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혹은 외사랑
- 작성일 200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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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잘 모른 채 여기까지 이끌려온 자신을 바라보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자꾸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설명할 수 없는 위축감에 제 할 말을 다하지 못하기 일쑤였으니까. 그 사람과 대화하고 싶었다. 내가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당신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는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어떻게 그 사람과 만나게 되어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든다. 차라리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을 모르던 재작년 겨울로 돌아가고 싶다고 늘 생각한다.
지금의 나의 모습을 보자면 예전에 나를 위해 열심히 살던 모습 따윈 아예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이 아주 낯선 느낌을 주는데 일상 자체도 너무 여유롭게 돌아가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무기력함과 내 안의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바깥에서 돈을 버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남들처럼 자기발전을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대강 정해놓은 목표 하나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때우는 내 자신을 보며 어이없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시험을 적당히 보고 온 날은 실패에 대한 무력감에 자리보전이라도 해야 할 판이지만 그런 것도 없다. 그저 너무나 태연하게 우울하니 음악이나 듣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함, 그 자체가 없다.
사실 나는 대인공포증이 있다. 언제부턴가 사람은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도 아주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무슨 말을 들을까봐 노심초사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그 때문에 볼 일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늘 집 안에서만 생활하곤 했다. 그 때문에 남들과 어울려 노는 방식은 익숙치가 않다. 아니 거부한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아웃사이더다. 세상이 날 거부하듯이 나도 세상을 거부하고 사는 면이 많다. 노는 방식도 늘 내 스타일대로만 간다. 남들이 신나게 놀 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무시한다고 해도 나는 늘 내 자신 자체를 인정하고 살아왔다. 내 자신을 인정한 채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지만 아직까지는 그에 대한 평가가 좋다고 말할 수 없다.
늘상 그렇다. 아웃사이더라는 것도, 비주류라는 것도,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면서도 벗어나서 인정받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꼴이 우습게도 보일 것이다. 나는 꿋꿋하게 나를 위해, 내 행복을 위해 갈 길을 가는 거라고 그런 비웃는 시선 따위엔 굴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누구보다 그 말에 상처받고 때로는 방황하며 무너지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너무나 보잘것 없고 연약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를 사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지금까지 진심으로 좋아해 본 사람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이런 감정에 무척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정말 누군가를 순수하게 아주 많이 사랑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게 된다. 그 점이 지금의 내가 가장 서글프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왜 내 앞에 나타났는지, 지금의 감정이 착각이 아니기 때문에 무척이나 정리되기 힘든데도 갑자기 다가와 흔들어놓고 가서 상처만 남겼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이 밉기까지 하다. 그 사람은 사실 나와는 아주 공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사람이다. 애초부터 사적인 감정을 가질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교수님으로만 대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나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늘 호감을 살 만한 아주 괜찮은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다. 가끔 질문을 하기도 하고 말 한마디 건네면 웃고 넘기기만 했지만...그런대로 별 감정없이 자연스럽게 지냈다.
어느 날은 운좋게 성적이 잘 나온 관계로 그 사람에게서 미술관 티켓을 받았다. 그건 기념으로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그 사람의 흔적이다. 내 지갑 속 한 구석에 고이 간직한 그 티켓을 받았을 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 당시엔 성적이 잘 나와 인정받은 게 기분 좋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확실히 그 때까지의 감정은 그랬던 게 분명하다. 왠지 모르게 차가운 구석이 있는 그 사람에게 못내 불만이 있어서였는지 좋아하는 감정 따위는 있을 턱이 없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데 우연히 그 날 질문을 한 가득 가지고 가 친구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선 앞에 있는 친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눈을 마주치며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대화하는 친구를 보며 문득 저 사람은 다른 아이한테는 무슨 말을 건넬까? 라는 유치한 생각을 했다. 다른 아이에게도 나처럼 말을 건네나하는 생각이 들어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그 사람은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은 채로 대화를 끝냈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아무 말도 안하리라는 이상한 다짐을 하고는 질문을 시작했다. 늘상 그 사람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수업을 하고 질문을 하고는 했는데 그게 나에게는 더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날 바로 그 사람에게서 지적을 당했다. 내가 질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려 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자" 나는 할 말이 남았나하고 올려다 보았는데,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눈을 마주쳐야 하는 거에요. 안 그러면 남자친구가 도망갈걸요."라고 하는 거였다. 속으로는 도망갈 남자친구도 없네요. 그걸 왜 상관하는지, 원. 그렇게 생각하고는 순간 주변 친구들이 들을까봐 겁이 난다는 생각에 얼른 자리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을 좋아하는 다른 무리의 아이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냥 웃으며 넘겼지만 사실 늘 그런 식으로 당황하고 피하기 일쑤였던 것 같다. 단 한 번이라도 내 감정에 솔직했더라면 그 사람에게 상처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텐데. 지금의 내가 이 감정 하나로 이렇게 힘들어하지는 않았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력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들도 있다. 나는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살아왔다. 그건 순수한게 아니라 어린아이같은 감정으로 세상을 너무 단순화시켜 버린 게 틀림없다. 사랑이란 감정 따위는 무시해도 괜찮은 거라고 저 혼자 판단하고 행동하고...언제쯤 성숙해질 수 있을지 참 의문이다.
난 늘 내가 애정결핍이라고 생각했다. 정에 굶주려 있는 아이. 그래서 누군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주면 금방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버린다. 하지만 정작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는 대상은 적다. 그건 사람을 믿지 못하는 탓이다. 사람에 대한 깊은 불신. 이건 오래 전부터 키워온 내 마음 속의 병과도 관련이 있다. 사람을 대할 땐 친절해 보이지만 정작 솔직한 내 모습은 보이지 않고 차갑게 구는 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 나도 내가 언제 사람 대하는 태도가 변할지 알 수가 없다. 분명 애정결핍인데 냉소적으로 변해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고 오직 자아에 집착해 버리는 아이. 내 주변에 사람이 없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늘 혼자 하고 싶은 게 많았다. 혼자 기차타고 정처없이 여행을 가보거나 사진찍는 걸 배워서 풍경을 찍거나 DVD로 좋아하는 영화를 감상하며 상상의 나래에 빠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데 아주 익숙했다. 그러니 나의 소원은 어서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혼자 나만의 생활을 만끽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극히 단순한 인간형이었다.
심지어 집에서도 가족들과는 단절된 생활을 계속하다보니 대화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나는 없는 존재와도 같이 나만의 공간에서 벗어날 줄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양상이 결국 나를 지금의 상황에까지 몰고 온 게 분명하다. 나는 지금 과대망상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어쩌다 사랑의 감정과 함께 이런 정신병에 걸려 밤늦게까지 혼자 글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예전과 같은 정신적 압박감은 없다. 시험준비에 분명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할 내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여유만만하다. 가족들의 이해와 보살핌 속에 병이라는 핑계를 대고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두서없이 쓰는 글에 무엇이 담겨져 의미를 갖게 되는지도 알 수 없다. 뭐든지 의미있는 걸 하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게 내 마음을 터놓는 글을 쓰는 것도 나름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나는 항상 그런 존재였다.
아, 밤이 좋다. 낮에 보다 더 집중이 잘 되고 무언가 혼자 느끼는 고독감이 좋다. 낮에는 산만하게 움직이던 내가 이상하게 밤에는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기도 하고...밤에 창가에 서서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고개쪽을 바라다보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걸 느낀다. 예전에는 문득 어렸을 때 엄마가 불러주던 모차르트의 자장가가 생각나서 엄마 등에 업혀 잠들던 다락방 시절을 떠올리며 한참을 서서 그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한밤중이고 밖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 있다.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건 절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 힘든 건지도 모른다. 잊을 것이다. 분명 잊겠지만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릴 뿐이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했던 말들로 그가 상처를 입었던 일들도 그로 인한 죄책감과 내가 오랫동안 부정했던 내 감정이 커져 버려 힘들어 해야만 했던 것도 이제 오늘로 마지막이 되었으면 한다. 그 일로 이렇게 과대망상이라는 정신병에까지 걸릴 만큼 힘들어해야 했지만, 내가 목표로 했던 일들도 다 한 순간에 무너지는 처참한 기분까지 맛보아야 했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래도 그 사람을 미워할 수도, 애써 지워낼 수도 없을만큼 가슴 아픈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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