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이 생식기’ 소송 단상
- 작성일 2010-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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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미운 대상은 무엇일까?
도둑놈과 사기꾼도 해당되겠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가 그중 제 1순위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일본은 바로 그에 해당되겠다.
충남 공주와 부여에서는 오는 9월 18일부터 10월 17일까지 1,400년 전
대백제의 화려했던 시절을 나타내는 <1,400년 전 대백제의 부활>이 펼쳐진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당시의 백제는 미련한 일본인들에게 각종의 문화와
진귀한 보물까지를 죄 가져다주었고 우둔한 머리까지를 깨우쳐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같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그래서 서두에서부터 은혜를 원수를
갚는 자(국가)가 가장 밉다는 논지를 펼친 것이다.
주지하듯 올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을 맞는 해이다.
‘국권 피탈國權被奪’의 이전 용어로도 회자되는 경술국치는 일제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이르는 말이다.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다.
이에 족하지 않은 일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대한제국에 군대를 파견한다.
월등한 군사력에 기초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하는데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까지 징발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에 이른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뒤 극악무도까지를 서슴지 않았는데
그 중엔 영화 <마루타>에 나온 것처럼 인체를 이용한 냉동 실험과
세균 실험, 그리로 독가스 실험에 이어 폭파 실험 등 살아있는
인간 마루타를 대상으로 온갖의 잔혹한 실험까지를 마다치 않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중엔 혜문스님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상대로 낸 조선 기생이었다는
명월의 이른바 ‘명월이 생식기’ 표본보관 중지 청구소송이 그 궤를 같이 한다.
뉴스로써 비로소 인지하게 된 ‘명월이 생식기’ 사건의 내막은 일제 강점기 시대
서울 종로에서 유명했던 기생집 명월관에서 일했던 명월이란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 경찰은 명월이와 성관계를 맺은 일본 남성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이유를 규명한다는 목적으로 생식기를 적출했다고 한다.
그리곤 적출된 명월의 생식기는 포르말린 용액에 넣어 보관되다가
1955년 국과수에 넘겨졌다는 것이 이 사건의 본말(本末)이다.
하니 당사자 명월이란 여성은 구천에서도 눈을 감지 못 하고
그 얼마나 괴롭고 슬픈 지옥의 나날을 점철하였을까!
일전 일독한 <덕혜옹주>는 무명의 작가 권비영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수작(秀作)의 소설이다.
하지만 권비영이 ‘덕혜옹주’라는 변방(邊方)에 방치돼 있던
인물을 추적하고 발굴까지 하여 세상에 알리지 않았던들
우린 어찌 과거 일제의 또 다른 만행을 기억조차 하였을까!
덕혜옹주를 조국으로 모셔가기 위해 뜻있는 인사들은
이승만 정부에 귀환을 요청했으나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은 되레 왕실재산을 국유화하고 왕족들을 천대했다.
이후 정권이 바뀌어 다시 박정희를 만나 덕혜옹주 이야기를
청했으나 대답은 이승만에 버금가는 백안시(白眼視)에 다름 아니었다.
“근데 덕혜옹주가 대체 누구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본인과 강제결혼을 하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으로까지 끌려간 비운의 여인 덕혜옹주는 평생 웃을 일이 없었다.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남편 소 다케유키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 정혜를 낳았으나 이들 부부의 관계는 당시의
조일(朝日)관계처럼 물과 기름처럼 겉돌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감옥과 다름없는 정신병원의 병동에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분노에 찬
지난의 세월을 살다 간 그녀는 소설가 권비영이란 ‘탐험가’에 의해서
비로소 세상에 자신의 이름 석 자에 담긴 울분의 역사까지를 토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가 잊을 뻔 했던, 아니 그동안엔
전혀 몰랐던 조선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명월이라는
여성의 비운의, 아니 비통나날의 그 산적했을 울분을 이제야 겨우 풀어준 혜문스님은
권비영에 버금가는 또 다른 변방의 그늘지고 음습했던 역사의 부분까지를 발굴하여
마침내 그녀의 통한의 설움까지를 씻어내 준 심지 깊은 탐험가가 아니었나 싶었다.
이 사건은 아울러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일본(인)들에 대한
경각심의 계기까지를 새삼 만들어 주는 쇼킹한 화두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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