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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홍콩

  • 작성일 2006-12-02
  • 조회수 317

                                     2006, 홍콩

                                                                                                           知永

 

 

 

 황추보(黃秋寶)는 오늘도 공사장의 막일을 끝내고 10층의 허름한 아파트로 돌아오고 있었다. 어스름한 저녁의 구룡성의 뒷골목은 고달픈 하루의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평온하지도 않은 가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어깨를 붉고 파란 네온사인으로 비춰주고 있었다. 추보가 걸어가는 10층 꼭대기의 방 두칸짜리 아파트도 휴식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얼굴은 비추지도 않고 인삿말만 현관 정면에 방으로 밀어넣은 채, 황급히 자기방으로 들어가기 바빴다.
"이상한 냄새가 나는구나."
웅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가 건넌방에서 들려왔다. 추보는 애써 외면했다.
"스승님. 몸에 땀이 많이 나서 냄새가 고약할 겁니다. 금방 샤워하고 들어가겠습니다."라는 말 따위는 통하지 않을걸 이미 알고 있었다.
"고얀 놈!"
아파트 천정이 날아갈 것 같은 저 고함소리에 다리가 알아서 스승의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추보의 몸은 뛰어난 조건반사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안그래도 뻘뻘흘렸던 땀에, 스승 앞에서 흘리는 진땀까지 더해져 방안 전체가 추보의 땀냄새로 도배하는 듯 하였다. 반팔 셔츠도, 청바지도 땀에 젖어서 축축했다. 그 역시 자신의 땀냄새로 질식할 것 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스승은 그런 것 쯤 아랑곳 하지 않았다.
"네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구나."
"당연하잖아요. 냄새가 안난다면 코가 이상해진거예요."
또다시 천정을 뚫을 호통이 이어졌다.
"이런 천하에 버르장머리 없는 고약한 놈 같으니라구. 그 냄새가 아니잖느냐. 네 놈이 밖에서 또 뭔가 괴이한 것을 먹은게야."
말라 비틀어질 노인네. 코만 생생히 살아있다.
"제가 무슨 괴이한걸 먹었다고 그러세요. 햄버거가 무슨 기린 등심으로 만든 물건입니까?"
그것도 점심에 먹은 것이다. 5시간 전에 먹은 음식 아닌가. 200년을 살았다더니, 그 얼토당토 않는 말이 믿겨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서 추보는 몹시 울적했다.
"도시락은 어쩐거냐. 그것 외에 이 세상에 먹을 음식은 없다고 누차 일렀거늘."
호통의 기세는 가시고, 끌끌 혀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도시락이요? 그게 도시락이에요?"
황추보의 가슴에 서서히 분노의 불꽃이 지펴올랐다.
"방울 토마토 몇개에, 생쌀에, 씁쓰레한 맛밖에 없는 날풀쪼가리에, 그것도 양이나 많으면! 정신나간 것들 다이어트 할 때나 먹을 만큼 주면서 뭔 도시락이예요."
참으로 어리석은 제자 추보가 하늘같은 자신에게 대들다니. 스승의 작은 눈은 동그랗게 커졌다.
"소식(食)의 중요함을 내 누차 일렀잖느냐. 네가 먹는 음식은 내 손수키운 것으로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거름으로 이틀간 담아둔 수돗물로만 키우는 것을 네가 잘 알고 있거늘."
"이랬잖느냐, 저랬잖느냐. 이랬거늘, 저랬거늘. 무슨 사극 찍어요. 정말 그 말투는 19년이 지나도 익숙해 지지 않는다니까."
스승은 조용히 하늘을, 아니 아파트 천정을 보며 탄식하였다.
"어디서 되도 않는 음식을 먹고 오더니, 오장육부에 이상이 온게야."
스승이 조용히 도복을 거두었다. 직감까지도 필요없이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지 추보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있는대로 진행되었다.
정신을 잃은지 1시간이 지났을 거고, 머리를 만지면 혹이 나있을 거고, 눈을 뜨면 아파트 옥상일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추보의 머리를 스쳐갔다.
"정신 들었으면 썩 일어나지 못해?"
추보의 몸은 마치 꼭둑각시 인형처럼 벌떡 일어났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혹도 나고 머리도 아팠지만 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손목시계를 보니 30분밖에 안 지났던 것이다.
'나도 내 생존 정도는 지킬 수 있게 되었구나.'
퍽.
정수리에 스승의 손바닥이 내리 꼿히자 마자, 털썩 무릎을 꿇는 추보. 생존 보장 가능성은 의심해 보아야 하겠다.
"머리 좀 그만 때려요. 안그래도 나쁜 머린데 더 나빠지겠어요."
스승은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붉은 벨벳 쇼파에 정자세로 앉아서 참으로 가련타는 표정으로 어린 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보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배경에, 엄숙한 스승의 포즈가 마음에 들어 그냥 얌전히 있었다.
"너에게 일러주고, 연마시키고, 가르친 무공들은 모두 불세출(出)의 비급들이다. 너는 지금 그 초입단계에 불과하다. 그런 네가 함부로 썩은 음식을 먹고, 독같은 음료들을 마시며 다 날려버리는 것을 눈뜨고 지켜볼 스승이 어디있단 말이냐."
"아, 진짜."
황추보는 벌떡 일어났다.
"내가 정말, 스승님 그런거 고마워요. 네? 그러니까 버려진 나 주워온 것도 고맙고, 무공 가르쳐 준 것도 고마울 수도 있어요. 근데, 차라리, 그러니까, 그래, 고아원같은데다 놔두지 그랬어요. 이게 뭐예요. 내가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아봤어. 무슨, 문화생활을 누려봤어. 맨날 맞고, 넘어지고. 그런거 밖에 더했냐구요.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거나 재밌는게 많은데. 사극 흉내나 내고 말예요."
나이도 먹으니 머리도 컸다. 이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스승은 분에 못이겨 날뛰는 망둥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를 발견하였을 적시엔 기골이 튼튼하고, 우는 소리가 기운찬 게 무엇을 가르쳐도 잘 받겠구나 생각했다. 네 학교란걸 못갔다 하여 억울한 모양인데, 너는 그들보다 한문에 능하고 기예도 뛰어나다. 어찌 네 가진 것을 생각못해."
억울함이 뻗친다.
"누가 요새 한문을 쓴데요. 다들 영어배우지. 기예가 뛰어나면 뭐해요. 써먹을 데도 없는데. 그러니까, 나 배우되게 놔둬요. 지난 세월이 너무 억울하니, 가진 능력으로 쿵푸액션 영화에 나갈거라구요!"
스승은 이번엔 진짜 하늘을 바라보았다. 긴 한숨이 밀려나온다. 이제 이 어리고, 뻗대기만 하는 제자에게 알려줄 때가 온 듯 하였다.
"너는 배우가 될 수 없다."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같은 목소리였다.
"뭔 소리예요, 그게?"
스승은 정자세를 풀고 붉은 벨벳 쇼파에 편히 몸을 기대었다.
"내 이미 200년을 살아온 몸. 설마 나에게 제자가 너 하나 뿐일 거라고 생각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너에게는 사형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너와 비슷한 이유로 배우가 되길 희망하였지. 모두 훌륭한 기골을 지니고 있었고,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며 당대의 스타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세상에 얼굴을 알리는 즉시로, 그들은 적에게 노출되어 유명을 달리하였다."
멍해진 추보.
"적이요? 적도 있어요?"
"네가 갈고 닦아온 무예들. 모두 절세의 비급이다. 노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요. 그것으로 비명횡사한 이 역시 한둘이 아니지.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한무리로 뭉쳤고, 지금은 유일한 사파의 무리들이다."
삼류 무협소설도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어디있는데요?"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현대인과 섞여 살고있지. 그렇지만 너의 존재를 알면 여기저기서 몰려들어 너와 나를 죽이고 비급을 가로채려 할 것이다. 네 사형들한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사형들이 누군데요."
스승은 짧은 염소수염을 쓸어내렸다.
"너도 알것이다. 이소룡이라고......"
"이 소 룡?"
"특출난 인물이었지. 특출났고 말고. 그러나 부귀공명에 마음이 기울어 그만 배우로 전향하고 말았다. 나는 말렸건만,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적들과 대치할 수 있다고 믿었다. 후우, 부질없는 짓."
"......"
"결국 그의 하나뿐인 아들마저 그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그들을 막을 수도 없었고, 이 곳을 떠나 타국으로 손을 뻗칠 수도 없었다. 그 생각만 하면 내 마음이 찢어지는 구나."
추보는 스승의 한줄기 눈물을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의 제자 역시 그 재주가 비할바 없었다. 외모또한 출중했지. 결국 배우에 가수까지 되었다. 사형의 사연을 알자, 그는 쿵푸배우로는 데뷔하지 않겠다며 떠났다. 그러나 세상이 결국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몇몇 무협영화에 출연한 그를 알아보고 또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 내 어찌 셋이나 잃고 슬픔을 억누를 수 있으리."
"누군데요?"
"장국영이다."
추보는 웃었다.
"푸하하하하, 장국영은 영국에서 공부했어요. 그의 이력에 무예를 배울 자리는 없었다구요."

"국영이 거짓말 한거다."
"......"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있는 추보를 뒤로하고, 스승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 계단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걸음은 전보다 더한 무게가 드리웠다.
"그러니, 너도 지금의 수련이 완성을 볼 때까지는 조용히 앞날을 기다리거라."
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계속..... 구룡성의 낡은 10층짜리 아파트 위에서 황추보는 한밤중에 내린 이슬비를 맞고 서있었다.

오늘도 추보는 변함없이 일용직 공사장에 나가 별로 무겁지 않은 시멘트 푸대와 벽돌들을 나르고 일당을 받아왔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도 외면하고, KFC의 치킨 냄새도 외면하고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배가 많이 고팠지만, 평소보다 방울 토마토를 많이 담았으니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그냥 걷는 것 같았으나 보폭은 비급에 나와있는 대로였고, 몸에 매달은 쇠추는 네개를 더 늘렸다. 그렇게 일상적인 하루를 마치며 아파트 앞에 도착한 그는, 스승이 쉬고 있을 자기집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지....'
고개를 살짝 갸웃.
'스승님이 말한거 진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