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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친구의 마지막 편지

  • 작성일 2006-03-28
  • 조회수 452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이었다. 이런 날은 친구를 만나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이고 싶지만 그 보다 얼른 집에 들어가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그래서 회사 동료들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지난밤의 과음 덕분에 아직도 위가 쓰렸고 온 몸이 쑤셔왔기 때문에 또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서류가방으로 비를 피하며 아파트 1층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아파트 주차장의 가로등에 비추어진 빗방울을 바라보며 어깨며, 서류가방을 적시고 있는 물방울들을 털어내고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꺼내드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짙은 남색 항공 점퍼 차림의 남자가 그처럼 우산을 잊었는지 현관 처마 밑에 들어와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머리를 털며 현관 처마 안에서 고개를 내밀어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우편물을 들고 마침 1층에 내려와 있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아파트 문을 들어서서 거실 탁자 위에 우편물을 던져놓고 바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욕실에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는 문을 열어 놓은 채 밖으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TV를 켠 뒤에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섞여 들여오는 TV소리를 들으며 우편물 들을 들어 하나 씩 살려보기 시작했다.

대 부분 세금 청구서나 신용카드 청구서 따위였는데 그 사이에 편지 봉투 하나가 끼어 있었다. 보내는 이의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그 편지를 집어 든 순간 그는 잠시 이상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봉투를 뜯어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꺼내는 동안에도 그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A4 용지에 프린트 된 편지를 꺼내든 순간에야 그 긴장감은 사라졌고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TV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랜만이라는 말이 쑥스러울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났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20여년이 지났으니 자네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네.

아! 이렇게 친한 어투로 이야기하듯 적었으니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자네는 내가 누군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하겠군.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하네. 사실 나도 자네에 대해 생각나는 건 몇가지 없으니까 말일세.

서두가 너무 길었군. 내 소개를 하겠네. 나는 자네와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최종렬이라네. 이름을 듣고 기억이 나지 않는 다면 자네 가방을 들어주던 “멍청이”를 떠올려보게. 이제 알겠나?

만약 이렇게 까지 이야기 했는데도 내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말 서운한 일인데.....

뭐,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네. 어차피 좋은 일로 자네에게 편지를 쓴 것도 아니고 말일세.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네.

어찌되었든 나 때문에 자네는 지금 시간을 빼앗기고 있고 과거의 잘못에 비해 엄청나게 큰 댓가를 치르게 될 지도 모르니까.

그럼 어떤 연유로 자네에게 사과를 먼저 했는지 설명하기 전에 조금 기괴한 내 취미에 대해 이야기 해 주겠네. 자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자네는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집에 돌아가면 책에 빠져들었네. 다행히 아버지께서 책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집에 읽을 책이 많았던 것도 요인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어쨌든 책을 읽는 동안은 학교에서의 괴로움을 잊을 수 있어서 난 집에 돌아오자마자 숙제도 팽개치고 책부터 펼쳐들었네. 그 덕분에 안경을 쓰게 되었고 또 그것 때문에 자네에게 놀림을 당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어쨌든 난 그 중에서도 추리소설을 굉장히 좋아했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대부분의 추리소설이 권선징악 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군. 얄팍하고 붉은 표지의 추리소설을 읽으며 나는 셜록홈즈의 활약을 손뼉 치며 응원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명탐정들과 만났다네. 즐거운 시간이었지.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서는 추리소설을 읽지 않았네. 아니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군. 공부에 치이고 또 자네처럼 나를 상상과 공상의 세계로 밀어넣는 친구도 없었으니 말일세.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다시 추리소설에 빠져들었네. 왜 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생각하네만...  굳이 말한다면. 맞네! 자네처럼 나를 밀어 넣은 친구가 나타난거지. 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이 편지를 받았는지 모르겠군. 늦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런데 다시 추리 소설에 빠져 들게된 나는 이전과는 다른 이유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네. 바로 그 속에 묘사된 수천 수만가지의 교묘하고 치명적인 살인 방법들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던 것일세. 난 소설을 읽으면서 그 살인방법들로 나를 괴롭히던 자들을 머릿속에서 나마 죽여나가기 시작했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읽은 책들이 늘어나자 읽지 않는 시간에 소설속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예술같은(이건 내 표현이네) 방법들을 떠올리게 되었네. 내가 문장에 소질이 있었다면 이런 아이디어 들로 추리소설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그 방법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파일을 만들어 나갔네. 물론 나를 괴롭히던 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말일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나를 괴롭히는 인간들은 나타났고 내가 기록한 죽음의 노트( 요즘 유명한 ‘데스노트’라는 만화가 생각나는군.) 는 점점 늘어났네.

이 정도 이야기 했으면 이제 왜 내가 자네에게 편지를 했는지 이해 했을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자네의 살인 노트를 작성했네. 마스터피스 중의 마스터피스지. 자네를 추적해 행동들을 미행하며 파악한 데이터들과 자네의 성격 그리고 완전범죄로 만들 수 있는 알리바이에다 자네를 가장 괴롭게 죽일 방법까지 적어놨거든. ( 나중에 자네가 꼭 읽어봤으면 좋겠군. 아마 자네도 대단하다고 생각할 걸세)

이제 왜 미안하다고 했는지 이해가 가나? 아 !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빼먹었군. 그 파일리스트에는 내 파일이 끼워 넣어져 있네. 자살 매뉴얼이랄까. 스스로 완벽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죽음의 노트에 끼워 넣는 것도 굉장히 스릴있고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었네. 그런데 그만 그 노트를 잊어버리고 말았네. 도둑맞았을 지도 모르고 말이지. 어쨌든 그게 내 손을 떠난 뒤 기막힌 일들이 벌어졌네. 그 노트에 적어놓은 사람들이 그 방법 그대로 시체가 되어 TV에 등장하기 시작한 걸세. 맨 뒤의 파일에서부터 역순으로 말일세. 누군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감동 받은 모양이야.
그러나 저러나 자네 생각나나? 자네가 밀어서 넘어뜨리는 바람에 내 얼굴에 길게 남은 흉터말일세. 자네 생각을 하며 편지를 쓰고 있으니 그 상처가 쑤셔오는군. 그 때 자네는 피 흘리는 내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말야. 어린아이의 잔인함은 놀라운 것이라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되는군.

자. 자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난 이미 죽어있을지도 모르지만 (파일의 순서대로라면 자네 파일 바로 뒤에 내 파일이 있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나니 조금 속이 시원하군. 아니 자네를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 밀어 넣게 되었다는 사실이 시원할지도 모르겠네. 그럼 지루한 편지 읽어줘서 고맙다는 말로 편지를 마치겠네. 부디 몸조심하게.


 남자가 편지를 다 읽고 탁자에 내려놓으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최종렬이라는 친구에게 받은 편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억지로 코웃음을 치고 일어나 이제 욕조에서 넘치는 물을 잠그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욕조의 물을 잠근 순간 아파트 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문을 열기 위해 열쇠구멍에 작은 쇠막대를 집어넣어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문을 열기위해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웬일인지 그는 아까 아파트 현관에서 만났던 검은 점퍼 입은 남자를 생각해 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위해 움직이기 전에 작은 소리를 내며 아파트 현관문이 열렸다.

아파트 문이 열리며 들어온 바람 때문에 탁자에서 바닥에 떨어진 편지의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네가 공포감을 충분히 만끽하게 하기위해 살인 노트의 한 가지 부분만 알려주겠네. 자네의 살해 장소는 자네 집이네. 그것도 욕조에서 익사하게 되지. 하지만 자네가 이것을 읽으리라고 기대는 하지 않고 있네. 자네 성격상 편지 뒷 페이지까지 볼 정도로 꼼꼼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아파트 문을 열어놨을지도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