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 이 신데렐라야!
- 작성일 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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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이 신데렐라야!
손 지상
하숙방 벽은 함유하고 있지 않다. 1mg도. 그러니까, 방음 말하는 것이다.
소리가 들어온다. 여과 없이. 젖은 종이에서 물이 떨어지듯. 축축하게 소리로 젖은 벽.
외국에서 살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당연히 항의를 받아 마땅하다. 비신사적인 행위다. 타인의 권리 침해다.
하루는 참을 수 없어 옆방에 문을 두들겼던 적이 있다. 방주인다운 심심한 얼굴이 나타났다. 여드름이 가득하고 무표정한 얼굴. 하숙방 같은 인생 이 하숙방 같은 얼굴로 박제된 것 같았다.
티셔츠에 그려진 그림은 그로테스크 했다. 피가 떨어지는 사람의 목을 들고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드는 저승사자였다.
그 손가락에 겁을 먹었다. 나는 부탁했다. 소리를 줄여줄 수 없겠냐고. ‘정중히’ 부탁했다. 덕분에 ‘정중한’ 욕설을 얻어먹어야 했다.(물론 그 말이 욕설인 지는 나중에 알았다. 당시에는 내 한국어가 아직 서툴러서였을 수 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 어색한 한국어가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한국어가 능숙해진 후에도, 여전히 정중한 욕설을 듬뿍 대접받았다는 것을 보아 이 점은 사실이 아닌 듯 하다.)
그 날도, 천장과 바닥과 세 개의 벽과 문을 통해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소리였다.
잠깐, 뇌내항의(腦內抗議)매뉴얼을 참고해보자.
1. 소리가 크다면? 방향을 찾는다. 이 후 항의한다.
2. 소리가 작다면? 집중해 소리의 방향을 찾는다. 이후 1과 동일하게 대처한다.
좋아, 좋아. 그런데, 어느 방에서 나는 소리지?
이 소리는 미묘한 경계선에 있었다. 들리지 않을 만큼 작지도 않았지만, 정신이 이상해 질 만큼 크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불을 끄고 누웠을 때 들리는 모기 소리 같은 것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페이퍼백이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이라는 파시스트가 썼다. 페이퍼백 표지에는 몽환적인 아가씨 서 있다. 점프 슈트를 입고 있다. 지퍼를 열고 가슴과 가슴 사이를 자랑한다. 보스턴에서 8학년을 다닐 때, 헌책방에서 산 것이다.
나는 유리컵을 꺼냈다.
어릴 때 아버지 서재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다. 아버지 서재에는 야한 책이 꽤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였다.
더러운 공산주의자가 제국의 찌꺼기(그러니까, 제임스 본드 말이다.)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 여자친구를 투입시킨다. 둘 다 위대한 당에 충성하기 위해 기꺼이 다리를 벌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둘 다. 옆방에서 벌어지는 정사. 선수는 대영 제국의 찌꺼기 제임스 본드와 레닌의 말씀이 혈관에 흐르는 본드걸.
공산주의자는 유리컵을 꺼낸다. 본드와 본드 걸 모두 서로의 가슴에 달린 서랍장을 열기 위해 아랫도리 자물쇠에 열쇠를 맞춘다.
아흑, 무슨 일로 이 섬에 아흑, 오셨나요? 아흑, 본드씨, 아흑. 당신과 마찬가지지요. 흡! 정말 눈이 아름답군요. 흡! 흡! 흡! 앙! 앙! 앙!
점점 높아지는 환희. 교성. 교성. 여자는 본드의 이름을 연호한다.
오, 본드. 오, 본드. 본드. 본드.본드본드본드본드나죽을거같아아나간다간다간다간간간다아아아아아,아,아,아.
젊은 공산주의자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유리컵을 귀에서 때지 않는다.
불쌍한 그는 그 정보를 믿고 행동하다 죽는다. 본드의 손에. 그리고 본드는 여자를 차지하고 석양을 바라보며 피스톤 운동을 한다.
그 이야기를 몰래 읽은 날 밤, 꿈. 본드 걸들은 이슬람 캘리그래피에서 본 것처럼, 알파벳으로 된 피부를 내 몸에 밀착시키고, 내 귀와 가랑이 사이에 대고 밀어를 속삭여 주었다.
유리컵을 통해 들은 소리는 단조로운 음악이었다. 악기로 연주해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허밍이었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느리고 우울한 소리였다. 동양의 사악한 중국인 마술사가 읊조리는 이단적인 주문 같았다. 등골을 차가운 깃털로 쓰다듬는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쪽 벽에도, 바닥에도 유리컵을 대 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같은 멜로디였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할까? 벽을 두들기고 소리를 쳐야 할까? 모른 척하고 모차르트라도 틀고 자야할까? 이대로 밤을 새며 긴장한 채로 버텨야 할까? 아니면 같이 허밍을 해야 할까? 어떤 종교적인 것은 아닐까? 어릴 때 아버지가 한국은 매일 오후에 국가를 틀고 국기에 경례를 하는 의식을 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그런 종류의 정치적인 의식은 아닐까?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새벽이었다. 밖에는 차들도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서로를 끈덕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들이 바라보지 않으면 이 세상이 멸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나도 그들처럼, 끈덕지게 바라보기로 했다. 허밍 소리가 안 들리는 양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니체에 따르면, 내가 심연을 바라볼 때 심연도 나를 바라본다고 했다. 거꾸로, 내가 그 소리를 안 들으면 그 소리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쓰러진 나무가 나는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토리(Satori, 悟り)란 것이 별거냐?
이거 봐. 이거 봐.
나의 주술적인 믿음이 통한 듯, 허밍은 어느새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불을 끄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침대 시트는 차가웠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꿈이라는 말에 함유된 동화 같은 아름다움으로 나를 지켜주길 기대하면서.
어릴 때처럼, 나는 마조히즘적인 쾌락과 함께 공상과 망상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소환됐다. 강제로. H. P 러브크래프트가 상상한, 무자비하고 오싹한 세상. 잔뜩 증류된 태고의 공포가 나를 어루만져주는 곳. 목구멍을 뚫고 나오려는 심장에 억눌린 비명. 로버트 E 하워드의 근육질 남자들이 피 묻은 칼을 휘두르는 곳. 플래시 고든이 사악한 황제 밍을 처부수고 금발의 코카시안 8등신 글래머의 가슴을 주무르는 곳. 눈을 감으면 나는 이미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플래시 고든이자, 시메리아인 코난이자, 크툴루이자, 니얄랍토텝이자, 솔로몬 케인이었다.
동시에, 이사에 이사를 거듭한 끝에 말라비틀어진 작은 아이었다. 언제나 펄프픽션이나 SF소설을 들고, 두꺼운 안경으로 세상과 자신 사이에 벽을 치는 아이었다.
냉장고에 붙은 아버지의 지저분한 메모(용돈이 같이 붙어있고는 했다. 친구들과 놀라고 말이다. 아버지는 친구도 돈을 살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었다.)를 무시하고 우유를 꺼내 마시며, 언젠가는 자기도 근육질 남자가 될 수 있다고 믿은 소년. 프랑스,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불가리아, 터키, 네덜란드, 이집트, 아버지를 따라 2개월에 한번 씩 이사를 하는 소년. 상냥하던 친구들에게 부질없는 희망을 또다시 품다 여지없이 절망하는 소년. 자신이 무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소년. 열심히 마술을 연습하는 소년.
결국은 또 다시 절망하는 소년.
소년들의 혈액에는 비정함이 흐른다. 안경잡이 꼬맹이 소년은 백인, 흑인, 라틴, 아시안, 혼혈, 혼혈의-혼혈, 혼혈의-혼혈의-혼혈, 자기가 위대한 아리안 혹은 유대인 혹은 게르만 혹은 코카시안 등등등 이라고 주장하는 놈들, 볼셰비키의 사생아, 하여튼 모든 소년들의 혈액에는 비정함이 흐른다.
소년은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디로 갔을까? 이런 나를 감싸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어머니로서의 역할일 텐데. 알게 뭔가. 어디 살아 있겠지. 근육질 젊은 남자들 밑에 깔려 비명을 질러대면서.
어느 세계에서든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까지 그들이 보여주는 친절함은 대부분 자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는 자기만족을 위해서다. 혹은 사회적인 룰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껍데기뿐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3개월은 필요하다.
나는 매번 리셋당해야 했고, 0이 된 경험치, 1이 된 레벨을 붙잡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언제나 마을 입구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엄마나무서워외로워나를구해줘아빠날봐나외로워나힘들어친구들이날괴롭혀친구라는게날기분좋게하는거아니였어?괴롭히는놈들은악마야나보고피부가노란놈은악마고하나님아버지가지옥으로떨어뜨려버린데약에취해서내입에다가그지저분한물건을집어넣어살려줘아빠비릿해미끈해토할거같아목구멍으로넘어가혀가이상한느낌이야혀에미지근한쇠맛이나이새끼우는데?FUCKIN'NERDPIECEOFSHIT!GETYO'MOUTHUP!IGOUTTAPISSONYOMOUTH-CUNTBITCH!DRINKIT!SWALLOWIT!YEAH!'AIGHT!백인놈들거시기는크기만하지껍데기가있어서지저분해뭐가껴서싫어엄마아빠살려줘살려줘살려줘살려줘하나님아버지는어디서뭐하고자빠졌는데이렇게바쁜거야살려달라고이놈들에게벼락을내서거당장좆을짤라버리라고
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자명종이 울렸다. 단속적인 금속음. 현실로 돌아오라는 신호. 세반고리관을 흔드는 고막 징소리.
혼탁한 기억과 꿈의 세계, 무거워진 발목을 돌리며 빨리 부기가 빠져나가기를 기다린다. 눈을 부빈다. 이마에 난 땀을 훔친다.
나는 출근 준비를 했다.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것은 즐겁지 않다. 그러나 해야만 하기 때문에 안할 수 는 없다. 마치 죽지 못해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강도 앞에서 똥오줌을 지리며 손을 비비는 사람처럼.
나는 21살 봄, 만성 대장염으로 5급 판정을 받고 면제되었다. 한국에 돌아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나를 한국에 돌려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죽었다. 나보다 어린 여자의 배 위에서 죽은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가 벌은 돈에 기생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숙주가 죽은 이상, 나도 죽어야만 했다.
그런 나를 살린 것은 아버지의 친구였다. 그는 무역회사 A의 사장이었다. 나는 그 회사의 번역을 담당하는 부서에 착륙했다. 내 착륙을 시기해 낙하산을 짓찢는 사람들도 있었다. 애석하지만, 난 이미 착륙한 상태다.
그는 자기가 나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어 보답하는 것이라면서 나에게 그 큰배를 들이밀었다. 마치 머리라도 쓰다듬어 달라는 투였다. 나는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는 데에 꽤나 고생을 해야 했다.
어느새 허밍은 들리지 않았다. 전기면도기, 칫솔과 치약, 열쇠, 계단. 부엌에는 벌써 몇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구석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다. 같은 26~7살이라고 해도, 대부분 한국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아직 대학생이다.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전기밥솥에서 밥을 퍼 담았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된 밥그릇에 뜨거운 열기가 전해지기 전에 식탁 위에 밥을 놓았다. 맨하탄의 차이나 레스토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쇠로 된 젓가락을 들었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나는 젓가락을 문 채로 고개를 들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답답한 헤어스타일을 내게 보이며 밥을 먹고 있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쥐고 국을 떠먹는 입에서도 그 소리는 새어 나왔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나는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냉장고로 가 냉수를 꺼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주인집 아주머니도, 도마 위로 식칼을 휘두르며 허밍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미소 짓고 있었다.
흠음흠음흠-흠-흠--
나는 물을 떨어뜨렸다. 플라스틱 물통에서 피처럼 물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배경음악이 흐르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영화 속의 인물들처럼 음식을 먹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입 안에 넣고 씹고 넘기고 다시 넣고 씹고 넘기고 물 마시고.
그리고 허밍.
온 피부 위의 땀방울 하나하나를 의식할 수 있었다. 뱃속에서 뜨거운 것이 웅크렸다. 덕분에 모든 살갗이 서늘하게 변해버릴 정도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백치처럼 단속적인 소리를 냈다. 그들은 나에게 전혀 무관심했고, 오직 굶주린 위장을 위해 음식을 계속 채워 넣고 있었다.
그리고 허밍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나는 도망치듯 구두를 구겨 신고 밖으로 나왔다. 드레스 셔츠(한국에서는 왜 이 걸 와이셔츠라고 부를까?)가 척척해져 있었고 구두와 아스팔트가 내는 격렬한 입맞춤 소리가 머리 끝 까지 울렸다.
나는 지하철 역 입구에 도착했다.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에 맺힌 땀을 식혔다.
아직 아무도 없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면서, 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설득시켰다. 필립 말로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냐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요새 조금 피곤한 것일 거야. 별일 아닐 거야. 그럼. 별일 아니고말고. 몽 디외! 홀리 마더 앤 고스트! 카미사마, 호토케사마, 칸논사마! 알라 후 아크바르! 옴 나마 시바야! 뭐든 좋으니까 살려줘.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피곤한 맛이었다. 아마 갈색일 것이다.
에스컬레이터가 다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서 있었다. 구두코가 빨려 들어갈 뻔 했다. 나는 앞으로 휘청대는 몸을 다잡고 넥타이를 정돈했다.
갑자기 뒤에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 만 명의 부두교도들이 두들기는 드럼소리처럼, 소리는 점차 크게, 점차 거대하게 변했다. 거대한 바오밥나무만큼 크게 변했다. 바오밥나무의 가지 하나하나가 보아뱀처럼 변해 내 등을 덮치는 것 같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들이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만든 보아뱀에, 혹은 살아 움직이는 바오밥나무에, 혹은 인간 츠나미(津波)에 떠밀려 개찰구까지 흘러들어갔다. 개찰구는 댐의 수문처럼 버티고 서서 먹이를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 개찰구의 검은 이마위에 댔다.
삑.
잔액이 부족하단다. ERROR-009. 붉은 색으로 불만을 토하는 기계와, 뒤에서 불만을 토하는 인간 츠나미에서 발생한 불만 허리케인이 온 몸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대역죄인이었다.
사람 사이로 수영하듯 빠져나와 기계를 향했다. 기계는 고장중이라는 부적을 붙힌 채 강시처럼 서 있었다.
흠
‘흠칫’이라는 단어를 판토마임으로 표현하듯, 나는 굳어버렸다. 어느새 허밍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시하고 싶을 만큼 작게 들려서, 나는 내 뇌가 만든 자학적인 환청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오밥나무가 바스락거리는 정도의 소리는 보아뱀의 쉬쉬거리는 소리로 자라더니 이내 <환희의 찬가>를 부르는 자기폭풍우로 변해 나를 날려버릴 기세였다. 차라리 내 이성과 함께 날 날려버렸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젠장할.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 나를 미친 사람 보듯 바라보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직원을 향했다. 식은땀에 절인 손으로 교통카드와 만원을 내밀었다.
“충전, 충전 부탁드립니다.”
역시나, 무시하고 싶지만, 하는 수 없이, 가치판단이 배제되는 것이 감각이니까, 어찌되었든, 그 직원의 입에서도 그 망할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빨리, 빨리 충전 해 주세요.”
직원은 얼굴이 부서질 정도로 안면근육을 긴장한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주름을 침범해 대 혼란 상태였다. 주름내전국가안면의 크레바스에서 메아리가 흘러나왔다.
“가위, 바위-”
가위바위?그게무슨소리지?혹시그시저스락-
“가위, 바위, 보!”
나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손은 좍 편 채였다. 그녀의 손은 권총 모양으로 쥐어져 있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다리와 이빨을 떨어야 했다. 이빨과 이빨이 맞부딪히면서 적절한 박자로 긴장을 해소해 주고 있었다. 땡스 가이스.
내 뇌는 아직 공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뒤에서는 삑 삑 거리는 개찰구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거대한 허밍이 물결치고 있었다. 나는 그 거대한 허밍에 떠내려가는 불쌍하고 어리석은 19세기 백인 탐험가였다. 배도 나오고 구레나룻도 기른.
“묵, 찌, 빠!”
?
무찌빠?묵찌빠?무슨소리지?이건또뭐야?이건또무슨상황이야?누가나한테상황을설명해줘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그녀의 손이 나와 같은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크게 허밍을 계속했고, 내 뒤에 충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기다리는 짜증을 허밍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나는 세금납부 전날 CD기 앞에서 땀 흘리며 악전고투하는 수전증 걸린 중년 아줌마처럼(대부분 그런 아줌마는 기계에 약해서 실수를 연발하는데다가, 줄서있는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불만을 터트리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들은 차례를 기다리는 데에 필수적인 인내심을 복용하고 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땀과 부끄러움을 흘리며 서 있었다. 그녀는 다시 가위바위보를 외쳤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른 채 있었다. 다시 묵찌빠. 다시 가위바위보. 나는 동상처럼 손을 편 채로 서 있었다.
결국 참다못한 한 사람이 정의의 이름으로 나를 때려 눕혔다. 나는 공공질서를 어기는 악당의 신분으로 얻어맞았고,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모두다 똑같이, 두개골이 부서질 정도로 웃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밖에 나가 택시를 잡았다.
다행이 택시 안은 허밍프리구역이었다. 택시기사는 외국인이었는데 그는 필리핀 사람이 한국에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든지를 필리핀 사투리로 계속 토로했다. 그날만큼은 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기분 좋게 맞장구를 치는 와중에(그 중에는 그 괴상한 허밍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는 내가 첫손님인 듯, 아직 그런 손님은 못 봤다고 말했다.) 회사에 도착했다. 요금은 5800원이었다. 나는 잔돈은 가지라고 하고 급하게 내렸다. 지각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마탄의 사수가 쏜 총알처럼 날아갔다. 세이프. 문이 닫히는 동안 내가 내릴 층수를 누르고 같이 탄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옆 사무실에서 일하는 L씨와 그 사무실의 과장 H씨가 타고 있었다. 당연히.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그리고 훌륭하게 떨리는 그 미소.
나는 4개 국어로 된 욕을 하늘에 대고 퍼부었다. 개 같은 허밍의 신이여! 저주와 함께 저속한 몸동작을 했다. 오늘은 주술적인 하루인가보다. 어느새 허밍은 들리지 않았다.(어쩌면 내가 간질병 환자처럼 온몸을 비틀며 욕을 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일 지도 모른다만.)
관성 덕에 엘리베이터 안에는 중량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간이 점차 묵직해져 가고 전광판의 붉은 숫자는 미친 듯이 팔을 접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1층, 2층 그리고 3층, F층.
이상한 노래와 박수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L씨와 H씨가 서로 손바닥을 맞부딪히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푸우른하아늘 으은하수우 하이얀쪼옥배애에에
처음 듣는 노래였다. 두 사람의 손바닥은 격렬히 부딪히며 상승했다가 하강했다가를 반복하고, 흑인들의 ‘형제의 악수‘처럼 서로의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바닥을 멈추더니, 이번엔 과장이 나에게 두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반응해야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마치 거대한 바퀴벌레나 팔뚝만한 생식기를 가진 토끼나 가슴달린 남자나 수염달린 여자나 온순한 록 스타를 보는 것처럼 그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의 얼굴도 그런 얼굴이었으니까. 옆자리의 L씨는 사우나에 똬리를 틀은 뚱땡이 마냥 땀을 흘렸다. H씨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곤란한 분위기는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 까지 계속되었다. 나와 그들은 도망치듯 서로의 사무실로 향했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복도에도 그 망할 허밍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장엄한 그레고리 성가마냥.
나는 사무실로 들어가 인사를 했다. 사무실 동료인 K씨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의미는 다음과 같다. 사장님의 훈화말씀이 계시겠으니 평사원인 나는 닥쳐야한다는 것이다.
“에, 마, 뭐시냐, 21세기를 주도하는 존경하는 사원 여러분. 우리는 지금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자치기와 구슬치기와 땅따먹기와 딱지치기와 공기놀이와 푸른 하늘 은하수와 고무 줄 놀이만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창조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강합니다. 예전에 어느 유명한 사람이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국민체조를 통해 소년에게 야망을 줄 수 있었지만 소녀들에게는 그러한 성공을 이루어 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소녀들에게도 야망을 가질 수 있는 전투적인 행동력을 가져야 합니다. 위대하신 영도자 박 대통령 각하께서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1980년대 삼청교육대에서 초등교사과정을 수료하던 도중에 감명 깊게 읽은 구절로, 정말이지 이 인생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투성이 입니다. 우리는 즐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해진 고통은, 괴테가 말했듯이, 달콤한 것이요 딛고 일어서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빨갱이를 까부수고 얻은 돈으로 위대한 문명을 이루었으며 그 근간에는 단결과 일치가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 같은 음악 같은 행동 같은 도덕 같은 윤리 같은 마누라 같은 남편 같은 자식을 가져야 합니다. 다 같은 술을 마시고 다 같이 즐거움에 취하고 수출 지수 돌파와 물가 안정과 IMF 금 모으기와 GNP 4억 달러에 도달하기 위해 일치단결하고 멸사봉공해야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여전히 똑같이 박제된 ‘과도한 긴장상태로 인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미스 C는 웃옷과 브래지어를 찢으며 절규하고 있었다. 어떤 여자는 가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고통과 환희를 노래하고 있었고 모두 다 한 마음 한뜻으로 자위를 하면서 허밍을 하고 있었다.
감동환희감동충격감동절규감동법열감동승천감동환희.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나는 아연실색 그 자체였다. 몰래 내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나는 이어폰을 내 귀에 꽂고 컴퓨터가 일어나기까지 기다렸다. 벌어지고 있는 광경은 무시해야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무시해야만 할 것 같았다.
컴퓨터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내 귀에 대고 크게 하품을 했다.
따단따단따아안 딴-단-딴--(≒ 흠음흠음흠 흠-음-흠--)
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의자는 뒤로 밀려났다. 바퀴가 굴러가는 대로, 관성이 이끄는 대로 밀려나가 한껏 자위 중인 부장의 분신을 덮쳤다.
꺅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땀을 닦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에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권투에서는 공이 살렸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전화벨이 나를 죽였다. 전화벨 소리마저 허밍과 같은 멜로디였던 것이다.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 메케메케메케메케메케메케
꺼억꺼억꺽꺽꺽꺽꺽꺽꺽꺽 키히히햐햐햐햐햐햣햣햣햣
키키키키키키키키키키키키 뇨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
퍼억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 잇던 것은 가랑이를 부여잡고 있는 부장이었다. 그는 나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자네가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것은 알고 있네만, 자네 같은 태도가 외국에서도 상식적인 선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은 자네도 알 것이라고 생각하네, 지금 그 태도는 뭔가! 이곳은 회사고 직장이야! 신성한 직장이란 말이야! 자네가 아무리 낙하산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그 점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회사를 위해 멸사봉공을 하지 않을망정 지금 편안하게 기절이나 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반역행위란 말인가! 지금도 북쪽에서는 우리를 향해 미사일을 겨누고 미국에서는 러시아 빨갱이들 뇌에 남은 지문을 조사하려고 머리를 쪼개고 다니고 화성의 세발달린 우주인들이 흐느적거리면서 우리 자식들을 강간하려는 것이야! 다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조국통일과 국가발전과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이 다 자네 때문에 이 모양인거야! 이 병신! 머저리! 쪼다! 말미잘! 해삼! 멍게!”
나는 그 모든 소리를 귀에 담으면서 동시에 다른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상선약수. 물 보다 더 선한 것은 없다. 그 사이에 내 머리 속에는 허섭스레기 스페이스 오페라에 등장했던 우주 선장이 흑인처럼 생긴 외계인을 쏘고 아름다운 코카시안 공주를 구해내려고 전자총을 삐융 삐융하고 있었다. 전자총의 주황색 레이저 불꽃이 미개한 야만인의 심장을 후벼 파고 우주에는 굉음을 내면서 공기도 없는 공간을 우주선이 찢어내고 있었다. 우주복도 입지 않은 중세시대 복장의 주인공이 다른 행성에서 숨을 쉬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반중력 장치로 날아다니면서 피스메이커 리볼버를 쏘아 되면 추한 화성괴물들은 차례차례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파워드슈트를 입은 금성인들이 다차원 우주를 찢고 아무 쓸모도 없는 푸른 변경 지구의 아름다움에 괜히 반해 영원한 전쟁을 치르면서 삐융 삐비비융 삐비융.
어느새, 설교는 끝나있었다. 나는 일어서 앉았다. 그렀다. 쓰러진 인간이 정신을 차리고 누워있는데, 부장은 내게 설교를 한 것이다. 누워있는 사람에게!
“반성했으면 푸른 하늘 은하수 하고 들어가게.”
“푸른 하늘 은하수?”
내가 이 말을 하자마자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시간도 얼어붙었다. 나는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흐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태어나서 처음. 게다가,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했다. 나는 침 한번 삼키고 주위의 차가운 얼굴을 둘러본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저기, 그러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우습게 들릴 수 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러니까, 그게, 뭐지요? 그 은하수 뭐시기 가?”
“뭐?”
다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웃옷과 브래지어가 찢어져 눈부신 유방을 드러낸 미스 C가 전화기를 들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는 비상계단으로 뛰어나갔다. 몇몇 사람이 나의 앞길을 막았다. 나는 그들을 발로 걷어차면서 내려가다, 3층이 되자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츠나미가 솟구치고 있었다. 나는 3층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이미 경찰과 경비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창문 깨지는 소리와 그 소리의 투명한 조각들(혹은 유리조각)과 함께 나는 잔디밭으로 떨어졌다. 화단에 떨어진 나는 온 몸의 근육과 관절이 터트리는 비명과 불평을 무시하고 달렸다. 내 뒤에는 엄청난 소리의 허밍이 들리고 있었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 메케메케메케메케메케메케
꺼억꺼억꺽꺽꺽꺽꺽꺽꺽꺽 키히히햐햐햐햐햐햣햣햣햣
키키키키키키키키키키키키 뇨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
나는 닥치는 대로 때리고 차고 물고 할퀴면서 도망쳤다.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는가.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광인의 정신은 원래 편집증 적이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때, 거리에 있던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아줌마 아저씨 조폭 경찰 군인 소방수 의사 변호사 간호사 자전거 오토바이 스쿠터 소형차 중형차 중형세단 소형트럭 포터 대형트럭 총알 고함 욕설 할 거 없이 모두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태풍의 눈이었고 이 사회의 유일한 아웃사이더였고 이 우주의 안티테제였고 블랙홀이었고 빨갱이였고 이방인이었고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그리고 허밍.
허밍.
나의 이성은 넘쳐버린 물처럼 찰랑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지겹게 묻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폭발
"Hey, He's awake." (어이, 이 사람 일어났어.)
“誰だろうな、危険ではないのかな。”(누굴까, 위험하진 않겠지?)
“What did he said? Keisuke?"(뭐래, 케이스케?)
"He said This man may be a dangerous person." (이 사람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말했어)
“Yeah, right. He might be dangerous, but we need informations more."(그래 맞아. 위험할 지도 몰라. 하지만 우린 정보가 필요해.)
"Sure, Captain." (물론입죠, 대장.)
"いっそうここでやっちゃえば?"(그냥 여기서 해치워 버리는 건 어때?)
"だめ!"(안돼!)
“What did he said?"(뭐래?)
"He said Kill him."(그냥 죽여 버리자는데?)
"No way!"(안되지!)
나는 목숨을 건졌다. 그들은 내가 영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Where am I?"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겁니까?)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Who are you?"(당신은 누구요?)
그들이 나에게 물었다.
"Who are YOU?"(당신이야 말로 누구요!)
"I am John Rajonsky and those guys are the crew."(난 존 레이존스키요. 그리고 이 친구들은 우리 대원들이지.)
"What CREW?" (무슨 대원?)
"We are
"S.A.F.P.K?" (S.A.F.P.K?)
"Survival Association for Foreign People in Korea."(한국주재 외국인을 위한 생존 협회요.)
그들은 한국인을 피해 도망치다, 도망치다 결성된 레지스탕스였다. 나는 그들의 테러 활동 중에 구조된 것이다. 그들의 설명을 듣자면, 한국인들은 어느 순간 갑자기 좀비처럼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 허밍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얼굴, 그러니까 두개골이 균열이 가고 안면근육이 파열될 정도로 긴장된 미소를 띠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허밍을 다같이 부르면서 허밍을 모르거나 이상한 손동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처형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얼굴이 가려워 만지려고 오른손을 들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얼굴에 닿지 않았다.’
"I'm sorry, bur Your ARM was blown by the explosion we did occur, sorry." (애석하다만, 당신 팔은 아까 폭발로 날아갔소. 우리 탓이오. 미안하오.)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 뇨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지하실 같이 습하고 축축한 방이었다. 덩치 큰 백인 남자가 서 있었다. 미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묶여있었다. 싸구려 영화에서 주인공이 고문당하는 취조실 분위기였다.
덩치 큰 백인 남자는 털투성이 손을 주무르며 몸을 풀고 있었다. 그는 서투른 발음이지만 정확한 문법으로 한국어를 구사했다.(이하 그의 말은 모두 표준어 발음으로 표기하겠다.)
“당신 정체가 뭐야?”
“정체?”
“스파이 맞지?”
“무슨 소리야?”
“우리를 염탐하러 온 스파이 맞잖아!”
“난 모르는 일이야! 난 죽 외국에서만 살았다고!”
“시끄러! 어서 말해, 너도 그 노래 알지?”
“무슨 노래?”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 뇨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
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연타
“닥쳐 이 새끼야!”
나는 입 안에 가득 찬 철분이 함유된 붉은 액체를 입에서 뱉었다. 이가 섞여 나왔다.
“나, 난 진짜 모르는 일이야. 난 몰라, 난 그 노랜지 허밍인지 지랄인지 몰라!”
“이 노래 진짜 모른단 말이야! 이 허밍의 가사 말이야, 가사! 이 가사가 도대체 무슨 뜻이야!”
“가사?”
“그래 가사!”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 샤바 아이샤바 1986년도
“그리고”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 마리
“이 노래의 가사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야! 어서 말해! 어서!”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계모와 친구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란다, 샤바 샤바 아이샤바, 뒈져라! 죽어! 그냥 죽으라고 신데렐라!
그런데, 1986년도는 도대체 무슨 소리지?
왠 푸른 하늘 은하수에 쪽배에 계수나무야? 이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Such a nonsense, just like life.
나는 악독한 스파이 취급을 받으며 감금당했다. 3년이라는 세월을 지하의 곰팡이와 함께 지내며 나는 그 노래를 허밍하며 지냈다. 그 놈들은 나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어내려 했지만, 내게서 얻어내는 정보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 공산주의자 청년이 얻은 정보처럼.
나는 열심히 허밍을 연습하고, 열심히 세도우 복싱을 하듯 푸른 하늘 은하수를 연습했다.(비록 한쪽 팔은 팔꿈치 아래로는 없지만) 편집증적인 정신이 기억하고 있는 손동작(L과 H가 하던)을 주의 깊게 되살려내고 하나, 하나 내 손으로 재현했다. 덕분에 상상의 친구도 생겼다만, 그의 인권과 사생활을 존중하기 위해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내 덕분에 S.A.F.P.K
어느 날, 버섯구름과 함께 한반도는 먼지와 폐허만이 남은 곳으로 변했다. 높은 산과 섬 일부분만이 남았다. UN평화유지군은 파워드슈트을 입고 방사능에 오염된 신데렐라들을 처벌한다.
나는 그들 중 하나를 처치하고 옷을 빼앗아 입었다. 나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스페이스 오페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나는 요즘도 신데렐라 타령하는 그 허밍을 중얼거리며 길거리에 널려있는 죽은 신데렐라와 산 신데렐라를 사냥한다.
사냥을 할 때는 여러 방식으로 한다. 직접 때려죽일 때도 있고, 돌을 던질 때도 있다. 가끔 운 좋게 K2나 M16, 혹은 기타 권총을 발견할 때 가 있는데 그럴 때는 직접 사냥을 한다. 그러나 어차피 사냥의 주 무기는 쇠파이프 같은 둔기기 때문에 일종의 도락으로 총을 사용한다. 쉽게 말해, 살아남은 미개한 신데렐라 군락을 발견하면 일단 총을 풀 오토로 놓고 일제사격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놈들은 허밍을 단말마 삼아 죽어나간다. 그러고 나면 나는 칼로 방광을 베어내고 그 안에 든 오줌으로 달구어진 총신을 식힌다. 안 그러면 총을 계속 쓸 수 가 없다. 죽은 신데렐라나나 아직 죽지 않은 신데렐라를 모아놓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일단은 두껍고 큰 돌로 두개골을 빠개고 안에 들은 뇌수를 마신다. 엔도르핀이나 도파민이 남아있는 경우에는 기분이 째진다. 이미 중독이 되어서 죽은 신데렐라의 뇌도 빨아먹을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은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한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전에도 말했듯이 해야만 하는 일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뇌를 다 먹고 난 뒤에는 장기를 적출해낸다. 맛이 있기는 하지만 금방 상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먹거나 아니면 버려야 한다. 아, 먹을 생각만 해도 벌써 콧노래가 나온다.
흠음흠음흠 흠-음-흠--
흠음흠음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흠흠-흠흠흠흠흠-
흠-음-흠-음-흠음음-
흠-흠음-흠흠음음흠-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소년의 혈관에는 비정함이 흐른다. 나를 믿으시라.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 뇨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포
<終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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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이 야스타카를 좋아합니다. 헌책방에서 잔뜩 사온 츠츠이 야스타카의 문고판을 읽어보면, 이 능글맞은 영감이 얼마나 흰소리를 하는지 배꼽잡고 웃을 때가 많습니다. 어릴 때 부터 좋아하는 만화가 중에 이 츠츠이 야스타카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저 또한 그런 중력권 하에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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