낙하한다. 무서우면서도 이상한 희열 같은 게 내 온몸을 휘어 감싼다. 신나고 재밌다. 그러면서 어느새 나는 식탁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있다. 잠시 후 진동이 멈춘다. 감칠맛 나게 진행되는군. 그 때, 콘크리트가 빠져나온 자리, 천장의 구멍에서 무언가가 꾸물꾸물 내려온다. 몸이 끼는지 힘겹게 하강을 시도하는 물체는 순백색이었다. 그러다 쑤욱, 거대한 물체가 바닥에 척 착지한다. 크다. 식탁 아래 엎드려 있는 인간과 마주한 그것은 절지동물 지네였다. “사..살려주세요.” 저절로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다.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안면이 굳어 버렸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순백색 절지동물 지네는 착지 이후로 움직임이 없다. 마치 흰색 페인트 통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눈알마저도 백색이어서 시선을 감지할 수 없다. 정말이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가 이렇게 처참하게 불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다 지네 근처에 놓인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을 보고 생각이 났다. 그래, 이제 곧 지진이 찾아올 것이다. 그것은 순백색 절지동물 지네보다 강한 것이다. 식탁 아래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몸을 일으키고 싱크대로 몸을 옮긴다. 지네와 싸워야 할 것인가. 싸운다면 어떻게 상대해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네의 약점에 대해서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싶어진다. 내가 결국 생각해낸 발상이라는 것은 식칼이었다. 식칼을 눈에다가 던지자. 모든 동물에게 눈은 약점이 된다. 재밌게 생각하자. 이것은 세계 멸망 이전에 준비된 이벤트 같은 것이다. 이 승부의 결과에 따라 내 다음 생이 결정될지 누가 아는가. 이어 슬쩍 지네의 눈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을 때, 그것은 이미 거기 없었다. 헛것을 보았던 것인가. 그 순간, “아, 씨발! 천장에 있어!” 라고 소리를 지른다. 쾅쾅쾅. 누군가 또 현관문을 두드린다. 대체 계속 누가 이렇게 방문한단 말인가. 지금은 가고 싶어도 문을 열어주러 도저히 갈 수가 없다. 바보처럼 눈물이 흐른다. “제발, 가만히 좀 내버려 두세요. 이제 다 끝났잖아요. 끝까지 왜 이러는 거예요. 미련 따위 없다구요. 그냥, 솔직히 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오, 할렐루야. 하나님 지진 좀 빨리 진행해 주세요. 이렇게 두 손 빌어 소망합니다. 도와주세요. 타로카드 씨발, 왜 이렇게 꾸물거리냐고. 올 거면 빨리 속 시원하게 해치워 버리란 말이야.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당신을 모독한 게 아니랍니다. 아아아. 몰라. 순백색 절지동물 지네 이 씨발새끼야. 그래, 깔쌈하게 한 판 붙자. 내려와. 정정당당하게 평지에서 승부하자고! 주말로 부족해서 이제 마지막 생의 순간까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났냐? 독을 품은 거로 치자면 여기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홧김에 식칼을 던졌다. 지네의 눈으로 향하길 바랐던 식칼은 지네의 둘째 줄 오른쪽 다리에 박혔다. 초록색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리고 순식간이었다. 순백색 절지동물 지네의 움직임은 쏜살같았고 나약한 인간 한 명을 집어 삼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할 말을 잃었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그 곳엔 내장 같은 것이 없는지 마치 짜놓은 관에 들어간 듯 누워있기 알맞았다. 곧 위액 같은 것이 나오겠지. 음식물 소화에 걸리는 시간이 곧 죽음에 이르는 카운트다운일 것이다. 제발 그 와중에 다른 인간만 먹지 말아줘. 귀찮은 일들은 이제 그만. 홀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런데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이 찾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돼지들과 목을 잡힌 닭의 심정도 이와 같았을까. 딱히 할 말이 없다. 삶에 굉장히 집착하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보내왔던 인간이라는 고등동물도, 생의 끝에서 스스로에게 해줄 말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끽해야 아직 생존할 다른 인간들에게 남기는 유언과 고심 끝에 고른 아포리즘 몇 구절 속에 기억되길 바라는 존재의 욕심을 담아 보낼 뿐이다. 지금은 이마저 소용없다. 기억할 사람도, 기억될 사람도 모두 함께 끝장이다.

 한 시간 정도 졸았을까. 뭔가 느껴진다. 그래, 드디어 온다. 왔다. 지금이다. 이제야 명확히 느낄 수 있다. 타로카드 술사가 예언했던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다. 마치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가 저음으로 거대하게 밀려온다. 지네의 죽음으로 인식될 한 인간의 죽음은 이렇게 세계의 끝과 함께 하는 것이다. 안녕히. 우르르 쾅쾅쾅 쿠구구구구구구궁,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콰지직 쿠궁. 와우,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신체적 고통도 없다. 멸망이 이토록 신나다니, 전혀 예상치 못 했던 부분이다. 그런데 슬슬 괴롭다. 확실한 짐작은 할 수 없지만 체감 시간은 하루 반나절이 지나간 거 같다. 계속되는 롤러코스터의 끝나지 않는 운행에 몸이 축나고 있다. 나는 구토를 다섯 번이나 했다. 자장면 냄새를 지나 이젠 쉰내만 가득하다. 지친다. 대소변도 그냥 싸질렀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다 깨기를 반복했고 어느새 세계는 고요해졌다.

 스스로 의식이 남아있음을 느끼는 순간 나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뭐야, 아직 살아 있는 거야? 그리고 무의식중에 일어나려 몸을 일으켰고 머리를 가까운 내벽에 부딪쳤다. 빠직, 금이 가는 소리. 어라, 퍽! 퍽! 나는 머리를 연신 박아본다.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퍼걱. 지네의 등껍질을 뚫고 인간의 머리 하나가 바깥으로 드러난다.

언젠가 너무 피곤하고 짜증나고 우울하고 불안했던 하루.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우울하다고 말했었다. 친구도 때마침 우울하다고 하였고, 서로 위안 받았다. 순간이동을 하여 침대에 누워 어서 잠들고 싶은 마음으로 꽉 찼던 내면. 나는 집에 도착해 씻지도 않고 곧장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은 달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잠이 들고 날이 밝아와 눈을 뜨면 전혀 다른 세계가 준비되어 있었으면 하는 바람. 물론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온 몸으로 전달되는 어제와 같은 세계의 분위기. 반복의 성공, 변화의 실패. 인간이 소망만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었다면 아마 미친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게 안 되니까 세상 대신에 인간이 미치곤 한다.

 순백색 절지동물 지네는 목숨이 언제 끊겼는지도 모르게 여러 쌍의 다리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다른 세계의 아침이 눈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영화 속 장면보다도 더 현실감 없게 다가오는 풍경. 축축하지만 건조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질감. 세계의 표면은 굉장히 지저분했다. 그리고 초록색 액체와 토사물과 변 등으로 얼룩진 채 서있는 나란 인간도 굉장히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더럽게 살아남았구나. 어쨌든 걷는다. 모두 죽은 것인가.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지네는 죽고 그 안에 먹혔던 인간은 살아남았다. 지네가 인간을 구원한다는 내용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듯 한 곳에 도착한다. 저것들은 명품이 아닌가. 샤넬, 루이비통, 돌체 앤 가바나, 프라다 등등등. 잊을 수 없는 브랜드 네임들이 눈앞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찢어진 것만 아니면 잘 털어서 입으면 될 것 같다. 속옷은 캘빈클라인이 좋겠다. 나는 한동안 신나서 시멘트 잔해 사이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갈아입을 것을 선택한다. 씻지 못 한 몸이 찝찝하여 주운 티셔츠에 페트병 생수를 부어 몸을 닦아낸다. 안감이 끝내주는 명품을 몸에 걸치니 생기가 돋는다. 선글라스까지 하나 걸쳐주니 안성맞춤이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큰 벽돌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의기양양하게 선팅된 렌즈를 통해 바라본 세계는 그러나 망해버린 도시의 흑백사진이었다. 나는 불쾌해져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다. 병신 같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어져야 할 건 이 세상이 아닌 여기 끈질기게 살아있는 이 찌질한 병신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담배 피고 술 마시고 싶어진다. 술병들을 찾아보는 데 다 깨져서 유리조각이 되어 버렸다. 결국 위스키도 보드카도 아닌 팩소주를 손에 들고 짜 마신다. 나는 지포 라이터로 연신 불을 붙여가며 담배를 핀다. 담배 한 갑을 앉은 자리에서 다 펴버리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이상한 희망에 마음이 잠시 들뜬다. 한 갑을 다 펴갈 때 쯤 머리가 몹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더니, 그리고 나는 기절했다.

 꿈을 꿨다. 나체로 잔디 공원을 뛰어다니면서 사과를 깨물어 먹고 있었다. 사과가 너무 아삭하고 달콤하고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경찰복을 입은 두 사람이 달려와서 내 몸을 잡고 흔들며 어딘가로 끌고 가려 했다. 경찰관들의 얼굴을 짧게 확인했다.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인 데,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퍽, 그 중 한 명이 내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그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고 눈을 떴을 때 사람의 얼굴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사람이다. 그것도 흑인종이다. “괜찮아요? 살아있네요.” 그래, 또 죽지 못한 것이다. 별다른 대답도, 반응도 없는 나를 보며 흑인종은 담담한 태도를 취했다. “적어도 이 근방에는 저희 둘 말고 아무도 없는 거 같아요. 게다가 물이 다 휩쓸어 갔는지 시체조차 찾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살아남으신 거예요?” 과도한 니코틴 탓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헛구역질을 조금하니 흑인종이 물을 건넨다. 물을 마시고 나니 속이 조금 가라앉는다. “지네한테 먹혔는데, 지네는 죽고 저만 살아남았어요.” “하하하하. 꿈 꾸셨나 봐요. 지네는 무슨, 그냥 운 좋게 살아남으신 거지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나저나 만약 정말 저희 두 사람만 살아남은 거라면, 좀 문제네요.” “뭐가요?” “동성이잖아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 말에 나는 미친 듯이 깔깔대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흑인종은 살짝 당황한 듯 “뭐가 그렇게 웃겨요?” 라고 물으며 깔깔대는 웃음을 끊고 들어온다.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내가 말했다. “원래 그렇게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살아왔어요? 지금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그런 걸 걱정해요?” “아니요. 그런 식으로 비꼬실 이유는 없을 거 같네요. 특수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인간이라는 게 거기에 맞게 적응하고 활로에 대해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래, 당신말대로 우리 둘이 무언가를 한다 해도 그건 자위 밖에 안 돼요. 저는 솔직히 세계가 멸망한 뒤에도 살아남은 사실 그래서 내 앞에 주어진 이 하루조차도 넘겨야 하는 건지 의문이에요. 어차피 인류의 미래는 이미 끝났으니까 말이죠. 결코 우린 아담과 이브가 될 수 없어요. 오케이?” “그럼 어떡할 건가요?” “깔려있는 인스턴트 음식들이 다 떨어질 때쯤 굶어죽겠죠.” “스스로 죽는 건 두려운 모양이군요.” “죽는 과정에서 아픈 게 싫은 거예요.” “정 원하신다면 대신 죽여드릴 수도 있어요.” “지진 날 때 벽돌을 머리에 맞았나. 원래 이렇게 매사 진지하신가요?” “아니, 진심이에요. 어차피 당신과 나, 이 세계에 인간은 둘 뿐이니까.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해줘야죠.” “혹시 알아요?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 다섯 사람, 아님 백 사람이 살아남았을지? 그래, 우리 둘만 살아남았다고 쳐요. 그럼 나 죽인 다음에 그 다음에 당신은 어쩌려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요.” “아무래도 혼자서는 심심할 텐데…” “그러니까요. 그러니 죽지 말고 함께 해요. 우리가 아까 말처럼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로서 꼭 무엇이 되거나 중요한 역할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정말 막연하지만 혼자보다는 둘이 나을 거 같아요. 마지막이잖아요.” “기존 세계에서 뭐하셨어요?” “체조선수.” “흑인은 본 적 없는 거 같은 데.” 갑자기 포즈를 취하더니 덤블링을 연속으로 세 번 하는 흑인종. “이제 믿을 수 있겠죠? 당신은 무슨 일을 하며 살았나요? 입고 있는 옷을 보니 꽤 부유한 계층이었을 거 같은 데?” “아, 뭐 부유할 거까지야. 그냥 디자이너였어요. 패션 디자이너. 지금 이 옷도 직접 디자인한 거예요.” “멋지네요. 결혼은 했었어요?” “결혼이요? 아, 했죠. 모, 모델. 패션모델이랑.” “그러고 보니, 언제 잡지에서 본 거 같기도 해요.” “하하하”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행복했겠네요.” 그 말에 웃음이 싹 가셨다. “저도 체조하면서 만난 코치랑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소소하지만 화목하게 살았어요. 그 삶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소멸되어 버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네요.” 그러더니 흑인종은 멍하니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정말 지금 같이 죽어버리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인 걸까요?”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면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 행동을 한다. “신은 살아남은 두 인간의 남은 생을 어떻게 활용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 이전에 왜 하필 성별도 같은 우리인 걸까? 장난치는 걸까?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내 말에 대해 여전히 스트레칭을 하던 흑인종은 말했다. “신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요? 너무 깊게 파고들수록 머리만 아프잖아요. 몸을 움직여 봐요. 한결 나아질 거예요.” 흑인종의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딴청을 피우고 있다.

 딴청 피우던 사람은 말한다. “사과가 먹고 싶어요.” “사과요? 있을까요? 먹고 싶으면 한 번 찾아나서 볼까요?” 그리고 두 사람은 돌아다니다가 무너진 건물 더미 어딘가에서 비닐 팩에 쌓인 사과를 찾아낸다. 대부분이 으깨졌고 그나마 멀쩡한 것도 여기저기 부딪쳐서 멍이 들어있었다. “이런 건 먹기 싫다.” “온전한 상태의 사과를 구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거예요.” 나는 멍든 사과를 바라보며,

 “어렸을 때 아버지랑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사과가 가득 담긴 검은 봉지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는데, 언덕길을 오르다가 그만 봉지를 놓쳐버린 거예요. 사과는 퉁퉁 거리며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허겁지겁 내려가 사과들을 봉지에 다시 주어 담았는데, 죄다 여기저기 멍이 들어 버린 후였죠. 아버지는 칠칠치 못 하다며 내 머리통을 몇 번 연이어 때렸어요. 나는 울음을 터뜨렸죠. 사과라는 게 그래요. 멍이 하나만 있어도 별로 먹고 싶지가 않아져요. 사실 그 멍든 부분 말고 다른 부분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말이죠. 그 뒤로 사과를 안 먹어요. 근데 어제 갑자기 사과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꿈도 꿨죠. 지금도 먹고 싶어요. 이상하죠. 그 사건 이후로 사과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졌는데… 어떤 날은 일부러 사과를 사서 벽에다가 막 던지기도 했어요. 그 때 얼마나 기분이 후련하던지. 내가 만약 세잔이었으면 그림을 한 장도 못 남겼을 거예요. 그림 그리는 도중에 사과를 다 집어 던졌을 테니까.”

 흑인종은 진지한 표정으로 듣다가 물었다. “세잔이 누구에요?”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죠. 화가.” “그렇군요. 저는 몸에 멍이 많은 데… 쉽게 사라지질 않네요.” “멍은 왜? 누가 때렸어요?” “대부분은 훈련 도중에 착지를 제대로 하지 못 해서 여기저기 부딪쳐서 생긴 거예요. 간혹 코치가 답답한 마음에 분풀이한 경우도 있지만요.” “남편이 때렸어요?” “남편이 아닌 코치의 마음으로 그런 거죠. 원래 운동선수라는 게 다 그래요. 완벽함을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하는 거죠. 그러다보면 나약한 인간은 지치게 되고, 그걸 옆에서 누군가 채찍질해 주어야 하니까.”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흑인종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코치가 저한테 손찌검하는 걸 아이가 보고 말았어요. 유치한 TV 드라마 같은 장면이었죠. 그 날 처음으로 체조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남편은 무릎 꿇고 용서를 구했죠. 난 남편을 안아주고 이마에 키스해 주었어요. 남편은 미안하다며 울었어요.” 얘기를 들으며 나는 사과의 멍든 부분을 입으로 걸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싱싱한 속살이 드러난 사과를 흑인종에게 건넸다. 흑인종은 고맙다며 사과를 받아 아삭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흑인종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내가 이어 말했다. “전 사실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아까 말한 것들이 우습게도 모두 거짓말이에요. 그러니까 전 패션 디자이너도 뭐도 아니었어요. 그냥 마지못해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회사원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얼마 전에 낙태를 했어요.” 흑인종은 말없이 사과를 다시 나에게 건넸다. 나는 사과를 받아 든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산부인과에서 수술을 마치고 혼자 집에 돌아와 콜라를 마시면서 소고기를 구워먹었어요.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처음으로 담배를 사다 펴보았어요. 제가 그 때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이 담배를 태우는 거였거든요. 우습죠?”

 나는 혼자 마른 웃음을 지으며 사과의 속살을 한 번 혀로 핥았다. “아, 달다.” 그리고 다시 아삭 한 입 또 한 입, 두 입, 세 입 우걱우걱 사과를 뼈대만 남기고 다 입에 집어넣었다. 입술 바깥으로 찐득한 즙이 새어나와 턱을 타고 목까지 흘러 내렸다. 바닥에 뚝뚝 떨어진 사과즙으로 개미들이 모여들었다.

 흑인종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말았다. 나는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살아남은 거죠? 그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대재앙 속에서.” 흑인종은 고민 없이 답했다. “살아남은 게 아니라, 계속 죽지 않은 거예요. 죽지 않은 상태가 죽지 않은 상태로 이어진 거죠.” 그 대답에 순간 짜증이 났다. “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면서,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걸 보니 주변 사람들을 많이 피곤하게 했겠네요.” “아니요. 사실 당신의 질문에 딱히 답이 없기 때문이에요. 어제 남편과 섹스를 하고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살아있었어요. 이게 전부예요.” “아니, 그럼 그 난리법석 동안 한 번도 잠에서 안 깨어났단 말이에요?” “난리법석 같은 거 없었어요. 마치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만 주어진 이상한 체험을 한 거지요.” “거짓말.” “진짜에요. 당신이야말로 거짓말을 했지요. 지네는 무슨…” “정말 답답합니다.” “저야말로.” “아, 지네 시체를 보여주면 되겠네. 보면 놀랄걸? 거대한 순백색 절지동물을 본 적도 없을 테니까.”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가 보았을 때, 지네는 그 곳에 없었다. 흑인종은 “괜찮아요. 믿을게요. 뭐, 바람에 날려 어딘가 좋은 곳으로 갔겠지요.”라고 말했다. 나는 들고 있던 사과의 뼈대를 손아귀 힘으로 꽉 쥐어짰다. 즙이 뚝뚝 땅바닥에 떨어졌다. 주먹으로 그 흑인종의 얼굴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참고 말을 걸었다. “달리기 시합할래요?” 흑인종은 그 제안에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태연한 척 좋다고 응했다. 내가 준비 땅하고 냅다 먼저 뛰기 시작했다. 흑인종은 억울함과 분노 섞인 표정으로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열심히 뛰었다. 폐가 포맷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흑인종이 없다. 유심히 보니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다. 이젠 내가 억울함과 분노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다가온 흑인종은 “시작부터 반칙이라 승부의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뛰다보니 왜 달리기 시합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의미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 뭐가 의미 있는데? 네가 같이 살자고 했으니까. 네가 획기적인 제안을 해보라고! 삶에 대한 의욕이 펄펄 끓어오를 수 있을만한 거로. 자, 얘기해봐. 어서?” “덤블링 가르쳐줄까요?” “존나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 덤블링이나 달리기나. 당신이나 실컷하세요, 덤블링.” “무섭구나. 덤블링 한 번도 못 해봤지요?” “저는 체조 선수가 아니거든요?” “그럼 당신이 할 줄 아는 게 뭔데? 잘하는 게 뭐 있는데?” “정말 유치해서 상대 못 해주겠네. 눈싸움 잘한다. 왜? 됐냐? 눈깔을 확! 아니다, 됐다. 이제 그만하자. 에너지 낭비야. 귀찮아, 이딴 식으로 말싸움하는 거.” 흑인종이 침묵한다. “그래요, 그만해요. 갑자기 서로 왜 이리 흥분했지? 미안해요.”

 나는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사과 뼈대에 붙은 살들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손이 얼얼하다. 뼈대 사이에 박힌 검은 씨앗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말한다. “이 사과 씨를 땅에 심으면 정말 사과나무가 자라날까요?” “자라나지 않을까요?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긴 하지만.” “이건 무슨 스피노자도 아니고.” “스피노자는 누구에요?” “생각이 많은 사람. 철학자.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거라고 말했지요.” “그 사람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멋있어보일라고 했겠지. 남이 했던 말을 베낀 거라는 얘기도 있어요.” 나는 사과 씨를 손가락으로 빼내어 흙을 파내고 그 안에 묻었다. 그리고 생수를 조금 부어주었다. “내가 정말 이런 행위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왠지 뿌듯하구먼.” “아름다운 모습이에요. 희망적인 기운이 샘솟네요.” “정말 감당할 수 없는 분위기구만. 난 아직 희망 같은 얘기에 동의할 마음이 없어요. 그냥 정말, 그냥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의미부여하지 말아줬으면 합니다.”

 흑인종은 조용히 자신의 배를 쓰다듬는다. “말하지 않은 게 있는 데, 사실 저 임신 중이에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할 말을 잃었다. “아, 축하해요. 이거 참 헷갈리네. 축하를 해주는 게 맞는 건지. 뭔가 이 어색하고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로 흘러가는 거에 대해 내가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할지조차 어렵네요.” 흑인종은 축하를 받지 않고 말한다. “남자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 말의 뜻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설마… 그런 의미의 기대는, 아니겠죠?” “꽤 그럴듯하지 않나요?” “지금으로선 대답하지 못 하겠어요.” “그럼 그 동안 눈싸움이나 할래요?” 응할 생각이 없었지만 눈을 부릅뜬 흑인종 앞에서 그렇게 나도 계속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흑인종이 점점 내게 다가와 살며시 나를 안아주었다. “정말 다행이지요. 이렇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이 세계에 발붙이고 살아가준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나는 그녀의 행동과 말에 반응을 해주는 게 부끄러웠다. 쑥스러웠다. 그런데 따뜻하긴 했다. 포옹으로 전달되는 타인의 체온은 기분 좋게 따뜻했다. 몸이 나른해지며 졸음이 다가온다. 나는 눈을 감고 그녀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말한다. “이제 곧 어두워질 텐데, 잠은 어디서 자야할까요?” 내 입에선 사과향이 나고 있었다.

나는 살며시 눈을 뜬다. 햇빛이 쨍하고, 주택가의 소란스런 소리들이 기분 좋게 공중에 맴돌고 있다. 순간 기겁을 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알람시계를 쳐다본다. 무려 오후 1시.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어제 술을 진탕 마신 것도 아니고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든 것도 아니었다. 알람소리조차 듣지 못 할 정도로 그토록 깊이 잠에 빠져 있었던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몸을 눕힌다. 가랑이 사이가 몹시도 흥건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나란 존재가 하루쯤 출근을 안 한다고 해서 재앙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아니, 차라리 오늘을 계기로 회사에서 나를 내쫓는다면 어떨까? 한숨 뒤에 곧바로 마른 웃음이 털털 나왔다. 그리곤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바닥으로 다리를 내려 침대에 걸터앉는다. 젖은 잠옷 바지와 속옷을 벗는다. 가랑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이불 빨래를 하고 시장을 보러 나서야겠다고 생각한다.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러 화장실 안에 들어섰을 때, 나는 기억을 해냈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튼 후,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아주 긴긴 꿈을 꿨어. 이상한 꿈.”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놀랐다. 얼굴이 사과로 변해 있었다. 한 군데 거뭇거뭇한 멍이 스며들어 있는 사과는 아주 빨간색이었다. 오른쪽 손을 들어 조심스레 사과의 멍든 부분을 만져 보려 다가간다. 온 몸에 찌릿하게 전율이 흐른다. 차마 만지질 못 하겠다. 미약하게, 미약하게 오랜 시간이 전진했다. 슬슬 무릎이 피곤하다. 나는 이성이 지쳐버린 사이를 노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검지의 지문이 그렇게 멍의 표피에 닿았을 때의 느낌은 말캉하고, 매끈하며 연약함이었다. 검지에 힘이 더해진다. 꾸욱- 누른다. 껍질 같은 막이 쭈글쭈글해지며 말캉함이 소멸되고 내 검지의 감각은 기존 사과의 그것에 도달했다.

 나는 싱거워져서 수도꼭지를 잠그고 화장실에서 빠져나왔다. 이불을 걷어내서 욕조로 옮기고 따뜻한 물을 받았다. 이불과 같이 목욕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보러 나선다.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흥겨워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걸으면서 몸에 리듬을 싣는다. 이대로 계속! 이라고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깨고 싶지 않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