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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홀 [Beer Hall]

  • 작성일 2006-10-15
  • 조회수 240

 

비어 홀 [Beer Hall]



얼마전에 한 TV프로에서 생리통으로 격렬한 통증을 앓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녀들은 한두시간이나 하루, 이틀. 심지어 보름에 걸쳐 아랫배에 극심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산너머 산이라고 아픈걸로 모잘라 진통제마저 듣지 않는 체질이라, 그 긴 시간동안 송곳으로 배를 후벼파는 것 같은 고통을 그대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내놈이지만 그게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 일인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 나도 진통제 따위 먹히지 않는 그런 통증으로 두달을 넘기고 있으니까.

“한잔 하죠!”

내 말에 선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잔 하죠? 어따대고 한잔 하죠야? 네가 요즘 한잔이야? 한말이지!”

선배의 말에 앞자리 옆자리에 있던 동기와 신입사원이 슬슬 서로의 눈치를 보며 가방을 챙겼다. 아니, 이런 배반자들 같이죽고 같이살자더니 이제는 혼자만 살자고 도망가는 거냐?

“어허, 어디 가시나?”

신입으로 들어온 친구의 입에서 애원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주선배님, 전 진짜 가봐야 해요. 요새 일도 밀려서 집까지 가져가서 하는거 아시면서 그러세요. 저 정말 집에 일 가져 가는거 싫습니다.”

별 소용 안되는 동기의 옷자락을 잡아보았다.

“야, 동기. 너는 정말 오늘 나랑 한잔 하자.”

그럴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냉랭한 반응만 돌아왔다.

“내가 언제 너랑 술마시디? 난 회식도 되도록이면 참석 안하는 사람인데.”

‘나쁜놈. 어학원이다, 헬스 클럽이다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욕은 욕대로 먹는 주제에…….’

문득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 주변을 돌아보자, 그다지 가까이 지내지 않았던 직원들과 과장님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쏟아내는 눈길에는 동정과 멸시가 함께 담겨있었다. 그래, 나도 안다. 이것이 한계다. 사회인은 공사(公私)구별이 확실해야 하고 그래야 프로다. 남의 돈 먹기가 그리 만만한가? 요즘같은 세상에 이건 기본이다. 그러나 그게 안되는 경우도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나는 할 수 없이 혼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그리 아껴주던 강선배를 한번 흘낏 쳐다봤지만, 꿈쩍도 안하고 혼자가라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는 쫓겨나는 기분으로 퇴근했다.


주태승. 나이 33세. 직업은 한송무역 총무과 직원. 미혼.

“결혼했어.”

중얼중얼.

“진짜, 결혼했어.”

만약 내 어깨에 앵무새 한 마리가 있어, “그녀는 결혼했어. 진짜 결혼했어. 널 버리고 결혼했어. 그녀는 결혼했어.”라고 지금 내가 중얼 거리는 것처럼 앵알대고 있었다면, 목을 비틀어 죽여버렸을 것이다.

혜주는 좋은 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리 미인은 아니지만,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나갈 여자도 아니지만, 일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사랑했다. 그래서 오히려 안심했다. 거만한 마음도 품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녀를 사랑하겠어? 그래서 벌을 받은건지도 모르겠다.

“벌 받은거야. 벌 받은거 맞아.”

누가 내 어깨에 앵무새 입 좀 닥치게 해주지 않으려나. 아니, 방금 그 말은 내가 한 말인가? 어제도, 그제도, 저번달에도 이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래, 술이 필요하다. 어학 교재의 외워지지 않는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 것같은 이 지겨운 중얼거림을 멈추려면 술을 마셔야 한다. 근데, 누군가 다른 상대와 같이 술을 마셔야 반복청취를 멈출텐데……. 말 건넬 사람도 있고, 들어줄 사람도 있고…… 그래, 강선배처럼 말이다.

-잊어라, 잊어. 세상 여자가 하나뿐이냐? 소개팅 시켜줘? 우리 여편네 후배 많아!-

그러면 옆에서 신입놈이 그러겠지.

-그럼요, 선배. 솔직히 우리회사, 중소기업 중에서는 알아주는 데 아닙니까. 저희 친척 누나 한번 만나보세요. 진짜 이뻐요.-

이 이야기도 교재 CD안에 들어있는 내용인가? 너무 귀에 익었다. 젠장, 세상이 온통 반복청취다. 근데 난 언제 여기 들어와 소주를 들이키고 있는거지? 추접스럽기는…….

뭐하는 거지, 나?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하네. 나 왜 이러고 있는거지? 빌어먹을, 이 가슴은 왜 이다지도 아픈거지? 통증이 멈추지 않네. 무지 아프다. 어어, 너무 서럽다.

어느새 나는 부끄러운 것도 잊은체, 파전집 식탁 위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주변에서 술마시는 남녀노소들이 힐끗보면서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었다.

-실연당했나봐.-

-보나마나네.-

-안됐다, 진짜. 한동안 저러고 다닐텐데. 같이 마실 친구도 없나?-

안 듣는 것 같아도 다 들리고 있다. 물론 같이 마시면서 그녀의 온갖 단점들을 들춰낼 친구들은 있다. 한달 전까지는 있었다. 넋두리 들어주기같은 것도 기한이 있는 건가? 아니면, 내 친구들은 더 이상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통증에 아파 괴로워 하는 것을 못보겠다고 결정했는지도 모르겠다.


신혜주는 언제나 자신이 주의력 부족인 것을 한탄했다. 페스트푸드점에서 소매에 케찹을 묻힐 때도, 횟집에서 치마에 간장을 쏟을 때도, 자신이 주의력 부족이라며 낙담하고는 했었다.

나는 그녀를 격려하기 바빴고, 다른 사람에 비해 산만하지도, 어린애 같지도 않다는 말로 위로해야 했다. 혜주가 내 말을 공치사처럼 받아들이고 공허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그냥 지나친 것이 나빴다. 정말은 내가 공치사를 했다는 것이 더 나쁜 일이었다. 내 마음은 솟구치는 짜증으로 울컥했지만, 내 위로는 상냥한 미소로 그녀를 어루만졌다. 나는 왜 혜주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믿었을까. 그녀가 어리숙해서? 늘상 당황하기 일쑤여서?


“어딜봐?”

“저기 TV. 모르는 애들이 또 가수라고 나오네.”

퇴근 후, 함께 저녁을 먹기위해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그 곳 벽에는 100인치의 거대한 벽면 TV가 걸려있었고, 처음보는 어린 소녀 몇 명이 열심히 춤을 추며 립싱크를 하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붕어들이 잘도 튀어나오는군. 얼굴만 가지고 뭐든 날로 먹으려 드니, 원.”

혜주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지고, 힐난조의 어조가 튀어나왔다.

“쟤들도 다 나름의 노력은 했겠지. 쟤네들 사회도 경쟁이 심할테고, 얼굴 이쁘다고 처음부터 춤을 잘추게 되는건 아니니까.”

포크를 냅킨위에 올려놓는다.

“춤만 추는게 문제긴 하겠지만.”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죄지은 기분이 되서 음식만 꾸역꾸역 먹었다. 그녀는 다시 TV화면으로 얼굴을 돌렸고, 나를 보지 않았다. 그 때 알았어야 했다. 모든걸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내가 그저 흘려보내고 있다는 것을.


가을은 가을이란 말이 무색하게 따듯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추석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온난화 현상으로 가을은 사라지고 모기가 남았다. 내 정신도 가을처럼 사라지고, 모기처럼 앵앵대는 소음만 남았다. 이상한 일이지? 나는 잡음을 일으킬 만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은데…… 핸드폰도 지난주에 새로 장만한 것인데.

“바보흉내 내면서 되묻지 마. 나 이제 태승씨,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어. 알고 있잖아.”

알긴 뭘 안단 말인가? 멋대로 내가 알고 있으리라고 단정짓지마! 하지만 단어들은 입안에서만 충돌하고, 문장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녀 말대로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낌은 있었어.”

알고 있었지만, 계속 뒤로 미루기만 했었다. 그러면 흐지부지 사라져버리지 않을까하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스쳐가는 위기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던 거야. 우리가 그런걸로 깨질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손으로 이마를 치고 있을 것이다.

“이런, 하나님 맙소사! 태승씨. 깨지지 않을 사이란 세상에 없어.”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들먹이며 헤어질 것을 종용했던 혜주가 두달 전에 결혼했다. 혜주의 마음을 돌리려고 몇 번이나 멍청한 행동들을 벌여왔던가. 그런 나를 불쌍하게 쳐다보던 그녀의 눈에는 경멸이 들어있었다. 어떻게 해도 소용없다. 모두 끝났다. 헤어지고 나서 6개월 후, 그녀의 결혼 소식을 점심시간마다 확인하던 그녀의 블로그를 통해 알게되었다. 깨지지 않을 사이란 세상에 없다더니. 그 놈과는 깨지지 않을 자신이 있단 말인가? 이봐, 주혜승. 그 놈하고는 깨지지 않을 거냐고!

소주잔을 파전집 식탁위에 탕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소리의 울림에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잠시 정지되었다가, 다시 소란스러움으로 메워진다. 그녀의 블로그에는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고민하는 글이 흘러넘친다. 혜주가 좋아하는 녀석은 자그마치 나이가 5살이나 어렸다. 그 놈은 가난한 집에 전공도 보잘 것 없는 복학생이었다. 그런 놈이랑 결혼하려고 나와 헤어진 것이다. 돈이 많거나 장래성이 확실하거나 하면 그런거 보고 연하랑 결혼했다 그러지. 혜주가 직장이 좋거나 얼굴이 이쁘면 그런거 보고 연상한테 접근했다 말이라도 할 수 있지. 뭐냐, 이건 정말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떠난게 되버리잖아. 내가 싫어졌다는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증거밖에 더 되냐고.

보면 안된다고 다짐하면서도 그녀의 블로그를 찾아가고 그녀의 결혼사진과 신혼여행 사진들을 열심히 클릭하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하지만 궁금했다. 혜주가 계속 행복한지, 나를 버리고 떠난 그림자가 얼굴에 드리워있지 않은지 계속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블로그에 올라온 결혼 사진에 혜주는 정말 이쁘기만 했다. 게다가 분위기가, 부드럽고 침착한 것이 내가 알던 주의력 결핍의 산만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콘텍트렌즈는 해본 적이 없고, 언제나 걱정이 가득한 눈을 안경으로 가리던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커플이던 주태승과 신혜주, 둘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여자가 필요해.”

누구나 그런 거 아닌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진통제를 필요로하는게 당연한거 아니냐구. 다들 아픈건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여자가 필요하다고 한대서 날 보고 비겁하다든가, 도망칠 구석을 찾고 있다든가 말 할 수는 없을거야.

“잘 생각했어. 그러라구.”

옆자리에서 부대찌게를 먹고 있던 40대 아저씨 둘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마디 참견한다. 뭣도 모르는 사람의 충고나 관심 따위 받고싶지 않다. 술값을 카드로 계산하고 영수증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뒤 밖으로 튕겨나오듯 뛰쳐나왔다. 거리가 이리저리 나를 흔든다. 도박판 플라스틱 컵안에서 뒹구는 주사위같은 기분이 들었다. 길이 거리를 틀며 나를 인도해 주는데 정확히 내가 갈 곳을 안내하고 있었다.


「여비서」

그래, 여기다. 들어가면 돼지같은 아줌마들이 나와서 술과 안주를 잔뜩시켜 지들끼리 다 먹고 계산은 손님한테 시킨다는 그 곳. 비어 홀(Beer Hall)말이야. 여기라면 내가 구역질을하고 그녀 이야기로 퍼질러 운다고 해도 내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그래, 나한테는 그런게 필요해.’

친구, 선배, 후배 모두 여자있는 술집으로 나를 데려가긴 했어도,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제길, 이해한다구. 누가 아파 뒹구는 놈을 보고 싶어하겠어. 아프지말라고 이것저것 먹이고, 데리고 다니는데 하나 소용없다면 지들도 허탈하지. 알구말구.

그러니까 심장을 쥐어뜯으며 울어도 내 신용카드 한 장으로 모든걸 받아줄 그런 곳을 혼자 찾아가겠다는 말이야. 나는 거칠게 검은색으로 선팅이 되어있는 비어 홀의 문을 열어제꼈다. 자리는 좁고 음침하며 대걸레 썩는 내가 풀풀 나는…….

“나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어?”

술이 확 깼다. 지금까지 내가 마신 양을 생각하면 술이 확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술도 깨고 눈 앞도 환해졌다.

“자리에 꿀물을 갔다놨습니다. 업무가 많이 밀렸지만, 분류별로 정리하고 자료도 찾아놓았습니다. 가능한한 새벽 1시 전에 마치실 수 있도록 조치해놨습니다. 1시 반쯤에 댁으로 돌아가 수면을 취하시면 됩니다. 최대한 내일 출근에 지장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감색 정장 스커트를 입은 날카로워보이는 인상의 미인이 환한 절약형 조명등 아래 서있었다. 커다란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고, 눈앞에는 육중한 원목책상과 LCD 19″ 평면 모니터에 삼성 컴퓨터, 책꽂이등이 놓여있었다. 그 한구석에는 그녀의 책상으로 보이는 사무용 책상과 소니 바이오 노트북이 보였다.

“여기 「여비서」아닌가요?”

“맞습니다. 제가 주태승씨의 여비서입니다.”

비어 홀 두개는 들어갈 널찍한 자리에, 공기청정기에서 흘러나오는 쾌적한 향기. 그리고 앞의 여자는 분명 어느 광고에서 본 듯한 여자였다. 어디더라. 여비서가 잔뜩나와서 남자의 일을 모두 해결해 준다는 광고였는데.

“일단 차를 드시고 일을 시작하시죠. 주태승씨. 그럼 저는 제 일을 보러 가보겠습니다.”

말쑥하고 냉랭한 표정의 그녀는 자기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또닥거렸다. 당최 무슨 일을 한다는 건지. 나도 내 자리로 보이는 호화스러운 책상에 앉아 꿀물을 마셨다. 속이 따듯해지는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저기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아무래도 뭘 잘못 찾은거 같아요.”

그녀는 표독스럽게 고개를 획 돌렸다.

“절대로 안됩니다. 화장실은 주태승씨 오른쪽 문으로 가시면 되고, 목이 마르면 뒤에 있는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거나 저에게 차를 부탁하세요. 일을 끝내기 전에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실 수 없습니다. 도대체 본인이 얼마나 일을 내팽개치고 있는지 알고는 계세요?”

서슬퍼런 눈에 나는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생각해보니 잘못 들어왔다는 설정도 먹히지 않는다. 저 여자는 내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고 있지 않은가.

“당신 이름이 뭐예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거예요?”

다시 단정한 목소리가 대답한다.

“제 이름은 비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태승씨는 이곳의 오너시니, 비서인 저로서는 당연히 알고 있을 수 밖에요.”

이름이 비서래. 그래서 간판이 여비서야? 아니 뭐 이런게 다있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차라리 내가 길가다 넘어져서 병원에 누워 꿈꾸고 있다고 말해. 그러는 편이 훨씬 이해가 갈거다!”

격해진 내 목소리에도 비서는 조금의 동요가 없었다. 그녀는 노트북의 내용을 흝어보고 주의깊게 저장한 다음에야 나를 쳐다보았다.

“본인의 상황이 이해가 안가십니까. 그렇다면 주제넘은 줄 알지만 비서로서 감히 충고 드리겠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주태승씨의 인사고과가 어떻게 쓰여지는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무관심한 척 해도 과장님이나 다른 직원분들이 주태승씨를 감싸기 위해 어느정도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물론 모르시겠죠. 지난 4/4분기 명퇴자 정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대로는 주태승씨는 올해 3/4분기까지 가지도 못할게 틀림 없습니다.”

몸이 점점 굳어왔다. 나는 이미 백수로 1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간신히 이 회사에 입사했단 말이다.

“다음달에 명퇴자로 찍힌다고 해도 할 말 없으실 거예요. 직원들은 이미 몇배에 달하는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데 거기에 주태승씨의 업무까지 더해졌다는 말이죠.”

다시 푹신한 가죽 의자에 주저앉았다. 33살에 명퇴자라고?

“책상위의 서류들, 검토 부탁드립니다.”

아무소리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분명히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지고 있어야 정상인데 여느때처럼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서류철 제목을 흝어보았다. 분명히 내가 맡아놓고 잊어버린 일들이다. 서류를 펼쳐보았다. 강선배가 필적이 틀림없는 글자들이 난삽하게 쓰여있었다.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노인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그래프와 숫자들이 얽혀있는 종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일은 정말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로 내게 왔다. 동료들이 저지른 오류들을 바로 잡아 새로 출력했다. 다른 직원들에게서 내게 인계된 업무는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는 부분까지 포스트 잇으로 자세한 설명을 첨부했다. 누가 이렇게 정리해서 건네준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다. 이 모든게 그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유능한 여비서다.

“커피 한잔 부탁해요.”

내 뒤에 냉장고 위에는 각종 차종류와 커피세트가 갖춰져 있다. 원두를 우려내어 커피잔에 담는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일본의 다도를 연상케 했다. 내온 커피맛도 훌륭했다. 한모금 마시자 머리와 마음이 개운해 지는게, 보다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후우.”

탁자위에 고급 가죽케이스로 싸인 시계를 보자 밤 12시 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이것 좀 봐주겠어요? 마지막 남은 통계자료야.”

비서는 노트북 옆에 차곡차곡 쌓인 서류를 하나하나 서류철에 옮겨놓다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화색(和色)으로 가득했다.

“다 끝내놓으셨군요. 역시 유능하십니다. 이렇게 진행속도가 빠를 줄 저도 몰랐습니다.”

“비서가 도와줘서 그렇지, 나 혼자선 절대 이렇게 못합니다.”

치켜세운 뿔테안경 너머로 그녀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아닙니다. 이건 평소 주태승씨가 가진 잠재력을 보여준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과장님이나 타 직원분들도 주태승씨의 능력을 아까워하기 때문에 아끼고 감싼거지요.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작?”

“조만간 한송무역은 SHK 주유회사에 통합되어, 대기업에 합류하게 될 겁니다. 보다 많은 인적자원이 필요로 하게 될 것이고, 주태승씨는 장래 한송무역의 중역으로 성장하게 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내가 중역? 가슴이 뜨거워져 온다. 그래, 사실 난 야망이 있었어!

“그러니, 지금처럼 방황해서는 곤란하지요. 나중에 자서전을 쓰게 될 때, 그녀의 이름은 페이지 한 장에 한줄 정도 차지하게 될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비서의 안경에 불빛이 반짝 스쳐갔다. 그래, 잊어버린 젊은 날의 꿈을 일깨워주었어. 이렇게 허랑방탕하게 보내는 동안 내 꿈은 멀어져가고 있는 거야.

“그래, 내 인생에 진정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이었어.”

내 말에 비서는 만족한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가볍게 문을 가르켰다. 나는 마음이 단단해 지는 것을 느끼며 문쪽으로 걸어갔다.

“오늘 푹 주무세요. 그리고 오늘 한 일의 결과물을 내일 과장님께 결재맡으시면 그것으로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 될 겁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되네요.”

“그럼 들어가서 쉬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비서도 수고했습니다.”

문을 열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문득 덥다는 기분이 들어,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온 몸에 진땀이 흐르며 취기가 돌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여비서네.”

간판은 처음에 보았던 그 여비서가 맞다. 그러나 내부는 그렇지 않았다. 안에서 남자와 여자들의 시끄럽고 경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마담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흘낏 쳐다보자 나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우욱.”

속에서 구토가 밀고 올라온다. 이상한 일이지. 분명히 여비서 안에서 난 꿀물도 마시고, 차도 마시며 취기가 가셨는데……. 어찌된 셈인지 도로 취해 버렸다. 빈틈없이 완벽한 여비서가 잃어버렸던 이상(理想)을 불어넣어줬다. 어떻게 된거지? 전봇대를 붙잡고 먹은걸 다 토해냈다. 머릿속이 두통으로 두조각 나버릴 것 같다.

“선채로도 꿈을 꾸나?”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을 불어넣어 줬는데, 그래서일까? 증기 기관처럼 마음이 터지려 한다. 나는 점점 흐릿하게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드디어 다시 기억해냈다.

“아, 신혜주.”

그 이름이 아니면 뭣 때문에 이리 아프겠는가.


몸이 아팠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열로 확 달궈지는 기분이었다. 거울로 내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아궁이 위에 놋쇠그릇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을 것이다. 차가운게 필요해. 목마르고 지쳤다. 구토하고 나서 목이 위액 때문에 쓰라렸다. 어디든 들어가서 맥주를 한잔 마셔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때, 한쪽구석이 깨진 간판하나가 반짝이는 전구를 빙 둘러싸고 내 발걸음을 막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가 걷어찼다고 하는 쪽이 옳겠지만……. 


「꿈의 궁전」

몸으로 문을 밀고, 그 안에서 푹 쓰러졌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찰과상을 입는 것이 정상인데 뭔가 달랐다. 얼굴에 닿은 것은 시멘트 바닥이 아니었다. 눈 뜰 기운이 없어 얼굴에 닿은 것을 확인할 수도 없었지만, 이건 꼭 양탄자 같았다.

“일어나세요. 보기 흉하게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러게, 꺄르르. 투정부리는 거예요?”

여자 목소리가 둘.

“후후.”

웃는 목소리까지 셋. 나는 눈을 떠보았다.

“맙소사, 이건 또 무슨 빌어먹을 환영(幻影)이지?”

바닥은 정말 양탄자였다. 엄청나게 넓은 양탄자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벽은 하늘색과 구름이 그려져 있고, 네모난 지붕 한가운데에는 호텔 라운지에나 걸려있을 법한 상들리에가 오색빛깔을 반사하며 짤랑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하얀 삼단케잌같은 분수대에서 뿜어나온 물이 분수대 맨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인테리어였다. 양탄자 위에 분수대라니? 어쨌든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엔틱 상점에서 볼 수 있는 호화로운 가구들로 들어차 있었다.

“두리번 거리지만 말고 일어나요. 어쩜, 이리도 무거워요?”

“그러게, 양팔을 잡고 있는 우리 생각은 털끝만치도 안하는 거죠?”

나는 나를 일으키려는 두 여인의 힘에 의지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그제서야 양 옆에서 내 팔을 붙잡고 웃는 두 여인과 맞은 편에서 살짝 미소지으며 바라보는 한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세여인은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나 나올 법한 옅은 베일에 싸인 옷을 입고, 윤기로 반들거리는 동양인의 살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인과 짧은 곱슬머리에 도발적인 눈길을 보내고 있는 여인. 그리고 삼단 케잌처럼 생긴 작은 분수에 기대앉아 몸을 감싼 베일을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카락 전체를 틀어올린 우아한 눈매의 여인.

“여…… 여긴? 당신들은?”

말이 완성되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순식간에 어눌하고 떠듬거리는 말더듬이가 된 느낌이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압도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게다.

“피곤하시죠? 그렇게 술을 드셨으니 녹초가 됐을게 뻔해요. 이리 오셔서 몸을 좀 뉘이세요.”

포니테일 여인이 나를 삼단케잌 분수 옆으로 끌고 갔다. 거기에는 두껍고 깃털같은 침구가 깔려있었다. 머리가 크고 푹신한 베개에 닿자 거짓말처럼 잠이 몰려왔다. 립 밴 윙클(Rip Van Winkle)이 이렇게 잠이 들어 노인이 되어버렸지. 나도 깨어나면 머리는 하얗게 새고 인생은 다 날려먹은 노인이 되어 깨어날거야. 술취해 넋나간 사람치고는 상황에 합당한 스토리를 떠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니, 이게 다음 날인지, 다음다음 날인지, 한시간 후인지 알 길이 없었다. 눈을 뜨자 푸른색 네모난 천장에서 매달린 샹들리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가 극심한 두통 때문에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욱-.”

깨질듯한 머리에 달린 내귀에 누군가가 속삭였다.

“저런, 머리 아프세요? 약이라도 갖다드릴까요?”

옆을 돌아보자 포니테일 여인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이해 안가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두통 때문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뭘 물어보고 그래. 보면 모르겠니?”

짧은 머리 여인이 크리스탈 물컵과 하얀 약봉투를 내밀었다. 약봉투에는 선명하게 <다나약국>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약국이다. 약봉투 안에는 평소 먹는 숙취용 알약과 쌍화탕이 들어있었는데 따듯하기까지 했다. 약을 입안에 털어넣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일어나세요. 빈 속에 다시 잠들면 좋지 않아요. 누워도 이거 드시고 누우세요.”

눈앞에 은방울이 매달린 가는 발목이 보였다. 발목을 따라 위로 올라가자 틀어올린 머리의 여인이 여전히 베일을 늘어뜨리고 밥상을 들고 서있는게 보였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자 김치 콩나물국 냄새가 풍겨왔다. 뭐냐, 여기는? 언벨런스한데다 묘한데서 디테일하다.

“대체, 여기 정체가 뭡니까?”

맵고 뜨거운 콩나물 국을 마시자 기운도 나는 것 같고 정신도 드는 것 같았다. 이 장소와 여인들이 실제라고 믿겨지지 않았다. 모든게 거짓이라면 약도 거짓말이고, 콩나물 국도 거짓말이고, 내 정신은 맛간 상태라야 할 것이다.

“주태승씨가 처음 본 그대로예요. 이 곳은 꿈에서나 볼 궁전이죠.”

긴 베일 여인의 사려깊은 대답을 듣고 다시 제대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60여평정도 되는 넓이에 고급스러운 가구, 양탄자에 샹들리에와 분수, 거기다 세명의 미인까지.

“궁전답긴 하지만 꿈에서나 볼 정도는 아니군요. 그러니까, 궁전이라면 뭐…… 베르사이유 정도는 되야 되는거 아닙니까?”

“여기는 주태승씨 혼자만의 궁전인걸요. 여기서 당신은 왕처럼 지낼 수 있어요.”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게…… 내가 여기 왕이요?”

“그런 셈이죠.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지만요.”

권리만 있고 책임이 없다고? 세상에 그렇게 거저 먹는 왕도 있단 말이냐?

“아직도 몸이 안좋으시면 꿀물을 타다 드릴까요?”

짧은 머리 여인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어보았다.

“아니, 딱히 지금 뭘 마시고 싶지 않네요.”

“어깨를 주물러 드릴까요?”

포니테일 여인의 애교섞인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퍼졌다.

“고맙긴한데, 몸이 많이 풀려서 별로…….”

“그럼 편한 옷으로 갖다 드리죠.”

긴 베일이 여인이 우아하게 일어나 거대한 옷장으로 걸어갔다.

“편한 옷은 필요하겠군요. 그런데 당신들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의 시선이 짧게 교차했다. 짧은 머리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질문에 답을 주었다.

“저희는 이름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부르세요.”

속으로 생각했다. 이름이 ‘꿈’이거나 ‘궁전’이거나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잠자기 편한 옷을 준다더니 이 들은 굉장한 옷을 주었다.

“이런걸 입고 자란 말입니까?”

“물론 다른 옷들도 있습니다. 왜요? 불편하신가요?”

불편할 리가! 이렇게 몸을 사락사락 스치는 옷감은 난생처음이다. 비단이 이런 느낌인가? 입고 나니 슐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머리에 쓰는 터어번을 주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약과 국을 먹어서인지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다시 깃털침구 위로 엎어졌다. 정말 몸이 피곤해서 계속 자는건지, 혹시 콩나물이나 쌍화탕에 다른걸 탄건지 알 수 없었다. 계속 이렇게 잠만 자게 놔둘 생각일까? 흐릿한 시야사이로 세 여인이 내 침구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들 아름다운 나신이었다. 모자이크 처리도 하지않았다. 제대로 된 파일인걸?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잠을 자고 싶었다. 이 꿈은 깨지 않는 것이 좋겠다.


호화롭고 아름답고 나른한 나날들이 눈 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실내의 샹들리에가 비추는 빛 하나로 낮과 밤을 결정지었다. 샹들리에가 비추는 동안은 낮이고, 빛이 꺼지면 밤이 되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이란 따로 없었다. 내 핸드폰도 손목시계도 어디로 갔는지 안보이지만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먹고싶은 메뉴가 있으면, 신촌의 스테이크 정식 메뉴, 신라호텔의 스시 또는 춘천의 닭갈비까지 언제나 식단에 올릴 수 있었다. 입고 싶은 옷도 마찬가지였다. 정장, 캐쥬얼, 디자이너 작품등등. 옷장안에는 나를 위한 옷들 뿐이고, 그녀들 옷도 나를 위한 옷들 뿐이었다. 누군가 나를 찾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발견되고 싶지 않았다. 이 곳에는 내가 바라는 평화가 있다.

“어떤 평화를 말하시는 거죠?”

긴 베일이 자기 무릎에 누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질문했다.

“안정. 평온함. 격변도 없고, 마음의 동요도 없는 것.”

내 대답을 듣고 언제나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짧은 머리 여인이 온몸을 내 가슴에 밀착시키고 내 눈을 들여다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안정적이라는 거죠? 그건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일이죠.”

발치에 앉아있는 포니테일 여인이 맛사지 할 수록 내 발과 발목은 솜털처럼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발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전신에 퍼지고 있었다.

“자기를 돌아봐요. 얼마나 시달렸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죠. 바라기만 하고, 손에 넣을 수 없으니, 얼마나 자기자신을 원망했겠어요. 심지어 자기파괴행위조차 서슴치 않았겠죠.”

자기파괴행위라……. 그렇게까지 망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니 사실 그렇게 망가졌었다. 그 생각을 하니 정말 이대로 모두 녹아내려 사라졌으면 싶었다.

“여기서 당신은 온전하게 당신 자신일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남을 괴롭히지 않아도 좋아요. 또 남들이 당신을 괴롭힐 일도 없지요.”

나는 내 눈 위에 있는 긴 베일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가볍게 미소띤 눈은 무엇이든 물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 여인이 까슬까슬한 곱슬머리를 내 가슴에 부볐다.

“밖에 있으면 당신은 미쳐버리고 말거야. 사람들이 당신을 미치게 하고, 나중에는 당신이 당신 때문에 미쳐버리고 말거야. 주태승씨는 자기자신을 잃고 말아.”

발맛사지를 멈추고 포니테일 여인마저 내 목덜미 근처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주태승씨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자신의 힘을 넘어선 세상을 향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책임이 없어요. 그리고 사실 당신에게 책임을 지어주지도 않아요.”

나는 서서히 잠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들의 주술이 아니라 지금은 잠을 잘 때이다. 낮잠인지 새벽잠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긴 베일의 여인이 내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며 자장가처럼 속삭였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세요. 저 문 너머에 있는 걸 다 떨쳐버리면 그 때, 당신은 당신으로 다시 거듭날 수 있어요. 주태승씨 본연(本然)의 모습을 본인은 알고는 있나요?”

아니, 잘 모르겠다. 알 수 있다면 좋겠는데. 과연 그렇게 깨닫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인가?

“당신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갑자기 눈이 떠졌다. 누가 내 머리위로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천근같이 무겁게 짖누르는 깃털 이불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그건 틀린 것 같애. 난 잘못이 있어요. 분명히 그 잘못에 대한 책임도 있어요.”

세 여인은 웃으며 내 옷소매를 끌어잡았다.

“그게 뭔데요?”

상냥한 긴 베일 여인의 말에 나는 대답을 못하고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혜주. 난 혜주한테 잘못했어요. 분명 그녀가 떠난 건 내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버린 것에는 분명 내 책임이 있어요.”

세 여인은 다시 그림같은 손가락으로 내 비단옷을 그러잡았다.

“우린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예요. 우리의 말을 이해 못하겠어요?”

포니테일 여인의 설득조에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알아요. 알 것 같아요. 여기 있으면 난 어째서인지 훌륭한 사람이 될 것 같아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해요. 하지만 난 그리 훌륭한 사람은 아니야. 내가 나를 아는데……. 그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착각을 계속 심어주는 것에 불과해.”

짧은 머리 여인은 화난 것 같았다.

“봐요, 다시 퇴보하고 있잖아. 나아질 수 있으면 나아지는 거예요. 우리는 당신에게 계속 숱한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세상을 보여줄 거예요. 당신이 나빠서 모든 일이 나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단 말예요.”

“여기 계속 누워있으면서?”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기만 하며? 아무도 괴롭히지 않으면서, 알게 될 거라고? 내 책임은 아무것도 없다는걸 깨달으라는 건가? 안됐지만, 분명히 있어요. 혜주가 있으니까. 내가 실수했고, 내가 나빴어. 그건 내 책임이야. 없어지지 않아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60평 너머에 있는 작은 철문을 향했다. 긴 비단 잠옷이 질질 끌리며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들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오자마자 대책없는 술기운이 나를 덮쳤다. 손목을 보았다. 고추장 얼룩이 묻은 셔츠 손목부분 아래로 새벽 2시를 가르키는 손목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 밤은 정말 정신없는 밤이군. 이제 집에 돌아가야만 돼.’

돌아보지 않으려고 생각했지만 번쩍거리는 꿈의 궁전 입간판을 보는 순간, 안을 들여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은 닫혀있었다. 손이 저절로 닫힌 문을 향해 뻗었다.

“들어오실라우? 여기 어제 새로 온 아가씨 있는데.”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문이 열렸다. 빨간 립스틱과 새카만 눈화장이 요란한 중년의 여인네가 어두컴컴하고 짧은 반바지를 입은 아가씨가 서있는 내부를 보여주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너무 늦었네요. 다음에 올께요.”

근처 편의점에 들러서 따듯한 캔커피를 사고 내 눈치를 보는 빈 택시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커피의 온기를 느끼며 한모금 입에 넣자 맨 앞에 있는 택시한대가 자리를 떠난다. 상관없잖은가. 빈택시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좀 더 큰길로 나가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으니까.

마음이 편해지면서 거리를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도로 양 옆으로 온통 그런 비어 홀 투성이다. 똑같은 구조의 입구를 모두 다른 간판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야생마, 느낌, 빨간장미, 브라질…… 브라질? 설마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을 생각하고 만든 이름은 아닐테지. 삼바축제와 연결시키는 쪽이 낫겠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다. 멈추지 않는 통증에 연거푸 진통제를 투입해서 모든게 무감각해져 버린 기분이었다. 예전에 충치가 생겼을 때는 충치있는 부분만 마취를 해서 얼굴 반쪽이 두꺼운 납덩이처럼 딱딱해져 버렸는데, 지금은 온 몸이 두꺼운 납덩이처럼 딱딱해져 버리고 말았다. 둔탁한 심장을 안고 오늘 밤을 지내다보면, 내 꿈에 나타나 가슴을 후벼파던 프레디의 손톱도 힘을 잃겠지. 난 택시를 잡기로 결정했다.

건너편 도로에 늘어선 택시 한대를 향해 손을 흔들려는 순간, 택시 뒤에 보이는 간판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다른 비어 홀의 간판과 별 다른 점은 없었다. 지저분한 입구, 새까맣게 선팅한 통유리, 유치한 색조의 간판. 간판…….

“첫사랑.”

나도 모르게 간판 이름을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분명 그렇게 쓰여있었다. 첫사랑이라고. 택시를 부르려던 손을 내리고 간판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내 행동에 택시기사들은 실망하거나 상욕을 내뱉고 있겠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힘든 하루였어. 몇시간을 몇날 며칠처럼 보냈어. 난 지치고 무뎌졌어. 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일상적인 하루를 되찾을 수 있어. 간신히 통증이 멈췄는데…….’

멈췄다고? 그렇다면 지금 바늘끝으로 가슴을 찌르는 따끔거림은 뭘까.

“피곤해.”

택시를 타고 집에가면 침대가 있고, 몇시간 못자고 나오겠지만 맑은 정신으로 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건너편 택시를 향해 발을 옮겼다.

-끼익, 딸랑.

“어서오세요.”

택시를 지나쳐 그 뒤에 있는 선팅된 유리문의 긴 손잡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평범한 비어 홀, 그대로였다. 칸막이가 높은 자리와 어두운 조명, 한구석에 쌓아놓은 맥주박스. 그리고 어딜가나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화장을 하고 있는 주인 아줌마.

“여기 앉으세요. 호호, 벌써 많이 취하셨나보네. 술냄새가 아주 진동을 해요.”

요란한 주인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기 더 있지 말고 그만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몸을 돌리자 주인은 내 소맷부리를 붙잡았다.

“아유, 기다려. 들어와서 왜 나가려고 그래.”

“아, 아니요. 잘못 들어왔어요. 미안합니다.”

“어머, 딴데보다 더 잘해줄께. 더 이쁜 애들도 있어. 아니, 얘들이 손님 왔는데 어디서 퍼질러져 있는거야? 여기 좀 앉아요. 금방 애들 불러서 술내오라고 그럴께. 응? 가지 말어!”

거의 떠밀리다시피 자리에 앉은 나는 멀거니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다. 살짝 나가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

사각의 높은 칸막이 안에는 공간에 딱 맞게 술좌석이 마련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입구 바로 안쪽으로 탁자와 낡은 빨간 쇼파가 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는 그런 공간이 세군데 있는데 그중 하나의 입구에만 요란한 녹색의 커텐이 쳐져 있다. 이미 누가 들어가 술을 마시고 있는 걸까?

“아니, 왜 그래. 어딜 가려고 그래. 우리가 잘해준다니까. 얘, 삼순아. 가서 인사드리고 주문받아야지.”

“오빠, 김삼순이예요. 거기 서있지 말고 이리와 앉아요.”

드라마 김삼순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긴 아가씨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커텐이 드리워진 입구를 턱으로 가르키며 사장에게 물었다.

“저긴 왜 막았어요?”

사장은 나를 가볍게 밀 듯이 자리에 앉히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저기, 탁자가 다 망가져서……. 호호, 이런 장사하다보니 별별 일이 다 생기거든. 그래서 흉한꼴 안보일려고 막았지 뭐야.”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두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주인 아줌마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거기 못앉는다니까. 다 망가졌다구!”

입구를 막은 커텐은 영화 <물랑루즈>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방에 드리워져 있는 커튼이었다. 나는 그 커텐을 기억한다.


조명은 꺼져있고 탁자는 멀쩡했다. 뒤의 두 여자는 나를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녀가 여기 싸구려 빨간 쇼파에 앉아 있으니까.

“어서와.”

신혜주가 나를 보면서 웃는다. 내가 아무리 약속시간에 늦어도 그녀는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늦었잖아. 오래 기다렸단 말이야.”

언제나 난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과 늦은 이유에 대한 변명으로 바빴다. 한번도 나를 기다리며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미안, 나야 늘 늦잖아. 심심했겠다. 뭐하고 있었어?”

“지나가는 사람들 보며 이런저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어.”

가끔 여기까지 대화가 나갈 때도 있긴 했다. 그리고 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무슨 생각?”

그녀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 그냥. 같이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 행동, 몸짓 그런거 보면서 어느쪽이 어느쪽을 더 좋아하고 있다던가, 저 네명중 한명은 또 한명을 싫어하고 있구나한다든가, 그런거지. 사람들 행동에 쓸데없는 의미를 붙이고 멋대로 결론을 내버려.”

넌 평소에 쓸데없는데다 집중력을 낭비하고 있었구나. 그녀는 쑥쓰러운 듯 빈 물컵을 만지작 거리며 작게 웃었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사람들이 진짜 그런것도 아닌걸. 내가 만든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얘기지.”

“그럼 이 비어 홀은 다 뭐지? 이것도 네가 만들어낸 세상 중에 하나 아니었어?”

“아니야. 난 이런거 만들지 않았어. 지금의 나도 진짜 내가 아니야. 난 당신이 만들어낸 그 많은 장소의 일부야.”

눈앞의 혜주는 두 달전에 결혼한 혜주가 아니었다. 비어 홀도 이 거리에 있는 비어 홀이 아니듯이…….

“어쩜, 당신은……. 그토록 많은 것을 겪고도 아직 못 알아챈거야? 자신이 만든 장치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댄 이유 말이야. 원하는건 하나였잖아.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말이야.”

혜주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내 손을 잡고 위로해주었다. 나는 그 손안에서 더 큰 고통을 느낄 뿐이었다. 이 손은 진짜가 아닌 카피본이고 다시는 그 손길을 찾아 올 수 없는 것이다.

“왜 나를 떠났어.”

비겁하게 카피본에게 묻는다.

“태승씨는 나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잖아. 왜 신경질을 부리게 되었냐고, 왜 자꾸 만나는 시간을 줄이냐고, 왜 핸드폰을 밖에 나가서 받느냐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잖아.”

물어보기 무서웠던 것이다.

“나한테 더 이야기를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을거야.”

힘없는 목이 저절로 떨구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모든게 너무 늦은 후였어. 태승씨는 아파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게 없었어.”

그녀와 나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좁은 비어 홀에서. 솔직하게 느낀 그대로를 전달하고 의견을 듣고 놓치고 지나간 부분을 되짚어나갔다.

“시간이 늦었어. 태승씨, 출근해야해. 밤을 꼬박샜네.”

선팅되지 않은 부실한 창문 모서리로 햇볕이 비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밤이었다. 이 밤에 이 거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도, 알고싶지도 않을지 모른다. 각기 원하는 것만 찾아 보고 듣고 하는 일에도 많은 것을 할애해야 하는 시대니까. 이런 낡은 간판의 비어 홀은 지나치는 거리의 뒷 배경에 불과할 뿐 아닌가.

“그래, 출근할 시간이 다 됐군.”

나는 <물랑루즈>에 나오는 커텐을 쳐다보았다.

“그래, 잘 들어가.”

“이제 다시 못보려나?”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태승씨의 생활이 변하고, 누군가 만나게 되면 오늘같은 밤은 없겠지.”

“그렇겠네.”

잠시 어제 밤의 일을 돌이켜보았다. 내가 무엇을 바랬고, 무엇을 떨쳐냈는가. 그런데 그런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계속 여기 앉아서 너와 이야기해도 좋을까?”

놀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별로 나가고 싶지 않아. 여기서 너와 여기서 마주앉아 있는게 좋아.”

혜주라면 자신이 먼저 나가겠지. 하지만 눈앞의 그녀는 내 안의 고통에서 튀어나온 혜주의 카피본. 그녀는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을 하게 되어있다. 혜주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의 답을내주고, 내가 지적받기를 거부했던 단점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전달하고 그리고……

“그래, 원한다면 그렇게 해.”

나와 함께 있어줄 것이다. 내가 아프지 않게.


누군가 이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나를 발견하게 되면, 집과 회사에 잘 말해주길 바란다. 그는 그 곳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말이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