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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 Back Time

  • 작성일 2007-05-09
  • 조회수 266

 

                         Turn Back Time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부근에 새로 생긴 찻집이 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저잣거리의 화려함을 유리벽 너머로 바라만 봐야했던 젊은 학생들은 그 찻집의 소박함과 싼 가격에 이끌려 현몽(賢夢)찻집으로 몰려들었다. 아니, 단지 그런 이유에서 만은 아니었으리라. 분명 이 찻집은 사람을 이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자, 여자, 노인, 아이를 불문하고 모두 환영의 인사를 보내는 마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녀가 손님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현몽이란 간판부터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는지도 모른다.

 “가게가 잘 되는 이유는 가게 안에 있지."

 경성제대 교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을 들은 학생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모르겠는걸, 자네 눈에는 그런 게 보여?”

 “이 찻집 주인은 다른 찻집과 달리 경성제대 학생들이 드나든다고 우쭐해하지 않아. 개개인 모두 똑같은 청년으로 생각하지. 하염없이 식물을 멍하니 응시할 때가 많은 것으로 보아 사람보다는 자연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인간은 그녀에게 식물만도 못한 존재일걸. 그게 오히려 학생들에게 편안함으로 다가왔지. 경성제대라는 교복을 입고도 그 허상을 벗을 수 있는 곳이니 말이야.”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웃음을 터트렸다.

 “경성제대의 허상이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친구도 자네밖에 없을거야. 난 도저히 허상이란 말을 못하겠네. 그건 바로 내가 다니는 학교가 경성제대라서 말야. 그게 허상이라 쳐도 말이지, 그 허상 때문에 대접받기를 원하는 학생들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호텔식 커피맛을 따라했다는 커피한잔을 우아하게 들이키며 호방하면서도 카랑카랑한 이중적인 목소리를 지닌 학생은 그 말에 답했다.

 “경성제대라고, 허울만 그럴 듯 하지. 우리는 양떼에 불과하네. 교수들이 말이 좋아 양치기지. 사실은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아까부터 신랄한 말만 퍼붓던 정태영은 다 마신 커피 잔을 아까운 듯이 쳐다본다. 어린소녀들에게 인기를 얻을만한 얼굴선이 가는 사람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태영과 동갑내기로 같은 법학부 2년생이지만 약간 나이 들어 보인다.

 “자네 말이 심하네.”

 혹시나 주변에 누가 들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임성섭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친구 정태영을 바라보았다.

 “심하다니,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뭐가 심하단 말인가. 자네는 이게 지금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슨 대학이란 게 알맹이가 바진 껍데기만 가르치고 있으니…….”

 성섭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 빠진 알맹이가 뭔데?”

 그 말에 태영은 소파에 몸을 풀썩 뒤로 젖혔다.

 “모르겠어. 애초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야 뭐가 빠졌는지 알지.”

 다시 웃으며 같이 아직도 절반이 남은 식은 커피 잔을 드는 성섭.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한다. 자네는 모든 걸 너무 심오하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런 버릇 좀 버리게. 그거야말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단 말일세.”

 정태영은 그의 성마른 체구처럼 넉넉한 체구를 가진 성섭의 말에 메마른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화의 끝은 늘 이런 식이다. 성섭이 다소 힐난조로 태영에게 단순하게 받아들이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말이다. 태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모든 게 자네처럼 산뜻하게 결론지을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편하겠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다 마신 커피 잔을 들여다보고, 주위에 꽉꽉 들어찬 같은 학교 교복을 바라본 뒤 슬금, 마담의 눈치를 살핀다. 여전히 마담은 손님들이 다 마셨는지, 자리를 얼마나 오래 차지하고 있는지 따위에는 관심 없어 했다. 그녀는 종업원과 수다를 떨거나 계산을 하려는 학생들과 가볍게 담소를 나누거나 하염없이 식물들을 쳐다보거나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그런 마담의 태도는 태영은 물론 학생들의 호감을 샀다. 그녀가 호들갑스러워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태영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마담을 관찰하고 있고, 마담을 등지고 앉은 성섭은 그런 태영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앉아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같은 교복의 학생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한마디 드립니다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매우 정중한 말투에 둘 다 옆을 돌아보았다. 혼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경성제대 교복의 학생 하나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로 대단한 말은 아니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뜻이죠. 예를 들자면 이 찻집에 경성제대 학생이 많은 이유는 찻값뿐만 아니라 실내가 우리 취향에 맞게 현대적이기 때문이죠. 마담의 차분한 태도 때문이기도 하죠. 이게 있는 사실이란 거지요.”

 아까 태영이 이야기한 마담이 사람을 식물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말에 정면으로 반박한 말이었다. 말뜻을 알아듣고 태영이 쓴웃음을 짓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친구 분이 더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마담이 인간을 하찮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저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학교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저 역시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에 대해 껍데기뿐인 강의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간혹 아닐 때도 있죠.”

 태영은 반색을 했다.

 “교내에서 내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닌데, 반갑습니다. 나는 정태영이라 합니다. 법학부 2년이죠. 형씨 성함은?”

 상대는 다소 성급하게 말하는 태영의 어조에 느긋이 미소를 짓는다.

 “최원식이라고 합니다. 경제학부 2년이요. 동급생이군요.”

 “자리건너 이렇게 말하지 말고 우리와 합석합시다. 태영이만 해도 벅찬데, 태영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까지 상대한다는 건 나로선 도전에 가까운 일이요.”

 너털 웃으며 말하는 성섭의 말에 원식은 말없이 커피 잔을 들어 태영의 옆 자리로 옮긴다. 애초에 그렇게 되길 바란 사람 같았다. 빈 자리가 생기자 찻집 밖에서 빈 자리가 생기길 기다리며 빙빙 돌던 일행하나가 냉큼 찻집으로 들어온다.

 “어서오세요.”

 약간 멍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마담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냥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한다.


 “우리학교의 허상이란 뭡니까? 교수들이 늑대라는 것은 무슨 뜻이죠? 빼앗긴 나라의 대학이란 곳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죄입니까?”

 자리를 바꾸자마자 원식이 말문을 열었다. 태영은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라고 하기에는 어렵군요. 그들은 죄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 권위를 찾아 이 학교에 왔어요. 우리도 죄를 찾아 이곳에 온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 곳은 최상위 교육을 가르치는 곳의 첨병이죠. 우리는 그 허상을 쫓아 찾아왔든 내몰리든 한거지요. 하지만 빼앗긴 나라의 대학이란 뭔가요. 결국 가축의 축사에 불과한 것.”

 “그럼 난 돼지우리에 갇힌 셈이군.”

 약간 살집이 있는 편인 성섭이 볼멘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태영이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입학하고 1학기가 지난 시점부터였다. 줄창 맞서왔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가축의 축사라……, 우리는 사육되고 있군.”

 한술 더 떠 원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있었다. 최상급 대학에 다니는 성섭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시점이었다.

 “모든 학교는 축사에 불과할 터이군.”

 마주앉은 태영과 원식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태영은 자기 생각에 이렇게까지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을 만난 기쁨이 얼굴에 잘 나타났다.

 “모든 학교가 축사란 말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오, 최형?”

 “그렇고 말고.”

 다시 성섭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인간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학교도 있지. 학교에서 많은걸 배웠다고 생각할 수 있는 학교도 있을 테고. 하지만 우리학교가 축사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야. 왜냐면 우리는 지배계급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우리는 사육되고 있는 것이네. 그들에게 언젠가는 잡혀 먹히기 위함이지.”

 성섭의 경악하는 표정 다음에 나타난 것은 원식의 탄성이었다.

 “제대로 짚어냈군요. 나는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것들이었습니다.”

 “맙소사. 그런 생각들을 이해한단 말이야? 자네도 경성제대 제복을 입은 주제에 말이야.”

 “이해 못할 건 또 뭐요…….”

 “어이구, 맙소사.”

 태영은 동질감을 얼굴 가득히 나타내고 옆자리에 앉은 원식을 바라본다. 드디어 동류를 만났다는 기쁨이 나타나있다.

 “꽤나 외로웠나 보군요.”

 원식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인다. 뭐든지 다 받아주겠다는 표정에 태영은 까닭 없 이 부끄러움마저 느끼고, 그런 분위기에 성섭은 위기감을 느꼈다.

 “최형과 정형이 이리 잘 맞으니 나는 소외감이 드는군. 나 빼놓고 술 마시러 간다든가 하는 일이 있으면 가만 안둘 테요.”

 다소 협박조의 성섭의 말에 태영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금방까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왜 이런 분위기가 생기는지 원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질투인겁니까, 임형? 정형과 같이 술 마시러 간다고 해도 그건 내 맘이죠. 그러나 여자랑 단 둘이 주점에 들어가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을 테고, 그런 일이 생길라치면 꼭 임형을 부르겠소.”

 원식의 말에 태영과 성섭이 얼어붙는다. 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 놀란 토끼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법학부의 정태영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법학부 유일의 여학생인데다가 내로라하는 재산가의 따님. 언제나 남학생 교복을 입고 다닌다지? 모르는 게 이상한 게죠.”

 임성섭은 “쳇!”하고 중얼거렸다.

 “자네도 그런 정형의 소문에 접근하려 덤비는 치들중 하나였나?”

 그 말에 당황한 것은 원식이 아니라 태영이었다.

 “말이 심해, 성섭. 최형은 그런 치들하고는 달라.”

 이미 비어버린 찻잔을 응시하고 있던 원식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난 단지 정태영이란 여성의 생각에 호기심을 느꼈을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전부 터 소문을 듣고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저 그 뿐이죠.”

 바로 말이 이어졌다.

 “정태영이란 여성이라, 정형을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군. 그는 한사람의 인간일 뿐이요.”

 “난 임형의 태도야 말로 정형을 한명의 여성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녀의 생각을 위축시키고 반박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여성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심보 아닌가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

 난데없이 가슴에 비수를 맞은 사람마냥 성섭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지금 제일 당황한 사람은 정태영이었다.

 “최형, 깨어있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입니다. 임형은 한번도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한 적이 없었어요. 임형은 순수하게 나를 하나의 인간, 동료, 동급생으로 봐줬단 말입니다. 그런 임형한테 너무 심하시오. 초면에 실례요. 우린 가겠습니다.”

 태영이 벌떡 일어나 맞은편의 성섭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지, 더 앉아있을 필요 없어. 정말 우리에 대해서 이해 못할 사람과 앉아있을 필요는 없어. 인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 다른 거 다 통해도 그게 안 통하면 얼굴 볼 필요가 없네.”

 원식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힘없이 끌려가는 성섭의 태도가 당신을 여자로 본다는 증거야. 왜 끌고 가면서도 그걸 알지 못하나. 왜 성섭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렵다는 듯이 그렇게 잡아끄느냐고.

 “이따 저녁 6시경에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정형. 위험한건 알지만 간단히 술이나 한잔 했으면 싶습니다.”

 그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태영은 계산을 치르기 바빴다. 그리고 황급히 성섭의 손을 이끌고 찻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찻집 한구석에서 일어났던 소란을 모두 봤을 터인데도 마담의 얼굴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혼자 남은 원식은 빈 찻잔 세잔을 응시했다.

 ‘하나뿐인 친구를 잃기 두려웠겠지. 그 사람이 자신한테 무슨 감정을 갖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그걸 무시할 만큼 친구를 잃는 게 두려웠겠지.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텐데 그 때는 어쩔 셈이지?’

 저녁은 아직 멀었다.


  시간은 꼬박꼬박 흘러 어느덧 6시가 되었다. 봄밤은 어스름 깊어 주위는 검게 물들고 학생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6시 10분, 6시 반, 7시가 되어도 정문에 기다리고 있는 원식에게 태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슨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이 원식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나뭇잎들이 무성한 정문 앞으로 한대의 인력거가 멈춰 섰다. 거기엔 변함없는 남학생 교복차림의 태영이 앉아있었다. 인력거의 커튼을 살짝 걷고 원식을 바라보는 태영의 얼굴에는 남학생 교복으로도 감출 수 없는 미모가 나타나 있었다.

 “이 시간까지 기다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일단 내리고 나서 이야기하지요.”

 그녀가 내리고 인력거는 떠났다. 둘은 마주보며 서있었다.

 “우리 둘 뿐이지만,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정형?”

 그녀는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술을 거부한 적은 없습니다.”

 나란히 걸어가면서 둘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져버린 벚꽃 잎이 거리를 가득 메워 마치 분홍색 융단을 깔아놓은 것 같았다.

 “왜 술을 거부한 적이 없을까. 술 마시는 게 좋습니까?”

 태영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이었다.

 “술은 나를 잊게 해주죠. 술은 주위와 동질감을 느끼게 하지요.”

 원식은 조금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를 잊게 해준다는 것은 여자임을 잊게 해준다는 말이고, 주위와 동질감이란 다른 남학생들과의 교류 같은 것입니까.”

 “어떻게든 나를 여자라는 묶음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군요. 나는 보다 인간적인 것을 말함입니다.”

 “인간적임을 강조하기 위해 남학생 옷을 입고, 남자들처럼 술을 마시고, 남자들처럼 말할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여학생 차림으로 남자들 세계에 뛰어드는 것이 더 인간적이지 않느냔 말이죠. 지금 정형의 모습은 남자들 사회에 편입하려 애쓰는 모습일 뿐이죠.”

 봄바람이 두 사람의 얼굴을 스친다. 얇고 작은 분홍색 이파리들이 허공을 나부낀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도 나에게 호응하지 못해. 난 동료들에서 따돌려지기 싫네. 난 사람들 속에 속해있는 것이 좋아.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그들에게서 이질감을 줄일 수 있다면 난 그쪽을 택할 뿐이야.”

 어느새 주점에 다다른 그들. 드럼통 위에 거대한 쟁반을 올려놓은 듯한 싸구려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곳이지만, 주변에는 역시 젊은 학생들로 들어차 있는 활기 넘치는 곳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계속 이어진다.

 “이질감을 줄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고루하고 꽉 막힌 틀에 사로잡혀있는 남성들의 인정이 그렇게 중요한가? 자신의 성을 왜곡시킬 정도로?”

 목이 말랐다는 듯이 태영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킨다.

 “왜 여학으로 가지 않았냐고는 묻지 않는군. 이젠 그런 질문에 지쳐 냉소로 응대해주고 있지만 질문하지 않는 친구는 드물었는데.”

 원식은 그 말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안주로 나온 두부김치를 먹기 더 바빴다.

 “그런 질문을 하다니 바보 같군. 여학에서는 법학을 안 가르치잖아. 경성제대로 올 수 밖에 없었던 거 아니었나.”

 “그 말대로. 여학은 법을 안 가르쳐. 난 법을 공부하기엔 경성제대가 제일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지.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내겐 적들뿐이었어. 가족조차도. 날 이해해주는건 아버지뿐이었고, 덕분에 학교에 올 수 있었지.”

 눈에 훤히 그려지는 듯 했다. 그녀의 길을 제일 말린 사람은 어머니였으리라. 그녀의 길을 제일 두려워한 건 가족들일 테고, 아무도 그녀의 속에 뭐가 자리했는지 알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가문에 먹칠을 할까봐 그게 겁났을 테지. 집안의 어른이 그녀의 편이었던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남자들의 편협함을 꼬집기보다, 그냥 남자들이 그렇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거군. 그냥 그런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가기로 한거고.”

 그녀는 처음 보는 불행한 눈빛을 보였다.

 “다른 여성들에게 미안해. 나는 나 하나만 챙기기에도 급급하네. 나는 내 이기심을 위해 다른 남성들을 교화할 여지가 없었어. 그저 그들을 인정하고 내가 그 속에서 인간으로 인정받는 일이 더 급했지.”

 울 것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여자의 눈물을 보는 것은, 더군다나 정태영의 눈물을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최원식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계속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다간 저도 모르게 그녀의 눈물을 기다릴 것 같아서였다.

 “정형은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는군.”

 “무슨 소리지?”

 막걸리를 들이켜고 호기롭게 소매로 입가를 닦는 원식.

 “아니야. 신경 쓰지 말라구. 그게 자네의 진실이군. 자네밖에 모르고, 자신이 제일 중요하고, 그로 인해 남을 위해 희생할 마음도 없고, 남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자신의 복장을 바꾸는 편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영리하네. 그런 정형을 조금도 비꼴 생각은 없어.”

 어느새 둘은 반말로 떠들고 있었다.

 “최형과 이야기하고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같아.”

 어느새 비어버린 막걸리 주전자를 흔들면서 최원식은 풀린 눈으로 지껄였다.

 “일어나자, 일어나자구. 술이 비었어. 술도 없는데 떠들어대는 것은 무의미해. 술이야 말로 우리가 인간이란 것조차 잊어버리게 하잖아. 우리의 대화도 여기서 끝이야. 다음, 다음이 기다리고 있잖아.”

“벌써 취했나? 주전자 하나에?”

“난 원래 술을 잘 못해.”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주점 밖으로 나왔다. 인력거 몇 대가 주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가지, 가자구. 집에 가라구. 난 정태영 자네가 집이 가까워도 절대 밤늦게 걸어서 집에 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 영악한 인간. 남자의 옷을 빌려도 자신이 여자라는 끈은 놓치지 않아. 그런 이중적인 면 때문에 친구가 없는 거야.”

 “나라고 친구가 없진 않아.”

 항의하는 듯한 태영의 말에 원식은 피식 웃는다.

 “그 남자친구들? 자네가 어른이 되면, 지금도 어른이지만, 어른이 되면 기다려 보게. 그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원식은 교복을 입은 그녀를 어여쁜 한복이라도 입은 것처럼 인력거에 태웠다.

 “내일도 볼 수 있을까? 점심시간에 학교 운동장에서 기다리겠어.”

 “아니, 기다리지 말게. 난 이제 학교 안나와. 자퇴했거든. 오늘은 그 기념이지.”

 태영은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사실 원식이 무슨 말을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상태였다. 술이 오르면 놀랄 만치 침착해지는 탓이기도 했다.

 “아쉽군. 계속만난다면 나에게 엄청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인력거꾼이 언제 떠날 건지 묻는 것 마냥 고개를 힐끗 돌렸다.

 “이기심에 모든 게 자기 위주인 정태영. 나중에 만날 날이 있겠지. 난 일본으로 가네. 다신 돌아오지 않아.”

 태영은 살짝 인력거 커튼을 내린다.

 “나도 일본으로 갈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어디선가 길에서 우연히 만날지도 모르고. 그 때는 웃으면서 인사하기야.”

 인력거는 떠났다. 그녀를 싣고 총총히 사라졌다. 인력거 바퀴에 흩날리는 꽃잎을 멍하니 바라보는 원식. 그러다 주춤거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만난다라, 이제 이 세상에서 그녀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그는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어느 다른 곳에서 정태영을 만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관악산 깊은 산자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아무도 찾지 않는 높은 산자락 깊은 숲 속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올라간다.


 그 곳에는 요상한 빛으로 번쩍거리는 로켓 같은 것이 하나 서있다. 거기서 임성섭과 놀라울 정도로 닮은 남자가 이 세상에는 없는 재질로 만든 작업복을 입고 붉은색, 노란색이 껌벅거리는 기판을 만지고 있었다.

 “만나고 왔어?”

 임성섭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최원식에게 말을 건다.

 “어, 헤어지고 왔어. 그녀는 여전했어. 전혀 변하지 않았어.”

 성섭과 똑같은 얼굴은 기판을 로켓 안에 집어넣고 뭔가 여러 가지 색깔의 선들을 이으며 투덜거렸다.

 “650년 전부터 그녀는 남자 옷을 입고 다녔단 말인가? 그녀의 영혼은 발전이나 변화도 없나? 여전히 정체성을 부정하고 다니게.”

 650년 전의 자네도 여전히 그녀 뒤를 쫓고 있더군. 내가 자네를 발견하고 얼마나 놀랬는줄 아나? 그러나 이런 생각은 원식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성섭과 같은 얼굴은 계속 투덜댔다.

 “게다가 그녀의 전생을 찾느라 허비한 3개월은, 그 수많은 수식들이 오직 그녀의 전생 하나를 위해 소진되다니, 어처구니없을 지경이야. 수학식 두 권은 나올 양이었다구. 한번밖에 못쓰는 타임머신이 자네의 연애사(戀愛史)를 위해 쓰여지다니 나로선 손해가 막심해.”

그렇게 투덜대는 친구 옆에 주저앉은 원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사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과거에도 그녀는 변치 않는 한 가지 일념으로 살고 있어. 인간으로서 인정받겠다는 이기심……. 나로서도 그런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돌아가면 그녀에게 청혼하겠어. 있는 사실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겠지.”

 퉁명스럽던 성섭닮은 친구는 반색을 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털고는 즐거운 듯이 말을 이어갔다.

 “드디어 결정했군. 이 정도 되면 자네 연애사에 쏟아 부은 내 타임머신의 가격을 톡톡히 치르는 셈이야. 그래, 돌아가세. 그녀가 있는 현재로. 나 역시 기쁘다구.”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