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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희「억새꽃」

  • 작성일 2007-10-15
  • 조회수 4,888

억새꽃

유강희
억새꽃이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명절날 선물 꾸러미 하나 들고 큰고모 집을 찾듯
해진 고무신 끌고 저물녘 억새꽃에게로 간다
맨땅이 아직 그대로 드러난 논과 밭 사이
경운기도 지나가고 염소도 지나가고 개도 지나갔을
어느 해 질 무렵엔 가난한 여자가 보퉁이를 들고
가다 앉아 나물을 캐고 가다 앉아 한숨을 지었을
지금은 사라진 큰길 옆 주막 빈지문 같은 그 길을
익숙한 노래 한 소절 맹감나무 붉은 눈물도 없이
억새꽃, 그 하염없는 行列을 보러 간다
아주 멀리 가지는 않고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억새꽃도 알고 보면 더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제 속에서 뽑아올린 그 서러운 흰 뭉치만 아니라면
나도 이 저녁 여기까진 오지 않았으리

● 출처 :『오리막』, 문학동네 2005

 

● 시- 유강희 : 1967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 시집『불태운 시집』『오리막』이 있음.

 

● 낭송- 이금희 : KBS 아나운서. <TV는 사랑을 싣고> <6시 내고향>등에 출연했으며, 현재 <아침마당> 등 진행중.

가을날의 억새꽃은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늦은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억새꽃이지요. 물론 이때 억새를 보는 사람은 억새의 배후에서 서쪽을 향해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억새꽃의 슬픔이 보입니다. 시인도 저물녘에 그런 흰 뭉치의 서러움에 감염되었나 봅니다. 이 시의 요점은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꼭 그만큼의 거리”에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어떤 거리일까요? 멀리 떠나고 싶은데 떠날 수 없는, 못난 삶의 운명 같은 것일까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찬연한 그리움 같은 것일까요?

문학집배원 안도현. 200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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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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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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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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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건

  • 익명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은 적이 있어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소설이었죠.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가 화풀이하러 갔던 빵집에서 오히려 위로 받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빵집 주인이 내온 갓 구은 롤빵은 제목 그대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그런 것이었어요. 시인에게 억새꽃이 어쩌면 롤빵 같은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설핏 드네요. 롤빵처럼 허기를 채워주지는 못할 망정 그 하염없는 행렬이, 눈을 가득 채우는 서러운 흰 뭉치가 이상하게도 위로를 주지 않았을까요.

    • 2008-07-30 04:08:0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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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보기만 하여도 가슴 시린 꽃,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만 봐도 무언가 가슴이 싸해지는 꽃, 그래서 으악새 슬피우는 꽃이라 했나보다. 가녀려 보이지만 한없이 강한 꽃, 강한 만큼 아픔을 안으로 품고 삼키어 오히려 금빛 물결로 빛나는 꽃. 혼자 있어 외롭기에 더욱 서로를 껴앉고 함께 피어나는 꽃.- 내 슬픔이 따라올수 있는 거리만큼 피어있는 꽃-이라고 하신 시인의 표현이 놀라울 뿐입니다.

    • 2008-07-11 12:45:27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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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너는 어째서 억새꾳으로 태어났느냐 수없이 예쁜이름이 많거들 촌스럽기 그지없는 이름으로 , 처녀뱃사공이 너와 같으려니, 세상사 억세고 보야한다며, 많은 약자들은 말한다. 전생에 너무가녀린탓에 물리어 할키고,짓밟히어,설음설음 내 던지려고 듣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억새로 거듭났느냐 머리를 멋대로 풀어헤치고 해드뱅이라도 칠양 연습 연습 언제나 흔들거리고 있는모습이 우습다.

    • 2007-11-06 17:56:0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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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가을바람을 한껏 마시러 저수지를 쏜살같이 지나 갈대를 찾아 나섰다. 자전거 바람이라 코바람이 시리다억샌가 갈댄가 하냔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 하늘 거리는 저것들이잠깐 갈대는 생각이 났는데 억새가 생각이 나질 않아 내 머리통을 쿵쿵한참만에야 억새를 생각해 냈다. 머리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나보다 ㅋㅋㅋ

    • 2007-10-30 19:43:5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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