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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ic - Tortured Brain

  • 작성일 2007-10-26
  • 조회수 326

건물 지하의 자료실에는 적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나 군복 따위의 물건들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며 널려 있었다. 원래도 축축한 냄새가 풍기는 곳이 그런 물건들이 내뿜는 갖가지 냄새까지 섞여 들어 퀴퀴한 곳이 된 덕분에 더욱더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곳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래서 자료실은 담배를 피우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아도 되고 냄새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 게다가 그 곳의 관리자인 멕킨지 역시 근래 보기 드문 흡연자였기 때문에 헬릭에게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또 담배 피우러 온 건가?

“응!

“아무래도 자네가 이 건물에서 유일한 흡연자가 될 것 같군.

“무슨 소리야?

문을 열고 자료실 안으로 들어선 헬릭이 입구 옆의 멕킨지의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상의 주머니에서 담배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벽을 등진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멕킨지는 얼마 전에 유전자 치료를 받아 다시 머리칼이 자라기 시작한 이마를 긁으며 말했다.

“오늘부로 끊었거든. 의사가 알아채 버려서 말이야.

헬릭은 멕킨지의 말에 짧게 신음소리를 내면서 꺼냈던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이제 담배를 끊었다는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기는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멕킨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피워도 돼. 옆에서 담배 연기를 보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 그거 아나?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 말이야. 연기가 흩어지는 게 보이지 않으면 담배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더군.

“흠 그래?

헬릭은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주머니에서 검은 금속 재질에 은으로 장식된 작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라이터를 쥔 손을 책상에 올려놓고 열었다 닫으며 찰칵하는 소리를 냈다. 금속이 내는 맑은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담배연기가 흩어지자 멕킨지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괜히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는 입을 훔쳤다.

“옆방의 할 이란 남자는 어때?

헬릭이 그런 멕킨지를 씩 웃으며 바라보다가 물었다.

“메인 컴퓨터 관리자 할 말이야? 뭐 어떻다고 할 것도 없는 평범한 남자지. ?

“아니, 가끔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는데 그냥 무시하더라고.

헬릭의 말에 멕킨지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헬릭 앞에 놓인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다가 놀라 다시 헛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관리자잖아! 게다가 할은 매우 내성적이거든”

“내성적이긴, 국장실의 애니타한테 치근대는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 그리고 자네도 관리자지만 할이랑은 다르잖아!

헬릭이 이렇게 말하고 미소 짓자 멕킨지가 말했다.

“하하! 이렇게 쓰레기 더미나 쌓아놓는 곳 관리자하고 건물 메인 컴퓨터 관리자 하고 같겠어? 보안 레벨이 다섯 등급이나 차이 난다고!

“그런 건가?

헬릭은 이렇게 말하고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는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곤 일어서서 바지를 한 번 추키고는 말했다.

“오늘은 몇 시에 퇴근할 거야?

“왜 또 담배 피우러 오려고?

“그렇게 될 지도 모르지.

“오늘은 퇴근시간이 되면 바로 나갈 거야.

멕킨지가 이렇게 말하자 헬릭이 할 수 없다는 듯 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헬릭이 방을 나서고 나서 한참 지나 멕킨지는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다 책상 위에 헬릭의 라이터가 그대로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집어 들고 일어서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은장식이 반짝거리는 라이터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 컴퓨터 옆에 세워놓은 뒤 휴대용 통신 장치의 음성채널을 열어 헬릭에게 연락했다.

“이봐! 자네 라이터 놓고 갔어!

“아! 그래. 이따 찾아갈 테니 그냥 책상 위에 놓아둬!

“알았네.

멕킨지는 라이터를 원래 있던 자리에 올려놓고는 잠시 중단 되었던 보유 물품 목록을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멕킨지가 보유 물품 목록을 작성하는 동안, 헬릭은 5층 창가의 자기 자리에 앉아 최근 일주일간 수집된 자료 중에서 몇 가지 키워드가 포함된 자료들을 찾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네트워크 상에서 수집된 문서, 이미지 그리고 영상과 음향 파일들 속에서 압축되거나 암호화 된 정보들을 검색하고, 컴퓨터가 예상하지 못한 패턴이나 등록된 키워드가 포함된 파일들을 찾아내 출처를 표시하고 정보 분석실로 보내는 일이었다. 정보부 내에서 “쓰레기 통 뒤지기”라고 불리는 이 작업을 맡은 지도 세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컴퓨터가 대부분의 작업을 하고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는 진행 상황을 체크하거나 패턴 적합도의 경계선에 딱 걸린 자료들을 따로 빼내 확인하는 작업이 전부였기 때문에 헬릭이 하는 일은 사실 상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점이 국장 루이스가 현장 요원인 헬릭에게 이 업무를 맡긴 이유였다. 물론 헬릭의 신상 정보에 몇 가지 오류들이 보인다는 점 또한 헬릭이 현장으로 가지 못하고 이 지루한 업무를 맡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루이스가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서자 책상 위에 반원 모양으로 펼쳐진 디스플레이 필름을 쳐다보던 헬릭이 반투명한 필름 너머로 국장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때 업무는 할 만한가?

정보국에서 잔뼈가 굵은 중년 남자의 얼굴은 언뜻 매서워 보였다. 또한 날렵한 턱과 흰머리가 드문드문 보이는 짧은 머리는 그를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게 만들었지만 눈가의 주름이 그의 실제 나이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회색 슈트 차림의 이 중년 남자는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헬릭에게 이렇게 물었다.

“현장 근무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죠. 덕분에 몸이 둔해지는 것 같긴 하지만요.

“그런가? 그럼 곧 현장 근무 부서로 돌려보내야겠군.

눈웃음이 그대로인 채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헬릭 옆으로 와서 앞에 펼쳐진 디스플레이 필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자네 파일을 봤더니 정보부에 들어오기 전에 용병으로 일 했더군.

“네! 몇 년 용병으로 떠돌아 다녔죠.

별일 아니라는 듯 헬릭이 대답했다.

“그럼 혹시 포로 심문 해 본적 있나?

루이스의 물음에 헬릭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방금 전의 눈웃음이 가신 무표정한 얼굴로 디스플레이 필름을 바라보고 있는 루이스가 무슨 생각으로 물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몇 번 해본 적이 있습니다.

“자네 신상 기록에는 아주 전문적이라고 기록되어 있던데……”

“실패한 적은 없으니까 전문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헬릭이 이렇게 말하자 루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흘리고는 말했다.

“그제 아침에 적의 정보원으로 보이는 자가 하나 잡혔네. 위조된 신분이 문제가 되어서 잡혔는데 수상한 부분이 많아서 여기까지 보내졌지. 약물투여로 정보원이라는 것과 뭔가 전달하려는 임무를 맡고 있다는 것을 밝혀 내긴 했는데 그 이후에 막혀버렸어. 요원들이 애를 먹고 있더군. 결국은 몇 시간 뒤에 연구시설로 보내 뇌 분석을 하기로 했는데 혹시 자네라면 분석실에 보내기 전에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

“전문 요원 들이 실패했다면 제가 가도 별 수 없을 텐데요? 분석실에 보내는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요새 정보부 내의 청소 때문에 그 쪽도 일이 밀려서 바쁜 모양이야, 자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되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헬릭의 어깨 위에 손을 살짝 얹었다. 청소라는 루이스의 말이 조금 걸렸지만 그는 내색하진 않았다. 하긴 새로 개발 되었다는 분석기에 머리를 집어넣으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끄집어낸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 내부에 존재할지 모를 구멍들을 찾아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좋습니다. 한 번 해보죠.

“음, 고맙군.

루이스가 이렇게 말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가자 헬릭이 뭔가 생각난 듯 그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제가 거절하면 또 부탁할 사람이 있었습니까?

헬릭의 물음에 루이스가 멈춰서 고개를 돌며 헬릭을 보았다. 뭔가를 숨기는 듯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듯 보였지만 이내 사라지고 무표정한 얼굴이 돌아왔다.

“없었네. 이 건물 안에 전장에서 살인을 해 본 사람은 자네와 나, 둘뿐이니까.

루이스가 이렇게 말하고 나가자 헬릭은 그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장에서의 살인이라는 말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잠시 후 그는 책상 서랍에서 권총과 예비탄창을 꺼내 잔탄들을 확인한 뒤 허리춤의 파우치에 꽂고는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한대 피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그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방을 나왔다.

취조실은 지하 4층에 있었다. 업무의 특성 때문에 건물 전체가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지하 4층은 가장 보안이 철저한 곳 이었다. 혹시 있을지 모를 공격이나 침입 등을 대비해 모든 문에는 신원 확인 장치와 보안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체중 감지와 열 감지 센서가 깔려 있었다. 또한 벽에는 몇 종류의 감지 센서들이 심어져 있어서 실시간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정보를 처리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하 4층에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체온과 심박 수에서부터 외부로 연결되는 유무선 통신신호는 물론 손수레나 쓰레기통의 움직임까지 저장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하 4층은 거대한 거짓말 탐지기이면서 감시자의 의도에 따라선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두운 정적이 그를 반긴다. 그 수많은 센서들을 설치할 돈으로 조명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 거라고 헬릭은 생각했다. 혼자 서 있지만 혼자가 아닌 느낌. 어둠 속에서 그 느낌은 묘한 공포를 불러온다. 그것은 마치 유령이 뒤에서 따라오며 자신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느낌 같았다. 복도를 걸어가자 맞은편에서 열 감지 센서 안경을 쓴 남자가 다가왔다. 렌즈가 짙은 붉은색인데다 어두워 상대의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헬릭 에스몬드 씨죠?

“네!

“국장님 명령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사무적인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나서도 안경을 벗어 헬릭의 맨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어쩌면 얼굴에 나타나는 체열의 변화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헬릭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포로는 저 안쪽 3번방에 있습니다. 곧장 걸어가시면 왼편에 보일 겁니다.

“심문은 저 혼자 합니까?

헬릭의 물음에 남자가 난처한 질문은 받은 것처럼 오른쪽 입술을 실룩거렸다.

“네, 심문이 좀 길어져서 다른 사람들은 전부 쉬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사용하실 장비들은 안에 있으니 그것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헬릭이 짧게 대답하고 남자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듯 지나쳐 취조실 쪽으로 걸어가자 남자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취조실은 항상 모든 상태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취조 상황을 모니터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남자 또는 다른 누군가가 헬릭의 심문을 감시하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헬릭에게 전달하는 남자의 의도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거칠게 하지 말란 말인지 아니면 대강하지 말라는 말인지 그도 아니면 단순히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인지. 뜻을 확실하게 알 수 없어 헬릭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자 그 역시 자신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헬릭을 주시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남자가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헬릭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남자의 뒷모습을 잠시 서서 지켜보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남자는 자신의 휴대용 통신 장치를 꺼내 헬릭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심문에 대해 전문적이라는 국장의 말과는 달리 그가 방금 전에 만난 남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우일수도 있었지만 처음 만난 상대의 이름도 묻지 않는 헬릭에게서 그는 뭔가 수상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교육을 받은 요원이라면 자신이 가슴에 신분증을 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이름을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정보부서에 일하기에 적합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혹은 뭔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어서 신분증이나 상대의 이름 따위에는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었다. 단지 그가 작은 실수를 한 것일까? 남자는 잠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정보부의 정보 분석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그의 직감은 놀랄 정도로 잘 들어맞았었다. 물론 틀리는 경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국장의 일처리가 순리적이지 않은 점부터 헬릭이란 남자가 등장한 것까지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루이스 국장은 자신들의 심문을 중지 시키고 다른 사람을 불렀을까? 게다가 대신 등장한 남자는 왜 수상하게 느껴질까? 이전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 일어나고 자신의 직감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남자는 안경을 벗어 상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곳은 지상 6층 정보 분석실이었다.

헬릭이 취조실에 들어서자 복도와는 달리 밝은 빛이 그를 맞이했다. 60평방미터 정도의 직사각형 실내 안은 정사각형 모양의 패널들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바닥은 옅은 상아색 합성수지 바닥재가 깔려있었다. 저 패널 하나하나에 여러 종류의 측정 장치들이 장치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양 편의 책상 위에는 건물의 메인 컴퓨터와 연결된 개인 단말장치와 고문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 같은 장비들이 놓여 있었고 방 한가운데에서는 바닥에 고정 된 금속제 의자 하나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차가움이 느껴지는 그 크롬빛 의자 위에 한 여자가 발가벗은 채 앉아 있었다.

문이 닫히자 헬릭은 한쪽 벽에 놓인 사무용 의자를 끌어와 여자 앞에 놓더니 허리를 숙이고 양 팔꿈치를 무릎에 댄 자세로 앉아 턱을 괴고는 그녀를 관찰했다. 이십 대 초나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의 새하얀 피부가 맨 처음 눈에 들어왔다.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지 못하고 대신 옆구리에서 잘록한 허리로 내려오는 곡선과 매끄러운 배 그리고 그 아래 거뭇한 음모와 상체에 비해 근육이 좀 있어 보이는 허벅지와 종아리, 하얗고 가는 발목들을 관찰했다. 이어 확인하지 못한 얼굴을 보기 위해 헬릭이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기고 여자의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지금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질러냈다. 텅 빈 방안에 고음의 여자비명이 울리는 덕분에 헬릭의 가슴도 울렁거렸다. 잠시 뒤, 마치 고통을 토해내는 것처럼 충혈 된 두 눈으로 헬릭을 노려보며 목이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던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자국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채찍 자국과 비슷한 그 붉은 상흔들은 그녀의 허벅지에서 시작해 배, 가슴으로 올라가더니 결국 목까지 다다랐다. 20센티미터 전후의 짧은 자국들의 끝이 서로 연결되어 그녀의 새하얀 몸에 붉은 색 물감을 온 몸에 칠한 뱀들이 그녀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간 것처럼 선명한 선들을 남겼다. 붉은 자국들이 나타나는 것이 멈추자 비명을 질러대던 여자는 거친 숨을 한 번 토해내더니 숨이 차 헉헉대며 간헐적으로 마른기침을 했다. 가볍게 떨고 있는 그녀의 팔을 바라보던 헬릭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팔에 새겨진 붉은 자국에 손을 가져갔다. 부드러운 피부의 촉감, 하지만 달아오른 것처럼 뜨거웠다. 그리고는 손을 움직여 그녀의 한 쪽 얼굴을 가리고 있던 머리를 치우자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가늘고 섬세해 보이는 코, 끝이 치켜 올라간 눈썹이 콧잔등에서 오른쪽 턱 아래까지 이어진 붉은 자국과 함께 나타났고, 원래 곡선을 그리고 있었을 그녀의 약해 보이는 턱은 악 다문 탓에 지금은 귀 밑으로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아랫입술을 가늘게 떨고 있는 작은 입이 보였고 시선을 바꾸자 약간의 물기가 어린 두 개의 매서운 눈이 헬릭을 쏘아보고 있는 게 들어왔다.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었군!

헬릭의 말에 여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예전에 당해 봐서 알고 있어. 저쪽에 있는 헤드기어를 씌워 놓고 지독한 체험 프로그램들을 실행시켰겠지. 겁쟁이 새디스트들에게 딱 맞는 물건이란 말이야. 당신처럼 부작용으로 몸이 반응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헬릭은 잠시 예전의 경험을 떠올렸다. 악의에 가득 차 원래의 목적을 변형시킨 이 가상체험 시뮬레이터를 그는 경멸했다.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점이 틀릴 뿐 신경과 연결되어 고통은 실제와 똑같이 전달되기 때문에 당하는 사람은 멈추지 않는 악몽을 꾸는 것 같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작동 스크립트가 저장된 소프트웨어들도 다양해서 단순한 폭행이나 고전적인 고문 방식을 사용한 것은 기초적인 것에 속했다. 헬릭이 경험했던 것 중 최악은 시간감각을 무너뜨리는 “긴 여행”이라는 소프트웨어였다. 크기가 변하는 텅 빈 정육면체의 공간에 선 채로 시간이 흘러간다. 처음에는 제대로 지나간 시간들을 가늠하지만 차츰 그것이 무너지고, 가상현실 안에서 하루가 지났다고 느끼면 현실에서는 때로는 10, 1시간이 지나있거나 때로는 3일이 지나있다. 이렇게 시간 감각이 무너지면 그 때 고통이 시작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은 인간에게 적응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헬릭은 여자가 아마도 고전적 고문 방식을 사용한 소프트웨어를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섭도록 놀라운 발명품이긴 하지만 이 발명품으로 고문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간혹 실제로 신체에 상흔이 나타나는 부작용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곤 했다. 인체의 신비라고 할까. 고문 받아 고통에 찌든 뇌와 멀쩡한 육체 사이의 간격이 그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실제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본 것은 헬릭도 처음이었다.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헬릭이 그녀의 허벅지에 난 붉은 자국에 손톱을 가져갔다. 손톱자국이 날 정도로 눌러 천천히 무릎 쪽으로 긁어내리자 그녀의 허벅지와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내 이야기 듣고 있군. 정신 잃은 사람 앞에서 혼자 중얼대는 것은 싫으니까. 그렇게 긴장하고 있을 필요 없어. 내 말에 순순히 대답만 하면 되니까? 자 그럼!

헬릭은 이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담요를 그녀의 몸에 덮어주고 그녀 앞에 앉았다. 그녀의 떨고 있는 모습이 잠시 안쓰럽기도 했고 벌거벗은 여자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게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

“폭력과 약물의 수순이었나 보군. 그래도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을 보면 대단해. 여기서 사용하는 약물을 견딘 걸 보면 전문 훈련을 받은 모양이지? 자 그럼 이름부터 시작해볼까?

“……”

짐작하고 있던 침묵이 흐른다.

“이름은?

끝이 올라간 헬릭의 물음이 뒤 따랐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이었다. 순간 헬릭이 여자의 왼쪽 뺨을 때렸다. 여자의 고개가 돌아가면서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름은?

이번에는 오른뺨이 붉게 물들었다.

“전장에서는 시간이 생명을 좌우하지. 내 목숨뿐 아니라 부하나 전우들의 목숨도 달려있어서 심문할 때 여기 아저씨들 같이 부드럽게 하지 않아. 저런 신사적인 장난감은 사용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포기도 하지도 않지. 그러니까 내가 묻는 것에 대해 순순히 입을 열어 줬으면 좋겠어. 그럼 다시 묻지. 이름은?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봐! 이름 정도라면 쉽게 알려 줄 수 있는 거잖아.

헬릭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 졌다.

“이미 우리는 네가 반란군의 정보원이고 뭔가를 전달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름 같은 걸로 시간 끌지 말자고!

“왜 모두들 처음에 이름부터 물어보는 거지?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헬릭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일단 입을 열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드디어 입을 열었군. 자 이제 이름을 말해봐.

“왜 이름을 먼저 묻는 건지 알려주면 나도 이름을 말하지.

여자의 말에 헬릭이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더니 머리채를 잡고 뒤로 젖혔다.

“내가 반란군에 잡혔을 때 그 자식들은 내 팔을 팔걸이에 고정시키고 직경 1밀리미터짜리 드릴로 팔꿈치 뼈에 구멍을 뚫었어. 이제 흉터는 사라졌지만 팔꿈치에서 어깨까지 올라오는 뼈의 진동만큼은 잊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나도 현재 자신의 상황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공주님 몸에 구멍을 뚫어볼까 하는데 말이야. 팔꿈치는 재미없으니까 어금니나 앞니는 어떨까?

이렇게 말하고는 왼손으로 여자의 양쪽 뺨을 세게 눌러 닫힌 입을 강제로 열었다. 하지만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헬릭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글쎄, 그건 의사 선생님께서 알아서 결정하셔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치과 공포증 같은 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대로 해.

억지로 벌려진 입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새어 나왔다.

“입을 열기 시작하니 이제 다른 의미로 피곤하게 하는 군.

“아저씨가 겁쟁이 새디스트들 보다는 인간적인 것 같아서 말이 많아지는 모양이야.

여자가 이렇게 말하자 헬릭이 여자의 머리를 앞으로 밀 듯 거칠게 머리채를 놓고는 탁자로 다가가 말했다.

“그럼 의사 선생님이 치료를 시작해 볼까?

 

헬릭이 여자를 심문하는 동안 국장 루이스는 정보 분석실의 3차원 영상 프로젝터가 만든 공간 안에 들어가 있었다. 취조실 벽에 설치된 수집 장치로부터의 정보로 6개의 입체 영상 프로젝터가 복제해 놓은 지하 취조실의 3차원 영상 안에 들어가 한 쪽 벽에 기대어 선 채 헬릭의 입체 영상이 움직이는 모양을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었다. 루이스가 주시하고 있는 헬릭의 입체 영상이 탁자에서 작은 무선 드릴을 집어 드는 순간, 취조실 반대편 벽을 뚫고 방금 전 헬릭을 취조실로 안내했던 남자가 나타났다.

“저 남자 믿을만한 사람입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체 영상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장난기 섞인 눈 빛의 헬릭이 왼손으로 여자의 턱을 잡고 입 안에 드릴을 집어 넣는 중이었다.

“이 봐! 영상만 유지하고 소리는 잠시 꺼버리게.

아까의 비명소리가 다시 반복될 것을 예상한 루이스가 이렇게 소리치고는 헬릭의 머리 너머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별로 미덥지 않은 모양이군.

“네. 그런데 국장님께서도 별로 신뢰하시지는 않는 모양이군요. 이렇게 심문하는 것을 감시하고 계시는 걸 보니.

남자의 말에 루이스가 부드러운 눈웃음과 함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감시라기 보다는 어떻게 심문을 할 지 궁금해서 말이야. 그가 성공한다면 다음에도 맡겨 볼까하고 구경하는 거지. 그건 그렇고 왜 자네는 헬릭을 못 미더워하나?

남자는 자신의 실패를 비꼬는 국장의 말에 잠시 인상이 굳었다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제 이름도 물어보지 않더군요.

“단지 그것 때문인가? 카심! 이미 자네를 알고 있어서 이름을 묻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나? 난 자네의 그 유명한 직감 때문인 줄 알았네.

“맞습니다. 그 직감 때문입니다. 국장님! 제가 파견지에서 돌아온 지 삼 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저 남자가 저를 알고 있을 확률은 극히 희박합니다.

카심이라 불린 남자의 어조가 더욱 단호해졌다. 그 모습에 루이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 의심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과거 행적에 오류가 있다던가, 마지막 작전에서 다른 요원들은 전부 죽었는데 비교적 경미한 부상만 입고 포로로 잡혀있다 살아 돌아왔다던가 하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면 모를까 말일세. 물론 그 부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예?

“지금도 이렇게 자네에게 감시 당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이 건물 안에서 그가 어떤 수상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충분히 컨트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가 위험인물이고 그 정체를 드러내 준다면 오히려 감사할 일이지. 하지만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곤란한 상황을 만들진 말게. 자네처럼 그도 우리 동료니까 말일세.

“…… 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

카심은 당신의 행동도 수상하다는 말을 루이스에게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는 못했다. 그 사이 헬릭의 입체 영상이 고개를 들었고 그와 함께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카심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의사 선생님의 솜씨가 맘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아직 완전히 멈추지 않은 드릴의 회전음과 함께 헬릭이 상기된 얼굴로 여자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비명을 지르던 여자는 입을 다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상악 전치부의 전면에 몇 개의 구멍을 내는 동안 드릴날과 이의 법랑질, 상아질이 마찰하며 금속이 타는 냄새가 옅게 풍겼고 그 냄새는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보는 것 만으로도 통증이 느껴질 것 같은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던 헬릭은 벽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과 얼음을 컵에 따라 한 모금 마신 뒤에 여자에게 다가갔다.

“자 이제 이름을 말할 준비가 됐는지 모르겠군?

“내 말을 잊었나 봐? 이름을 듣고 싶다면 왜 이름부터 물어보는지 말하라고 했을 텐데.

여자의 입에서 쉰 목소리로 이 말이 새어 나온 순간 헬릭이 그녀의 입을 벌리고 얼음물을 그녀의 입 안에 들이부었다.

“어때! 뼈가 얼어붙는 기분인가? 치료를 했으니 입도 행궈야지”

헬릭은 물 한 컵을 다 입 안에 들어 붇고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입을 다물고 통증을 삭히고 있는 여자의 눈이 살기로 빛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잃었는지 여자가 아래로 고개를 떨구자 헬릭은 의자에 앉아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휴대용 통신 장치의 시계를 확인하는 것 같더니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불을 붙이기 위해 상의와 하의 주머니를 뒤지다 뒷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그가 맥킨지가 있는 자료실에 놓고 온 것과 같은 검은 금속 재질에 은장식이 된 작은 라이터였다. 그는 두 손을 모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빤 뒤에 일어나 여자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방 안의 조명이 깜빡 거리다 꺼지는 것 같더니 잠시 뒤 낮은 명도의 푸른 색 조명이 들어왔다.

“시간이 없어. 어서 일어나.

방금 전과는 달리 급박한 목소리로 헬릭이 여자를 깨웠다. 뺨을 두드려 여자가 깨어나자 헬릭이 여자의 얼굴을 들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이름을 먼저 물어본 건 당신 이름은 새어나가도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야. 시간이 없으니 어서 빨리 당신이 전달하려던 정보를 말해.

“뭐 하는 거지?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여자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헬릭을 바라보았다.

“나도 당신처럼 혁명 투사 연맹 소속이야. 당신 대신 정보를 전달하려는 거니까 어서 말해!

“이제 별 방법을 다 쓰는 군. 이게 전쟁터에서 쓰는 방법인가?

여자가 비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헬릭이 의자에 고정된 여자의 오른손을 풀고는 파우치에서 권총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 이제 믿을 수 있겠나? 시스템이 재 가동되는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빨리 말해!

여자는 손에 총이 쥐어지자 헬릭의 이마를 겨누며 말했다.

“이 권총에 총알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절반은 믿어주지 하지만 당신에게 전달할 수 있는 건 없어. 내 머릿속에 숨어 있는 거니까?

“무슨 소리야!

여자의 말에 헬릭이 소리쳤다.

“내가 전달하려던 것은 문서 해독을 위한 키코드야. 그 코드들을 외워서 전달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자의 말에 헬릭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혁명 투사 연맹에서는 정부의 감시를 피해 각 문서들을 암호화 하여 공개 네트워크를 통해 배포했다. 헬릭이 정보부에서 맡았던 업무가 바로 그런 암호화 된 문서들을 찾아내는 일 이었는데 그렇게 찾아낸 문서들은 특별한 사항을 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문서들의 일부분을 잘라내어 병합하면 새로운 압축 문서를 만들 수 있었고 그 압축문서를 해제하고 암호화를 푸는데 사용하는 코드들은 직접 전달하고는 했다.

“젠장! 그럼 당신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군,

헬릭이 이렇게 말하자 여자가 권총을 다시 헬릭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당신의 처음 계획대로 나를 죽이면 돼! 어차피 내게서 정보를 얻은 뒤에는 나를 죽였을 거 아냐.

여자의 말에 헬릭이 권총의 안전 손잡이를 올리고 말했다.

“여기서 당신을 죽여도 내가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없어. 어차피 의심 받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잡혀오지 않고 또 루이스가 심문을 맡기지 않았다면 메인 컴퓨터를 고장내고 사라질 작정이었는데 당신 덕분에 일이 꼬여버렸지. 이렇게 됐으니 당신도 나도 살아 돌아가야지.

“지금이라도 나를 죽이고 혼자 빠져 나가는 게 쉬울 거야.

헬릭은 여자의 손과 발을 풀고 일으켜 세운 뒤에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그녀의 입에 물렸다.

“쭉 빨아봐. 각성 효과와 진통 효과가 있는 흡입기야.

“이에 구멍을 낼 때는 언제고 이제 진통제를 내미는 군.

여자가 이렇게 말하며 일어서자 헬릭이 그녀를 부축해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팔이나 다리에 상처를 내면 움직여야 할 때 힘들어질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선택한 방법이었는데 미안하군.

헬릭이 그녀를 문 앞에 세워두고 문 주위를 살피는 동안 여자가 말했다.

“얼음물까지 부을 필요는 없었잖아.

그 말에 헬릭이 웃으며 그녀를 다시 부축해 복도로 나가면서 말했다.

“당신! 은근히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있더라고.

 

 

헬릭이 취조실에서 라이터를 켠 순간, 멕킨지의 사무용 책상 위에서 헬릭이 놓고 갔던 라이터가 폭발을 일으켰다. 그 한 쌍의 라이터는 실은 EMP장치로 작은 폭발과 함께 강력한 전자기파를 방출해 주변의 전자기기를 무력화 시키는 물건이었다. 멕킨지가 퇴근하기 전 생각을 바꿔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면 건장한 그의 몸이 절반으로 나뉘어질 정도의 폭발을 일으켰는데, 문 밖에서는 폭발음도 들을 수 없었지만 옆 방의 메인 컴퓨터는 폭발과 동시에 전원이 끊긴 것처럼 작동이 정지 되어버렸다. 긴급 상황에 대비한 비상 전원 공급 장치의 컨트롤러도 폭발의 영향을 받아서 자동 리붓 시스템도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그것은 건물 내부의 모든 통신 시스템이 중단 되었음을 의미했고 또한 헬릭이 감시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의미했다. 건물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메인 컴퓨터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층 전체가 두꺼운 금속 방어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지만, 내부에서의 공격은 건물을 가장 기본적인 전기 시스템만 동작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자료실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루이스와 카심은 담배를 꺼내 무는 헬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군요.

신기한 것을 구경한다는 것 같은 카심의 말에 루이스가 픽 웃었다. 하지만 잠시 뒤 영상 시스템이 노이즈와 함께 멈추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지?

“시스템이 중단 되었습니다. 지금 재 연결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시스템 오퍼레이터의 목소리를 듣고 카심이 말했다.

“저 취조실에서 방금 전에 전자신호가 발생하지 않았나 알 수 있나?

카심의 말에 다른 시스템 오퍼레이터가 대답했다.

“메인 컴퓨터에 기록된 것을 확인하면 되는데 지금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그 말과 함께 카심이 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저는 아무래도 헬릭이란 남자가 장난을 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카심의 말에 루이스가 눈 옆을 긁적이더니 말했다.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무장 경비팀과 함께 취조실로 가 보게. 되도록이면 무력 사용은 자제하게. 그 여자에게는 아직 얻어야 할 정보들이 있으니까.

“네!

카심이 대답하고 밖으로 뛰어나간 뒤 루이스도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책상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잔탄을 확인하고 왼쪽 허리의 파우치에 꽂은 뒤에 어디론가 향했다.

 

카심은 비상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서 경비실로 전화를 걸었다. 내부의 통신은 모두 중지 되었지만 외부를 통해 들어오는 통신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 온전하게 작동했다.

긴급 지시네. 지금 즉시 지하 4층으로 경비팀을 보내게.”

전화가 연결되자 마자 카심이 이렇게 소리쳤다. 다급한 카심의 얼굴에 경비실의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메인 컴퓨터 실에 공격이 벌어졌단 보고를 받고 모두 거기로 출동했습니다.”

! 그럼 아무도 없나?”

카심의 말에 직원이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이 밝아지더니 말했다.

지하 4층이라면 지하 3층의 특수 공격팀에 연락해 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 다행이군. 지금 즉시 출동해서 지하 4층의 3번 취조실의 헬릭 에스몬드와 적 정보원의 신변을 확보하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연락하겠습니다.”

카심은 연락을 마침과 동시에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상 3층의 비상구 램프가 그의 발걸음을 비췄다.

 

 

그 사이, 헬릭은 여자를 부축해 긴 복도를 빠져나와 지하 4층의 비상구 문 앞에 서 있었다. 다행히 아직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지만 여기서부터는 더욱 조심해야 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가장 먼저 헬릭과 여자를 확인하기 위해 올 것이며 그게 누구든 엘리베이터가 정지된 현재의 상황에서 계단을 통해 올 것이라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여기있어.”

헬릭은 여자를 4층 비상구 문 옆에 세워놓고 가슴의 명찰을 떼 주머니에 넣고 문을 열었다. 두꺼운 금속제 문이 작은 마찰음과 함께 열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와 닿았고 동시에 작은 발자국 소리들이 헬릭의 소리에 들렸다. 헬릭은 허리춤에 꽂쳐 있는 권총의 안전 장치를 풀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자 발자국 소리가 잦아들더니 바로 위에서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 들엇!”

전투복 차림에 라이플을 든 특수 공격팀의 지휘관이 헬릭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 특수 공격팀인가? 갑자기 컴퓨터가 모두 정지되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가는 길인데.”

헬릭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지만 상대는 아무런 말없이 그를 조준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신 뒤에서 두 명이 계단을 따라 내려와 헬릭의 옆으로 와 그의 몸을 수색해 권총을 빼앗고는 얼굴이 벽을 향하도록 세웠다.

이름과 소속을 대라?”

뒤에서 지휘관이 물었다.

자료실의 멕킨지 하웰이야. 분류넘버 43350003094-23”

평소 같으면 그가 들고 있는 스캐너에 명찰에 기록된 정보가 나타날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헬릭은 알고 있었다. 헬릭이 대답하자 양 옆에서 그를 잡고 있던 두 명이 손을 놓고 권총을 내 밀었다.

미안합니다. 위에서 지금 지하 4층에 있는 두 명의 신변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아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상황이 이래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 지상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지휘관은 헬릭에게 이렇게 말하고 아직도 헬릭 왼편에 서 있는 남자에게 신호를 했다. 헬릭과 함께 지상으로 이동하라는 의미였다. 헬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따라 올라갔고 그 사이 특수 공격팀이 지하 4층의 비상구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 옆에서 헬릭에게 경계를 풀고 있지 않은 남자를 포함해 모두 7.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하 3층의 비상구 문 앞에 도착한 순간 헬릭이 권총을 뽑아 옆에서 따라오고 있던 남자의 이마를 쐈다. 그리곤 바로 쓰러진 남자의 라이플을 손에 든 순간, 지하4층의 문 앞에 있던 여섯 명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헬릭은 먼저 쓰러진 남자에게서 수류탄을 빼내 계단 아래로 굴리고는 탄창들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청명한 금속음과 함께 수류탄이 계단에 튕기며 내려가 터졌고 폭음과 함께 희뿌연 먼지가 계단에 가득찼다. 좁은 공간이어서 폭발로 인한 피해는 줄 수 없었지만 그들의 공격 형태를 무너뜨릴 수는 있었다. 헬릭은 라이플을 들고 자세를 낮춘 채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순간 그의 머리 위로 총탄이 스쳐 지나가며 벽에 박혔다.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겨 반격하자 난간 옆으로 위협 사격이 계속 됐다. 잠시 뒤 탄창 하나가 다 비워지고 위협사격이 끝남과 동시에 아래에서 뭔가 튀어 올라왔다. 섬광 수류탄이었다. 미리 짐작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빨리 바닥에 엎드려 양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섬광 수류탄의 위력은 대단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멍한 귀로 눈을 뜨고 계단을 확인하자 두 명이 총을 겨누며 나타났다. 헬릭의 눈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공격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오는 두 명 뒤로 다른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신호로 헬릭의 라이플이 불을 뿜었다. 좁은 공간에서 공격을 받은 네 명이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쓰러지자 이번에는 아래에서 수류탄이 날아 들었다. 위쪽에 떨어져 계단을 타고 굴러오는 수류탄을 피해 헬릭이 라이플을 내던지고 권총을 꺼내며 난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지하 5층에 연결되는 계단 위로 착지하면서 남은 두 명을 쏘아 쓰러 뜨렸지만 그의 등과 다리에서도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계단에 앉아 그가 다리와 등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등에는 수류탄의 파편이 박혀있었고 왼쪽 다리에는 관통상이 나 있었다. 다행히 다리는 총탄이 거의 스치듯 지나가 출혈이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등의 파편은 꽤 깊게 박혔는지 통증이 심했다. 혁띠를 풀어 다리를 묶고 팔을 뒤로 뻗어 박혀 있는 파편을 뽑으려 하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걸렸지.”

헬릭이 고개를 돌리자 카심이 권총을 겨누며 서 있었다.

완전히 들켜 버렸군.”

여자는 어딨지?”

카심이 이렇게 말하자 헬릭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 무슨 여자말이야?”

시치미라도 뗄 셈인가? 좋아 빠져나가지 못했을 테니 천천히 찾아주지. ! 그럼 권총을 계단 아래로 던져!”

헬릭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옆에 놓아두었던 권총을 계단으로 던지려는 때, 지하 4층의 비상구가 거칠게 열리며 뭔가 튀어나와 비상구를 등지고 있던 카심을 밀어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다. 날아오르듯 카심의 몸이 떠올라 계단아래 떨어지면서 묵직한 소리를 냈고 헬릭의 권총이 발사됐다. 두 발의 총알이 쓰러진 카심의 옆구리에 맞으며 잠시 몸이 꿈틀거리다 멈추었다. 카심을 밀어 떨어뜨린 것은 모포를 두른 여자였다. 그녀는 바닥에 엎드린 카심의 뒷모습을 내려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복수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헬릭은 등 뒤의 파편을 마저 뽑고 일어서서 계단을 올라가 여자에게 말했다.

덕분에 살았군. 그런데 내가 몸이 이렇게 돼서 이제 부축은 못해주겠어.”

걱정마 아까 준 진통제가 꽤 효과가 있는 모양이니, 이제 나 보단 너에게 더 필요하겠는데.”

여자가 이렇게 말하며 그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헬릭의 입에 물렸다.

진통제는 하나뿐이야. 이건 그냥 담배라고.”

그러자 여자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며 말했다.

이것도 좋지 않아?”

그녀의 말에 헬릭이 쓴 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비상 계단을 통해 지하 2층의 주자창 문 앞에 다다르자 헬릭은 여자를 문 옆에 세워두고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 다음 주자장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또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렌지색 전등이 켜져 있는 주차장 한 쪽 구역에서 자신의 차를 찾아 문을 연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지금 퇴근하는 거야?

멕킨지가 막 자신의 차에서 내리며 헬릭을 부르고 있었다.

“응 조금 늦었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헬릭이 대답하자 멕킨지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퇴근 했다가 할이 다시 불러들이는 바람에 다시 돌아왔어. 막 집에서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자료실에서 뭔가 폭발했다고 그러더라고.

어두운 조명 때문인지 허벅지와 등 뒤의 상처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 그래? 그런 소리 못 들었는데. 그럼 수고하라고.

“어 그래!

멕킨지가 이렇게 말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차 문을 열던 헬릭은 자신이 뭔가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멕킨지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생각대로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멕킨지는 비상계단 문 앞에 서 있다가 헬릭이 오는 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는데. 자네도 걸어왔나?

멕킨지가 웃는 얼굴로 헬릭을 향해 이렇게 말하다 뭔가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눈빛이 변했다. 헬릭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왼쪽 다리에 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리는 왜 그래?”

! 이거!”

멕킨지의 물음에 별 것 아니라는 듯 헬릭이 큰 소리로 말하더니 그의 뒷목을 권총 손잡이로 내리쳤다. 갑작스런 공격에 실신해 축 늘어진 멕킨지의 옆구리에 팔을 끼어 비상계단 안 쪽으로 옮기자 그것을 지켜보던 여자가 말했다.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는군.

“엘리베이터가 정지했다는 사실을 깜빡하지 않았다면 이럴 필요도 없었을거야. 게다가 이 남자 내 친구이기도 하니까.

적당한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할 수 없었다. 헬릭은 여자에게 따라오라는 손 짓을 하고 다시 자신의 차로 향했다. 여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운전석에 올라타 엔진에 시동을 걸자 비로소 안도감이 몰려왔다. 이제 달려 나가 사라지면 끝이었다. 여자가 원래 가야할 곳에 데려다 주고 자신은 미리 준비해 놓은대로 빠져 나가면 끝이다. 늦었고 엉망으로 엉켰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은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수석에 앉은 여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루이스가 밖에 서서 머리를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루이스는 총을 겨눈 채 왼손으로 차 문을 열어 헬릭을 끌어내려 엎드리게 한 뒤에 권총을 빼앗아 허리에 꽂고는 여자를 내리게 했다.

“굉장히 빠르군 경비팀을 뚫고 벌써 여기 도착할 줄은 몰랐어.

루이스의 말에 엎드린 채 머리에 양 손을 대고 있던 헬릭이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할 말이야. 특수 공격팀을 처리하고 올라온 것 치고는 그리 늦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걸어서 빠져 나가지는 않을테니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럼 카심이 오기 전에 일을 끝낼까?

카심은 오지 않을거야.”

오 이런, 카심까지 해치운 건가.”

루이스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헬릭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헬릭의 앞에 모포를 두른채 맨 발로 서 있는 여자의 새하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도 우리 쪽 사람이군.

여자가 입을 열자 루이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맞아. 그래서 이 헬릭이란 남자가 당신을 심문하도록 한 거지. 그래서 지금까지 처음 계획대로 되긴 했는데 상황이 많이 바뀌었어.

루이스가 혁명 투사 연맹이라는 사실을 헬릭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잠시 놀랬다. 그런 이유로 헬릭의 정체를 눈치 챈 루이스가 심문을 맡겼다는 것은 이해가 됐지만 그래 놓고서 왜 이제 자신을 막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배신하려는 건가?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루이스는 웃음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니! 좀 더 안전한 길을 택하려는 것뿐이야. 처음에는 너를 빠져나가게 하는게 목적이었지만 생각해보니 너를 여기서 죽이는 게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더군. 게다가 상부로부터 의심받고 있는 이 헬릭이란 남자를 내가 처리하면 나에 대한 의심도 줄어들어 뇌 분석실에 갈 일은 없어질 테니까. 나를 위한 연극을 한 편 기획했는데 배우들이 너무 연기를 잘 해줬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이스의 총이 발사됐다. 동시에 여자가 뒤로 쓰러지는 것이 헬릭의 눈에 들어왔다.

“자 이제 네 차례야.

총구가 헬릭의 뒤통수에 와 닿았다가 떨어졌다. 머릿속에서 카운트가 시작된다.

321…”

총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꼭 감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에선 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통증 대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일어나!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워서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그녀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있었다. 헬릭이 일어나 머리에 총을 맞은 루이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까 저기 비상계단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서 빼앗아 놓았던건데 당신을 구하는데 쓰게 되는군. 내가 먼저 쐈으면 좋았을텐데.

여자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하더니 가슴의 총상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붉은 피를 만져 눈으로 확인하고는 헬릭을 바라보았다.

“살아 갈 수 있을까?

약기운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 없었다.

“몰라. 죽음은 신의 영역이니까. 그래도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 준 여자에게 살아 갈 수 없을거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군.

“어울리지 않게 종교까지 있는거야.

“아니! 종교는 없지만 무신론자는 아니야.

헬릭이 그녀를 안아 조수석에 태웠다. 그리고 차를 운전해 주차장 입구 쪽으로 향했다. 작동하지 않는 차단기를 그대로 통과해 건물을 빠져 나오면서 헬릭이 차창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왜 이름을 먼저 묻는 건지 알려주면 이름을 알려주지.

“아까 말해주지 않았던가? 그게 새어나가도 상관없는 정보이기 때문이라고.

“성의 없는 대답이었잖아.

“음 그런가? 그럼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서라고 답을 바꿔볼까?

“그건 마음에 드는군.

“그럼 어서 말해봐.

“……”

헬릭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가 즐거웠던 것인지 웃고 있었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헬릭은 오른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려다 멈칫했다. 대신 엑셀레이터를 더 밟아 속도를 올리고 그녀가 기댄 조수석의 차창을 조금 내렸다. 차창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으로 그녀의 긴 머리가 흩날려 그녀의 미소 띤 얼굴이 드러났다. 그렇게 길게 뻗은 도로 위로 헬릭과 여자를 태운 자동차가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