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환타지] 왕의 신부

  • 작성일 2007-03-21
  • 조회수 215

                                              - 왕의 신부 -

 

 

왕은 외로웠다.  이 거대하고 풍요로운 나라의 왕이란 자가 치를 떨며 외로워하는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일찌감치 부모와 격리된채 학자들과 마법사들과 검사들에 둘러싸여, 오직 책임감있고 현명한 왕이 되는 길만을 교육받아온 사대독자인 왕자는, 그나마 부모마저 잃고(왕과 왕비는 소풍길에 올랐다가 날아다니는 벌에 놀란 말이 이성을 잃는 바람에 마차가 전복되어 즉사해 버렸다.)고아신세가 되어버리고 만것이다. 그리고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 자리에 올라 왕이 얼마나 고독한 직업인지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서 혼인 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건 쉬운일이 아니었다. 왕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찬양했지만, 무식함을 비웃었고, 지식의 풍요함을 존중했으나 외모의 추함을 기피 하였다. 지적이며 매력적인 여성에게 끌렸으나 동정심이 없음을 나무 랬으며, 감성적이며 시를 쓰는 여성을 아꼈으나 여린 마음을 짜증스러워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과 모든것이 똑같은 여성이 있기를 바랬다.

왕의 취미, 생각, 먹는 음식, 좋아하는 책까지 모든것이 일치하는 그런 여성과 만나기를 소원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그런 부부가 되기를 열망하였다.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었다.

왕은 마법사의 거울에 나라 안과 밖의 여자들을 샅샅히 비추었고, 가장 빠른 말을 신하에게 하사하여 멀리 산맥 너머의 나라까지 돌아오게 명령했다. 심지어는 엘프와 마족의 여인들까지 살펴보려 한 것을 신하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겨우 멈추었다.

기다림에 지친 왕은 결국 끝장을 보려했다. 그래서 어처구니 없는 주문으로 매일매일 왕궁의 마법사를 들들 볶아대었다.

"폐하, 사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옵니다."

"도안팔트여.... 내가 원하는 것이 그리도 곤란한 일인가? 가물면 비가오게 하고, 폭설이 내리면 눈을 멈추게 하는 그대의 힘으로도 나의 신부감 하나 만들어내는게 그리 어려운것인가?"

왕궁의 수석마법사 도안팔트가 왕의 이러한 요구에 버텨온것이 벌써 석달이 다 되어갔다. 그는 이 터무니없는 요청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으나 한편으론 왕이 몹시 측은하기도 하였다.

접견실의 화려한 커텐도, 빨간색이 강렬한 책상위의 장미도, 왕의 옷을 수놓은 금은색실도.... 아무것도 그 빛을 내지 못했다.
모든 것이 왕의 어두운 얼굴에 묻혀 칙칙해 보이기만 하였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날들이었다. 왕은 나날이 말라갔고 왕이 약해져가듯 나라도 약해져갔다.

"폐하.... 정말 그러한 왕비를 원하시옵니까? 모든것이 폐하와 똑같기를 바라시옵니까?"

"진정코 내가 원하는 바다."

노마법사는 한숨을 쉬었다. 깊이 꺼져들어가는 한숨은 체념과 근심을 포함하고 있었다.

"알겠사옵니다."

마법사는 조용히 물러갔다.

그리고 또다시 1년.... 왕궁에 속해있는 10명의 마법사도 부족해서 타국에서 또 7명의 마법사를 초빙해왔다. 17명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고 실험한 결과. 드디어 왕과 똑같은 성격의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완성되었다.

"폐하. 마지막 단계만 남았나이다."

1년새 흰머리가 두배로 늘은 도안팔트는 쟁반위에 컵과 칼을 들고 나타났다. 왕은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꼭 완성시켜 다오."

"돈이 드는것은 아니옵니다. 그저 폐하의 피 한컵이 필요할 뿐 이옵니다."

"내 피를....?"

도안팔트는 컵과 칼을 내밀었다.

"폐하께서 직접하셔야 하옵니다."

왕은 컵과 칼을 한참 쳐다보았다. 이윽고 한팔을 걷고 칼을 팔뚝에 대었다.

뚜욱... 뚝....

투명한 크리스탈 컵이 피빛으로 가득하지자 노마법사는 말한마디 없이 그걸들고 접견실을 나왔다. 성직자가 들어와 상처를 치료해주고 돌아갈때 까지 왕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왕은 엄숙해 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왕은 자기 방에서 나오다 드디어 원하던 결과를 볼수 있었다.
문 앞에 까만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고(왕도 검은 머리였다.)동그란 분홍빛 뺨을 가진 여인이 서있었던 것이다. 그 옆에는 도안팔트가 서있었다.

"이...이 여인인가?"

여인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왕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서로 같은 사람이란걸.... 이 세상 누구보다 서로에 대해 잘 알수 있는 사이가 되리란걸 왕은 단박에 알수 있었다.

왕은 모든 일정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하루종일 루나(왕이 지어준 이름 이었으며 루나 역시 대단히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와 이야기 하며 정원을 거닐고 식사를 하고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은 정말 완벽 하게 서로를 이해했다.

....그 뿐이었다.

그냥 그 뿐이었다. 왕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증오 했다. 왕은 가장 보고싶지 않은 자신의 추한 모습을 거울보듯 들여다 봐야만 했다. 급한 성격, 아집, 불만, 애정 부족의 컴플렉스...
아무데서나 머리를 긁는 버릇까지.....
왕은 자신의 결점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고 그것이 얼마나 추한지 일깨워주는 존재를 갖게 된 셈이었다.
시간이 좀더 흐르자 왕은 끔찍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나에게 저런 면이 있었더란 말이냐?'

왕과 루나는 성의 넓은 뜰 한가운데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루나는 두사람의 마음에 꼭 드는 초록색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갓 왕궁에 들어온 서투른 하녀도 있었다. 그 다음은 뻔히 눈에 보이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녀는 노란색 크림스프를 보기 좋게 루나 앞가슴에 집어 던지다시피 한것이다. 스프는 왕의 얼굴에 까지 튀었다.

"짜악~"

벌떡 일어난 왕의 눈엔 저만큼 나가 떨어진 하녀와 자기가 한짓에 놀란 루나의 얼굴이 들어왔다. 루나는 미안해하며 손수 하녀를 일으켜주었다. 하지만 하녀의 뺨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입술 끝은 터져서 피가 흘렀다.(왕도 그녀도 힘이 좋았다.)

그리고 왕은 자기 역시 그 하녀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왕이 조금만 빨랐어도 하녀의 얼굴을 후려친 사람은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녀는 더 다쳤을 것이다.

왕은 선량한 사람이었다. 고집이 세고 맘대로 휘두르려는 성격이 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었다.
왕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젠 스스로의 선함이 위선이라고 여겨졌다. 사랑받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무의식이 자기를 선한사람으로 포장한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그의 선한 심성을 말해주는 거지만 그런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왕은 서서히 자기마저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마저 들었다. 왕은 외롭다 못해 자학까지 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은 방황했고 루나는 성심을 다해 왕을 도우려 했다. 하지만.... 왕이 루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처럼 루나도 왕을 사랑하지 않았다. 서로 완벽하게 이해하는 두 사람은, 완벽하게 이해 하는 일 이상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달빛이 장미정원을 비추던 밤... 왕은 술에 취해 사방을 비틀거리며 돌아다녔다.
루나는 왕의 방황을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이 더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왕 대신 국사를 처리하면서, 한편으론 매일 시종을 보내 제발 나라를 돌보셔야 한다고 하소연해왔다. 왕은 루나를 이해했기 때문에 귀찮게 하는 시종에게 화도 내지 않았다.
대신 시종을 피해 넓다란 장미정원에서 술을 마시며 자학하는게 소일거리가 되었다.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정말 위선자인가? 뭐하러 루나를 만들어 내라고 끈질기게 마법사를 졸랐던가....

왜 사랑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도안팔트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폐하, 방으로 돌아가서 쉬십시오.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왕은 도안팔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미안하오. 그대를 이렇게 늙게했어. 내가... 내가 그대를 오랫동안 괴롭혀왔어. 후후... 그런데 봐... 난 아무런 성과도 없지 않는가."

노마법사는 눈물을 흘렸다.

"폐하, 이 늙은이 소원이 있사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내가 할수 있는것이면..."

왕은 다시 술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지금 이대로 나가셔서 아무나 맨 처음 만난 처녀와 혼인하소서."

술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슨 소리인가?"

목이 잠긴 소리로 더욱 머리를 조아린 도안팔트.

"부디 그리하여 주시옵소서. 이대로는 폐하의 몸만 더 상하실 뿐이십니다. 전환기를 마련하십시오."

"아무와 혼인하면 내가 평안해 지겠는가? 난 더 불행해 지지 않을까?"

도안팔트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보다 더 불행해 질수 있겠사옵니까?"

성문이 열렸다. 새벽에 터덜거리는 왕의 뒷모습을 본 문지기들은 우왕좌왕거렸다. 몇명의 병사가 따라가려 했으나 왕은 노하며 그들을 막았다.
안개가 사방에 깔려 왕은 앞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우유 먹을래요? 배고픈거 같네."

불쑥 들려온 소리에 왕은 깜짝 놀랐다.
작은 소녀가 우유병을 가득실은 짐수레를 끌고 왕 옆에 서 있었다. 핼쓱한 얼굴, 깡마른 몸에 눈만 퀭하니 커다랗고, 못배운티가 나는 말투는 투박하기 그지 없었다.
소녀의 손에는 우유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먹어요. 돈 없으면 안줘도 되구요."

초라한 왕의 몰골이여. 남루한 셔츠에 때묻은 바지. 누가 왕이라고 하겠는가. 왕은 우유를 받아 마셨다. 눈물방울 하나가 뺨으로 흘러 내린다.

"한병 정도는 더 마셔도 되요. 자요."

소녀는 짐수레에서 우유병 하나를 더 꺼내려 했다. 왕은 소녀의 손을 잡고 짐수레에서 끌어내었다.
그리고 소녀와 혼인하였다.

소녀의 부모가 나라에서 제일 큰 농장을 갖게되고 소녀의 오빠가 왕궁 기사학교에 들어간 것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의 우유파는 소녀들이 새벽마다 거리를 배회하고, 왕이 타국의 왕들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올린 화려한 결혼식 이야기는 세상이 소멸되는 그 날까지 길이 전해져 내려올 전설이 될것이다.

암튼 이런 얘기는 먼 훗날에나 할 이야기고....

루나는 어찌 되었을까? 그녀는 왕가의 피를 나눈 사람으로서 왕의 누이동생 자격을 얻게 되었다. 여동생으로서의 루나는 나쁘지않은 존재였다. 둘은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서로를 칭찬했다.

"아마 내피를 나누어 가진 가족같은 기분이어서 더 사랑할수 없었던게 아닌가 싶구나."

훗날 왕은 노처녀공주 루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루나는 어떤 남자도 거부하며 꿋꿋하게 홀로 늙어갔다. 아마 그녀는 주변에 사랑 해줄 사람도 많고, 홀로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운명이 아니라서 왕보단 외로움을 덜 탓던게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그럼 행운의 우유배달 소녀와 왕은?

늦은 저녁, 백발이 성성한 왕은 20여명 되는 시종들, 기사들과 손주를 낳은 왕자비를 위로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왕궁 바로 앞에 자리잡은 도안팔트의 무덤가를 지나, 장미가 다져버린 쓸쓸한 장미정원을 가로질러, 몸이 불편해 따라나서지 못한 왕비를 보기위해 침실문을 열었다.
왕비는 커다란 안락의자에 따듯한 모포를 덮고 자고 있었다. 손에는 자그마한 책이 들려있었는데 제목은 <용의 계곡을 건넌 음유시인 프레일>이었다.

"으음... 아, 폐하. 언제오셨어요?"

눈을 뜬 왕비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방금이오. 왕자비는 건강하더군요. 손주도 튼튼하고...."

왕은 잠자리를 거들러 온 시녀들을 물리치고 왕비와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그래요? 정말 다행입니다. 저도 수일내 기운을 차려서 아이들을
보러가야 겠네요."

"책 읽고 있었소?"

"네, 정말 정신없이 읽었네요. 아픈것도 모를정도 였어요."

"호오.. 그렇게 재밌었소?"

왕비는 안락의자밑에 떨어진 책을 집어들었다.

"딴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저는... 특히 음유시인의 시가 너무 슬프더군요. 어째서 이런 시가 씩씩하고 사나이답다고 평가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외롭구 불쌍해보이던데....."

왕과 왕비는 노을을 구경하다가 잠자리로 들어갔다. 왕비는 깊이 잠들었지만 왕은 그러지 못했다. 왕비의 듬성듬성한 흰머리를 쳐다보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왕은 <용의 계곡을 건넌 음유시인 프레일>의 겉장을 벗겨내었다.
벗겨낸 겉장 안에 장난스런 글씨로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 이렇게 약해빠진 시가 왜 군가로 쓰였지? -

어렸을적 왕이 왕자였을 때, 프레일의 시가 군가로 쓰인 이유를 모르겠다고 스승에게 대든 기억이 떠올랐다. 용맹스럽다는 프레일의 시에서 왕자가 느낀건 홀로된 남자의 넋두리 뿐이었다.

"...부부가 늙으면 닮는 법이라더니..."

왕은 외롭지 않았다. 자기를 이해해주는 아내와 자식들과 말썽만 부리는 할머니가 된 누이동생도 있었다.

이제 왕은 만족스러웠고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잠이 들었다. 그 표정 그대로.... 왕은 깨어나지 않는 잠속에 빠지게 되었다.


- 끝 -


길이 머네. 내가 갈 길이
붉은 흙이 뜨거워
가죽신을 신고
발이 뜨거워
뛰어 가야만 하네.
엇차
나는 쉴 수 없는 여행을 하지.
뒤도 돌아볼 수 없어.
여인을 두고 가는 것은
그 녀 탓이 아니라네.
엇차
길은 하나고 목적지도 하나
뒤도 돌아볼 수 없어.
여인을 두고 가는 것은
오직 내탓 일뿐이네.

<용의 계곡을 건넌 음유시인 프레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