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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기

  • 작성일 2010-01-28
  • 조회수 329

신학기

“반장 선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담임인 김형석은 자기 반 학생인 한예지를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네, 외고준비도 해야하고 중2때부터는 반장은 하지 않기로 작정했거든요. 공부만 하려구요. 그리고 반장일이 이젠 힘들어요.”

형석은 흠하고 예지의 성적기록부를 쳐다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 일을 쭉 해왔고 중1때도 반장을 했다. 1학년 담임으로부터 예지에 대한 좋은 소리도 많이 들었다. 전교 5등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는 우등생이었다.

“일단은 알았다. 싫다면 억지로 내보내지는 않겠지만 반장 선거는 어차피 2주 정도 지나야되니까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결정해라. 그리고…….”

목소리가 갑자기 바뀌는 형석.

“강민정, 너 앞으로 나와.”

예지 옆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던 민정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형석의 앞으로 다가섰다. 형석은 출석부로 민정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그 바람에 안경이 흘러내렸다. 민정은 안경을 고쳐 썼다.

“너는 신학기가 된 후 한번도 제 시간에 온 적이 없어. 너는 핸드폰도 없고 자명종도 없냐? 운동장 도는게 그렇게 좋아? 몸은 튼튼해지겠다. 응?”

그러고서 한번 더 출석부로 머리를 내리쳤다. 또 안경이 흘러내렸다.

“앞머리 좀 어떻게 해봐라. 그렇게 두꺼운 안경을 끼면서 눈까지 가려야 좋겠니?”

민정은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리고 아무말 없이 서있기만 했다.

“내일도 지각하면 일주일간 화장실 청소다. 하루 늦을 때마다 일주일씩이야. 알아서 해. 1학년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2학년 내내 이런식이면 각오해두는게 좋을거야.”

그녀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

“됐어. 둘 다 올라가 봐.”

둘은 선생님에게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빠져 나갔다. 둘은 교실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 않니?”

앞서가던 예지가 뒤를 돌아 보았다.

“응? 뭐라고 했니?”

“너무하지 않냐구. 안경이 흘러내리는데 자꾸 출석부로 때리다니.”

민정이하고는 1학년때부터 같은 반이었지만 말을 주고 받은적은 한번도 없는 사이였다. 아니 사실 민정이하고 누군가 말을 주고 받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었다. 예지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계단에 멈춰섰다. 그러자 민정이도 멈춰서서 말했다.

“담임 말대로 난 핸드폰도 없고 자명종도 없어. 아침에 일어나는게 너무 힘들단 말이야. 어쩌면 우리집 사정 뻔히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니.”

예지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민정이가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자명종 하나를 사는 것도 힘든, 그런 집인지도 모른다.

“재수없어.”

그녀의 말이 예지의 입을 열게했다.

“담임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너도 계속 늦지 않으면 혼나지 않을거 아니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기르면 어떨까. 조금만 서두르면 너한테도 담임한테도 다 좋은 일 이잖니.”

호의가 가득 담긴 민정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나를 위해 하는 소리니? 고마워. 1학년 때부터 그랬지만 나한테 친절한 사람은 너밖에 없었어. 네가 반장이어서 1학년을 견딜 수 있었는데, 2학년 때 반장을 안한다니 내가 섭섭할 지경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릴까. 예지는 1학년 때 민정이한테 잘해준적이 있었나 돌이켜보았지만 기억 속의 그녀는 실체 없는 그림자와 같았다.

“넌 이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가지고 다니는 물건도 다 비싸고 좋은 것들이지. 모두 너를 좋아해. 나도 널 좋아하고. 널 싫어하는 애들은 못되쳐먹은 애들 뿐이야.”

예지는 듣고 있기가 점점 부담스러워 졌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우쭐대는 성격이 아닌 그녀는 빨리 교실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난, 난 그렇게 착하거나 좋은 애가 아니야.”

더듬거리는 예지의 반박에 세된 목소리가 답했다.

“아냐! 너는 완벽해. 거의 완벽해. 다른 애들도 너에 비하면 손톱 끝에 때만도 못해. 그 애들은 모르겠지만 난 알아. 대번에 널 알아봤다구.”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다고 판단한 예지는 그녀의 말을 저지하려고 손을 흔들었다. 마침 수업시작 종이 울렸다. 민정은 예지를 지나쳐 교실로 향했다. 예지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를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그 날, 둘은 더 이상 말을 나누지 않았다.

이튿날, 수업이 끝나자 예지는 친구들과 헤어져 학원에 가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 손에 종이박스를 한아름 짊어든 한 아줌마가 그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학생, 혹시 한예지라는 학생 아니야?”

그녀는 당황해서 아줌마를 쳐다보았다. 보글거리는 파마머리에 너저분한 츄리닝을 입고 종이박스를 든 모습은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저 아세요?”

아줌마의 얼굴이 환해진다.

“민정아, 얘 네 친구 한예지 맞지.”

그 아줌마 뒤에 서있는 민정이 보였다. 민정은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말을 시키자 하는 수 없이 대답해야 했다.

“응, 맞어. 엄마.”

민정의 엄마였다. 예지는 내가 언제부터 민정이와 친구였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일단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민정이 어머니”

큰 목소리가 호들갑스럽게 울려퍼졌다.

“어쩜, 민정이가 얘기한거랑 딱 맞네. 예의도 바르고, 이쁘게도 생겼네. 공부도 잘한다며? 반에서 몇등이나 해?”

불쾌감이 확 밀려왔다. 게다가 아줌마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민정이 그런 엄마의 팔을 잡아 끌었다.

“학교에서 5등안에 드는 애야. 엄마, 이제 집에 가자.”

“잠깐만 있어봐. 네가 그렇게 얘기하던 친구를 만났는데 어떻게 그냥가니? 너는 어느 학원다니니? 우리 민정이는 학원다닐 형편이 안돼서 못보내. 너네 집은 부자라고 들었는데 방도 넓겠지? 그럼 우리 민정이 데려다가 공부도 가르쳐 주고 그래, 놀러만 다니지 말고. 얘는 공부가 통 안늘어서 걱정이야.”

민정은 공부가 늘지 않는게 아니라 공부 자체를 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아이였다. 게다가 놀러만 다닌다니, 누가? 언제? 예지는 기다리는 버스는 오지 않았지만 아무거나 타고 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버스가 와서 이만 가볼께요. 안녕히 계세요.”

박스를 내려놓은 아줌마의 억센 손이 예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잠깐, 기다려 봐. 친구 엄마가 부탁하는데 대답은 해줘야지. 우리 민정이 공부 가르쳐 줄거지?”

사람들이 모두 그 둘을 쳐다보았다. 그 속에서 민정은 아무 말 안하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부끄러움과 당황이 보자기처럼 예지를 덮어씌웠다. 그녀는 있는 힘껏 어깨를 흔들어 아줌마의 손을 뿌리쳤다.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소리가 튀어나왔다.

“전 바빠요! 민정이처럼 멍청한 애 공부 가르쳐 줄 시간 같은거 없어요!”

정류장에 서있는 아무 버스에나 재빨리 올라탔다. 창가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휘젓는 아줌마와 충격받은 듯한 민정의 얼굴이 보였다. 예지는 고개를 돌렸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버스는 정류장을 출발했다.

다음날, 예지는 학교에 등교해서 맨처음 민정의 자리를 찾아보았다. 자리에 없었다. 물론 늘상 지각하는 아이니까 늦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석도 잦아서 그러려니 했지만, 화요일도, 수요일도 민정은 학교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누구 강민정하고 친한사람?”

김형석은 별로 기대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강민정 집 아는 사람 있니?”

역시나…….

“선생님이 좀 바쁜데 누구 나 대신 강민정 집에 찾아가 봐줄 사람 없나?”

담임이 바쁘다는 것은 핑계일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들은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알았다. 종례 마친다. 주번 일어나.”

주번이 일어나 차렷, 경례를 외친다. 담임은 끝내 자신이 찾아가 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예지는 뭔지모를 책임감이 느껴지는 것을 외면하려 애썼다.

‘나는 민정이 친구도 아니고 그 애 공부를 봐줘야 할 이유도 없어. 그 애 엄마가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게 나빠. 사람 많은데서 날 붙잡고 소리지른 쪽이 나쁜거야. 무엇보다 나 때문에 학교에 오지 않는게 아닐거야. 아프거나 학교에 못 올 일이 있는 걸거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민정의 안색이 머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얼어붙은 표정, 배신당한 사람의 억울함, 분노 같은 것. 그 애를 멍청한 애라고 부른 자기 자신. 그 애 엄마가 들고 있던 종이 박스들. 그런 것들이 마음 속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목요일이 되어도 민정은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예지는 마지막 민정의 표정에 지고 말았다. 결국 자신이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고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찾아갔다. 담임은 자리에 없었다. 그 대신 책상 위에는 강민정의 이름과 집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옮겨적고 교무실을 나왔다. 임원으로 교무실을 자주 드나들었었기 때문에 예지의 그런 모습은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했다.

방과 후에 강민정의 집주소를 들고 집을 찾아 나섰다. 전화를 먼저 걸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미리 말하지 않고 찾아가는 편이 민정이 더 기뻐할 것 같았다. 그 애의 집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가파른 산길을 올라, 이러저리 휜 좁다란 골목을 지나,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붙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간신히 찾았네.”

집주소가 일치하는 곳에 겨우 다다랐다. 예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골목 끝에 자리잡은 그 집은 예지의 키를 조금 넘는 철문이 달린 단층집이었다. 집은 매우 낡았다. 집 뒤는 공터였는데 잡초들이 어지럽게 자라고 있었다.

“계세요?”

예지는 소리높여 외쳤다.

“아무도 안계세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문을 쾅쾅 두들겼다.

“누구세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답했다.

“네, 민정이 반 친구인데요.”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살짝 대문이 열리고 고개만 내미는 사람은 민정의 엄마였다.

“응, 저번에 그 학생이네. 민정이 때문에 왔어?”

문과 얼굴이 활짝 열린다.

“어서 들어와.”

“네.”

마당이 넓은 집이었다. 마당에도 잡초들이 그득했다. 화장실이 마당에 있다. 이런 집은 처음 보았다.

“귀한 손님이 왔네. 민정이가 지금 많이 아픈데 학생 온 거 알면 되게 기뻐할거야. 어서 들어가자.”

민정이 엄마는 예지의 손을 잡아끌었다. 어찌나 손힘이 센지 예지는 질질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거실에 올라가 좁은 민정의 방에 들어갈 때까지 민정 엄마는 예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민정아, 누가 왔는지 봐라.”

너저분한 방 한 구석에 때가 꼬질하게 낀 이불을 덮고 누워있던 민정이가 부스스 일어난다.

“어, 한예지.”

그제서야 민정 엄마는 예지의 손을 놓고 두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힌다.

“앉아있어, 맛있는거 가져올게. 얘기나 하고 있으렴.”

문이 닫히자 약간의 침묵이 방안을 흐른다. 예지는 뭔가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아팠니?”

“응, 많이 아팠어.”

“학교에 못 올 만큼 아팠어?”

민정의 눈길이 다소 날카로워 진다.

“다 너 때문이야.”

예지는 깜짝 놀란다.

“나 때문이라니? 그럼 그 날 일 때문에 아픈거였니?”

안경을 벗고 줄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민정.

“넌 다른 애들이랑 다를 줄 알았어. 달라야 했어. 그런데 하나도 다르지 않았어. 결국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날 생각했던 거야. 흐윽, 너는 언제나 나에게 상냥했는데 우리 엄마가 파지 줍는걸 보고 얕봤던 거야. 난 너라면 그러지 않을 줄 알았어. 하지만 아니었어. 끄윽, 끅.”

흐르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는 통곡이 되어가고 있었다. 민정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태도가 돌변했다.

“공부 잘한다고 치켜세웠더니 기어이 우리 애를 울려놓고 마는구나, 못된 것. 우리 애는 너를 자랑으로 여겼는데, 매일매일 네 얘기만 했는데, 너는 이런식으로 보답을 하는거야?”

“아, 아니예요. 제가 그런 것이…….”

아줌마는 거칠게 민정 얼굴을 예지 얼굴에 가까이 갖다대고 그녀의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올려붙였다. 예지는 처음으로 민정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저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막고 뒤로 물러나는 예지. 거기에는 예지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얼굴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얘를 봐, 얘를! 너랑 똑같이 생겼어. 그래서 널 보자마자 알아본거야. 민정이는 이렇게 너랑 똑같은데 넌 왜 부잣집 딸로 태어나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들한테 사랑받는 거야. 민정이도 너처럼 이쁜데! 민정이도 너랑 다를게 하나도 없는데! 왜!”

민정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서 미소인지 뭔지 모를 표정이 떠올랐다. 예지의 정면에서 거울같은 민정이 입을 연다.

“넌 나랑 똑같이 생겼으니까 착할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똑같은건 얼굴 뿐이야. 넌 나보고 멍청하다고 했지? 나 따위는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내 상처 따위는 상관도 안한거야. 그렇지?”

벌벌떨고 있던 예지가 일어나 황급히 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민정이 다리를 붙잡는다.

“어딜 가!”

“놔, 이거 놔!”

아줌마가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기자 힘없이 주저앉는 예지. 이번에는 예지가 울부짖는다.

“놔주세요. 이거 놔요. 집에 보내주세요.”

“여기까지 와서 우리 민정이 불쌍한 꼴을 보고 학교에 가서 소문 내려고? 거지같은 년이 너랑 똑같이 생긴게 재수없다고 할거지? 너희같은 애들 속알머리는 다 알어. 이 개호랑말코같은 년아.”

솥뚜껑같은 손바닥이 예지의 뺨에 날아든다. 벽에 나가 떨어질 정도로 세게 얻어맞은 예지의 얼얼해진 뺨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윽고 통증이 몰려왔고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른다.

“집이랑 학교에 가서 민정이 엄마가 널 때렸다고 일러바칠거냐? 네가 우리 민정이한테 한 짓은 이것보다 더 심했어. 너도 민정이 만큼 한번 괴로워해봐.”

아줌마는 예지의 핸드폰이 든 가방과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리나케 일어나 문을 돌리고 밀고 당겨보기도 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거 밖에서 잠그면 안에서 못열어. 가끔 우리 엄마가 날 가두기도 하거든.”

예지는 민정에게 울며 매달렸다.

“민정아, 나 좀 내보내 줘. 나가서 아무소리도 안할게. 너한테도 더 잘해줄게.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게 해줄게. 아무도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할게. 그러니까 제발 내보내 줘.”

휴지로 눈물을 닦아낸 민정이는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못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네가 미인으로 대접받는 걸 보고서야 내가 예쁘다는 것을 알았어. 그건 네 덕분이야, 고마워. 하지만 공주님과 똑같은 얼굴을 가졌다고 갑자기 모든게 바뀌는 건 아니었어. 난 여전히 지저분하고 불결한 애고, 너는 왕궁에 살고 있었지. 감히 나 따위가 너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니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이젠 아니야. 너는 다른 아이들처럼 너밖에 모르고 날 업신여겼어. 내가 널 잘못봤어. 넌 나를 실망시켰어.”

그녀는 벌떡 일어나 예지 앞에 섰다.

“친구를 많이 사귀게 해주고 애들이 날 괴롭히지 못하게 해주겠다고? 네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어. 봐, 우리는 이렇게 똑같잖아.”

예지는 눈물을 닦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민정이를 쳐다보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닮긴 했지만 그 애 엄마나 민정이가 주장하는 대로 똑같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너랑 나랑은 똑같지 않아. 닮았을 뿐이야.”

민정이 소리를 꽥 지른다.

“아니야, 똑같아! 어디 하나 다른 데 없이 똑같아. 난 너처럼 될 수 있어! 아니 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내가 더 착하니까.”

예지는 헉헉거리던 숨을 고르게 몰아쉬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 그래. 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러니까 날 풀어줘. 네가 네 말처럼 착한 사람이라면 날 풀어주는게 맞는거 아니니?”

잇몸을 드러내며 웃는 민정.

“하지만 우리 엄마는 진짜 고약해서, 한번 하겠다고 하면 진짜 하고 말거든. 엄마가 못나간다고 말했으면 못나가는거야.”

얘도 날 내보낼 생각이 없구나. 예지는 주저앉아서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왜 얘한테 미안한 감정을 가졌을까. 왜 얘네 집에 찾아올 생각을 했을까. 왜 얘네 집에 온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말고 우리집에서 나랑 같이 지내자. 넌 원래 진짜 착한 애야. 너랑 같이 다니는 애들이 나빠. 네 친구 재숙이는 저번에 내가 지우개가 없어서 빌려달라니까 들은 척도 안했어. 그리고 은영이는 내가 스치기만 해도 얼굴을 막 찡그렸고…… 그런 애들하고 놀지마. 그런 애들하고 놀다보니까 너도 모르게 나빠진걸꺼야. 우리는 얼굴도 똑같으니까 비슷한 점도 많을거야. 둘이서 그런 걸 찾아보자.”

예지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건 감금이야. 범죄라구! 너랑 네 엄마는 잡혀가서 처벌을 받게 될거야!”

민정이도 지지않고 소리를 질렀다.

“처벌은 지금 네가 받고 있잖아! 내가 멍청하면, 네가 내 마음에 준 상처는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거니? 그리고 난 멍청하지 않아. 난 너랑 똑같단 말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아줌마가 들어왔다. 아줌마 손에는 찌개와 김치와 프라이 팬에 놓인 계란프라이가 다인 초라한 밥상이 들려있었다.

“저녁들 먹어야지? 배고프지?”

저도 모르게 뺨을 감싸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아줌마를 쳐다보는 예지. 그러나 정신은 똑바로 차리고 있었다.

“절 내보내 주세요. 제가 여기 온거 선생님도 애들도 다 알아요. 제가 집에 못가면 경찰이 찾아 올거예요. 절 내보내 주시면 여기서 있던 일들 하나도 말하지 않을께요.”

아줌마는 밥상을 내려놓고 히죽 웃었다.

“내가 그런거 하나 챙기지 못하고 널 가둬놓을거 같니? 우리집 지하에는 연탄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거기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 소리도 못듣고, 소리가 밖으로 새지도 않아. 누가 오기만 하면 넌 거기로 직행이야. 난 아무도 안왔다고 하면 그만이야.”

온몸에 힘이 빠진다. 예지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밥이나 쳐먹어. 너한테 밥값 달라는 소리는 안할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넌 이제 여기서 우리 민정이 대신 있어야 해.”

이게 무슨 소릴까?

“네? 뭐라구요?”

“밥 안쳐먹으면 이번에는 반대쪽 뺨따귀가 날아갈 줄 알아!”

허겁지겁 상에 가 앉는다. 세 사람은 잠시 조용하게 밥을 먹는다. 예지의 눈길이 빼꼼히 열린 민정의 방문에 가 박힌다. 밥을 다 먹고 아줌마가 밥상을 들고 문을 활짝 여는 순간을 예지는 놓치지 않았다.

“에잇!”

아줌마의 두 손은 지금 밥상에 묶여있고 민정이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 틈새로 예지가 비집고 들어간다. 재빠르게 방밖으로 튀어나온 예지. 그러나 등으로 날아온 밥상에 맞아 마루에 쓰러지고 만다.

“악!”

넘어진 예지의 머리 위로 프라이 팬이 호를 그으며 날아온다. 예지는 그대로 기절하고 만다.

머리가 심하게 아파왔다. 눈이 떠지질 않았다. 손, 발에 감각이 없다. 나는 이대로 죽는건가? 예지는 엄습하는 공포에 가슴이 내려 앉았다. 움직여야 해. 살아야 해. 죽기 싫어. 난 아직 15세밖에 안됐단 말이야. 손가락을 움직여 보려고 애썼다. 움직인다. 죽은건 아니었다.

“예지야!”

“예지야!”

“한예지!”

이 목소리는?

“눈떠봐, 예지야. 어이구 내 딸! 손, 손 좀 더 움직여봐. 여보, 얘가 움직여요.”

엄마의 목소리다. 엄마!

“예지야, 아빠 목소리 들리니? 아빠 여기 있어.”

가느다랗게 눈이 떠진다. 흐릿한 영상이 점점 선명하게 모습을 갖추어 나간다. 엄마와 아빠가 바로 옆에 서있었다.

“엄마, 아빠.”

힘없이 너무 간절했던 명칭을 불러본다. 다급한 목소리가 간호사를 부른다.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간호사와 의사가 다가와서 예지의 눈동자를 살피고 말을 건다.

“학생, 학생. 정신이 들어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부모님이랑 선생님, 다 알아보겠어요?”

“네.”

예지의 엄마가 울면서 침대에 누운 그녀를 부여안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보, 그만 울어.”

의사는 예지의 부모님에게 말했다.

“일단 따님 의식이 돌아왔고 제대로 알아보는 걸 보니 안심은 됩니다. 검사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머리의 타박상 외에는 큰 부상은 없는걸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머리쪽이라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님 되시는 분은 저와 함께 좀 가실까요?”

예지의 아빠는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의사의 뒤를 따라 응급실을 나섰다. 엄마는 예지의 손을 꼭 잡고 울면서 하나님을 연신 불러대고 있었다. 예지의 의식은 아까보다 더 선명해져 왔다.

“엄마, 어떻게 된거야?”

“이것아, 어떻게 된건지는 엄마가 묻고 싶어. 도대체 왜 그런 집에 가서 다쳐 온거야.”

“날 어떻게 찾았어?”

선생님이 머리맡에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민정이가 말해서 알았지.”

“민정이가요? 걔는 절 가두려고 했는데…….”

선생님은 손으로 마구 이마를 문질러댔다.

“그게…… 하도 기가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

“아침에 너희 집에서 학교로 전화가 왔다. 어제 네가 집에 오지 않았다고 말이야. 넌 갑자기 가출하거나 할 애가 아니라서 깜짝 놀랬지. 그래서 수업 끝나는 대로 집으로 가보겠다고 했고, 너희 부모님은 실종신고를 내셨다. 일단 조회시간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너랑 꼭 닮은 애가 교무실로 들어오더니 나한테 꿉벅 인사를 하지 않겠니. 처음 봤을 때는 넌 줄 알았다. 네 명찰이 붙은 교복까지 입고 있더라. 근데 아무리 봐도 네가 아닌거야. 얼굴을 자세히 뜯어봤지. 걔가 누군지 도통 모르겠더라. 그런데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민정이잖냐.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아냐?”

“뭐라고 했는데요?”

“글쎄, ‘다시 생각해 봤는데 반장선거에 나가겠어요.’라고 하지 않겠니. 그래서 민정이한테 물었지. 무슨 소리냐고, 왜 예지 교복을 입고 있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너라고 우기기 시작하지 뭐냐. 선생님들이 몰려와서 넌 예지가 아니라 민정이라고 아무리 얘길해도 듣질 않는거야.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민정이를 끌고 경찰에 찾아갔다. 울며불며 갈 수 없다고 매달리더구나. 경찰서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지. 거기서도 걔는 자기가 예지라고 우겨댔지. 나중에 형사가 경찰서로 찾아와서 걔랑 둘이서만 얘기하겠다고 숙직실로 데려갔단다.”

예지는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제서야 사실대로 말하더란다. 자기 집에 네가 있다고…… 참, 형사가 괜히 형사가 아니더라. 아니, 이런 얘기 할 때가 아니지. 그래서 걔를 데리고 너희 부모님과 경찰들과 같이 가니까 걔네 엄마가 그런 애는 모른다고 딱 잡아떼길래 민정이를 앞세워 너를 찾게 했지. 넌 연탄이 잔뜩 묻어서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

예지의 엄마가 말을 걸었다.

“왜 그런 애 집에 가 있었니? 왜 그랬어.”

예지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선생님도 묻고 싶다. 걔네 집에는 왜 갔냐?”

그러게, 걔네 집에 왜 갔을까. 마음이 놓이고 졸음이 밀려들어왔다.

“선생님, 민정이하고 민정이 엄마는 지금 어디있어요.”

“형사가 데리고 가서 조사 중이란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엄마,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테니, 나 지금 좀 자면 안될까?”

엄마가 예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래, 피곤하면 자. 나중에 얘기하자. 푹 자.”

엄마의 손을 놓고 베게에 얼굴을 묻는다. 가라앉는 의식 사이로 민정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엄마를 만나지 않고,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으면 그 애도 보통 아이와 다름 없었을까? 속으로 도리질 친다. 아니다. 민정이는 그 자체로 악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애한테 미안한 마음과 동정심을 품지 않았다면 나는 무사했을까? 내가 잘못 한걸까? 그것 역시 아니다. 멍청하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 죄책감에 따라온 감정과 행동은 당연한 것이다. 예지는 잠이 들려고 한다.

‘새학기부터 재수가 없었어. 지독히 재수가 없었어. 그것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

꿈을 꾼다. 거기서 한예지는 강민정이 되어 그녀의 엄마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너무 끔찍해서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이 악몽에서 깨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자고있는 예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