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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범, 「검은 TV와 신문의 날들」

  • 작성일 2012-01-30
  • 조회수 1,649




 
조동범, 「검은 TV와 신문의 날들」
 
 
 
 
사무실을 나서는 남자의 어깨 위로
늙은 개와 썩은 생선 통조림으로 가득한 죽은 나무의 거리가 피어오른다.
남자는 가방을 든 채,
하수구를 향해 맹렬히 쏟아지는 썩은 생선을 바라보고 있다.
뻥 뚫린 생선의 주둥이는 죽은 나무의 가지에 걸려 몸속의 내장을 게워내고 있다
남자의 신발 속으로 생선의 내장이 비릿하게 들어선다.
남자의 가방은 썩은 생선의 대가리로 가득 찬다.
말라 죽은 나무와 썩은 생선의 거리를 지나 남자는
검은 버스를 타고 검은 구두의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늙은 개는 더러운 밤을 뒤적인다.
남자는 검은 전등을 켜고 검은 샤워를 하고 어둡고 오래된 냉장고의 식욕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남자의 식사가 검은 전등불 아래에서 검게 빛난다.
남자는 검은 커튼을 치고 검은 TV를 켠 채 오래되고 익숙한 검은 날의 밤을 맞이한다.
남자의 검은 밤이 무수히 지나갔다.
남자는 여전히 늙은개와 썩은 생선 통조림으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검은 구두의 집으로 돌아갔다.
남자의 식탁은 어둡고 오래된 냉장고의 식욕으로 빛났지만 누구도 검은 전등불 아래에서의 식사를 본 사람은 없었다.
남자의 검은 밤과 검은 낮이, 무수히 지나간다.
남자의 검은 TV는 언제나 켜 있고
검은 구두의 현관 앞은 검은 신문으로 넘쳐 흐른다.
검은 신문에서 검은 활자가 쏟아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검은 현관이 열리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썩은 생선이 담긴
남자의 가방이 검은 구두의 현관으로 들어서는 듯도 했지만 그것의 냄새를 맡은 사람 역시 없었다.
검은 구두의 현관 너머에선 언제나
검은 TV의
검은 노래와
검은 코미디와
검은 쇼가
쉬지 않고 새어나왔다.
검은 TV와 신문이 도래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시ㆍ낭송_ 성조동범 - 1970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02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그리운 남극」 등 5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문학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등이 있음.  
 
출전_ 『카니발』(문학동네)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새해가 시작되면 흔히 우리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결심을 합니다. 이루고 싶은 소소한 꿈들이 있고 그 꿈을 향해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지요. 그런데 일상의 속도는 검은 파도처럼 사정없이 덮쳐옵니다. 검은 컨베이어벨트에 태워진 채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어디론가 가고 옵니다. 처음엔 내가 가고 옵니다. 그러다 점점 더…… 가고 오는 게 누구인지 모르게 됩니다. ‘검은 TV와 신문의 날들’이 우리를 삼킵니다. 우리가 발명해낸 문명이 우리를 삼키고 마음, 몸, 영혼, 정신을 따로따로 분해하거나 아예 짓바수어 컨베이어벨트에 수북수북 싸질러놓습니다. 청신한 새아침의 결심은 한 달 만에 혹은 한주일 만에 검은 TV 속으로 꿀꺽 삼켜집니다. 이것은 특별한 잔혹동화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통의 날들을 잡아먹은 검은 쇼의 커튼콜은 끝없이 반복 재생됩니다. 누가 저 검은 TV를 끌까요. 우선은 각자의 손끝에 달렸습니다.
 
문학집배원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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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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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위험한천사'님의 글과 함께 읽으니 시가 더욱 넉넉하게 읽힙니다.

    • 2012-01-31 12:15:1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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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가끔 이 다섯부의 신문들을 다 받아야 하나 하며 쌓인 신문을 읽지도 않고 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다 다시 신문을 펼친다. 매일 새벽 이 신문을 돌리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얼굴도 모르나 분명히 존재하는, 희망보다 절망을 더 믾이 전해주는 그들의 새벽 발자국 소리. 보통의 날들을 잡아먹는 커튼콜의 커튼을 젖히는 올린 두 팔과 보이지 않는 두 발을 위하여 오늘도 검은 신문을 펼친다.

    • 2012-01-30 18:02:09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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