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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작

  • 작성일 2011-02-01
  • 조회수 439

"아, 미치겠네. 소재를 또 어떻게 찾아내라는 거야."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막연함이 깃든 회색빛 한숨에도 하늘은 변함없이 푸르렀고 들판도 계속해서 녹광색으로 빛났다. 그림쟁이들은 도저히 속을 모르겠다니까, 왜 이렇게 이상한 걸 붙잡고 늘어지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들판에 벌러덩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새파랗다…저 얄미울 만큼 번쩍거리는 태양만 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잠깐, 하늘? 그렇지!
나는 벌떡 일어나서 들판의 한복판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아르빈은 그곳에서 짤막한 나무의자에 앉은 채 붓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저건…
"왔나."
"네. 이야아, 아름다운 들판…이라고 하기는 좀 그러네요?"
"색반전 이라는 거다. 대상이 가진 색과 반대되는 색으로 그림을 칠하는 거지."
"성과는 있으세요?"
아르빈은 방금 전까지 그리고 있던 물감도 안 마른 그림을 북북 찢은 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예. 충분히 설명이 됐어요."
"용건은?"
거 하는 말 하고는. 꼭 '할 말만 하고 꺼져라'라고 하는 것처럼 들리잖아.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겉으로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어쨌거나 지은 죄가 있으니 말이야.
"하늘. 어때요? 언제나 존재하고, 무엇보다도 높아요. 때로는 맑지만, 때로는 흐려요. 기쁨을 주지만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지요. 내생각에 '완성된 그림'은 하늘을 담아야 할 것 같은데."
좋아, 이번에야 말로!
내 말을 들은 아르빈은 앉은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노려보았다. 저러면 눈이 아플걸. 경험자의 말이니까 신뢰해도 좋아. 하지만 아르빈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드높은 창공을 쳐다보았다. 대상에 초점이 잡히지도 않는 상황에서 저렇게 무언가를 쏘아보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결국 아르빈은 고개를 고정한 채 한참동안 하늘을 노려본 후에야-나는 괜스레 애꿎은 하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개를 다시 내렸다. 우와, 십초만 바라봐도 눈 아프던데. 저건 어떻게 하는 거지? 아르빈은 자신이 그린 괴상한 들판의 잔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붓을 쥔지도 이십년이 지났다."
"네?"
"내가 이십 년 동안 하늘 한번 그려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나."
"네?"
"가라."
"…네."
결국 나는 이번에도 힘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르빈으로부터 좀 떨어져 들판에 다시 드러눕자 나른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아아, 이대로 화석이 되어버리는 것도 괜찮은 경험일 것 같아…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다시금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늘이 뭐가 어쩌고 저째? 내가 어쩌다가 이런 헛소리나 하게 된 거야?
 
 
 
 
 
아르빈을 처음 만난 건 오늘로부터 삼일 전의 일이었다.
나스와 대판 싸운 채 볼이 퉁퉁 부어있던 나는-지금 생각해도 열 받는다. 에이, 망할 계집애 같으니라고!―고개를 푹 숙인 채 보이는 돌멩이마다 힘껏 걷어차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획기적인 귀가법을 고안해내고 있었다.
퍽! 음, 저건 돌이 흙 위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로군. 딱! 저건 돌이 돌과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군. 깨갱! 저건 한스네 개가 돌에 얻어맞은 소리고, 찌지직! 저건…?
나는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돌과 상봉을 이루었을 때 몹시 비정상적인 소리를 낼 수 있을만한 물체를 찾아보았다. 그 결과 나는 들판에서 붓을 든 채 찢어진 캔버스를 우울하게 바라보고 있는 화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생각해보니 삼일 전에 화가 한명이 우리 마을에 왔었댔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숨이 가빠왔다. 좋아, 시드. 침착하게 생각하자. 저 사람이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너무 세게 놀려서 찢어진 것일지도 몰라. 내가 찬 돌멩이와는 하등 상관이 없을 거야…캔버스의 아래에는 물감이 묻은 돌멩이가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젠장! 그렇다면 다음 방법은 내가 하지 않은 것 마냥 날 발견 못했을 때 도망쳤다가 잠시 후에 지나가면서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뻔뻔하게 물어보는 거다…화가는 어느새 나와 돌멩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남은 방법은 두 가지, 살인멸구와 용서 빌기. 나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화가에게 다가갔고 화가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 검을 발견했다.
나는 잽싸게 무릎을 꿇으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백번 생각해 보아도 제 잘못입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게 비굴해 보인다고?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으윽.
화가는 조용히 날 응시하며-다행히 검을 뽑아들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말했다.
"미안해할 것 없다. 어차피 실패작을 그리고 있었으니, 오히려 찢는 수고를 덜어주니 고맙다고 해야겠군."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실패작을 그리고 있었다고요?"
"그려봐야 나오는 건 실패작밖에 없으니 실패작을 그리는 것 아닌가."
뭔가 말이 이상한 것 같은데. 나는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내가 보기엔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세밀한 묘사에, 개성 있는 그림체, 적당한 농담, 튄곳 하나 없는 스케치…가운데에 있는 구멍만 없었다면 훌륭한 그림이었겠어.
밀려오는 죄책감에 허우적대며 말했다.
"제가 보기엔 아주 잘 그리셨는데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럴 것 같나?"
"네?"
"누가 보던지 간에, 굶주린 거지던, 이 나라의 국왕이던, 네가 아는 가장 감수성이 낮은 자도 잘 그렸다고 생각할 것 같나?"
순식간에 나스가 떠올랐다. 아이고, 고 앙칼진 계집애. 무릎이 저릿저릿한 것이 다시금 느껴진다.
"어…아마 그러진 않겠군요."
"그럼 실패작이다."
흑백논리의 추종자였군. 그러니까 누구나 보고 감탄할 만한 그림이 아니면 실패작이라는 건가.
"그래도 제가 보기엔 훌륭한 그림이에요. 뭔가 보상할 만한 게 없을까요?"
으악,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정신을 놨나? 화가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나. 저건 실패작이다."
"실패작도 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정말 내가 미쳤나보다. 괜찮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벌을 주라고 하고 있는 꼴이라니.
"네가 내 그림에 값을 매기겠다는 건가."
화가가 하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해선 안 될 말을 한 건가? 하긴 열여섯 살짜리 어린애가 그런 말이나 하고 앉아있으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어.
"이름이 뭐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 생각…네? 아, 시드 입니다. 시드 폭스레인이요."
다행히 빈정이 상하거나 하진 않은 것 같다.
"아르빈이다.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나는 완성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네? 아까 그 그림을 마저 그리고 싶으시단 건가요?"
아르빈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의 완성이 아니라… 완벽한 그림이라 하는 게 좋겠군. 아까 말한 것처럼 가장 비천한 자도, 가장 고귀한 자도, 가장 슬픈 사람도, 가장 기쁜 사람도 내 그림을 봤을 때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말이다."
"저보고 그런 그림을 대신 그려달라는 말씀인가요?"
"나는 몽상가가 아니다."
말 참 예쁘게 하십니다. 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완벽한 그림이라. 그런 그림이 있다면 얼마정도 할까? 천만 셀? 어떤 사람이던 간에 언제든지 보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이라니, 굉장한 그림이겠어.
아르빈은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여기 머무는 동안 완성된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을만한 것을 찾아와서 내게 가져와라. 그러면 널 용서해 주겠다."
"못 찾아내면요?"
"널 용서하지 않고 떠나겠다."
어, 그거 나쁜 거겠지? 하긴 평생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 생기는 거니까 썩 기분이 좋진 않겠지.
"걱정 마세요…라고는 못 하겠지만, 노력은 해볼게요. 언제 떠나시죠?"
"나흘 뒤."
"네, 나흘 뒤까지 찾아볼게요!"
 
 
 
 
 
 
그리고 사흘째가 되었다. 나는 일하던 서점에 사흘간 휴가를 내고(지금까지 업무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사흘째 손님이 없었거든) 소재를 찾아 나섰다. 그동안 내가 별의별 근거를 들어 아르빈에게 가져간 소재는 끝없이 많다. 땅, 벌레, 나무문, 술집, 칼, 한스네 강아지, 하늘 등등.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상당히 쓸데없는 소재만 가져다주기는 했군. 미안하게 됐어요, 아르빈. 그때 내 눈에 '적'이 포착되었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에 붉은 눈. 얇게 보이는 다리지만 실체는 누구보다도 강력히 로우킥을 날릴 줄 아는 군 단급의 전투력을 가진 소녀.
"나스?"
"와아아, 시드. 안녕?"
햇빛을 등에 이고 활짝 웃으며 내게 말을 거는 그녀는 몹시 귀여웠다. 물론 수틀리면 나를 쥐어 팬다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젠장, 아직도 사흘 전에 채인 무릎이 욱신거려! 자연스럽게 말이 퉁명스레 나왔다.
"용건이 뭐야."
맙소사, 아르빈한테 옮았군.
"용건? 그런 건 없는데. 아르빈씨하고는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용건 있잖아…그보다 너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구나."
나스는 마을에 가끔 오시는 손님들에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가르쳐주라고 떼를 쓴다. 손님들 역시 졸라대는 꼬맹이가 퍽 귀여웠는지 반쯤 장난삼아 나스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쳐주곤 한다. 덕분에 나스는 권법과 각법 등의 전투기술-모험가들이 가진 게 몸뚱아리쓰는 법밖에 더 있겠나―등을 익히며 점차 최종병기화 되어가고 있는 참이다. 그 모험가들은 덕분에 마을의 가녀린 소년이 샌드백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를 거다. 일을 저질렀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 와중에 아르빈이 나타나자 나스는 그저께 나를 끌고 아르빈에게 가서 '그림을 가르쳐 주세요오!'라고 졸라댔다. 물론 돌아온 대답은 '싫다. 내가 왜 그래야 하나.'라는 쌀쌀맞은 대답뿐이었다. 역시 포기하지 않은 거였군. 어디보자, 이 계집애를 곯려먹을 방법이 없을까? 아하!
"사실 너한테 그림을 가르쳐주라고 말을 했었어."
"화아!"
나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때, 고맙지?
"그랬더니 누가 봐도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소재를 알려주면 널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라. 생각나는 거 없어?"
"으음…"
나스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잠시 후 빠르게 말했다.
"모르겠는데."
으이그, 그러면 그렇지.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니. 그때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있던 나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서점이야."
"아니, 난 시드 폭스레인이야. 그런 괴상한 이름을 가지고 있진 않아."
"너 말고, 서점에 가면 카일 아저씨가 모르는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서점이라?"
저 계집애가 왠일로 쓸모가 있을 때가 있네? 서점에 일하는 나도 생각해내지 못한 걸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나서 서점을 향해 걸어 나갔다.
"혹시 아르빈 씨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나한테 꼬옥 말해줘야해애?"
나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 순진한 계집애야. 아르빈 씨는 내일 떠나거든? 나는 빙긋이 웃음을 베어 물었다.
 
 
 
 
 
우리 마을, 그러니까 모스빌에 있는 유일한 서점인 '카일 서점'은 사실… 카일 씨의 서점이다. 뭘 기대한 거야?
문을 열고 서점에 들어가자 언제나처럼 카일 씨는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카일 아저씨."
"시드구나, 내일까지 휴가 아니었나?"
"손님도 안 오는데 휴가가 어디 있어요. 저, 카일. 혹시 그림을 완성하는 방법을 아세요?"
"붓을 잡아. 내키는 대로 휘갈겨.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명작이라고 사람들에게 사기를 쳐. 끝."
"…그런 거 말고요."
나는 자초지종을 카일 에게 이야기했다. 카일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빙그레 웃었다.
"낭만주의자로군. 그 아르빈이라는 화가는."
"네? 별로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던데요."
"그런 낭만이 아니라…누구에게나 공평한 이상을 원한다는 것 아닌가. 그치들이 좋아할만한 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지. 스완 송(Swan song)이라는 말을 아는가?"
스완 송. 백조의 노래라. 아름다운 작품 같은걸 이야기 하는 건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요."
"백조는 죽기 직전에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고 하지."
카일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조용히 서점을 나왔다.
들판에서는 여전히 아르빈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뭔가."
내가 다가가자 아르빈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거 참, 고개한번 돌리는 게 그렇게 힘드십니까? 사람 뒤통수 보고 이야기하는 게 썩 권장할만한 경험이 못 되는가 알아요? 나는 아르빈의 머리에 대고 몇 번 투정을 해댄 후 입을 열었다.
"스완 송이라는 게 있대요. 백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건데, 이 그림이 생애 마지막 그림이라는 느낌으로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때요?"
아르빈은 한참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마치 그 자리에서 수천 년 동안 뿌리박혀 있던 나무와 같이 고정되어 있었다. 아르빈이, 아니 나무가 말했다.
"그림을 그리고 죽는다는, 그런 느낌으로 그림을 그리라는 건가."
"말하자면 그런 거겠죠."
"소재가 아니군."
"네?"
아뿔싸, 그러고 보니 이건 소재가 아니잖아! 이런, 실수했다. 아르빈이 '이건 무효다.'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겠어. 내가 안절부절하는 사이 아르빈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소재는 내가 구하도록 하지. 수고했다."
아르빈은 그림도구들을 들고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해가 하늘에 새빨간 물감을 뿌리는 시간이었다.
 
 
 
 
 
 
"자아, 완벽해. 어느새 새나라의 어린이들은 잠을 잘 시간이군."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깨끗이 정리된 거실을 바라보았다.
"우후후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먼지들에게 패배하지 않는단 말이야. 알아먹겠냐. 이 빌어먹을 미생물 자식들아!"
이야아아, 열심히 일을 했더니 피곤하구만! 소파에 몸을 푹 파묻었다. 아아, 깨끗한 냄새다! 푹신함이 이십 퍼센트쯤 증가한 듯 한 기분이야! 그대로 꿈나라로 직행하기 직전 나는 다시 일어났다. 물론 딱히 유혹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지만, 누구든지 누가 자기네집 문을 두들기고 있는 상황에선 쾌적한 수면에 애로사항이 꽃피기 마련이다. 문을 열자 이렌 아주머니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어, 저, 시드?"
"이렌 아주머니?"
"저기, 노파심에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뭔가 하기로 한 게 있을 수도 있고…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혹시 그림에 밧줄이 필요할 수도 있니?"
"…네?"
아니, 그림이 무슨 퍼포먼스 아트라도 되나?
"그럴 리가요. 그런데 갑자기 밧줄은 무슨?"
"좀 전에 우리 집에, 그…누구더라?"
"아르빈 씨요."
"그래, 아르빈 씨. 그분이 오셔서 밧줄을 사가셨거든. 쓸 일이 있으신가 싶으셔서 내드리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밧줄을 쓸 데는 없는 것 같고, 그래서 설마 싶어서 네가 알까 해서…"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요. 의외로 아르빈 씨에겐 그런 쪽의 취미가 있었던 거군요."
"…시드!"
어디보자, 아르빈 씨가 무슨 일로 밧줄을 사갔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원체 모르겠는 사람이라 짐작도 안 가네. 천천히 생각해보자. 내가 아르빈 씨한테 스완송이란걸 이야기 해줬었지.
스완 송. 백조의 노래. 백조가 죽기 전에 부르는 최후의 노래. 그 노래는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생명을 살라 부르는 노래. 생명. 백조. 노래. 최후? 죽음. 죽음? 노래. 그림.
최후. 그림. 죽음. 그리고 밧줄.
"오, 이런, 맙소사!"
갑자기 비명 같은 외침을 치자 깜짝 놀란 이렌 아주머니를 거칠게 밀어내고아르빈의 집 쪽으로 달려 나갔다.
"시드! 어디 가는 거야!"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나지만 깨끗이 무시한다. 미친 예술 쟁이 같으니라고. 그림하나 그리고 죽을 생각을 한단 말이야? 죽지 않으면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거야? 오, 아르빈. 그건 아니잖아요!
달리고 또 달린다. 내가 이렇게 빠르게 달릴 수 있었던가? 다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내 다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 갑자기 참을 수 없을 만큼 웃음이 나왔다. 나는 웃으면서 계속해서 들판을 질주했다.
"오, 맙소사. 아르빈. 당신 틀렸어요! 당신이 실패작을 그리고 있다고 했었잖아요!"
계속해서 달린다. 숨이 차는걸 느끼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는다.
"당신이 실패작을 그린다고 했어요. 마치 그리기도 전에 실패작이 될 것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면 당신은 그림을 그리면 안 되잖아요!"
무언가에 걸려 땅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다. 아마 돌뿌리인것 같군. 돌멩이를 그렇게 차댄 복수를 이렇게 당했어. 볼썽사납게 넘어져 있었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다시 일어서 달렸다.
"그림을 그리면 안 되잖아요! 성공한 그림이 아니면 그리면 안 되잖아요! 하지만 당신이 성공한 그림을 그리려면 그림을 계속해서 그려야 해요! 당신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졌잖아! 이런 엉터리가 또 어디 있어!"
아르빈이 묵고 있는 집의 앞에서 멈춰 섰다. 떨리는 손으로 회색빛 벽에 달려있는 갈색 나무문을 밀었다. 문은 열려있었다.
끼이이익-
기름이 제대로 쳐져있지 않은 나무문은 기분 나쁜 소리를 낸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는 밧줄이 천정 위에 매달려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밧줄…그 밧줄은…
아르빈이 그리는 그림의 모델이 되어 있었다.
"…에?"
"뭔가."
아르빈은 오른손에 붓을 쥐고 목을 매달 수 있게 걸려있는 밧줄을 그리고 있었다.
"아니, 저는 당신이…그림을 그리고 죽을 줄 알고…"
"소재는 내가 스스로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
"…"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그때 아르빈의 손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붓을 떨어트렸다.
"어, 괜찮아요…?"
그제야 나는 아르빈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아르빈은 왼손을 축 늘어뜨린 채 오른손으로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왼손…그 왼손에서는 계속해서 무엇인가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손목을 그은 거야?
"다, 당신…어째서 그런 짓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죽는다는 느낌으로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그림이 만들어 질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완성이다. 완성되어 가는 자는 완성된 그림을 그릴 수 있겠지…나가주겠나.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군."
그래서 그림을 그리려고 죽겠다고? 완성되겠다고?
"다…당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아르빈이 나를 쳐다보았다. 왼손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죽음은 완성이야. 분명히 완성이야. 그…그렇지만, 그건 당신의 완성이 아니야. 당신의 몸뚱이의 완성이야! 당신의 완성이 아니야!"
"내 몸의 완성과 나의 완성은 무엇이 다른가."
달라, 끔찍할 정도로 달라. 아니,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어. 애초에 같다고 할 수가 없어.
"당신이 죽어. 그래, 당신이 죽는다고 쳐. 그게 당신의 완성인가? 당신은 죽으려고 태어난 거야?"
"하지만 내가 죽으면서 그림을 완성한다면? 그렇다면 내 몸도, 내 자신도 완성되는 것 아닌가."
"그래…그럴 수도 있어. 당신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어. 완성을 바치면 완성이 나올 거야…"
숨이 가빠왔다. 눈앞이 계속해서 뿌옇게 흐려졌다.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렇다면 그림은 완성되겠지. 당신도 완성될 거야. 당신의 몸도 완성될 테고. 그대로 모든 게 끝나겠지. 하지만…하지만 나는 당신이 계속해서 실패작을 그렸으면 좋겠어."
"실패작을 그리라고 했나."
아르빈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울렸다. 그래, 실패작. 실패작은 완성하지 못한 작품.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
"완성된 작품은 분명히 아름다울거에요. 누구나 보고 감탄하고, 언제 그것을 보더라도 감동하겠지. 하지만 완성된 그림은 그 이상은 없을거에요."
"무슨 말이지."
"실패작이라도 아름답지 않나요?"
아르빈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벽에 내 목소리가 반사되어서 온 세상에 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어린 아이들이 아름답지 않나요? 그들의 완성되지 못함이 아름답지 않아요? 실패작은 발전해 나가요. 완성된 작품은 발전하지 못해요. 실패작은 바꿔 말하면 발전할 여지가 남은 작품이에요. 아름답지 않아요?"
침묵 또한 울려 퍼졌다. 무음(無音)은 사방에 퍼져나갔다.
"내 완성된 그림을 좋아하겠지만 내가 그림을 완성하는 건 싫어할 거라는 말인가."
"맞아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거실을 뒤져 붕대를 찾아냈다. 붕대를 아르빈의 왼쪽 손목에 강하게 묶자 붕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당신한테는 이것도 물감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어. 몸을 재료로 삼아 그림을 그리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나는 붕대를 다 묶은 뒤 계속해서 말했다.
"좋아요. 이렇게 생각해보죠. 나는 당신의 완성된 그림을 좋아할 거예요. 하지만 그걸 그리면 당신은 죽어요. 나는 당신의 실패작도 좋아할 거예요. 실패작을 그리면 당신은 살아요. 둘 중 하나를 고르자면 후자가 이득이군요."
아르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예술을 그따위 허점투성이의 논리로 이해하려하나. 머저리로군."
"머저리요? 그거 좋죠. 아는 게 없으니 더 쉽게 발전할 수 있겠죠."
아르빈이 피식 웃었다. 나도 덩달아 씩 웃고 말았다. 그거 알아? 나 당신이 웃는 거 지금 처음 봤어.
 
 
 
 
 
 
 
"떠날거에요?"
"그래."
아르빈은 그림도구들을 담은 가방을 오른손에 들고 서 있었다. 내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왼손은 제대로 치료했지만-의사가 말하길, 가로로 베어서 다행이란다. 사실 손목을 벨 때는 세로로 그어야 하는 거라고 하셨다. 그런데 의사가 이런 거 말해줘도 되나?―당분간은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바로 여행을 떠나버리겠다니, 섭섭하네.
"시드."
"우와,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요?"
"내가 살던 방에 그림이 하나 있다."
"그림이요?"
밧줄 그림은 아르빈이 찢어버렸다. 어째서 손목까지 그으면서 그린 그림을 그렇게 찢어버리는 건가요. 라고 물었더니 불완전의 결정체인 사람인 주제에 완성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게 우스워서, 라는 알쏭달쏭한 말만 들었다.
"가져다줄까요?"
"네가 가져라."
"네?"
"내 그림이 마음에 든다 하지 않았나. 가져라. 마음에 안 들거든 어디 팽개쳐버리고."
와아, 그거 신경 써 주고 있었군? 이사람, 의외로 속은 따뜻한 사람일지도?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빈을 쳐다보았다.
"헤에, 당신…"
"간다."
아르빈은 바삐 자리를 떴다. 나는 그가 언덕을 넘어 마을을 떠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시야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그제야 아르빈의 집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름칠을 한 걸까. 그리고 그 거실엔…
파아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
밧줄이 걸려있던 바로 그 자리,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죽음이 아닌 생명을 물씬 품은, 완성이 아닌 실패가 가득 담긴 그림이 걸려있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순 엉터리 같으니라고, 내가 그 색반전이라는거 별로 안좋아했던거 어떻게 알았어요? 이렇게 한명한테 맞춰주는 주제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한 거야?
"아하하하…"
아르빈. 당신은 실패했어요. 평생 실패한 삶을 살 테고, 당신의 몸이 완성되어도 당신은 완성되지 못할거에요. 당신은 계속해서 실패작을 그리겠지요.
어제 다 쏟아냈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나왔다.
마을의 들판이 담긴 그림은 실패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