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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정「참 긴 말」

  • 작성일 2008-01-14
  • 조회수 6,438




참 긴 말
                               강미정
 

일손을 놓고 해지는 것을 보다가
저녁 어스름과 친한 말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저녁 어스름, 이건 참 긴 말이리
엄마 언제 와? 묻는 말처럼
공복의 배고픔이 느껴지는 말이리
마른 입술이 움푹 꺼져 있는 숟가락을 핥아내는 소리같이
죽을 때까지 절망도 모르는 말이리
이불 속 천길 뜨거운 낭떠러지로 까무러지며 듣는
의자를 받치고 서서 일곱 살 붉은 손이
숟가락으로 자그락자그락
움푹한 냄비 속을 젓고 있는 아득한 말이리
잘 있냐? 병 앓고 일어난 어머니가 느린 어조로
안부를 물어오는 깊고 고요한 꽃그늘 같은 말이리
해는 지고 어둑어둑한 밤이 와서
저녁 어스름을 다 꺼뜨리며 데리고 가는
저 멀리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집
괜찮아요, 괜찮아요 화르르 핀 꽃처럼
소리 없이 우는 울음을 가진 말이리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저녁 밥상 앞
자꾸 자꾸 자라고 있는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는
엄마 언제 와? 엄마, 엄마라고 불리는 참 긴 이 말
겨울 냇가에서 맨손으로 씻어내는 빨랫감처럼
손이 곱는 말이리 참 아린 말이리

 

 

● 출처 :『작가와 사회』, 2006년 봄호

 

● 詩 - 강미정 : 1962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1994년『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타오르는 생』『물 속 마을』『상처가 스민다는 것』이 있다.


● 낭송 - 안도현 : 문학집배원으로 활동중. 

누구에게나 사무치는 말이 있고, 가슴을 후벼 파는 문장이 있지요. 몸에 들어왔다가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는 말이 있지요. 아예 몸속에 옹이처럼 박혀 몸하고 같이 사는 말, 건드리기만 하면 금세 서러움의 현을 건드려 울음으로 쏟아지고 마는 말, 그 말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말, 그 말이 아니면 도저히 다른 말로는 말할 수도 없고, 말이 되지도 않는 말, 상처의 딱지 같은 말, 독약 같은 말, 종교처럼 슬픈 말, 부서지기 쉬운 말, 그러다가도 촉촉해지는 말, 우리를 가두는 말,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말, 그런 말이 있지요. 당신에게도 있고 나한테도 있지요.

2008. 1. 14. 문학집배원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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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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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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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건

  • 익명

    어린 아이들을 떼어놓고 일을 다니던 그때가 생각나 가슴아픕니다.엄마를 기다리며 아파트 계단에서 울다가 목이 쉬어버린 아이...엄마! 언제와? 그말! 참! 긴말~

    • 2008-07-28 17:13:5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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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저에게도 참 긴 말들이 참 많습니다. 엄마에게 "사랑해"라는 이 석 자도 저에겐 세상에서 가장 긴 말이지 싶습니다. 아려한 마음에 자꾸만 시를 읽어봅니다. 세상의 모든 긴 말들은 다 슬픔인가봅니다.

    • 2008-07-19 02:12:5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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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자꾸만.. 이시를 읽으면 슬퍼집니다.그리고 편안해 집니다.

    • 2008-02-05 00:17:4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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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조용합니다. 성가를 듣습니다.가슴이 뜨거워지며 울먹입니다.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 이 긴말이 나를 울먹이게 함니다.조용합니다.잔잔히 흐르는 성가는 더욱더 잔잔하기만 합니다.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성가는 내 가슴을 헤집고 스며듭니다.

    • 2008-01-25 13:23:3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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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유년시절 어둡고 침침했던 그래서 가끔은 우울했던 어렴풋한 기억들이아리고 시리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수는 없겠지만세상에 그늘진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으면 합니다.

    • 2008-01-14 06:44:4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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