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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리「그 변소간의 비밀」

  • 작성일 2008-03-24
  • 조회수 8,164

그 변소간의 비밀

박규리
십년 넘은 그 절 변소간은 그동안 한번도 똥을 푼 적 없다는데요 통을 만들 때 한 구멍 뚫었을 거라는 둥 아예 처음부터 밑이 없었다는 둥 말도 많았습니다 변소간을 지은 아랫말 미장이 영감은 벼락 맞을 소리라고 펄펄 뛰지만요, 하여간 그곳은 이상하게 냄새도 안 나고 볼일 볼 때 그것이 튀어 엉덩이에 묻는 일도 없었지요 어쨌거나 변소간 근처에 오동나무랑 매실나무가 그 절에서는 가장 눈에 띄게 싯푸르고요 호박이랑 산수유도 유난히 크고 환한 걸 보면요 분명 뭔가 새긴 새는 것이라고 딱한 우리 스님도 남몰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요 누가 알겠어요, 저 변소는 이미 제 가장 깊은 곳에 자기를 버릴 구멍을 스스로 찾았는지도요 막막한 어둠 속에서 더 갈 곳 없는 인생은 스스로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요 한줌 사랑이든 향기 잃은 증오든 한 가지만 오래도록 품고 가슴 썩은 것들은, 남의 손 빌리지 않고도 속에 맺힌 서러움 제 몸으로 걸러서, 세상에 거름 되는 법 알게 되는 것이어서요 십년 넘게 남몰래 풀과 나무와 바람과 어우러진 늙은 변소의 장엄한 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만도 하지만요 밤마다 변소가 참말로 오줌 누고 똥 누다가 방귀까지 뀐다고 어린 스님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저 구미호 같은 보살 말고는, 그 누가 또 짐작이나 하겠어요?

● 출처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2004

 

● 詩, 낭송 - 박규리: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5년『민족예술』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이 환장할 봄날에』가 있음.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저는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습니다. 변소간의 그 보이지 않는 구멍이 제 마음을 관통했던 겁니다. 변소의 역할은 자기 몸에 똥을 채우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러운 것을 몸으로 받는 일이지요. 그러나 늙은 변소는 사랑과 증오와 서러움을 다 거르고 삭혀서 세상에다 되돌려줍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하므로 분명히 장엄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우리 인간들이야 그 뜻을 한 치라도 헤아리기나 하겠습니까?

 

2008. 3. 24. 문학집배원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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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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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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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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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4건

  • 익명

    제목이나 내용이 너무 우습다.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감상할 만한 시이다.

    • 2010-09-02 01:09:51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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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ㅋㅋㅋ~엊그제 시골가서 뒤뚱거리는 나무 다리에 걸터앉아 볼 일을 봤던게 생각납니다~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2008-07-30 00:58:5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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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어쩜! 부럽다는 생각이 앞서내요. 이런 소제로 이렇게 멋지고, 맛있는 글을 쓸 수 있는지...영혼을 흔드는 메세지를 전할 수 있는지요...법정 스님이 쓰신 '무소유'가 생각납니다. 버림으로, 내려 놓음으로, 나눔으로 더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이세상에 거름이 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행복합니다...좋은 글.

    • 2008-07-26 19:44:32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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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쌓기만 한다면 무너짐을 볼 수 없겠죠. 세상 살아가는 버리지 않고, 무엇을 계속 쌓는다면 언젠간 무너져 가슴에 큰 상처로 남을 수도 있겠죠. 그 가슴을 치유할수도 없게 되겠죠.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겠죠. 모든걸 버리고 깨끗하게 남도록, 오늘도 한가지를 버립니다.

    • 2008-07-24 14:34:54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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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그런 변소가 될 수있을까요? 제가 그런 변소간처럼 쓸모있는 사람이였음 좋겠습니다.

    • 2008-07-21 14:34:26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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