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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김혜순 시인과 지하철 4호선

  • 작성일 2017-10-01
  • 조회수 2,407

기획의 말

2017년 커버스토리는 <그곳>입니다.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이미지로 다시 되새기는 작업 속에서 폭넓은 독자층과 소통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혜순 시인과 지하철 4호선

최하연

김혜순 시인의 시 「날마다의 복사」1)에는 “명동역이 열렸다가 닫힐 때”가 등장한다. 그때로부터 30년간 명동역은 날마다 열렸다 닫혔다. 그런데 그 날들의 총합은 적어도 은하 한 개가 품은 시간보다 길다. 이를테면 “사당역 4호선에 2호선으로 갈아타려” 할 때 “만나는 얼굴들이 모두 붉은 흙 가면” 같은데, “십 년, 이십 년, 오십 년” 매일 아침 우리는 (그분이 별들을 가마에서 구워내듯이) 그 붉은 흙 가면을 몸 안에서 구워내 뒤집어쓰고 문을 나서기 때문이다.2) 이렇게 시 두 편으로, 우리는 열렸다 닫히는 무한 복사기 속에서 매일매일 붉은 흙 가면 얼굴(별)들이 출퇴근하는 은하, 바로 생사화복의 지하철을 만날 수 있다. 그리하여 지하철은 복사기 속의 은하(銀河)이다.

김혜순 시인에게 지하철은 순환하고 사라지고 홀로 타오르는 강이다. 그라운드 제로이자 사건의 지평선이다. 지독함이다. 한편으로는 “기억 속 엄마처럼 환하게 불 켠 가슴”3)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바로는 시인의 직장이 명동역에 있었을 때, 시인의 집은 평촌역이었고, 시인의 집이 한성대입구역으로 옮겨온 직후 시인의 직장이 안산 중앙역으로 이전해 갔으니, 산술적으로 시인은 하루 8시간 근무 기준, 만 7년을 지하철 객차에서 지낸 셈이다

나의 친할머니는 늦은 나이에 교회를 다니며 한글을 깨쳤고 노동요 가락에 모든 찬송가를 맞춰 부르셨다. 자주 흥얼거리셨던 노래 마디가 “며칠 후 며칠 후 요단 강 건너가 만나리”였는데, 아마도 ‘천국은 해보다 밝다’는 원곡의 의미보다 강을 건너야 만나진다는, 우리의 기원에 자리 잡은, 이쪽에서 저쪽4)으로의 이주를 그토록 바라셨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 김혜순, 『우리들의 陰畵』, 문학과지성사, 1990.
2) 김혜순, 「별을 굽다」, 『당신의 첫』, 문학과지성사, 2008.
3) 김혜순, 「0」,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4) 김혜순 시인의 시론에서 바리공주 신화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은 최근의 시론집에서 ‘바리공주 자신의 역할을 이쪽이 아닌 저쪽과의 경계의 자리에 설정’한다는 본문 문장에 “이쪽저쪽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공간을 이승과 저승, 현실과 환상처럼 물리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현존하는 것을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해, 다른 쪽을 결여로 간주하기 않기 위해서다”라는 주석을 붙인 바 있다.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이쪽과 저쪽. 내 경험과 추측으로는 옥수역에서 타서 곧바로 동작역에 내리면 아마도 그런 느낌이지 싶다. 옥수역의 나가는 입구는 강 이쪽의 끝이고, 동작역의 들어오는 입구는 강 저쪽의 끝이다. (노선이 다른 두 역은 한강 강둑 지상에 세워진 지하철역이다) 그렇다면 지하철은 강을 건네주는 배이기도 한데, 복사기 속의 은하이기도 한 지하철은, 그 스스로 강이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실어 나르는 배이기도 할 것이다.

김혜순은 시인은 지하철 은하의 바리데기이다. “나는 불붙은 이 전동차를 타고 가는 유일한 승객이다.”5) 시인은 유일한 승객인 동시에 뱃사공이며 안내자이다. 아케론 강의 카론이 왕복하는 구간이 이승과 저승이라면 시인은 (시의) 몸 안과 몸의 밖,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것, 나의 언어와 당신의 언어, 이분법에 종속된 것과 이분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 외침과 침묵 사이를 왕복한다. 그 객차의 한가운데에 앉아 시인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실어 나르는 그 지독한 현장을 몸으로 앓으며 ‘시’하는 중이시다. 이를테면 이렇게,

네가 답장할 수 없는 곳에서 편지가 오리라

(중략)

빛으로 만든 마차의 방울소리 고즈넉이 울리고
빛으로 만든 바지를 입은 소녀의 까르르 웃음소리 밤 없는 세상을 두드리는

마지막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가고
플랫폼의 기차들이 일제히 불을 켠 채 말없이 너를 잊어주는

너는 발이 없어 못 가지만 네 아잇적 아이들은 이미 거기 가 있는
네 검은 글씨로 답장조차 할 수 없는 그 밝은 구멍에게서 편지가 오리라

네 아이들이 네 앞에서 나이를 먹고
너 먼저 윤회하러 떠나버린 그곳에서

밝고 밝은 빛의 잉크로 찍어 쓴 편지가 오리라6)

5) 「수압 마사지기」,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2017)
6) 「백야-닷새」, 『죽음의 자서전』, 문학실험실, 2017.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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