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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여왕이 되다.

  • 작성일 2010-10-07
  • 조회수 382

마녀가 깨어났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뻗어 허무가 만든 빈틈을 벌리고, 망각을 핑계로 기어 나와 면도칼 같은 세상을 향해 차가운 숨을 내쉬었다. 그 때문에 한 남자는 길고 긴 어둠에서 빠져 나와 다시 다른 어둠을 맞닥뜨렸고, 아주 오래 전 멈추었던 이야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찰자

 

삼십 대 후반의 이혼 남, 그리고 불명예 퇴역한 군인이 택할 수 있는 직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것을 생각하는데 딱 일년이 걸렸다. 배와 허벅지에 살이 붙기 시작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늦어지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전처에게 전화를 걸어 작별인사를 하고, 아직 잠이 덜 깨 엄마 옆에 바짝 붙어 눈을 비비고 있는 딸의 얼굴을 아무 말 없이 한참 바라보다가 그대로 짐을 싸 들고 집을 나왔다. 내가 떠난다는 말에 두 여자는 아무 말도, 아무런 감정 표현도 없었다. 두 여자에게 나는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항상 외계의 어느 전쟁터에서 화상 통신으로만 이야기를 나누던 전 남편과 아버지에게 별 다른 인상 같은 게 남아있을 리 없겠지. 싸구려 모텔을 나서면서 어디로 갈 지 확실하게 정하진 않았지만 한가지 만은 확신 할 수 있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이 곳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복무 시절 알았던 사설 경호 업체의 실장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내가 일자리에 대해 묻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 떠들어 댔다. 자식들에게 들어가는 돈에 대한 푸념은 로봇들 덕분에 사설 경호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결국 내가 일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이미 말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하는 바람에 얻는 것 없는 긴 통화만 계속되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군대 동기였던 제프에게 연락을 했다. 제대한 후로 고향에서 작게 사업을 하고 있다는 그에게 연락을 하자 그는 반가운 얼굴로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나는 이혼한 이야기며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제프는 얼굴을 반쯤 덮은 그의 수염을 긁적이더니 전화번호 하나를 건넸다.

 

내가 군대시절에 알던 회사인데 아마 자네 정도라면 쉽게 자리를 줄 거야. 전화해서 안네라는 여자를 찾은 다음에 내 소개로 연락했다고 해.”

 

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자 그는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큰 기대는 하지마.”

 

나는 제프에게 거듭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바로 그가 전해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자동 수신 화면과 함께 GPC 라는 로고가 떠올랐다. 연결을 위해 원하는 이름을 말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안네라고 말하자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면서 은발의 노인이 화면에 나타났다. 깊게 패인 눈가의 주름과는 대조적인 그녀의 붉은 입술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그녀가 먼저 말했다.

 

무슨 일로 찾으셨나요?”

 

토마스 헤이든이라고 합니다. 제프가 소개해 주더군요.”

 

제프?”

 

그녀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는지 되묻자 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제프를 기억하게 하려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사이 다행히 그녀가 기억을 해 냈는지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예전에 56 수송대에 있던 제프를 말하는 거군요?”

 

. 일자리를 구한다고 했더니 이 쪽으로 연락해보라고 하더군요.”

 

…… .”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귀찮아 한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지만 나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 감찰관이 한 명 필요하긴 한데요…….”

 

그녀가 말 끝을 흐렸다. 아마도 내가 그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감찰관이라면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저희 회사 산하의 특수 목적 부서들을 감찰 하는 일이에요. 대부분은 사설 부대의 감찰을 맡게되죠. 혹시 전에도 이런 일 해보신 적 있나요?”

 

전에 군에 있긴 했습니다만……”

 

자신이 없는 내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얼굴은 밝아졌다.

 

아 군에서 일하신 경험이 있다면 충분해요. 어때요? 해보시겠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승낙하자 그녀는 내 시민번호를 묻고는 바로 취업 서류를 내 휴대 통신 단말기로 전송했다.

 

별도의 교육 같은 건 없어요. 토마스 씨는 그냥 취업서류에 포함된 감찰 항목 리스트에 매일의 점검 사항을 체크해서 전송해 주시면 돼요. 보수는 주 단위로 계산되고 리스트가 도착할 때마다 추가 지급되니 나중에 확인하시구요. 마지막으로 GPC의 직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녀의 축하한다는 말에 나는 얼떨결에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전화가 끊기고나서 나는 서류에 첨부된 파일들을 확인했다. 근무지에 대한 정보와 함께 내가 체크해야 하는 감찰 항목 리스트가 첨부되어 있었다. 직원들의 근무 태도에 대한 약 100여 가지 사항들을 A 에서 E까지의 등급으로 분류하여 기입하도록 되어 있었다. 별 다를 것 없는 항목들을 훑어보다 나는 근무지 정보를 확인했다. 그런데 기입되어 있어야 할 근무지 항목은 비어 있었고 대신 집결지라는 항목과 함께 24-3번 게이트가 적혀 있었다. 집결 시간까지는 약 20여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24구역 까지는 먼 거리였기 때문에 나는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관찰대상

 

셔틀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24구역에 도착했을 때는 집결시간을 2시간 정도 남기고 있었다. 중간에 버스 터미널에 있는 취침용 캡슐에서 잠을 청하긴 했지만 새로운 상황에 대한 묘한 흥분과 기대감 때문인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피곤은 남아 있었다. 3번 게이트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 한 쪽에 있는 여행자용 안내 콘솔에 다가가 묻자 지도에서의 위치와 함께 택시를 이용하라는 답을 주었지만 지도 상에 나타난 거리로 약 4킬로미터 정도였기 때문에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천천히 걸어가기로 하고는 지하철 역을 나왔다. 키 작은 건물들을 지나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어둡고 긴 도로를 한 시간 정도 걷자 3번 게이트까지 남은 거리를 나타내는 표지가 나타났다. 그 뒤로 약 10분 정도 더 걷자 드디어 3번 게이트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상에 낮게 돔 모양으로 세워진 3번 게이트는 주위가 온통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돔을 비추고 있는 지상의 푸른 조명은 오래되어 벗겨지고 바랜 건물 외장을 그대로 드러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돔 정면에 검은색으로 쓰여진 3번 게이트란 글씨를 잠시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분명 여행자들을 위한 곳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었다.

 

3번 게이트에 거의 다다르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소총을 등에 맨 채 내가 건넨 신분증과 취업 서류가 담긴 파일들을 자신의 PDA 에서 확인하고는 손가락으로 자신 바로 뒤 쪽을 가리켰다.

 

“6번 탑승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인원들과 같이 가시면 됩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6번 탑승구로 들어갔다. 환하게 불이 켜진 복도를 지나 대기실에 도착하자 건장한 남자들 몇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풍기는 냄새, 그것은 내게 익숙한 냄새였다. 땀과 피 그리고 수컷들의 페로몬이 뒤섞인 시큼하고 진한 냄새. 욕구와 본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 냄새. 나는 잠시 그 냄새에 취한 듯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이 대부분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한 명이 내게로 다가와 물었다.

 

“GPC에서 오셨습니까?”

 

내게 묻는 남자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반짝이고 있었다.

 

.”

 

잠시 뒤에 대장님이 오시면 출발할 겁니다. 대장님이 감찰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니 조심하시고요. 그리고 성함이?”

 

토마스 헤이든 입니다.”

 

! 그럼 그냥 토미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는 쟈크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리고 장비가 저 쪽에 있으니 미리 확인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남자가 이렇게 말하고는 문 옆에 놓인 전투배낭과 소총을 가리켰다. 멋대로 토미라고 부르겠다 것도 그렇지만 대장님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며 그의 얼굴에 나타났던 일그러진 웃음에서 나는 내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전투 배낭 쪽으로 다가가 물품들을 확인하자 쟈크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의 감찰관들이 묘한 사건들을 당해서 이번에는 감찰관의 경호원을 보낸다고 하더군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나중에 확인하고 알려드리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고 라이플을 집어 들어 작동을 확인하자 아직 돌아가지 않고 서 있던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특히 소총은 잘 확인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전의 감찰관은 총기 오발사고로 죽었거든요.”

 

쟈크가 이렇게 말하고 돌아간 뒤 나는 소총을 들고 배낭을 깔고 앉아 주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20여명의 남자들이 몇 명씩 무리를 지어 떠들고 있었다. 몇 명은 나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용병이 오히려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동료들에게 경계를 받는다는 것은 괴롭고 위험한 일이었다. 아마 이전의 감찰관들도 사고로 위장되었지만 저들에게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쩐지 일이 술술 잘 풀린다 했더니 결국에는 이렇게 어그러지고 말다니……. 하지만 그래도 경호원이 있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적어도 혼자보다는 둘이 조금은 나을 테니까.

 

소총을 분해해 살펴보는 사이 앞 쪽의 문이 열리더니 사내들이 일어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부대장과 경호원이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나도 그들과 함께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배낭과 소총을 들고 밖으로 나오자 거대한 수송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쟈크란 남자도 시야에 보이지 않았고 다른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지도 않아 그만 두었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사내들이 수송선 안으로 사라졌고 나도 대열의 맨 마지막에 서 있다가 수송선에 올라탔다. 어둑한 조명 사이로 사내들의 얼굴이 밖에서와는 달리 가라앉은 것을 신기해하며 나는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소총을 좌석 옆에 세워 놓고 배낭과 소지품을 정리하는 사이 수송선의 입구로 두 명이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젊은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중년의 남자였다. 남자 때문인지 아니면 여자 때문인지 두 사람이 나타나자 작게 웅성거렸던 수송선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중년의 남자는 입구에 서서 수송선 안을 한번 둘러본 뒤에 좌석에 앉았고 여자는 남자와 떨어진 곳의 비어 있는 좌석에 가서 앉았다. 잠시 뒤 문이 닫히고 수송선 안의 조명이 밝아지더니 엔진이 출력을 높이는지 선체가 작게 흔들리더니 지상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 나는 배낭을 정리하며 저 두 명중 누가 내 경호원일지 생각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년의 남자 쪽이 경호원으로 훨씬 믿음직스러웠지만 여자가 이 부대의 지휘관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여자 쪽이 경호원이고 중년의 남자가 지휘관이라는 쪽이 자연스러웠고 그러한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잠시 뒤 쟈크가 중년의 남자에게 다가가 내 쪽을 쳐다보며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뭔가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확실해 보였다. 쟈크의 보고에 남자가 바라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보이는 갈색머리와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이며 나를 훑어 보았다. 그의 강렬한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내가 눈을 돌리자 그도 눈을 돌려 쟈크를 바라보며 뭐라고 말을 하더니 이내 눈을 감았고 쟈크도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지휘관이라면 여자가 내 경호원일 것이 분명한데 그녀는 그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리 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았지만 왠지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이 말을 걸기 힘들게 만들었다. 한기가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랄까? 어쨌든 그녀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뒤로 틀어 올린 금발머리는 반짝였고, 전쟁터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흰 피부와 - 희다는 것 보다 창백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 가늘고 길게 뻗은 손가락은 부드러운 굴곡이 살짝 드러난 군복과 함께 독특한 분위기를 풍겨서 그녀를 노골적인 눈으로 쳐다 보게 만들었다. 그러다 잠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는데, 내 시선을 발견한 그녀는 약간 미소를 띤 얼굴로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미소와 눈빛이 얼마나 내 가슴을 흔들었는지, 방금 전 그녀를 바라보며 내 머릿속에서 일어났던 개인적인 상상들을 매우 추잡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매력에 눈길을 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앞에 앉아있던 용병부대의 무리들은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긋하지만 위험한 향기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했는지, 향기에 취한 나비처럼 그녀에게 사뿐히 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용감하게도 그녀에게 날아들었는데 그게 나비처럼 상냥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옆을 흘깃거리며 여자의 얼굴을 살피는 것 같더니 징그러운 - 다른 형용사가 생각나지 않지만 이 단어는 그의 표정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표정에 걸맞았다. -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 하듯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

저런 미인이 전쟁터에 나타나는 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손해야. 아마 제대로 된 밤을 보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말이야. 저 여자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질러대는 교성을 들어보고 싶군. 그럼 딱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여자는 그의 예의 없고 천박한 말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니햇 (Boonie hat) 아래로 그녀의 눈이 잠시 날카롭게 빛났을 뿐이었다. 여자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오히려 몸이 달아오는 것은 남자 쪽이었다. 이번에는 더욱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늘밤 어때? 내가 황홀한 밤을 약속하지!”

그 말에 여자의 오른쪽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와서는 보기 흉할 정도로 벌리고 앉은 남자의 다리 사이에 발을 올려놓고 남자의 사타구니 사이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말 많은 남자들이 날 만족시킨 적은 없었어. 그 어떤 것도.”

그리고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남자의 팔을 쳐내고 언제 꺼냈는지 은빛 날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나이프를 꺼내 남자의 뺨에 댔다. 천천히 남자의 눈과 일그러지는 얼굴을 노려보며 나이프로 뺨을 그어 내리자 길게 붉은 선이 얼굴에 생겨났다.

그리고 난 너처럼 곱상한 얼굴은 좋아하지 않아.”

남자의 주먹이 여자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둔한 동작을 살짝 피하고 뒤로 물러나 나이프에 묻은 피를 핥았다가 침과 함께 바닥에 뱉었다. 덕분에 그녀의 입술이 더욱 붉게 반짝였다. 남자는 자신의 뺨에 손을 대서 흘러내리는 피를 확인하고는 무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뒤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여자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입가에 남아있는 피를 혀로 핥으며 말했다.

네가 내 뒤에 설 수 있을 때는 네 뒤에 날개를 달고 있을 때뿐일 거야. 그 덩치에 날개를 달고 있으면 꽤 어울리겠는데, 귀엽겠어.”

 

그 말에 남자가 무서운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왼쪽 끝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다시 앉게 하고는 말했다.

장난친 거 가지고 법석 떨지 마라.”

중년 남자의 말에 다른 자들의 웃음 소리와 잡담으로 시끄러웠던 선내가 금새 조용해 졌다. 여자는 자리에 앉아 얼굴을 만지는 남자를 쳐다보며 웃다가 나이프에 묻은 피를 시트에 문질러 닦고는 집어넣었다.

 


 

소란이 가라앉고 다시 조그마한 잡담과 수근거림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권을 벗어난 수송선이 작게 요동쳤다. 그러자 앉아있던 중년의 남자가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가 부대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있으니 내 소개부터 하지. GPC 소속 사설 부대 폭스트롯 팀의 부대장 에릭 샌더스라고 한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용서할 수도 있지만 그러다 죽어버리는 것은 용서할 수 없으니 이 점 잊지마라. 그리고 이번에 새로 감찰관 토마스 헤이든씨와 경호원 에린 가넷 양이 팀에 참가하게 됐으니 두 분께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나와 에린 가넷이라는 이름의 경호원을 가르키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러자 부대원 몇이 아까 뺨에 상처를 입은 남자와 경호원을 번갈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웃었고 금세 웃음이 전염되어 수송선 안이 시끄러워졌다.

 

조용! 내가 손을 대면 닉처럼 뺨에 흠집 생기는 것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 확실히 하도록 해라. 그럼 지금부터 이번 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말을 마치고 에릭이 주머니에서 CPC(전투지원컴퓨터)를 꺼내 들었고 동시에 부대원들도 배낭에서 CPC PDA 같은 것들을 꺼내들었다. 나는 아까 배낭 안에서 CPC를 본 것을 떠올려 그것을 찾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어 잠시 애를 먹은 뒤에야 그것을 꺼낼 수 있었다. 화면에 어떠한 지역의 지도가 떠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브리핑이 시작됐다.

 

이번 우리의 작전지역은 OTC에서 관리하는 계획 행성 OPP-0434 지역이다. 인류 이주를 위해 환경 시설들은 준비가 완료된 지역이지만 아직 세부적인 문제가 있어 민간인 이주는 이루어지지 않은 곳인데 최근 우리쪽 정보원이 그 지역에 불시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 이번 우리임무는 CSAR (Combat Search & Rescue: 전투수색구조)이지만 구조보다는 정보원이 가지고 있는 중요 문건에 대한 확보가 우선시 된다는 점을 기억해 두길 바란다. 주의해야 할 점은 그 문건을 탈취당한 쪽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OPP-0434 지역의 특수한 상황이 작전에 영향을 끼칠것으로 생각된다. OTC쪽으로부터의 방해와 유랑자들 같은 불청객들과의 전투가 예상된다.”

 

OTC라면 GPC와 적대적인 기업이었다. 이주행성을 개척하고 관리하는 두 개의 거대기업의 조용한 싸움이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정보원은 OTC에서 어떠한 정보를 빼내 탈출하려다 발각되어 불시착한 것 같았다.

 

잠시 뒤, 수송선이 대기권 밖의 하이퍼 게이트를 통과하면 OPP-0434까지 도착하는데 약 5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불시착지역 주변의 대공방어망을 피해 작전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착륙한 뒤 임시 기지를 구축하고 장비를 점검하는 것을 1시간 안에 처리해야 하니 지금 푹 쉬어놓도록 아마 이번에도 꽤 피곤한 임무가 될 것 같다. 이상!”

 

에릭이 이렇게 말하고 묘한 웃음을 짓자 다른 사내들도 뭐가 웃긴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부대장 에릭은 이렇게 브리핑을 마치고 내게로 걸어오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쟈크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하는데 늦었군요.”

 

그는 생김새와 다르게 점잖은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토마스 헤이든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름을 말하며 손을 내밀자 그가 악수를 하면서 말했다.

 

전투 경험은 있으십니까?”

 

전투 경험에 대해 묻는 에릭의 눈이 조금 날카롭게 변한 것 같았다. 난 잠시 어떻게 말해야 할 지 고민했다. 군 복무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전장에서 보내긴 했지만 실제적인 전투를 치뤄본 것은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몇 번 경험해 봤습니다.”

 

결국 이렇게 대답하자 에릭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나타났다.

 

다행이군요. 서류를 보니 불명예 퇴역 하셨던 데, 무슨 일 때문이었습니까?”

 

제발 그것만은 물어보지 말았으면 하던 것을 묻자 그만 나는 굳어버렸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명령 불복종 때문이었습니다.”

 

군대에선 용납되지 않는 일을 저지르셨군요.”

 

이렇게 말하는 에릭의 표정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부하들 머리 위로 폭격을 지시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결국엔 부하들도 구하지 못하고 저도 이렇게 쫓겨나 버리고 말았지만 후회하진 않습니다.”

 

뭐 그런 것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헤이든 씨가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니까요. 전투 경험도 있으신 것 같고 직접적인 교전에 참여하진 않으실 테니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에릭은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서서 내 경호원인 에린 가넷이란 여자를 불렀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고 그녀 역시 고개를 숙여 답했다.

 

이제부터는 여기 있는 가넷양과 함께 움직이시는게 좋겠습니다. 가넷양도 저희와 일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두 분이라면 제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그리고 전장에서는 씨나 양 같은 호칭은 생략할 겁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불쾌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럼……”

 

에릭이 말을 마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에린은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 배낭이며 무기 같은 것을 들고와 내 옆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자리에 앉자 마자 CPC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것 쓸 줄 알아?”

 

이미 이름을 알고 있긴 했지만 자기 소개도 하지 않고 대뜸 반말로 이렇게 묻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약간 당황해서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좀 가르쳐 줘!”

 

! …”

 

어째서 경호원으로 고용된 사람이 CPC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뭔가 상황이 역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난 그런 것을 내색하지 않고 CPC 화면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간단하게 조작법을 설명했다.

 

이건 아직 보안 설정이 되어 있지 않군요. 원래 지문을 인식해 다른 사람은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거나 같은 부대원 들만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거든요. 자 일단 화면을 한번 두드리면 켜지고 인터페이스 화면이 나타나고요. 여기서 메뉴를 건드리면 각 메뉴 화면으로 이동하고 기본적으로 주위의 CPC 들과 동기화해서 각 대원들의 위치를 표시해 줍니다.”

 

내 설명을 듣고 있던 세린이란 여자는 화면을 쳐다보다가 흠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내 손에서 CPC를 빼앗아 들고는 말했다.

 

뭐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잖아.”

 

폭발물에 신호를 보내거나 전투복에 장착된 센서로부터 정보를 받아 신체정보들을 수집하는 기능 같은 것도 있으니 전투에선 꼭 필요한 물건이지요. 그런데 이런 임무는 처음 맡으셨나보군요?”

 

이런 임무?”

 

내 물음에 그녀가 한 쪽 눈을 살짝 치켜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경호 임무 말입니다.”

 

!”

 

내 말에 그녀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했다.

 

팀으로 움직이게 된 것은 처음이라서 이런 물건을 사용해 볼 일이 없었어. 그리고 경호도 사실 해 본적이 없고. 그러니까 당신 아 이름이 뭐랬지?”

 

토마스 헤이든입니다.”

 

! 토마스 헤이든. 어쨌든 당신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씨익하고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듣기 전에 벌써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있긴 했지만 직접 이야기를 듣자 조금 불안해졌다. 여자인데다 나보다 전장 경험이 적을 것 같은, 즉 있으나마나 한 경호원의 존재에 대해 내가 불안해 하고 있는 사이 그녀는 계속 CPC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어느 새, 수송선이 하이퍼 게이트 앞에 도착했는지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주위의 다른 몇 명도 그것을 느꼈는지 풀어놓았던 좌석 벨트를 매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수송선이 완전히 정지하고 조명이 잠시 꺼지자 선내방송이 흘러나왔다.

 

“1분 뒤 하이퍼 스페이스로 진입합니다. 선체에 약간의 진동이 있을지 모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끝나자 나는 눈을 감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하이퍼 게이트를 이용해 이동하는 것은 편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체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안락한 수면을 마음껏 즐겼다.

 

누군가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는 작전 지역이 있는 OPP-0434에 거의 도착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내 어깨를 흔들던 에린은 내가 잠이 덜 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이전보다 더 세게 어깨를 흔들더니 말했다.

 

징징대면서 칭얼대는 것보다 낫지만 이렇게 정신 놓고 맘 편히 자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비비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의 다 도착한 것 같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가르치고 타이르려는 듯 행동하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신은 내 경호원이지 상관이 아니니까 그런 태도나 말투는 좀 고쳐줬으면 좋겠는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 내 말에 그녀가 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가 너무 참견했나? 하지만 당신이 너무 긴장을 안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내 말에 그녀가 픽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수송선은 OPP-0434의 대기권을 통과해 착륙예정지로 향하고 있었다. CPC에 전투행동 개시를 알리는 타이머가 떠오르자 주위에서 전투용 고글이나 컨택트렌즈 스타일의 조준 시스템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군 시절에는 감염이나 전투중 발생하는 각종 위험 요소에 대해 보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전투용 고글을 선호했지만 배낭 안에는 컨택트 렌즈가 들어있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렌즈를 오른쪽 눈에 착용하고 소총을 들자 엹은 녹색의 조준점이 시야에 나타났다. 시야 확보를 위해 조준점의 형태나 소총과의 반응 거리들을 조정하는 사이 옆자리의 에린도 컨택트 렌즈를 착용하고 작동을 확인하고 있었다.

 잠시 후, CPC에 착륙 예정 메시지가 떠오르자 부대장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소리쳤다.

착륙과 동시에 1소대는 사주경계, 2소대는 주변 정리 후 3소대와 같이 장비하적, 4소대와 중대 본부는 통신 및 공중 지원 장비의 준비에 들어간다.”

에릭의 말이 끝나자 대원들이 함성이 울려 퍼졌고 곧이어 착륙 표시등에 카운트가 시작되었다. 내가 배낭을 메고 일어서자 에린이 CPC를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우리는 중대 본부와 같이 움직이면 될 테니 느긋하게 앉아서 기다려. 우리가 나서봤자 거치적거리기만 할 테니까.”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내가 일어서자 주위의 몇 명이 벌써 일어서냐는 듯 웃고 있었다. 카운트가 줄어들고 내 심장의 박동도 빨라지는 것 같더니 작은 요동과 함께 수송선의 전면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대원들이 밖으로 나가면서 소란스러워지자 에릭과 쟈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상황보고가 끝나면 같이 나가죠.”

.”

그 옆에서 쟈크는 통신기와 CPC를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1소대의 보고가 끝났고 나머지 소대들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일까?”

에릭이 이렇게 말하고 밖으로 나가자, 우리도 그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OPP-0434의 모습은 황량했다. 대기의 조성은 완성되어 호흡에 불편함은 없었지만 조금 낮은 중력으로 인해 처음에는 움직임이 조금 부자연스러웠다. 이끼류의 식물이 철분이 많이 섞인 붉은 토양 위에 군데 군데 자라고 있었지만, 붉은 모래를 날리며 부는 바람의 스산한 소리가 황량함을 가중시켰다.

나는 붉은 모래 바람을 보자 컨택트 렌즈보다 전투용 고글이 있었으면 좋았을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에린은 그런 것 따위 상관없다는 듯 벌써 손수건 같은 것을 꺼내 옛날 서부영화에서 보던 복면처럼 입과 코에 두르고 있었다.

 

장비 하적 작업이 끝나 무인 정찰기가 저소음 비행을 하며 주변지형에 대한 정보 갱신 작업을 시작했고 중대 본부가 설치한 통신용 안테나가 임시 기지 가운데 솟아 올랐다. APC (Armoured personnel carrier) 4대와 대공 방어 로봇의 배치가 끝나고 이동식 벙커의 설치가 끝나가는 동안 에린은 그 모든 것이 신기한 듯 작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사이 내 CPC 에는 새로운 메일의 수신을 알리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각 소대로 부터의 보고를 체크하며 막 완성된 벙커 안으로 들어가는 에릭을 따르며 메일의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은 첫번째 감찰 결과를 송신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이전에 받았던 감찰 항목 리스트와는 다른 내용의 리스트가 첨부되어 있었다. 급하게 새로 전송된 리스트의 항목들을 훑어보는 사이, 뒤 따라온 에린이 어깨 뒤로 내 CPC를 들여다 보며 말했다.

뭐야! 벌써 보고하는 건가?”

에린의 말에 막 그녀에 대한 항목을 발견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흠칫놀라 숨기듯 CPC를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내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그녀가 웃는 것 같았지만 복면으로 가려져 있어 확실하게는 알 수 없었다. 그 때, 에릭이 벙커 내에 설치된 모니터와 3차원 지형 홀로그램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고할 사항이 있으면 지금 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잠시 후, 바로 APC를 타고 이동할테니까요. 여기에는 중대본부와 4소대가 남아 후방지원 임무를 맡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짧게 대답하고 벙커 한 쪽의 의자에 앉아 각 항목들에 체크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받았던 리스트와 비슷한 항목도 있었지만 새로 받은 리스트에는 이상하게 에린에 대한 항목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린에 대한 항목들도 감찰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신체적, 정신적 이상에 대한 관찰 결과, 특이한 행동의 유무 같은 대체로 평이한 항목들뿐이었다. 난 서둘러 설문의 작성을 마치고 전송 결과를 확인했다. 그에 맞추어 에릭이 소총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3차원 지형 홀로그램을 바라보던 에린도 내렸던 복면을 다시 콧 등위로 올리며 일어섰다.

“1소대가 도착하는 즉시 APC에 타고 이동할 겁니다.”

에릭이 이렇게 말하고 벙커에서 나가려는 순간, 쟈니가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3소대가 할로우(Hollow)를 타고 작전지역 쪽으로 선두 이동하고 2소대가 예상 작전 범위에서 목표물 수색에 들어갔습니다. 1소대의 주변 정찰이 끝나면 2소대와 함께 수색에 참여하면 됩니다.”

알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에린이 모니터에서 뭔가 발견했는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가 찾고 있는게 저것 같은데?”

모니터에는 불시착한 셔틀의 항공 촬영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모니터를 확인한 에릭은 좌표를 확인한 뒤 3소대에게 좌표지역 확인을, 2소개에게 주변 경계 명령을 내렸다.

일이 빨리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옆에서 바라보던 쟈크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에릭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석연치 않은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유랑자들

 

십여명이 빽빽히 들어 앉은 APC안의 공기가 점차 탁하고 뜨거워졌다. 에어컨디셔너가 작동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는지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APC의 가장 안 쪽에 앉은 나와 에린은 마주보고 앉아 있었지만 한참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것은 APC 안의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여서 수송선 안에서의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석고상처럼 경직된 표정으로 양쪽에 길게 앉아있는 그들의 모습은 아직 아무런 위험요소가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APC의 작은 엔진 소리와 숨소리만 들리는 상황을 깨치고 통신기를 들고 있던 쟈크가 입을 열었다.

“2소대로부터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에릭이 바로 쟈크가 들고 있던 통신기와 자신의 CPC를 번갈아 확인하더니 말했다.

“3소대는 좌표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우리는 2소대의 위치로 합류한다.”

그는 쟈크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APC 안의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2소대가 불시착 지점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 흔적을 찾았다. 상황의 처리를 위해 3소대만 작전을 계속하고 1소대는 2소대와 합류한다.”

옆에서 부대장의 명령을 듣고 있던 쟈크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고 나는 전투 흔적이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전투 흔적이라니 무슨 일 입니까?”

작은 목소리로 묻자 에릭이 자신의 CPC에 수신된 영상을 보여주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멀리서 찍은 영상이었다.

이 근처에서 유랑민의 마을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전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최근에 벌어진 전투인가 보군요?”

, 거기다 보고된 상황으론 좀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만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난 잠시 그의 다문 입술을 바라보다가 그가 계속 존칭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상황이 급박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도 나만큼이나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는 데 오래 걸리는 성격일까?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APC가 멈추고 뒤 쪽 해치가 열리며 외부로부터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거기엔 무엇인가 타는 냄새와 함께 비릿함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대원들의 뒤를 따라 내렸을 때 난 그 냄새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눈 앞에는 실로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십여개의 트레일러와 천막으로 이루어진 유랑민 마을은 여기저기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 마을 한 가운데 둥그런 원형 지역에는 시체로 이루어진 탑이 놓여 있었다. 타다 남아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들의 탑 앞에는 십여명의 시체가 엎어져 있었는데 모두 뒤에서 사살한 것으로 보였다.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군요.”

내가 코를 막으며 말했지만 에릭은 대꾸하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다른 것은 찾지 못했나?”

계속 찾고 있습니다만 문건이나 정보원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2소대장의 보고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쟈크를 불렀다. 난 마을을 둘러보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그 지독한 학살의 풍경에선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것 같은 잔인함만이 느껴졌다. 인간의 감정이라곤 느낄 수 없는 냉혹한 작업, 어떤 자들의 짓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작업을 완료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던 에린이 어느새 다가와 옆에서서 말했다.

유랑민들은 반격하지 않았나?”

무기가 보이지 않는 걸 봐서는 그냥 당한 것 같은데.”

이 쪽도 대책없는 인간들이구만.”

한심하다는 말투에 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왠지 복면 위로 보이는 그녀의 눈에서 잠시 연민 같은 것이 스쳐지나 간 것 같았다. 그 때, 에릭이 한 트레일러 앞에서 나와 에린을 불렀다.

잠시 이리와 보십시오,”

에릭의 부름을 받고 트레일러 안에 들어서자 피가 흥건한 바닥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트레일러 천정에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있는 다섯 구의 시체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상의가 벗겨진 채 날카로운 것으로 난자당한 시체들을 살펴보던 에릭이 말했다.

보르조이(Borzoi) 입니다.”

?”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하자 그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OTC의 특수부대로 별칭 보르조이라고 불립니다.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는 놈들로 유명하지요. 이렇게 매달아서 고문하는 것도 그 놈들의 수법입니다. 별 상관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해치운 것을 보면 틀림없는 것 같군요.”

보르조이라 전 처음 들어보는데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내 물음에 에릭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 놈들 덕분에 우리 폭스트롯팀 마로지(Marozi)가 태어났으니까요.”

보르조이에 대항해 만들어진 팀이란 말입니까?”

내가 묻자 에릭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원래 폭스트롯팀은 알파와 델타팀의 생존자들로 새롭게 만든어진 팀 입니다. 브라보팀과 찰리팀이 에코팀이 되었죠. 저 놈들과의 전투에서 우리 부대원들이 절반으로 줄었거든요.”

이렇게 말하는 에릭의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고 트레일러 밖으로 나왔다. 대원들이 정보원에 대한 흔적을 찾느라 수색을 계속하는 사이 난 시체들의 탑에서 어린 소녀의 주검을 발견했다. 딸아이의 나이 즈음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 옆의 여자 시체에서 내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그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착각이라는 생각이 곧바로 따라 붙었다. 내가 그들을 사랑했다면 지금 여기서 시체를 바라보며 딸과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죽은 소녀의 모습에서 연상되는 딸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시체 애호증이라도 있나? 왜 그렇게 시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지?”

아무것도 아냐.”

그래도 보기보단 대단한데 이런 광경을 그렇게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니. 좀 당황할 줄 알았는데 말야.”

익숙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무리에 끼어서 약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 난 오히려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은게 놀랍군.”

내 말에 에린이 뭐가 우스운지 소리내 웃었다.

여자라서?”

조금은.”

내 대답에 그녀가 다시 웃더니 말했다.

 

아까는 계속 존칭을 쓰더니 언제부터 말을 편하게 하는데? 좀 친숙해진 건가?”

 

당신 말투 덕분이지.”

 

그런가?”

그녀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고, 난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대원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대원들이 수색 작업과 동시에 상황 정리를 마치는 사이 에릭은 중대 본부로부터 보고를 받는 것 같았다. 소각 명령으로 트레이너와 천막등에 소이탄이 투척되어 불길이 치솟는 것과 동시에 아무도 탑승하고 있지 않던 APC가 급출발하여 옆으로 돌더니 마을 동쪽의 평원을 향해 기관포를 쏘아 댔다. 어디선가 로켓이 발사되는 신호를 탐지하고 자체 방어 시스템이 동작한 것이었다. 첫 번째 로켓이 APC 측면 장갑에 맞아 탄흔과 함께 폭음이 울린 것을 신호로 모든 사람들이 자세를 낮추며 엄폐물을 찾아 움직였다. 다행히 초탄의 피해가 크지 않았는지 APC가 주변에 연막탄을 터뜨리고 후진하자, 머리 위에서 얇게 베인 종이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어디서 발사되었는지 알 수 없는 대전차 미사일이 공중으로부터 직선으로 낙하하여 APC의 상판에 명중했다.

 

소구경 기관포의 포탑에 명중해 APC가 폭발하자, 뒤이어 저격수의 총탄이 날아들었다. 방탄 슈트 표면에서 폭발하는 소구경 고폭탄에 의해 두 명이 분해되어 사라지고 나자 에릭의 다급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2시 방향으로 제압사격!”

 

아직 타지 않은 트레일러 아래 숨어 엎드려 있던 나는 망원경을 꺼내 2시 방향을 주시했다. 수십개의 예광탄 궤적이 날아들자 저격수의 공격이 멎었지만, 적의 정체도 위치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남은 APC 한 대가 다시 연막탄을 주변에 터뜨리자 이번에는 부대원 두 명이 달려가 탑승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CPC APC의 센서가 탐지한 데이터로 추정한 적 예상지점을 알리는 지형도가 수신되자 에린이 내가 숨어 있는 트레일러 쪽으로 뛰어왔다.

 

어떤 놈들이지?”

몰라. 하지만 에릭이 말한 보르조이는 아닌 것 같군.”

 

제압사격이 멈춘 틈을 타 내가 대답했다. 에릭이 말한 보르조이라면 저렇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저격하는 대신 공중 지원이나 포격을 시작으로 전면 공격을 시작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유랑민들인가?”

 

에린이 이렇게 대답하고는 소총을 들어 스코프로 전방을 살폈다.

 

정찰기로부터 적 위치가 파악되었다. –

 

CPC의 음성 채널로 에릭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서 작은 화면에 추정 좌표가 반짝였다. 마을의 위치로부터 6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의 점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스코프나 망원경에는 이끼류의 식물과 붉은 토양 뿐 특이할 만한 물체는 보이지 않았다. 상공을 날아가던 정찰기의 날개에서 불꽃이 일어나더니 곧이어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날아가는 물체를 정확하게 저격한 것을 보면 유랑민이 맞겠군. 아무래도 저 정도 실력을 가지려면 같은 환경에서 지속적인 연습이 필요하니까.”

 

나는 에린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에릭을 연결했다.

 

유랑민들의 공격인 것 같은데 우리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기엔 우리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우리나 보르조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상대니까요. 우리 역시 OTC 관리 행성에서 활동했다는 증거를 남겨서 좋을 일도 없구요.

 

하지만…….

 

나는 오해를 풀고 그들에게 보르조이나 정보원의 행방에 대해 묻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음성채널이 끊기고 명령이 전달되었다. 주변에 부대원 들이 던진 연막탄들이 피어오르고 열 탐지 센서가 장착된 대인 공격용 유탄이 공중을 향해 날아올랐다. 스코프에 정찰기가 보고한 지점에 유탄이 떨어져 폭발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2소대의 인원 몇 명이 포복으로 전진하여 자리를 잡고 제압사격을 하는 동시에 우리측 저격수가 APC 쪽으로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고 바로 두 번째 유탄이 발사되었다.

 

유탄이 떨어진 자리에서 폭음과 섬광 대신 흰색의 연기가 피어오르자 CPC에서 화학전 상황을 알리는 메시지가 반짝였다. 신경작용제에 아군 피해를 막기 위해 색을 넣은 모양이었다. 바람을 등지고 있었으므로 아군의 피해는 없을 테지만 난 만약을 대비해 방독면을 확인했다. 잠시 후 연기가 가라앉고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목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며 움직이던 남자가 우리 쪽 저격수의 총에 맞고 쓰러지고 나서 바로 아군 저격수가 적의 공격에 쓰러졌다. 적의 저격수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잠시 방심해 위치를 노출한 것이 실수였다. 적의 규모와 위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 보르조이라는 자들이 나타난다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돌아가리라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었지만 별 다른 대응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에린이 옆에서 포복으로 기어나가며 말했다.

 

잠깐 다녀올 테니 뒤를 조심해.”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방금 죽은 저격수의 위치로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뒤 쪽 컨테이너 아래에서 쟈크가 날 발견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는 어째서 그녀가 뒤를 조심하라는 말을 했는지 알아챘다. 나는 신경이 곤두선 채로 소총의 손잡이를 움켜 잡았다.

 

에린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조금 지나 그녀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아군 저격수의 저격 소총을 들고 몸을 숨긴 채 조준하던 그녀가 연달아 세번의 사격을 하더니 자리를 옮겼다. 뭔가 수상해 보이는 것을 쏘는 가 싶었는데 바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는 신중하게 한 곳을 조준하고 있었다.

 

에린! 난 당신에게 저격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음성 채널에서 에릭의 낮지만 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엎드려 있다가 한 발을 발사했다. 그녀의 총탄이 떨어진 곳의 지면이 조금 출렁이는 것이 망원경에 보였지만 적의 저격수가 맞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있지만 이대로 있다가 죽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저격 소총을 옆에 내려 놓고 그녀가 에릭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격수가 처리된 것인지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공격이 한동안 이어지지 않자 APC가 연막을 뚫고 나와 저격수의 위치로 움직였다. 적의 유체를 확인한 뒤 보고하자 부대원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적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듯 매우 조심스러웠다.

 

쟈크가 에릭에게 피해 상황을 보고 하고, 조심스러웠던 부대원들의 움직임도 경계가 누그러져 바빠진 순간, 주변을 확인하고 이동을 위해 마을로 돌아오던 APC가 돌연 폭발했다. 로켓이나 미사일의 공격 증후도 없었는데 갑자기 폭발한 것 이었다. 적이 남아있던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사고 인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내 앞 쪽에 바위를 은폐물 삼아 숨어있던 대원 한 명이 갑자기 쓰러졌다. 내 눈 앞에 쓰러진 대원의 정수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에릭이 소리치며 뛰어왔다.

 

도망쳐!”

 

그의 다급한 표정에 얼른 일어서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에릭의 외침에 다른 대원들도 산개했으나 그 중 몇은 적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기의 정체는 위성 혹은 대기 상층부에서 발사하는 레이저 였다. 처음 APC와 대원 한 명을 공격해 환경 변수들을 수집, 취득하고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려는 것을 다행히 에릭이 눈치챈 덕분에 피할 수 있었지만 마지막 공격이 이루어진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20미터가 쏟아져 내린 레이저의 비를 맞고 타버렸다. 몇 개의 렌즈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지만 지면의 흔적등으로 유추해 봤을 때 소용돌이 모양으로 회전하며 공격하는 것 같았다. 유랑민이 저런 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동하는 APC를 공격한 것을 봐서는 위성의 광학 장치로 수집된 정보로 자동 공격하는 것 같았지만 첫 번째 대원을 공격한 패턴을 봐서는 누군가 좌표 측정기를 이용해 조준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소수의 저격수에 의해 농락당한 폭스트롯팀이 이 새로운 적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무기의 한계인지 연속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는 틈을 타, 주변을 살피며 지면에 몸을 붙인채 참호라도 파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고 있는 사이, 부대원 한명의 적의 좌표 계산용 레이저를 고글로 발견하고 소리쳤다.

 

“3 500 미터 전방 지면

 

그의 외침에 에릭이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유탄이 다시 날아가고 소총수와 자동화기 사수가 제압사격을 하며 빠르게 접근했다. 제압사격에 적이 접근하는 부대원들을 향에 2차 공격을 시도했지만 산개하여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다수를 공격하기에는 무리였다. 더구나 조준과 공격간에 시간차가 있어서 부대원들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최초 보고했던 지점에 접근하는 것 같더니 순간 지면에서 뭔가 튀어올라와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다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생포된 적이 부대원들에게 끌려오는 사이 에린이 옆으로 다가왔다.

 

아직 살아있었군.”

 

“……”

 

되도록이면 부대장 옆에 붙어있는게 나랑 같이 있는 것보다 안전할 것 같아.”

 

무슨 소리지?”

 

그가 위성 레이저 공격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채지 못했다면 다 죽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의 옆에 있는 편이 예기치 않은 공격에 대처하기 쉽지 않겠어?”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지만 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끌려온 적은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남자였다. 이제 막 소년 티를 벗은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며 에릭이 물었다.

 

정체가 뭐지? 그리고 왜 우리를 공격한 거지?”

 

우리 마을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남자의 분노에 찬 음성에 에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이렇게 피해를 당한 것을 발견한 것뿐이다. 너희들은 엉뚱한 상대를 공격한 거야!”

 

거짓말 하지마. 너희들이 마을을 불태우는 것을 똑똑히 봤어.”

 

남자가 소리치자 옆에 있던 쟈크가 물었다.

 

너희들은 유랑민들인가? 어째서 위성 레이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거지?”

 

쟈크의 물음에 남자가 노려보며 쏟아내듯 내뱉었다.

 

우리는 유랑민이 아니야! 우리는 이주민들이라고.”

 

이주민이라는 말에 쟈크가 놀란 얼굴로 에릭을 쳐다 보았다. 아직 이주민이 이주하지 않은 상태로 알고 있던 에릭이 다시 그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의 인원이 이주해 있지. 이런 마을이 또 있나?”

 

우리뿐이야. 하지만 벌써 연구시설도 벌써 들어와 있다구. 무기도 그 연구실에서 준거고.”

 

연구시설과 이주민의 존재는 작전 내용에 포함되지 않은 사항들이었다. 추후 심문을 위해서인지 에릭이 남자를 치료해 주라고 명령하자 부대원들이 남자를 끌고 사라졌고 에린이 왠일인지 남자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에릭이 나를 불렀다.

 

어떻게 보고할 생각입니까?”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지만 나는 머뭇거릴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보고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지만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궁금해졌다.

 

달리 생각하진 않았지만 최대한 사실대로 보고하는게 맞겠지요.”

내 대답에 에릭이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유랑민과의 전투에 대한 부분을 조금 바꿔주시겠습니까?”

 

?”

 

정확히 어떻게 바꾸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어 이렇게 되묻자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우리가 생포한 남자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빼주십시오. 그가 이주민이라고 말한 부분 말입니다.”

 

어째서지요?”

 

우리가 선제 공격을 당했고 그들이 이주민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해도 이주민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민간인과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작 내가 받을 설문지에 이번 전투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이주민의 존재가 그것을 허용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 남자는 죽일 겁니까?”

 

그래야겠지요.”

 

이주민의 선제 공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첨부한다고 해도 그렇게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보고서에 내용에 대해 기술하라는 지시가 없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이주민 남자의 죽음에 간접적이지만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하는 대신 그가 쉽게 받아 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기로 했다.

 

그를 살려 준다면 말씀하신대로 보고하지요.”

 

내 대답에 그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를 그냥 풀어 줄수는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과 에린이 그 포로를 책임져 주십시오.”

에릭은 이렇게 말하고는 내 옆을 지나 쟈크에게 돌아갔다. 포로로 데리고 다니라는 말에 숨어있는 여러가지 의도들을 생각해 봤지만 역시 모두 내게 불리한 것들뿐이었다. 귀찮은 짐을 떠맡은 사실을 에린이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부서진 2대의 APC 대신 임시 기지로부터 새로운 APC와 정찰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사이 사상자들의 수습 작업이 끝났다. 1소대의 사상자가 3, 2소대의 사상자가 6명으로 에릭과 쟈크 그리고 에린과 나를 제외한 17명이 남아있었다. 에릭은 중대 본부의 인원으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는 대신 사상자의 이송을 명령하고 쟈크와 함께 작전에 대해 상의했다. 이미 3소대로부터 불시착한 셔틀을 발견했으며 문건이나 정보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었으므로 정보원이 문건과 함께 어딘가에 숨어 있거나 벌써 보르조이에게 잡힌 것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문건과 정보원의 행방을 추적할지 상의하는 사이, 에린이 치료를 마친 포로를 데리고 왔다. 총상을 입은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절뚝거리며 끌려온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내 앞에 털썩 주저 앉았다.

 

우리에게 이 남자를 데리고 다니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거지?”

 

에린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있었다.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사상자가 많으니 우리 손을 빌리려는거겠지!”

 

웃기지마. 이 남자를 치료한 건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으니 우리가 맡을 이유가 없어. 왜 이렇게 된거지? 너도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데 그렇게 수긍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뭔가 있군.”

 

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을 돌려 남자에게 물었다.

 

이봐. 넌 이름이 뭐지?”

 

“…….”

 

내 물음에 남자대신 에린의 다그침이 이어졌다.

 

말을 하지 않겠다면 좋아! 이 자를 죽이면 그만이니까.”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소총을 남자의 머리에 겨누었다. 꿈쩍하지 않는 남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난 사실을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 둬! 이주민과의 전투에 대한 것을 비밀로 하는 대신 그를 살려두기로 한거니까.”

 

뭐라고? 어째서지!”

 

사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불필요한, 아니 피할 수 있는 살인을 막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에린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 이렇게 됐으니 할 수 없지. 하지만 이것만 알아둬. 내 임무는 당신의 경호뿐이라는 것 말야. 그러니 내가 이 꼬마까지 보호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마!”

 

그녀가 총구를 거두자 남자가 고개를 들어 에린에게 소리쳤다.

 

위성용 좌표 측정기를 가져간 거 당신이지?”

 

남자의 말에 에린이 반사적으로 소총을 겨누었다가 말했다.

 

재밌는 장난감이라 구경 좀 할 테니까 다른 놈들에게는 이야기하지마. 다행히 아무도 관심 없는 것 같으니까.”

 

좌표 측정기라는 말에 나는 에린을 바라보았다. 뭔가 그녀가 적당한 해명을 해주길 바래서 였지만 그것은 단지 내 바램일 뿐이었다. 묘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단순한 호기심인지 감추어둔 의도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것으로 뭘 하려는 거지?”

 

특별히 목적이 있진 않지만 나중에 유용할 지도 모르니까.”

 

그녀의 유용할지 모른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을 문제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난 그냥 묵인하기로 했다. 다만 그것으로 이 귀찮은 포로의 처리를 그녀에게 떠 넘기기로 마음 먹었다.

 

그 비밀을 지켜주는 대신 저 포로를 맡아줘.”

 

자기가 저질러 놓고 내게 떠 넘기는 건가?”

 

에린은 이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이미 자신의 장난감을 뺐기고 싶지 않았는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APC가 도착하자 1소대의 인원이 먼저 탑승해 출발했고 2소대가 남아 무인 정찰기를 작동시키고 통신 장비와의 연결 상태를 확인했다. 그 사이 에릭은 포로에게 혹시 남아 있는 이주민이 더 있는지와 연구시설에 대해 심문했다. 대부분의 질문에 침묵하던 포로는 연구시설에 대해서만은 입을 열었다. 그의 말로는 연구 시설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상주하는 연구원이 십 여명이고 주 마다 수송선이 오간다는 것으로 보아 이 행성의 환경 유지 시스템을 관리하기 위한 연구 시설은 아닌 것 같았다. 인원 수도 너무 적었지만 수송선이 주 단위로 오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로를 심문하고 나서 에릭은 1소대와 3소대에게 연구 시설에 침투에 안전을 확보하고 연구 시설 내에 정보원이나 문건의 수색을 명령했다. 그리고 중대 본부에 보르조이나 기타 전투 가능 집단에 대한 정보 수집을 명령하고는 APC에 올라탔다.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은 마을의 연기가 저물어 가는 석양의 노을을 향해 퍼져나가는 것을 뒤로하고 우리는 연구 시설을 향해 출발했다.

 

한 밤의 사냥개

 

APC의 어두운 조명에 비친 부대원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전우들의 죽음과 전투로 지친 그들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에린의 표정을 오히려 더 밝아진 것 같았다. 아니 에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음에도 그들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져서 상대적으로 밝아 보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대원들이 야간용 장비들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도 장비들을 확인했다. 야간 투시경과 각종 센서들이 부착된 HUD (Head Up Display)를 쓰고 수신호 용의 센서를 전투 장갑에 부착하자 에린이 물었다.

 

그걸 쓰면 컨택트 렌즈를 빼야 하지 않아?”

 

그럴 필요 없어. 그런데 수신호는 알고 있나?”

 

대부분은.”

 

그 때, 부대원 한 명이 나와 에린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떠드는 거야!”

 

수송선에서 에린에게 찝적대던 덩치였다. 그가 금방이라도 덤벼들듯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에린이 빈정대며 말했다.

 

넌 뭐가 그렇게 우울해서 안그래도 더러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거지?”

 

!”

 

APC안 부대원들의 차가운 시선이 에린과 내게 향했다. 그런 눈빛을 즐기듯 에린이 싸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출발할 때 봤던 그 멋진 표정들이 전투 같지 않은 전투 한 번에 그렇게 변한 것을 보니 꽤 귀엽단 말야.”

 

한 번만 더 지껄이면 그 입을 뭉개버리겠어.”

 

덩치의 말에 에린이 픽하고 웃었다.

 

발끈하는 것도 귀엽네.”

 

에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덩치가 일어섰다. 좁은 APC안에서 일어선 덩치의 모습에서 풍기는 위압감이 순식간에 내부에 가득차 올랐다. 하지만 그는 일어섰을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것이 그를 노려보는 에릭의 무서운 눈초리 때문이었는지, 에린의 손에 들린 단검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시 앉는 그의 움직임에서 덩치 역시 지쳐있었으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소란스럽게 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잠깐의 폭풍이 지나간 뒤 입을 연 것은 쟈크였다.

 

! 모두 야간 장비 장착하고 통신 상태 다시 점검해!”

 

부대원들이 장비를 다시 점검하자 쟈크가 에릭에게 CPC를 보여주었다. 말 대신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보아 CPC에 수신호로 작성되는 문자 메시지를 통해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CPC를 바라보는 에릭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몰래 지켜보는 동안 에린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중대 본부가 공격당했어.”

 

내가 놀라 에린을 쳐다보자 쟈크가 우리를 발견하고 손의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에릭이 나와 에린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군요.”

 

수송선이 안전하다면 작전을 중지…….”

 

그건 안됩니다! 아니 아직 작전 불능 상태는 아니니까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릭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1소대와 3소대가 연구 시설을 찾아내서 연구원들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그 쪽에서 정보원의 시체를 발견했다니 우리가 도착해 문건을 찾으면 작전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다른 부대원들에게는 알리지 않을 생각입니까?”

 

임무 완수 후에 알려도 늦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많은 수의 부대원을 잃은 상황에서 임무까지 완수하지 못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보르조이의 존재가 그를 몰아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확실한 것은 그의 표정을 보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 CPC에서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신호를 내보내는 것을 확인하고 어떤 내용인지 확인했다. 그것은 회사에 보고하기 위한 설문지 파일의 도착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수신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는데 설문지 파일의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중대 본부가 공격 받은 시간에 도착했는지 보고서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이 손상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CPC의 손상된 파일 복구 루틴이 살려낸 부분은 전체 설문 중 10여개 정도의 질문뿐이었다.

 

중대 본부에서 설치한 안테나를 통해 중계 전송을 통해야만 전송이 가능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연구 시설의 안테나를 조작해 새로 설문지를 전송 받고 보고하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보다 심각한 것은 설문의 내용이었다. 이주민과의 전투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전투상황에 대한 질문과 피해 대처에 대한 내용 그리고 이주민의 상황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회사가 이주민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보고자가 있거나 폭스트롯팀의 모든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또 설문에 에린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문제였다. 그녀가 이주민으로부터 무기를 입수한 것에 대한 것은 빠져 있었으나 전투에 참여했었는지,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 기술하도록 되어 있었다. 에릭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일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나 말고 다른 보고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점과 회사에서 에린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이해하기도, 또한 처리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설문파일의 전문이 수신되지 못했고 상황 상 바로 보고서를 작성해 보낼 수 없너서 잠시 생각을 정리할 틈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CPC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에린을 살피려는 순간, APC가 멈추며 뒤 쪽 해치가 열렸다. 적의 공격이라면 먼저 신호를 보냈을텐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APC가 연막탄을 발사하는 것과 동시에 CPC의 화면이 일그러지며 오작동을 일으켰다. 전자 장비 교란신호 였다.

 

무슨 일이지?”

 

에린이 이렇게 묻자, 쟈크가 APC의 전자 장비와 자신의 CPC를 체크하고는 말했다.

 

보르조이의 전파 방해 같군.”

 

전자장비 교란은 확실했지만 보르조이의 짓이라면 어째서 그들이 전면 공격을 하지 않고 교란신호를 보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선 공격후 교란으로 효과를 극대화 한다는 것이 올바른 순서였다. APC 에서 내린 대원들이 야간 장비를 작동시키고 산개해 주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사이 나와 에린도 내려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정지해 있는 APC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부대원들이 작동하지 않는 전투용 센서들 대신 그나마 영향을 받지 않는 야간 투시경으로 주변을 살피는 사이 나는 이주민 포로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에린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포로의 모습을 찾을 수 없어 에린에게 신호를 보내자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신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급해져 APC와 연막 주변을 살피던 내게 손이 묶인 채 엎드려있는 포로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를 잡기 위해 천천히 기어서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포로가 일어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야간장비 같은 것도 없어서 내가 접근하는 것을 알리 없을텐데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알 수 없었다. 포로를 잡기 위해 내가 움직였다가는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포로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다시 살펴보니 달려가던 방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었다.

 

소리도 없고 빛도 보이지 않는 무기에 의해 공격받아 쓰러진 포로의 몸이 두 번 들썩이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포로를 살려보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대한 아쉬움 보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차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포로가 도망가던 방향에서 10여명 정도의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우리들의 존재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기를 뒤로 맨 채, 산책하듯 평온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들을 발견한 순간 에릭의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격!”

 

그 외침과 동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유탄이 내 뒤 쪽에서 폭발했고 부대원들의 사격이 이어졌다. 소음기를 장착한 소총에서 발사되는 탄환들이 탄막을 형성해 적들을 덮쳤지만 그들은 일체의 피해도 받은 것 같지 않은 움직임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저자들이 보르조이 인가?”

 

그들이 다가오는 모습에서 나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아직도 잡음이 발생하는 야간투시경을 껐다. 그리고는 광학 배율만 적용된 스코프로 그들이 다가오는 방향을 살펴보았다. 야간투시경에서는 흐릿하게나마 형체를 확인할 수 있었던 그들의 모습이 광학 스코프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적외선 홀로그램 입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 쪽에서 바닥으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소리라기 보다는 땅바닥을 타고 내게 전달된 진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몸을 뒤집어 소총을 겨눈 채, 팔꿈치로 기어 뒤쪽으로 물러섰다.

 

단순히 어둠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검디 검어 마치 무한히 검은 것이 만들어 낸 듯한 공간이 거기 서 있었다. 현실과 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서서는 희미한 녹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나를 내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등장에 겁을 먹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녹색의 눈동자가 사라지고 밤하늘의 별들이 다시 나타나더니 어디선가 단말마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비명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야간투시경을 켜자 원숭이처럼 땅에 닿을 듯 긴 팔을 가진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긴 손에 들린 단검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자, 그것은 다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으나 긴 팔과 움직임은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주위를 살피며 물러나는 동안 가까운 곳에서 몇 번의 낮은 총성이 울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재미있는 놈들이야. 왜 백병전이지?”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에린이었다. 그녀는 단검을 거꾸로 쥐고 허리를 숙여 자세를 낮춘 채, 나를 자신의 등 뒤에 세우고 말했다.

 

세 놈인 것 같아.”

 

나는 세린과 등을 맞대고 서서 소총을 전방에 겨누었다. 다른 부대원의 모습을 확인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저쪽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오른손에 소총을, 왼손에 단검을 쥐고 주위를 살피고 있는 에릭이었다. 잠시 후, 누가 쐈는지 공중으로 조명탄이 솟아오르자 야간투시경을 벗은 상태로도 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까 보았던 기괴할 정도로 긴 팔은 적이 입고 있는 전투용 슈트 때문이었다. 양쪽 어깨에서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게 뻗어 있는 기계 팔의 모습은 흡사 긴팔원숭이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그들을 짐승처럼 보이게 한 것은 머리에 쓰고 있는 전투용 고글과 방탄복 때문이었다. 점액처럼 윤기가 흐르는 방탄복은 검은 광택으로 반짝였고, 크고 작은 두 쌍의 센서와 엹은 녹색을 띠는 두 개의 주 렌즈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부대원들은 적을 확인하자 사격을 시작하였지만 방탄복과 기계 팔에 가로막혀 적에게 피해를 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약할 것으로 보이는 센서를 겨냥하여 사격을 계속하는 사이, 등 뒤에서 에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어느새 왔는지 뒤 쪽에 있던 적의 긴 팔을 피하며 에린이 단검을 상대의 겨드랑이 사이에 박아 넣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엉켜있는 모습을 알아채지 못해서, 에린이 공격 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소총으로 머리를 겨누었는데 적이 고개를 떨구는 것을 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잠시 두건을 내린 에린의 얼굴이 조명탄 불빛에 나타났다. 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피가 그녀의 것인지, 적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잔인한 눈이 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에린은 단검을 적의 겨드랑이 사이에서 빼내고 목을 왼팔로 휘감은 뒤 아래로 껐었다. 뼈가 부러지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입가에 피를 손 등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소총으론 힘들어. 정신차리고 겨드랑이나 목 같이 장갑이 약한 곳을 노려!”

 

그녀의 말을 듣고 다른 놈들의 움직임을 보자 동료의 죽음 때문인지 다른 두 명의 움직임에 빈틈이 생겼다. 아무래도 얕보고 있던 상대에게서 예상치 못한 손실이 발생하자 당황한 것 같았다. 그 틈을 노려 에릭이 적을 향해 다가갔다. 공격반경이 넓은 상대의 공격을 피해 고개를 숙인 듯 하더니 어퍼컷을 하듯 찔러 올린 그의 단검에 턱을 관통 당한 적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두 번째 적이 쓰러지자 남아있던 하나가 바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까운 곳에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에릭은 나머지 하나를 찾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적이 자취를 감추자 에릭이 소리쳤다.

 

사상자와 적의 시체를 확인해라.”

 

에릭의 말에 나는 야간투시경을 켜고 에린이 죽인 적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섰다. 그런데 전투용 고글을 벗기고 방탄복의 소재가 무엇인지 확인하다가 시체의 목에서 이상한 상처를 발견했다. 동물의 이빨 자국 같다고 생각하며 상처를 살피는 순간, 두건을 다시 올려 쓴 에린이 다가와 말했다.

 

뭘 그렇게 살펴보고 있는 거지?”

 

아니…….”

 

나는 에린에게 적의 목에서 발견한 이상한 상처에 대해 말하려고 하다가 그만 두었다. 야간투시경을 통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궁금한 듯한 어투로 물었지만 눈에선 묘한 살기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켰지만 겉으론 자신과 상관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양새였다. 그녀가 서툴렀는지 내 직감이 날카롭게 작동해서였는지,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내가 말을 멈춘 순간, 그녀의 눈빛이 다시 변하는 것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여기 이상한 자국이 있어서 말이지. 이빨자국 같은게.”

이런 때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괜히 숨겨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처와 에린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불확실하다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살기 어린 눈이 잠시 고민하게 만들긴 했지만.

 

뭔가에 찔린 거겠지.”

 

거짓말이었다. 분명 그녀는 이 상처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유도 타당하지 않고 연결고리도 없다. 굳이 파고 들어갈 이유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묘한 불안감, 결국엔 큰 댐을 무너뜨리는 작은 틈이 물줄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런가?”

 

난 이내 별 것 아닌 일처럼 말하고는 일어섰다. 틈이 보이고 수상하지만 꼭 선명히 밝혀야 할 일일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덮어두어도 좋을 일, 그 뿐이었다. 댐이 무너지더라도 내가 그 물살에 휩쓸 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을 지도 몰랐다.

 

두 명의 보르조이 대원 시체와 아군 사상자가 옮겨졌다. 짧은 교전 시간 동안 발생한 사상자 수는 생각보다 많았다. 시체가 옮겨지자 에릭이 쟈크를 불러 이동을 서둘렀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의 교전을 피하고 떨어져 있는 다른 소대와 빨리 합류하는 것이 중요했다.

 

마녀가 나타났다.

 

1,3 소대가 찾아냈다는 연구시설에 도착하자 에릭이 부대원들에게 말했다.

 

“1소대와 3소대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보르조이에게 공격 받았을지 모르니 확실히 경계하도록.”

 

그리고는 쟈크에게 임무 완수 후 즉시 철수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고는 대원들과 함께 APC에서 내렸다.

 

도착한 지점에 있는 것은 축구장 크기만한 돔형 구조물이었다. 구조물만 보아서는 무슨 종류의 연구를 진행하는 곳인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입구는 한 군데, 그런데 경비 병력도, 먼저 도착했을 1,3 소대와의 교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돔 형태의 구조물 안으로 들어서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구조물 안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지하에 주 시설이 있고 교전도 지하에서 이루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에릭은 1,3소대에 다시 연락을 취하도록 하고는 엘리베이터 조작을 지시했다. 수직이 아닌 경사 엘리베이터로 네 개의 주 레일을 타고 벽 없이 바닥만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하 터널의 크기가 엘리베이터 바닥 패널보다 컸기 때문에 가장자리로 아래쪽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등도 켜져 있지 않는 터널에선 바람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역시 반응이 없습니다.”

 

…”

 

1,3소대에 연락을 취하던 부대원이 보고하자 에릭이 쟈크와 여섯 명의 대원을 선발해 지하로 내려 보냈다. 지하로 내려가는 대원들은 레이저를 이용해 신호를 전달하는 통신장치를 가지고 내려갔다. 유선 케이블을 연결하는 것이 정석이었으나, 이렇게 지하의 깊이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이나 별 다른 장해물이 없는 곳에서는 레이저 통신을 이용하기도 했다. 물론 신호의 세기를 유지하기 위해 적당한 간격으로 중계기를 설치해야 했다. 중계기는 유탄발사기를 통해 발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주 수신기를 터널 입구에 설치하고 내려가면서 터널 천정에 장치하면 됐다.

 

정찰대가 지하로 내려간 지 20여분이 지나 첫 번째 연락이 왔다.

 

통신 회선 연결을 완료했습니다. 그리고 1,3 소대의 흔적도 찾았습니다.

 

쟈크가 보낸 영상에는 연구시설 입구로 보이는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대원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적의 흔적은?”

 

보르조이는 아니고 연구 시설 경비대 같습니다.”

 

알았다. 남은 대원들을 찾고 문건을 확보하라.”

 

분명히 1,3 소대가 연구원을 심문하고 있다는 연락이 들어와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1,3 소대는 전멸한 모양입니다. 보르조이 놈들이 우리 통신 장치를 이용해 장난을 친 것 같군요.”

 

에릭의 말에 내가 문건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럼 문건에 대한 내용도 …… “

 

아무래도 보르조이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릭은 이렇게 말하고는 다섯 명의 대원을 지상에 남겨 놓고 남은 십 여명의 대원과 막 올라온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말했다.

 

여기 남겠습니까?”

 

에릭의 물음에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에린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여기서 뭐 하려고? 내려가야지!”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중간 중간 터널 천장에 매달린 중계기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지하 최하층에 내려서자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쟈크는 연구 시설로 들어서는 문을 열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역한 냄새가 풍겨 왔다.

 

이게 무슨 냄새지?”

 

에린이 이렇게 말하며 내렸던 두건을 다시 코 위로 올렸다. 에릭과 대원들이 경계자세로 문 안으로 들어섰고 나와 에린이 그 뒤를 따랐다.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악취는 마치 동물의 남새 같았다. 동물 실험을 위한 실험체들의 냄새라고 생각했지만 주위에서 동물의 흔적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었다.

 

문 뒤의 연구시설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기둥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기둥들은 원을 그리며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 직육면체의 건물이 있었다. 내가 뒤 쪽에서 연구 시설의 모습을 살펴보는 사이, 쟈크가 기둥 뒤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에릭에게 손짓했다. 그곳에는 입구에서 발견되지 않은 1,3 소대 대원들의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의 시체들은 총상이 아닌 목뼈가 부러지거나 단검에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 시체들 중에 전투복을 입지 않은 자의 모습을 발견한 쟈크가 상의와 바지를 뒤지더니 조그마한 물체를 찾아내 에릭에게 내밀었다.

 

이건가? 그런데 왜 이걸 그대로 놔뒀지?”

 

시체로 상태로 보았을 때는 보르조이에게 당한 것이 확실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문건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놔 둔 것이었다.

 

에릭은 쟈크로부터 받은 디스크를 CPC 에 집어넣어 전송하다 에린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다 갑자기 에릭이 CPC를 집어넣고 문 쪽에 총을 겨누며 말했다.

 

놈들이 온다.”

 

에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쪽에서 보르조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마도 에릭은 레이저 통신 중계기를 통한 전송이 중지 되는 것을 보고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놈들이 나타나자 대원들이 공격을 시작했고 놈들은 기둥 뒤로 몸을 숨긴 채 우리 쪽으로 접근했다. 적은 모두 다섯 명.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일반적인 무기가 통하지 않는 적들과의 전투라 우세라고 할 수도 없었다. 기둥을 엄폐물 삼아 접근하는 놈들을 소총으로 공격하는 사이, 나는 에린의 모습을 찾았다.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습을 찾을 수 없어 당황하고 있는데, 어느새 뒤로 다가온 한 놈이 내 목을 팔로 감아 들어올렸다. 놈이 나를 방패로 삼아 접근하자, 잠시 총격이 느슨해졌고 그 틈을 타 나머지 놈들이 무리 안으로 뛰어 들었다. 총 대신 단검이 엉킨 싸움이 되자 내 목을 감고 있던 놈이 내 목뼈를 부러뜨리려고 오른손을 머리에 가져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 놈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보니 놈의 뒤에서 에린이 단검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쑤셔 박아 비틀고 있었다.

 

놈이 쓰러지자 에린이 등에 둘러맸던 소총을 바로잡고 막 쟈크를 집어 들던 놈의 무릎을 난사했다. 피해는 입히지 못했으나 주의는 끌 수 있었는지 놈이 고개를 돌린 순간, 쟈크가 놈의 손을 잡고 발로 녀석의 가슴을 차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바로 달려 놈의 허리를 안고 쓰러져 대검으로 놈의 머리를 찔렀다. 두 녀석이 쓰러진 사이, 다른 보르조이 놈들도 제압당해 쓰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네 명뿐 하나는 언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원들이 이전처럼 허둥대지는 않았으나, 아군의 피해도 꽤 심해 겨우 다섯 정도가 살아 있었고 그나마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상황이 정리되자 에릭이 갑자기 에린에게 총을 겨누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에릭의 물음에 에린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건을 본 모양이군.”

 

그래. 문전에 두 가지 내용이 있더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다음엔 네 차례니까.”

 

에릭의 갑작스런 행동에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당황했다. 그런데 에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에릭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와 관련된 문건은 조작된 거야. 다른 문건 만이 정보원이 전달하려던 진짜 물건이야.”

 

그걸 어떻게 믿지?”

 

에릭이 반문하자 에린이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상부에서도 그걸 알고 있어서 이 토마스라는 남자를 내게 붙여놓은 거고. 내가 OTC의 일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문건에는 내가 아직도 OTC의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되어 있겠지?”

 

그녀의 말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는지 에릭도 놀란 표정을 보였다가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보르조이 놈들이 문건을 가져가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거야.”

 

그 놈들이 그런 위험한 방법을 쓸 이유가 없을 텐데!”

 

문건이 전송 되어있을 수 있는 위험 말인가?”

 

그래. 녀석들의 목적 역시 문건의 회수일 테니까.”

 

잘못 알고 있군.”

 

에린의 말에 에릭이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지? 대체 네가 알고 있는 게 뭐냐?”

 

저 놈들도 이 연구시설의 정체를 확인하러 온 거야. OTC가 관할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 행성도 사실 재단이 OTC로 부터 지원 받아 이용하고 있는 곳이니까?”

 

그럼 네 말은 OTC도 이 곳의 연구시설에 대해 모른다는 건가?”

 

아니 알고는 있어. GPC의 정보원이 빼내온 문건이 내가 OTC에 있을 때 봤던 문건일 테니까. 하지만 재단이 관리하는 곳이라 자세한 사항까지는 모르는 거야. GPC에 빠져나가는 것은 더욱 싫고 말이지. 아마 정보원도 그 문건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이 곳에 온 걸꺼야. 확인해 봐. 문건의 내용이 OPP-0434 에 대한 내용일 테니까!”

 

그녀의 말에 에릭이 쟈크에게 CPC를 건넸다. 잠시 후 문건을 확인한 쟈크가 그녀의 말이 맞는다는 듯 에릭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네 정체에 대해 답하지 않았어. 어떻게 우리와 합류하게 됐고 네 목적이 뭔지도 밝혀라.”

 

! OTC에서 GPC로 이적한 정보원 이랄까. 보르조이에서 잠시 CQC(Close Quarter Combat)를 가르쳤던 적도 있으니 정보원이란 말은 좀 맞지 않겠군. 저 놈들은 아마 최초 공격에서 내 존재를 확인하고 문건을 조작하는 방법을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이 팀에 합류하게 된 건은 사실 내가 원해서였어. OTC에 있을 때 그 문건을 살펴보고 궁금해 했었는데 기회가 생기더라고. GPC에서야 아직까진 정체가 확인되지 않은 뒤가 수상한 여자니 꼬리까지 붙였을 테고.”

 

에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폭스트롯 팀의 감찰이 아닌 에린의 감시가 주목적이었다니…… 확실히 마지막에 받은 설문의 내용을 보면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에린의 말이 끝나자 에릭이 아래로 떨구었던 총구를 다시 쳐들며 말했다.

 

보르조이가 널 알고 있고, 너를 죽이기 위해 가짜 문건을 심어놓았다는 거군.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믿고 싶지 않아. 그냥 여기서 너와 저 감찰관을 죽이고 문건과 함께 돌아가면 끝이야. 간단히 해결되지. 복잡해질 필요가 없어.”

 

에릭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방아쇠를 당겼다. 동시에 천장의 조명들이 보이는 것 같더니 복부에 뜨거운 통증을 느끼며 뒤로 쓰러졌다. 희미해지는 의식 사이로 마지막에 보인 것은 날 끌어당기는 에린의 얼굴이었다.

 

쟈크의 충고는 거짓이 아니었다. 감찰관을 싫어한다더니 지금껏 말랑하게 편의를 봐주는 것 같더니 결국 총을 쏴대다니. 조금이지만 보르조이란 놈들과 상대하면서 전우애 비슷한 것도 느꼈는데…… 아내가 내 표정을 살펴보더니 딸아이를 부른다. 아이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더니 상처가 당긴다. 몸을 관통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통증에 그제서야, 난 눈치챘다. 아내와 아이가 나오다니 꿈이었다. 깨어나면 금새 잊혀져 버릴 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에린이 내 배의 상처를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대로 죽어 버릴 줄 알았더니 정신 차렸군.”

 

~.”

 

대답 대신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근거리에서의 총격으로 방탄 슈트도 막지 못한 모양이었다.

 

! 정신 차렸으니 이젠 직접 막아. 난 밖에 있는 녀석들을 상대해야 하니까.”

 

에린이 이렇게 말하고는 라이플을 들고 일어섰다. CPC를 힘겹게 꺼내 화면을 살펴 보았다. 신체 손상 정도와 바이탈 사인이 점멸하는 CPC를 바라보며 왼쪽 허리춤에서 마약성 진통제 주입기를 꺼내 허벅지에 찌르고는 벽 쪽에 등을 기대 앉았다.

 

세발 중 두발은 관통했고 한발이 몸 안에서 쪼개져 왼쪽 신장을 망가뜨린 상태로 CPC에 출력되고 있었다. 출혈량이 증가하고 있어 바이탈 사인이 점멸하는 간격이 점차 빨라졌다.

 

약효가 들기 시작해 통증이 많이 가지자, 다시 진통제를 맞고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 사이 에린은 연구실 창으로 밖을 살피고 있었다.

 

왜 날 끌고 왔지? 혼자 도망치는 게 나았을 텐데.”

 

내 물음에 에린이 등 뒤에서 수통을 꺼내 던지며 말했다.

 

살아 돌아가면 내 증인이 필요하지 않겠어? 내가 공격한 게 아니라 공격 당해 반격한 거라는 사실을……”

 

받아 든 수통의 물을 들이키자 타 들어가던 목이 좀 괜찮아지는 듯싶다가 이내 구역질이 났다. 그 때, 에린이 고개를 숙이고 소총만 창으로 내밀고는 위협사격을 가했다. 아무래도 에릭과 남은 대원들이 접근하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이 곳으로 들어온 거야? 도망칠 곳도 없이 완전히 독 안에 든 쥐 신세군.”

 

일단은 피하고 볼 생각이었지. 보르조이 한 녀석이 남아 있으니 우리가 숨어 있는 사이 저 놈들과 붙으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승산이 생길 것 같아서.”

 

에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으로 총탄이 날아들었다. 에린은 접근하는 대원들을 향해 위협사격을 계속하다 내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살고 싶지?”

 

뜬금없는 질문에 내가 눈을 찡그리며 바라보자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잠시 내 갈증을 좀 풀어줘야겠어.”

 

그녀의 갈증이 무슨 뜻인지 나는 바로 알아챘다. 시체에서 발견한 상처, 그녀의 입가에 묻어 있던 피, 그리고 갈증. 애써 덮어두려던 일을 그녀가 다시 상기 시켰다. 그것도 거부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 의도와 관계 없이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 왔다. 그리고 내 목에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한 순간의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눈이 흐려진다. 모든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창을 깨고 날아드는 연막탄이 꼬리를 남기며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에린이 붉게 물든 입술을 핥으며 내게서 멀어져 연기 속으로 사라진다. 눈을 감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어째서인지 부릅뜬 채 연기 속을 노려보았다.

 

에린의 모습이 연기 속에 잠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단검에서 피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비명과 총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잠시 보르조이의 모습이 보였다. 남은 한 녀석이 연막탄 안으로 뛰어든 모양이었다. 누가 살아 남아야 내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막탄의 연기가 서서히 가라앉고 그 속에서 보르조이의 목을 부러뜨리고 서 있는 에린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 뒤로 에릭의 모습도 보였다.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들어 에릭을 겨누면서 나는 뭔가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쏘아야 할 것이 에릭이 아닌 에린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확실히 믿고 있진 않지만 내 몸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나선 계단 밑으로 한 없이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이 내 몸을 감싼다. 께름칙했던 이유들, 그리고 내 본능이 알아챈 것들이 이제 두려움이 된다. 짦은 고민과 혼돈 속에 난 겨우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에린의 뺨을 스치고 날아가 에릭의 어깨에 맞았다. 그리고 에린의 손이 에릭의 목을 쳐 그를 제압하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는 살아 남아 있던 대원들과 보르조이가 쓰러져 있었고 에린만이 꼿꼿이 서서 뺨에서 흐르는 피를 닦고 있었다.

 

“덕분에 살았어.

 

그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귓속을 울린다. 내가 누구를 겨누었던 것일까. 짧은 고민 사이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출혈이 많아서 뇌 혈류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이제 목소리도 멀어진다. 내게 다가오는 에린의 얼굴이 아내의 모습으로 보였다가, 딸 아이의 동화책에서 본 적이 있는 마녀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대관식 전야

 

멍한 정신으로 다시 눈을 뜬다. 마약성 진통제의 영향 때문인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오른팔에는 피가 수혈되고 있었고 복부의 상처도 치료가 끝난 상태였다. 억지로 일어나려는 내 팔을 누군가 잡아 당겼다. 에릭이었다.

 

움직이지 말고 더 누워있는 게 나을 거야.”

 

총으로 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걱정해 주는 듯한 모습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표정을 알아챘는지 에릭도 손을 내려 놓았다. 에릭 너머로 쟈크와 다른 마로지 대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전투로 어지러웠던 공간은 어느새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연구 시설의 모니터를 바라보는 에린 너머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내 물음에 에린이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에릭을 흘깃 보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왜 저들이 살아있어서 기분 나빠? 하지만 난 너희들이 될수록 많이 살아 있는 편이 좋으니까.”

 

네가 빨아 먹을 것들이 부족할까 봐?”

 

그런 이유도 있겠지. 근데 내가 흡혈귀나 뭐 괴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린이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기 띤 얼굴로 말했다.

 

사실 나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몰라. 냉동 캡슐에서 깨어나면서부터의 기억뿐이고 그 뒤로는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 행성을 이용해 볼까 하는거고.”

 

저 자들은 또 누구지?”

 

응 여기 연구원들이야. 보르조이 녀석들이 가둬두었던 것을 풀어줬더니 바로 내 쪽으로 돌아서더군.”

 

그 때 연구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에린에게서 위성 레이져의 좌표 측정기를 받아서 사라졌다.

 

목적이 뭐지? 임무는 끝났으니 여기서 이럴 필요 없이 돌아가야 하잖아.”

 

! 이 행성이 어떤 곳인지 너는 아직 모르지!”

 

에린이 이렇게 말하고는 3차원 홀로그램 모니터를 만지작거리더니 행성의 모습이 담긴 3차원 모델을 출력시켰다. 지하로 무수히 많은 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처음에는 그것이 이 행성의 모습인지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위성 레이저의 좌표 측정기를 들고 갔던 연구원을 손짓해 부르더니 설명을 부탁했다.

 

. 아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이 행성은 수명 30년의 유기 연산 장치 입니다. 쉽게 말해 컴퓨터라고 할 수 있는데 기존의 컴퓨터와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기 연산 장치라니? 그게 뭡니까?”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컴퓨터죠. 실제로 살아 있는 겁니다.”

 

살아 있다는 말에 놀라 남자를 바라보자 연구원이 총격으로 부서진 창을 손으로 가리켰다. 밖에 세워져 있던 기둥들이 천천히 안전장치로 보이는 것을 풀더니 기둥 옆에서 푸른 빛의 수조가 열매처럼 솟아 나왔다. 기둥 하나에 수 백, 아니 수천 개의 수조가 매달려 있는 모습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 수조 하나에는 뇌가 들어있었는데, 그 크기나 모양이 흡사 인간의 뇌와 비슷했다.

이게 작동 중인 모습입니다. 지금까지는 수면 시간이라 잠을 자고 있었죠. 이 행성에는 이 규모의 단말들이 셀 수 없이 많이 퍼져있습니다. 저 뇌들을 유전자 조작으로 돼지를 이용해 만들어 낸 인간의 뇌 입니다. 생물학적으론 말이죠. 뇌를 제거한 돼지들을 분해해 양분으로 주입하고 적당한 자극 물질을 투여해서 통제하고 신경 전달 물질로 가상의 집단의식을 유도하면 수 많은 가능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남자의 말투에 언뜻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행성 전체에 저런 게 퍼져 있다는 말이요? 대체 무슨 목적으로?”

 

목적이라뇨? 모르시겠습니까? 완성되어 원래의 생각대로만 움직인다면 이 행성은 어떤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 행성만으로 우리가 풀지 못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진화하는 컴퓨터를 상상해 보십시오. 기아를 해결할 새로운 물질의 합성, 시뮬레이션을 통한 전쟁 예측, 그 외에도 기존에 불가능했던 것들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근데 왜 30년이 최대 작동 한계라는 거지?”

 

중간에 에린이 끼어들었다.

 

. 중간에 죽어가는 뇌들을 대체해서 새로운 뇌들로 진행이 되고 있지만 그 수명에 대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말을 끊었다가 계속했다.

 

저 뇌들을 통제할 것이 필요합니다. 원래는 컨트롤을 컴퓨터를 이용해 하려고 했으나 그것으론 통제가 힘들었습니다. 또 인간의 유전자 때문인지 저 각자의 뇌들이 공격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휴지기에 제멋대로 다른 뇌들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다른 뇌를 향해 공포와 증오를 보내는 거지요. 그것이 원래의 수명보다 빨리 저 뇌들을 죽게 합니다.”

 

. 고마워요.”

 

에린이 연구원을 보내고 나자 내가 물었다.

 

그래. 이 거대한 쓰레기가 어째서 네가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된다는 거지?”

 

내 물음에 에린이 의자에 앉아 조종실 탁자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말했다.

 

난 이런 것을 원했어. 다른 자들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 권력을 의미한다고. 아마 이걸 만들었던 재단의 놈들도 그걸 노렸을 테고. 그런데 이렇게 허술하게 그걸 내놓고 있다고. 이걸 손에 넣으면…… 생각만해도 즐겁지 않아?”

 

네 흥을 깨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허술한 이유를 모르겠어? 재단은 이 행성을 폐기한 거야. 원하는 성과가 없으니까. 죽은 정보원은 자기가 뭐 대단한 비밀이라도 캐낸 줄 알았겠지만. 너라면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을 지키는 데 이렇게 허술하게 저 정도의 인원만으로 유지하고 있겠어?”

 

내 말에 순간 에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눈은 어느 때 보다 반짝였다.

 

그런가? 그런데 난 벌써 결정했어. 내가 갖기로.”

 

에린은 이렇게 말하고는 미소지었다.

 

벌써 GPC 에는 내 가짜 신상 정보를 문건인척 전송했고, 궤도의 수송선은 아까 내가 건넨 위성 레이저 무기로 파괴할 거거든. 마로지는 전멸인 거지.”

 

“GPC는 그렇다 쳐도 OTC는 보르조이가 당한 것을 알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그거야 GPC OTC 사이의 문제지 여기엔 신경을 쓰지 않을 걸.”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그녀 멋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연구원 들도 에릭도 그녀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들 모두 최면에라도 걸린 듯 고분고분 에린의 명령을 따르고만 있었다.

 

거래를 했어. 에릭과 저 들과는 말이야. 수명이 30년인 뇌에 네가 흡혈귀라고 생각하는 내 유전자를 이식하면 어떻게 될 지 저들도 궁금해 하더라고. 그리고 못 들었어. 저 뇌들을 통제할 게 필요하다잖아. 여왕이 필요한 거라고!”

 

에린이 이렇게 말하고 웃는 동안 난 내가 그 때 누굴 겨누었었는지 기억해냈다. 반사적으로 권총 홀더에 손을 가져간 내 모습을 바라보며 에린이 웃고 있었다.

 

자 이제 너와 거래할 차례군. 다른 친구들하고는 적당한 거래를 했지만 아쉽게도 너와는 적당한 거래 거리가 없어서 몇 번이나 살펴줬는데도 결국 목숨으로 거래할 수 밖에 없겠군.”

 

빈 권총 홀더에서 사라진 내 권총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날 바라보는 동안 난 다시 바닥이 꺼지며 내 몸이 깊은 구덩이로 떨어지는 느낌에 작게 몸을 떨었다.

 

-끝-

 

단편 연작 중 한 편이라 단편으로서의 완결성도 떨어지고 단점도 많은 글이지만 단평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싶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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