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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겨울숲을 바라보며」

  • 작성일 2012-01-02
  • 조회수 3,204




 
오규원, 「겨울숲을 바라보며」
 
 
 
 
겨울 숲을 바라보며
완전히 벗어버린
이 스산한 그러나 느닷없이 죄를 얻어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들판에서 만난다.
 
누구나 함부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누구나 함부로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는
이 처참한 선택을
 
겨울 숲을 바라보며, 벗어버린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곳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벌의 죄를 더 얻는다.
 
한 벌의 죄를 더 겹쳐 입고
겨울의 들판에 선 나는
종일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 속에 놓인다.
 
 
 
시_ 오규원 -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 출생. 1965년《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순례』『사랑의 기교』『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사랑의 감옥』『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두두』 등이 있고, 시론집으로 『현실과 극기』『언어와 삶』『날이미지와 시』『현대시작법』 등이 있음.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함. 2007년 2월 작고함.
 
낭송_ 정인겸 - 배우. 연극 <2009 유리동물원>, <맹목> 등에 출연.
 
출전_ 『오규원 시 전집』(문학과지성사)
음악_ 김태형
애니메이션_ 이지오
프로듀서_ 김태형
 
 

 
  “죄, 죄 하며 내리는 눈보라”를 만난 적 있나요. 세상의 모든 자기계발서들이 세뇌하듯 한 목소리로 ‘긍정의 힘’을 말하는 시절입니다만, ‘습관적 긍정’은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요. 거짓 긍정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되지 못하고 진짜 긍정은 오히려, 벌거벗은 가장 낮은 마음의 참회로부터 비롯하는 것일 테니까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완전히 벗어버린 겨울나무들. 그 정결한 무욕함으로부터 더불어 아름다워지는 생명의 세상이 출현하지요. 모든 치장을 다 버린 겨울숲 앞에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가진 것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는 인간이 눈 내리는 겨울 숲 앞에서 ‘한 벌의 죄’를 껴입고 무릎 꿇습니다. 바닥에서 넘어진 자 바닥을 짚고 일어서라. 당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바닥은 진심을 다한 참회로부터…….
 
문학집배원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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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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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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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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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건

  • 익명

    긍정을 강요받고 있다 싶었는데, 참된 긍정을 바라보게 해 주시네요. 역시 오규원이다 싶고요. 시끄러운 연초에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고맙습니다.^^

    • 2012-01-03 20:57:2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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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이게 시란 말입니까? 내가 보기엔 그저 시 형식을 빌어다 쓴 수필인데요. 시는 반드시 운율적으로 형상화 되어야 하는데 형상화 된 운율을 찾을 수도 없단 말이지요. 집배원하시는 분은 시라는 장르의 기본 특성도 명확히 모르나요? 아신다면 운율의 정체 같은 시라는 장르의 특성 좀 구체적으로-만인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명확힌 증거로-제시해 보시지요.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운율과 음율은 하등 연관성도 있을 수 없는 사실은 아시나요? 영국 시인들은 왜 시는 구어체로 써야 한다고 하는 건지 그 이유라도 안다면 제시해 보시고요.

    • 2012-01-03 11:22:5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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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아! 새해에 이런 좋은 시를 보내주셔서 고마워요. 김선우 시인님.

    • 2012-01-02 15:17:4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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