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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변용 – 꼭 그래야만 하나? 그래, 그래야만 했다!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2,181

[단편소설]



죽음과 변용

- 꼭 그래야만 하나? 그래, 그래야만 했다!



서준환





1


불이 들어온다. 환하다. 눈앞에서 공간이 열린다. 불빛 아래 시야에 어느 공간이 솟아난다. 그 내부가 드러난다. 이런저런 세간과 가구가 처음 눈에 들어온다. 탁자, 소파, 책장, 걸상, 철제 선반, 야전침대, 옷걸이, 전화기 등등. 무슨 사무실 같다. 정말 무슨 사무실일 수도 있다. 어쩌면 무슨 사무실이 아닐 수도 있다. 모르겠다. 인상은 공간의 정체에 앞선다. 열린 공간은 용도의 시간을 떠안는다. 좌표축은 공간에 배치된 사물이다. 탁자, 소파, 책장, 걸상, 철제 선반, 야전침대, 옷걸이, 전화기 등이 공간의 용도를 암시한다. 용도는 시간과 맞닿는다. 시간이 나타난다. 공간을 연 것은 불빛만이 아니다. 큼지막한 벽시계가 보인다. 벽시계의 시/분침은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다. 초침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벽시계가 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실내 공간이 환히 열렸다는 점이다. 이곳은 한낮인 양 밝다.


아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세간과 가구가 아니다. 그 공간에 와 있는 사람들이다. 세간과 가구는 사람들 뒤로 숨는다. 공간과 함께 거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열린다. 빛이 있고 공간이 있고 사람들이 있다. 공간과 사람 사이에 세간과 가구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밑자리에 깔린다.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야전침대 위에 안대를 하고 누워 있는 소녀이다. 소녀는 수의 같은 드레스 차림이다. 처음에는 시신처럼 보인다. 아니다. 뭐라고 웅얼대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뒤척인다. 몸의 뒤척임으로 살아 있음을 알린다. 그 소녀를 둘러싸고 세 사람이 걸상에 앉아 있다. 걸상은 네 개이다. 나머지 하나는 빈자리이다. 세 사람은 왼쪽부터 차례대로 대기자 7호, 대기자 26호, 대기자 45호이다. 평상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모두 앞만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굳은 모습이다.


잠든 것처럼 보이는 소녀의 입에서 불현듯 이 침묵을 깨는 말소리가 새어 나온다.
“(노래) 우리는 모두 다 아마라의 자녀. 우리는 모두 다 아마라의 자녀. 얼굴은 달라도 아마라의 자녀. 생각은 달라도 아마라의 자녀. 다 같이 믿는 아마라의 자녀…….”
세 사람의 시선이 소녀에게 모인다. 굳은 표정과 몸가짐은 그대로이다. 소녀의 잠꼬대가 계속된다.
“……너희들, 아마라가 누군지 아니? 몰라? 실은 나도 몰라. 누군지 알기는커녕 그게 뭔지도 모르겠어. 사람인지 짐승인지, 어떤 물건인지 살아 있는 생물인지, 아니면 신인지 악귀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너희들이 궁금해 해도 그게 누구라고, 뭐라고 설명해 주기가 어려워. 그냥 그런 게 있다고만 말할 수밖에. 그냥 그런 게 있는 거야. 아마라는 그림자처럼 끈덕지게 나를 뒤쫓아 다녀. 형체로 따라다니는 게 아니야. 만약 형체가 있었다면 나를 스토킹 한다고 경찰에 신고라도 할 수 있었겠지.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뭔가가 나를 뒤쫓아 다닌다고 신고하면 경찰에서 뭐라고 하겠니? 그런 게 아니었어. 아마라는 그 이름만으로 나를 사로잡았거든. 어느 날 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어린이 찬송가를 흥얼거리는데 ‘하나님’의 자리에 ‘아마라’라는 이름이 들어왔어. 나는 그게 누군지도, 뭔지도 모르면서 찬송가 노랫말에 아마라를 대신 영접해야 했어. 그래, 이름이 먼저이고 그게 진짜로 뭔지는 나중이야. 나한테는 아마라가 맴돌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라’라는 이름이 맴돈다고 해야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아마라’라고 불쑥 내뱉는 버릇이 입에 붙고 말았어. 가령 어떤 아이가 나한테 이렇게 물었다고 쳐봐. 그 만화책 봤니? 봤어, 아마라. 그래, 아마라더라. 아마라라니, 재미있었다는 말이니? 아니, 아마라는 그냥 아마라야. ‘아마라’라는 게 뭐냐니까. 아마라는 다 같이 믿는 아마라야. 그럼, 재미있다는 말인가 보구나. 아마라, 아마라는 그런 게 아니래두. 친한 아이였는데 내가 몇 번 그런 식으로 대답하니까 언젠가부터 나를 슬금슬금 피하더라. 그러더니 다른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 내가 눈에 뜨이면 자기 머리에 대고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댔어. 쟤, 갑자기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야. 뭐, 대충 그런 뜻이었겠지. 그러든 말든 상관없어. 나는 어딜 가든 누구한테나 ‘아마라’라는 말을 내뱉고 다녔거든. 심지어 학교에서 담임선생님하고 얘기할 때도 내 입에서는 여지없이 ‘아마라’가 튀어나왔어. 선생님, 근데요 ‘아마라’란 무엇일까요? 뭐? 아마라가 뭘까요? 그래, 너 마침 말 잘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사이 아마란가 뭔가 때문에 너를 두고 아이들 사이에서…… 아마라! 뭐? 뭐가 아니라 아마라라고요. 너, 선생님한테 장난쳐? 칫, 아마라도 모르면서 선생은 무슨 니미, 아마라 같아 가지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핫, 아무 말 안 했는데요. 그냥 아마라라고 했어요. 아마라. 근데 이놈의 계집애가……. 너 아무래도 내일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다. 그 이름도 찬란한 아마라! (노래) 아마라는 무엇일까요, 무엇일까요? 사람일까요, 짐승일까요? 무엇일까요? 아마라는 아마라……. 이쯤에서 다 같이 그 이름도 찬란한 아마라를 ‘아마라’ 하고 외쳐 봅시다. 아마라!”
소녀의 말에 세 사람, 일제히 한 음절씩 끊어서 외친다.
“아 · 마 · 라!”
소녀가 대기자 7호를 가리킨다.
“그래, 너한테는 뭐가 보이니?”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아무것도 안 보여.”
소녀는 다시 한 번 대기자 7호를 가리킨다.
“솔직히 말해, 뭐가 보이니?”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들소가 보여.”
소녀가 말한다.
“들소가 어떠니?”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들소가 커. 불알도 이따만 하고…….”
소녀의 손가락이 서둘러 대기자 26호로 옮겨간다.
“넌 뭐가 보이니?”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아무것도 안 보여.”
소녀가 말한다.
“솔직히 말해, 뭐가 보이니?”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물소가 보여.”
소녀가 말한다.
“물소가 어떠니?”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물소가 들소랑.....”
소녀, 대기자 45호를 가리킨다.
“뭐를 보고 있니?”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아무것도 안 보고 있어.”
소녀, 다시 한 번 대기자 45호를 가리킨다.
“솔직히 말해봐, 뭘 보고 있냐니까.”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눈앞에 버펄로가 나타났어.”
소녀가 말한다.
“버펄로가 어떠니?”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버펄로가…… 근데 버펄로라는 게 말이야 들소나 물소랑은 다른 건가?”
소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외친다.
“아마라!”
그러고는 빈자리를 가리킨다.
“뭐가 보였니?”
아무 대답도 없다. 소녀, 다시 묻는다.
“뭐가 보였나 솔직히 말해줘.”
대기자 45호가 대신 대답한다.
“지금 이 자리엔 아무도 없어. 아직 빈자리라고.”
손가락으로 계속 빈자리를 가리키며 소녀가 말한다.
“나는 거기서 너희들 눈에 보였다는 소를 보았어. 소 한 마리가 거기 있었어. 소를 보지 못했니?”
소녀의 말에 세 사람, 번갈아가며 이렇게 되묻는다.
“들소?”, “물소?”, “버펄로?”
소녀가 말한다.
“우리는 모두 소를 보았어. 종류는 달라도 제각기 소 한 마리씩이 눈앞에 나타난 거야.”
세 사람이 입을 모아 묻는다.
“네 소는 어땠니?”
거기서 소녀의 잠꼬대가 멈춘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 가운데 한 악장이 흘러나온다. 음악과 함께 관리인 박 씨가 대기자 38호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온다. 관리인 박 씨는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대기자 38호는 관리인 박 씨가 손짓하는 대로 빈자리에 가서 앉는다. 나머지 세 사람, 대기자 38호를 흘금거린다. 웅얼거리는 말씨로 처음 뵙겠다는 인사도 나지막이 오간다. 그러는 사이 관리인 박 씨, 소녀가 누워 있는 야전침대로 향한다. 그러고는 잠시 소녀를 내려다본다.
“얘는 이런 데서 편히 잠이 오나 무슨 잠을 이렇게 오래 자? 얘, 일어나 봐. 얘, 얘!”
관리인 박 씨, 소녀를 흔들어 깨운다. 소녀는 깨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 잠꼬대처럼 이렇게 웅얼거린다.
“아마라…….”
관리인 박 씨,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라고?”
그러면서 소녀의 얼굴에 귀를 바짝 들이댄다. 쌔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런 참견도 하려 들지 않는다.
관리인 박 씨가 웅얼거린다.
“가만있어 보자, 여기 어디 모포 같은 거 없나?”
관리인 박 씨, 잠시 두리번거린다. 옷걸이에서 군복 야상을 찾아낸다. 그 군복 야상을 소녀의 몸 위에 덮어 준다. 소녀, 몸을 뒤척인다. 관리인 박 씨, 이번에는 네 사람의 대기자들에게로 향한다. 그러고는 비닐봉지에 담아온 음식과 물병을 나눠준다.
대기자 7호가 묻는다.
“저, 여기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그래요. 대기한 지도 한참 지났는데.”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글쎄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약속이 틀리잖아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원래 계약대로 하셔야죠.”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조금만 더 느긋하게 기다려 주시지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그럼 저도 여기서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최대한 유의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그러는 동안 소녀가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린다.
대기자 7호가 잠든 소녀를 노려보며 말한다.
“저 아이는 언제까지 저렇게 자도록 내버려둘 셈인가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지금은 일부러 깨워도 안 일어나니 할 수 없고요 언젠가 제 스스로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요.”


전화벨이 울린다. 관리인 박 씨, 전화를 받는다. 대기자 네 사람, 오가는 통화 내용에 귀를 쫑긋 세운다.
“네, 어디시라고요? 여기가 어디냐고요? 거기는 어딘가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는데요?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여기는 불의의 사망자를 접수 받아 처리해 주는 곳이지 그런 식의 일을 하는 중개소가 아닙니다. 전화상으로는 자세한 말씀 못 드립니다. 여건이 허락되는 한에서 저희와 비밀리에 접선하시면 대면 상담은 가능하고요, 네? 누굴 찾으신다고요? 누구라고요?”
관리인 박 씨, 대기자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서 메모하는 시늉을 한다.
“찾으시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네? 갑자기 감도가 떨어져서 잘 안 들리네요. 뭐라고요? 아마라요? 어디 저기 외국 사람입니까? 인도 사람이에요? 아, 그게 아니라 성이 ‘아’ 씨에 이름이 ‘마라’로군요. 합쳐서 아마라.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찾아보고 다시 연락드리든가 할게요. 네네.”
관리인 박 씨,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맥없이 웅얼거린다.
“전화번호를 또 바꿔야겠네.”
대기자 38호가 조심스런 어투로 묻는다.
“무슨 일인가요? 누구를 찾는 전화였나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였어요. 괜찮습니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혹시 나를 찾는 전화 아니었는가 모르겠네. 왜냐하면 나는 이승에 발목 잡힐 일이 많았거든.”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언뜻 이름이 들린 것 같았어요, 아마라라고……. 어쩌면 그 이름은 제 기억에서 가물거리는 저 세상의 법명이었을지도.”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틀림없이 나를 찾는 전화였을 텐데. 평소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내가 받지 않고 딴사람이 받으면 어김없이 나를 찾는 전화였어. 아마도 미련이 많아서 그런가 봐.”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아니,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는데 왜들 그러십니까?”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언뜻 이름을 들은 것 같았…….”
관리인 박 씨, 버럭 그 말을 자른다.
“이름은 무슨 이름이요? 귀찮아서 안 들리는 척하고 다 제가 꾸며낸 이름인데요. 그러니까 저쪽에서 전화를 끊더군요.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 도저히 누군가가 기억해 낼 수 없는 이름이죠. 여러분이 이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전의 신원은 죄다 불타 없어지고 말았는데요.”
대기자 네 사람, 알아들었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관리인 박 씨, 벽시계를 올려다본 후 이렇게 말한다.
“앗, 벌써 시간이 저렇게 됐네. 이제 일 보러 나가 봐야 할 시간이네요.”
그러고는 잠든 소녀에게 슬쩍 눈길을 준 후 문 밖으로 사라진다. 소녀, 군복 야상 밑에서 몸을 뒤척거린다.


대기자 네 사람은 관리인 박 씨가 나눠준 음식을 꺼내먹는다.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불에 구운 옥수수와 맹물이로군.”
일동은 불에 구운 옥수수 알갱이를 오물거리며 아래의 대화를 이어 간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난 밥상 타박 안 해요. 이거라도 먹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죠.”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그래도 옥수수를 군불에 제법 잘 구웠는지 맛있네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하기야 이제 배가 고파질 시간이니까.”
대기자 7호가 옥수수를 뜯다 말고 문득 이렇게 묻는다.
“지금 몇 시쯤이나 됐죠?”
대기자 26호,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딱 열두 시 정각이네요.”
대기자 38호도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저 시계, 가고 있는 거 맞죠?”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딱 열두 시 정각이라면 정오인가, 아니면 자정인가?”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사방이 이리도 환한데 자정일 리 있겠어요? 정오겠죠.”
대기자 45호가 잠든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누군가가 밥도 안 먹고 곤히 잠들어 있는 것을 보니 아마 자정일 거예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저 아이는 자정이든 정오든 전혀 개의치 않아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낮도 밤처럼, 밤에도 낮과 다름없이 쿨쿨 잠만 자죠.”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이런 잠꾸러기 같으니라구. 저 아이의 단잠 때문에 정오와 자정의 차이도 지워지고 말았어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하긴 정오와 자정이 다르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내맡겨져 있다는 것만 알면 됐지.”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에 내맡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앞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내다볼 수만 있으면 됐지.”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앞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내다볼 수 있다 해도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앞으로 닥칠 시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만 깨달으면 됐지.”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앞으로 닥칠 시간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들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결국 죽음을 늦추기밖에 더하겠는가라는 사실만 직시하면 됐지.”
소녀, 잠꼬대와 함께 몸을 뒤척인다. 한동안 침묵.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앞일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입 다물고 있기로 합시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그래요. 그에 관해서는 철저히 입 다물고 있기로 해요.”
대기자 38호가 묻는다.
“왜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죠. 앞을 내다보려고만 하면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요.”
대기자 38호가 다시 묻는다.
“그럼 앞길이 끊겼다는 의미일까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시간에 길 따위는 애초부터 나 있지 않았어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차라리 벼랑으로라도 이어져 있으면 다행이겠다 싶을 지경이죠. 그럼 그 밑으로 몸을 던질 가능성이나마 생기는 거잖아요.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앞으로 내달릴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그럼 이제 여기서 뭘 하죠?”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전혀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 자체가 착각이죠.”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숨만 쉬는 거예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그럼 시간이 잘 갈까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시간은 원래 가는 게 아니더라고요. 시간이 흐른다는 믿음이야말로 엄청난 착각이더라고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저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라는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오길 바랐다면 오산이죠. 시간이 가기도 바라지 말아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잠자코 버텨 보도록 합시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그래도 숨은 쉬고 있을 수가 있잖아요.”
대기자 38호, 과장되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한다. 숨쉬기 운동이 점점 격해진다. 일동, 가벼운 웃음.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숨은 그만 아껴 두소. 그렇게 혼자서 숨을 열심히 쉬면 우리 몫의 숨까지 줄어들라.”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지난 이야기로 우리 말문이나 트죠.”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버거운 과거사만 여러 섬 볏짐처럼?”
대기자 38호, 입 열기를 주저주저한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이렇게 선생을 뵈니 제가 여기 처음 와서 대기할 무렵이 떠오르는군요. 당시 정전이었나 어쨌나 실내가 칠흑처럼 어두웠어요. 그런데도 저는 관리인 박 씨가 그때 무슨 일로 너무 바쁘다 해서 누구의 안내도 받지 않고 혼자 이곳에 들어섰더랬죠. 그 기분, 누구보다 잘 알아요.”
이윽고 대기자 38호가 입을 연다.
“꼭 그래야만 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공간이 어두워진다. 잠들어 있던 소녀, 야전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빠져나온다. 그러고는 군복 야상을 대기자 38호의 어깨에 걸쳐 준다.



2


불이 들어온다. 광도가 낮다. 흐린 불빛 아래서도 공간은 솟아난다. 그 내부가 어슴푸레 드러난다. 뒤집혀 있는 탁자, 책상, 걸상 등이 보인다. 가구와 세간이 듬성듬성하다. 동일한 장소 같다. 폐쇄된 사무실을 연상시키는 공간이다. 큼지막한 벽시계는 그대로이다. 열두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는 것도 똑같다. 벽시계가 가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실내 공간은 어스름이 깔릴 무렵처럼 흐릿하다.


야전침대 위에 안대를 하고 누워 있는 소녀. 수의 같은 드레스 차림이다. 야전침대 앞에 뒤로 넘어져 있는 걸상 네 개. 그 걸상 앞에는 각각 대기자 7호, 대기자 38호, 대기자 45호가 쭈그려 앉아 있다. 나머지 하나는 빈자리이다.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태양이 서서히 사위어가나 봐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아직 그만큼 어둡지는 않은데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조짐이라는 게 있잖아요. 최근 들어 한낮에도 속 시원하게 환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죠.”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맞아요. 구름이 끼거나 비가 내린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더라고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정말 그렇다면 큰일인데? 어두워지는 거야 둘째치더라도 어마어마한 추위가 몰려올 텐데 어쩌죠?”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아마 지구 전체가 꽁꽁 얼어붙을 거예요. 먼 옛날의 빙하기 따위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새 빙하기가 닥칠지도 모르고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뭐라고 해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뉴스나 신문, 못 본 지 꽤 됐어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우리만 못 본 게 아니라 요새는 세상에서 아예 뉴스나 신문도 자취를 감췄다는 말이 나도는 것 같습디다만.”
대기자 7호가 말한다.
“하긴 온 세상의 빛이 이렇게 약해서야 신문이나 뉴스를 보려고 해야 볼 수도 없을 거예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생겼다고 하던데 이제 그 빛을 거두어 가시려는 모양이에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하나님 믿어요? 저쪽에 있을 때 교회 다녔나 보죠?”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어쩌다 우연히 떠올라서 읊어 본 풍월이에요. 믿긴 내가 뭘 믿겠어요.”
불현듯 소녀의 잠꼬대가 시작된다.
“(노래) 우리는 모두 다 아룸바의 자녀. 우리는 모두 다 아룸바의 자녀. 얼굴은 달라도 아룸바의 자녀. 생각은 달라도 아룸바의 자녀. 다 같이 믿는 아룸바의 자녀…….”
세 사람의 시선이 소녀에게 모인다. 소녀는 계속한다.
“……너희들, 아룸바가 누군지 아니? 몰라? 실은 나도 몰라. 누군지 알기는커녕 그게 뭔지도 모르겠어. 사람인지 짐승인지, 어떤 물건인지 살아 있는 생물인지, 아니면 신인지 악귀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이야. 그러니 너희들이 궁금해 해도 그게 누구라고, 뭐라고 설명해 주기가 어려워. 그냥 그런 게 있다고만 말할 수밖에. 그냥 그런 게 있는 거야. 아룸바는 그림자처럼 끈덕지게 나를 뒤쫓아 다녀. 형체로 따라다니는 게 아니야. 만약 형체가 있었다면 나를 괴롭힌다고 학교 보안관 아저씨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할 수 있었을 거야. 학교 보안관은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아저씨야.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혼나. 꼭 아저씨라고 불러야 해.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뭔가가 나를 뒤쫓아 다닌다고 일러바치면 보안관 아저씨가 나한테 뭐라 그러겠니? 그런 게 아니었어. 아룸바는 그 이름만으로 나를 사로잡았거든. 어느 날 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어린이 찬송가를 흥얼거리는데 ‘하나님’의 자리에 ‘아룸바’라는 이름이 들어왔어. 나는 그게 누군지도, 뭔지도 모르면서 찬송가 노랫말에 아룸바를 대신 영접해야 했어. 그래, 이름이 먼저이고 그게 진짜로 뭔지는 나중이야. 나한테는 아룸바가 맴돌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룸바’라는 이름이 맴돈다고 해야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아룸바’라고 불쑥 내뱉는 버릇이 입에 붙고 말았어. 가령 어떤 아이가 나한테 이렇게 물었다고 쳐봐. 새로 전학 온 아이 어떠니? 알아, 아룸바. 그래, 아룸바더라. 아룸바라니, 그 아이 별명이니? 아니, 아룸바는 그냥 아룸바야. ‘아룸바’가 뭐냐니까. 아룸바는 다 같이 믿는 아룸바야. 그럼, 착한 아이라는 말인가 보구나. 아룸바, 아룸바는 그런 게 아니래두. 친한 아이였는데 내가 몇 번 그런 식으로 대답하니까 언젠가부터 나를 슬슬 따돌리려고 그러더라. 다른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 내가 다가가면 쟤랑 놀지 마, 쟤랑 놀면 너도 똑같은 미친년이야 하더니 자리를 피하기까지 하더라니까. 물론 그러든 말든 상관없었어. 나는 어딜 가든 누구한테나 ‘아룸바’라는 말을 내뱉고 다녔거든. 심지어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아저씨하고 얘기할 때도 내 입에서는 여지없이 ‘아룸바’가 튀어나왔어. 아저씨, 근데요 ‘아룸바’란 무엇일까요? 뭐? 아룸바가 뭘까요? 꼭 베트콩 이름 같구나. 내가 사이공에서 육박전을 뛰는데 말이야 거기서 그 이름 비슷한 베트콩 한 놈하고 이단옆차기로다가……. 아룸바! 뭐? 아룸바라고요. 너, 베트콩 좋아하니? 베트콩이요? 베트콩이 뭔데요? 땅콩이나 아몬드 같은 건가요? 얘가 보자보자 하니까 어른을 자꾸 놀려먹으려고 드네? 칫, 아룸바도 모르면서 어른은 젬병…….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핫, 아무 말 안 했는데요. 그냥 아룸바라고 했어요. 아룸바. 근데 이놈의 계집애가……. 너 아무래도 내일 부모님 모시고 와야겠다. 아저씨한테요? 아저씨가 뭔데 우리 부모님을 오라 마라 해요? 아저씨라니, 선생님한테! 아니, 언제 또 선생님이 김 상사 아저씨 자리에……. 이런 아룸바 같은 일이 있나. 그 이름도 찬란한 아룸바! (노래) 아룸바는 무엇일까요, 무엇일까요? 사람일까요, 짐승일까요? 무엇일까요? 아룸바는 아룸바……. 이쯤에서 다 같이 그 이름도 찬란한 아룸바를 ‘아룸바’ 하고 외쳐 봅시다. 아룸바!”
소녀의 말에 세 사람, 일제히 한 음절씩 끊어서 외친다.
“아 · 마 · 라!”
소녀가 말한다.
“아니, 아마라 아니고 아룸바!”
세 사람, 일제히 한 음절씩 끊어서 외친다.
“아 · 마 · 라!”
소녀가 대기자 38호를 가리킨다.
“아룸바든 아마라든…… 그래, 너한테는 뭐가 보이니?”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아무것도 안 보여.”
소녀는 다시 한 번 대기자 38호를 가리킨다.
“솔직히 말해, 뭐가 보이니?”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흑마가 보여.”
소녀가 말한다.
“흑마가 어떠니?”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아주 근사해. 말의 옷차림을 하고 있어.”
소녀의 손가락이 서둘러 대기자 45호로 옮겨간다.
“넌 뭐가 보이니?”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아무것도 안 보여.”
소녀가 말한다.
“솔직히 말해, 뭐가 보이니?”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당나귀가 보여.”
소녀가 말한다.
“당나귀가 어떠니?”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당나귀가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아저씨를 태우고 성질머리 사나운 어느 여선생님 집으로…….”
소녀, 대기자 7호를 가리킨다.
“뭐를 보고 있니?”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아무것도 안 보고 있어.”
소녀, 다시 한 번 대기자 7호를 가리킨다.
“솔직히 말해 봐, 뭘 보고 있냐니까.”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눈앞에 노새 한 마리가 나타났어.”
소녀가 말한다.
“노새가 어떠니?”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노새가…… 근데 노새도 말의 한 종류냐?”
소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외친다.
“아룸바!”
그러고는 빈자리를 가리킨다.
“뭐가 보였니?”
아무 대답도 없다. 소녀, 다시 묻는다.
“뭐가 보였나 솔직히 말해 줘.”
대기자 38호가 대신 대답한다.
“지금 거기엔 아무도 없어. 아직 빈자리라고.”
손가락으로 계속 빈자리를 가리키며 소녀가 말한다.
“나는 거기서 너희들 눈에 보였다는 말을 보았어. 말 한 마리가 거기 있었어. 말을 보지 못했니?”
소녀의 말에 세 사람, 번갈아가며 이렇게 되묻는다.
“흑마?”, “당나귀?”, “노새……(도 말이냐)?”
소녀가 말한다.
“우리는 모두 말을 본 거야. 종류는 달라도 제각기 말 한 마리씩이 눈앞에 나타난 거야.”
세 사람이 입을 모아 묻는다.
“그래, 너의 말은 어땠니?”
거기서 소녀의 잠꼬대가 멈춘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 가운데 한 악장이 흘러나온다. 음악과 함께 관리인 박 씨 등장. 대기자 26호도 뒤따라 안으로 들어온다. 관리인 박 씨는 군복 야상을 입고 있다. 손에 커다란 비닐봉지도 들고 있다. 대기자 26호는 관리인 박 씨가 손짓하는 대로 넘어져 있는 나머지 걸상 앞에 가서 다른 대기자들과 똑같은 자세로 쭈그려 앉는다. 나머지 세 사람, 대기자 26호를 흘금거린다. 웅얼거리는 말씨로 처음 뵙겠다는 인사가 나지막이 오간다. 그러는 사이 관리인 박 씨, 소녀가 누워 있는 야전침대로 향한다. 그러고는 잠시 소녀를 내려다본다.
“얘, 얘, 빨리 눈 좀 떠봐!”
관리인 박 씨, 소녀를 흔들어 깨운다. 소녀는 깨어나지 않는다. 그 대신 잠꼬대처럼 이렇게 웅얼거린다.
“아룸바…….”
관리인 박 씨,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라고?”
그러면서 소녀의 얼굴에 귀를 바짝 들이댄다. 쌔근거리는 숨소리만 들릴 뿐이다. 관리인 박 씨가 소녀를 이리저리 살피는 사이 대기자 45호가 다른 대기자들에게 속닥거린다.
“저렇게 내내 잠만 처자다 혹시 그대로 가거나 그러지는 않겠죠?”
대기자 7호가 속닥거린다.
“가다니, 어디로요?”
대기자 45호가 저 위쪽을 가리키며 속닥거린다.
“저기, 저쪽으로 말이에요……. 저 건너 붉은 하늘 아래.”
대기자 7호가 속닥거린다.
“아, 난 또 무슨 얘기라고.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애가 잠만 잘 자는 것 같은데.”
대기자 38호가 속닥거린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여기까지 와서도 저렇게 곤히 잠들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네요.”
대기자 45호가 속닥거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상태가 어떤지 유심히 볼 필요가 있어요. 자다가 급사하는 경우도 많다잖아요. 그럼 끔찍해서 어째요?”
대기자 38호가 속닥거린다.
“거, 부정 탈 소리는 하지도 마소. 저렇게 어린애가 죽긴 왜 죽어요? 우리는 눈도 못 붙이는데 저 아이가 우리 몫까지 자는 셈치고 좋게 봐야지.”
대기자 7호가 속닥거린다.
“여기 어디 모포 같은 거라도 없나? 덮어 주면 좋겠구먼.”
대기자 45호가 속닥거린다.
“우리야 워낙에 헐벗었으니 그렇지만 관리인 박 씨가 입고 있는 저 잠바라도 벗어서 얘한테 덮어 주면 좋으련만.”
대기자 26호가 속닥거린다.
“그러게요. 이 동네 오니까 어째 불기가 한결 덜한 것처럼 느껴져서 자꾸 몸이 으슬으슬하네요.”


관리인 박 씨, 비닐봉지에 담긴 음식과 물병을 대기자들에게 나눠준다. 생 옥수수이다. 대기자들, 생 옥수수가 나오자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일제히 투덜거린다.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생 옥수수뿐만 아니라 당분간은 우리 모두 날것만 먹으면서 견뎌야 할 것 같네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당분간이라면 언제까지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여러분이 여기서 대기하는 게 ‘당분간’이라고 할 때 그 당분간에 가까울 거예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그럼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우리가 언제부터 여기서 대기했더라?”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모르겠어요, 시간관념이 흐려졌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나요. 아무튼 ‘당분간’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건 틀림없어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그렇게나 여기 오래 있어야 하나요? 그럼 처음 계약조건하고 틀리잖아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글쎄, 누가 아니랍니까. 당분간만 대기하면 된다더니 아예 여기서 눌러 살라는 모양입디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그래 놓고 생 옥수수를 먹는 것도 당분간이면 앞으로 계속 이런 것만 먹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네?”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에이, 그럼 그건 당분간이 아니지.”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자자, 당분간만 참으세요, 당분간만. 당분간 참고 견디다 보면…….”
대기자 38호가 말허리를 자르고 이렇게 따져 묻는다.
“흔히 당분간이라는 말은 참고 견딜 수 없는 현 상태를 무마하고자 아무 기약도 없이 던져 놓는 미끼 아닙니까? 실제로는 아무 기약도 없는 거 아니냐고요.”
관리인 박 씨가 되묻는다.
“무슨 기약이 필요하세요? 지금 여러분한테 뭐가 기약되어 있기를 바라십니까?”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아니 뭐, 하다못해 계약조건을 지킨다든가 최소한 언제 언제부터는 예전대로 옥수수를 불에 구워 주겠다든가.”
대기자 7호가 말한다.
“그래도 당분간 이렇게 날것만 먹으라는 건 아니지. 이제는 불에 굽기도 번거로워서 우리더러 생 옥수수를 먹으라고 던져 주나 그래!”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 마찬가지라고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아니, 마찬가지라니? 어째서?”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그럼 음식을 굽거나 찔 불이 없는데 어쩝니까. 세상 어디에도 불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아니, 불기운을 찾아볼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고는 문 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덧붙인다.
“정 미심쩍으시면 바깥에 나가서 직접 한번 찾아보시든가요.”
대기자 네 사람,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모아 이렇게 외친다.
“바깥에 나가? 에이, 그건 안 될 말이지. 안 될 말이고말고!”
그러더니 모두 생 옥수수를 입으로 가져가서 오물거리기 시작한다.


그때 똑똑 하고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관리인 박 씨, 조심스럽게 문을 반만 연다. 생 옥수수를 입에 가져다대고 오물거리던 대기자들, 긴장한 표정으로 바싹 얼어붙는다.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네, 어디시라고요? 어디를 찾아오셨다고요? 이거, 아무래도 헛걸음하신 것 같은데요. 여기는 그런 데가 아니거든요. 글쎄, 여긴 선생이 생각하시는 일을 하는 그런 중개소가 아니에요. 정히 의심스러우면 분명하게 말씀드리죠. 여긴 불의의 사망자를 접수 받아 처리해 주는 대행업체입니다. 더 자세히는 말씀 드리기 그렇고요. 아니, 뜬금없이 실종자라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관리인 박 씨, 대기자들을 흘낏 바라본다. 대기자 네 사람, 널브러져 있는 책상 뒤로 달아나 황급히 몸을 숨기려고 한다. 잠든 소녀, 때마침 몸을 뒤척인다. 네 사람은 이 사소한 기척에도 놀라 어쩔 줄 몰라 한다. 관리인 박 씨는 태연한 척 계속 상대와의 대화를 이어 간다.
“여기는 실종자가 아니라 불의의 사망자와 관련된 일을 하는 곳이라고 하는데도 그러시네. 실종된 사람이 여기 와 있을 리가 없질 않습니까. 저희가 무슨 납치범들도 아니고. 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범죄조직 아니냐, 라뇨. 말씀 좀 가려 하시죠. 저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나름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격려는 못해 줄망정 그래, 그런 막말을 쏟아내십니까? ……. 네네, 그래요. 그 심정 알죠. 알겠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모르게 그만 언성을 높이고 말았네요. 사과드립니다. 또 혹시 모르니까 찾으시는 분 성함이나 알려주고 가세요.”
대기자 38호가 웅얼거린다.
“틀림없이 나일 텐데 큰일 났네.”
대기자 45호가 웅얼거린다.
“내 이름을 대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일세.”
대기자 7호가 웅얼거린다.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저 지랄들이지? 미치겠네 이거.”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지금이라도 달려 나가서 나 여기 있다고 그래 버릴까 봐. 숨통이 조여 오는 것 같아 도저히 못 견디겠어.”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누구라구요? 아로마요? 아, 아로마가 아니고 아룸바. 어디 저기 외국 사람입니까? 베트남 사람이에요? 성이 ‘아’ 씨에 이름이 ‘룸바’라고요? 인상적인 이름이네요. 한번 들으면 까먹진 않겠어요. 제가 일단 메모지에 적어 놓고 혹시 저희 정보망에 이 비슷한 이름이라도 걸리면 그때 다시 연락드리든가 그렇게 할게요. 일부러 여기까지 물어물어 오셨는데 마음 같아서는 불이라도 쬐다 가시라 그러고 싶지만 저희도 지금 형편이 마찬가지라……. 네네, 그럼 살펴가세요. 좋은 소식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관리인 박 씨, 문을 닫으며 웅얼거린다.
“조만간 사무실을 또 옮기든가 해야지…….”
대기자 네 사람, 책상 뒤에서 기어 나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간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저기 언뜻 어떤 이름을 들은 것 같았…….”
관리인 박 씨, 버럭 그 말을 자른다.
“이름은 무슨 이름이요? 공연히 성가신 일이 벌어질까 봐 못 알아들은 척하고 아무렇게나 내뱉어 본 이름인데요. 그러니까 상대방도 어안이 벙벙해 하던 걸요.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 도저히 누군가가 기억해 낼 수 없는 이름이죠. 불이 흔했던 시절, 이전의 신원은 죄다 소각되고 말았고요.”
대기자 네 사람, 알아들었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린다. 관리인 박 씨, 벽시계를 올려다본 후 이렇게 말한다.
“앗, 벌써 시간이 저렇게 됐네. 이제 일 보러 나가 봐야 할 시간이네요.”
그러고는 잠든 소녀에게 슬쩍 눈길을 준다. 그대로 나가는가 싶더니 갑자기 군복 야상을 벗어 대기자들 앞에 내려놓고 퇴장한다. 대기자들, 아무도 나서서 군복 야상으로 잠든 소녀의 몸을 덮어 주지 않고 마냥 쭈그려 앉아 서로 눈치만 본다.


대기자 26호, 손에 쥐고 있던 생 옥수수를 옆으로 내치며 말한다.
“관리인 박 씨 말대로 당분간 이렇게 흘러가겠죠?”
대기자 38호, 생 옥수수를 뜯어 먹으려다 말고 말한다.
“그 말과는 달리 당분간은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을 거예요.”
대기자 45호가 생 옥수수에 후후 입김을 불며 말한다.
“거기서의 당분간은 여기서의 당분간과 똑같은 의미라는 게 확실해진 셈이죠.”
대기자 7호는 생 옥수수를 옷섶으로 닦다 말고 말한다.
“그러니까 당분간이란 말은 시간이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한다는 뜻일 수밖에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속절없이 맴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겠네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지금 몇 시쯤이나 됐지요?”
대기자 45호,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딱 열두 시 정각이네요.”
대기자 26호도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저 시계, 가고 있는 거 맞죠?”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아마도 그럴 거예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딱 열두 시 정각이라면 정오인가, 아니면 자정인가?”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사방이 이리도 흐린 걸 보면 눈부시도록 환한 정오와 칠흑처럼 어두운 자정이 겹쳐진 시간대 같아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듣고 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그럼 흔히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하는 바로 그 무렵인가?”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제가 알기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하면 동틀 녘의 어스름을 가리키는 말이지 정오나 자정과는 상관없는 것 같은데?”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제가 알기로 그 말은 특정 시간대와는 상관없는 문학적 비유라는 것 같던데?”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제가 알기로 정오는 환하고 자정은 캄캄한데 지금은 칠흑같이 캄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눈부시게 환한 것도 아니니까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대기자 7호가 말한다.
“글쎄, 제가 알기로 문학적 비유에서는 모든 게 허용된다고 하니 우리가 그렇게 느끼면 느끼는 대로 아무렇게나 불러도 다 맞을 것 같은데?”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그럼 기준이 없어지잖아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무슨 기준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나?”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그럼 지금은 ‘개와 늑대의 시간’의 정오 또는 자정의 버전쯤 된다고 해둡시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그건 너무 편의적이 아닐까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기준이 없는데 아무러면 어때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기준도 없는데 사람이 어떻게 살아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이렇게 열심히 숨 쉬고 살면 돼요. 숨 쉬고만 있으면 사는 건 아무 문제없어요.”
그러고는 과장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대기자 26호, 대기자 45호를 자기도 모르게 따라한다. 26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 그 모습에 킥킥거린다.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숨은 그만 아껴 두소. 그러다 우리 몫의 숨까지 다 줄어들라.”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기준도 없는데 숨 쉬기를 빼면 그럼 이젠 뭘 해야 할까요?”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아무 가능성도 없어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절벽이죠.”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절벽이기라도 하면 차라리 낫게? 그러면 그 밑으로 몸을 던질 가능성이라도 생기잖아?”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지난 이야기로 말문이라도 트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버거운 과거사만 여러 섬 볏짐처럼?”
대기자 26호, 입 열기를 주저주저한다.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누군들 해묵은 흉터를 원할까.”
이윽고 대기자 26호가 입을 연다.
“꼭 그래야만 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공간이 어두워진다. 잠들어 있던 소녀, 야전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빠져나온다. 대기자 26호, 군복 야상을 집어 들고 빈 야전침대로 다가간다.



3


희미한 빛줄기만 군데군데 공간에 비낀다. 어둑어둑하다. 어둠에 가려 공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세간과 가구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동일한 장소 같다. 공간은 다른 인상을 준다. 큼지막한 벽시계는 그림자로만 가물거린다.


야전침대 위에 안대를 하고 누워 있는 소녀. 몸에는 군복 야상이 덮여 있다.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랜턴 네 개. 랜턴 앞에는 각각 대기자 26호, 대기자 38호, 대기자 7호가 엎드려 있다. 나머지 하나는 빈자리이다.


대기자 26호 앞에 불이 들어온다. 얼굴만 비친다.
“그런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대신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아마 지금부터 털어놓을 얘기가 실은 더 흥미로울 거예요. 남편과는 후배 소개팅으로 만났어요. 아직 정식으로 이혼한 건 아니니까 그냥 남편이라고 할게요. 소개해 줄 때 후배 얘기로는 한 번 갔다 온 남자라고 했어요. 저는 당연히 초혼이었고요.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왜 본인들만 좋으면 됐지 그런 거 안 가리잖아요. 이혼남이라고 별다른 선입견은 없었어요. 첫인상도 수더분하니 나쁘지 않더라고요. 목공일을 한다고 했어요. 아담한 자기 점포도 있다고 했어요. 저는 이 일자리 저 일자리를 전전하며 시급 생활로 근근이 먹고살 때였어요. 저에 비해 직업도 안정된 편이었죠. 목공일도 예술가에 속하나요? 말투도 예술가답게 자분자분했어요. 왜 구슬이 서 말이라지만 꿰어야 대박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딱 그런 느낌이었어요. 처음 만나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데 불쑥 손을 잡더라고요.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가슴이 막 쿵쾅거렸어요. 이 남자는 당장 상황만 되면 더한 것도 할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뭔가 급하구나 싶기도 했죠. 그래도 싫지는 않았어요. 그랬으니까 이튿날 다시 만났을 때 느닷없이 달려들어 키스를 하는데도 순순히 받아들인 걸 거예요. 그러고 나서 한 주쯤 뒤에, 에이 아니다 이 자리니까 그냥 다 솔직하게 털어놓을게요, 그러고 나서 다음날 또 만나서 바로 잠자리를 했어요. 제가 더 못 참겠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저도 당시 나이가 나이니만큼 급했거든요. 잡아야겠다 싶었어요. 얼마 있다 혼인신고만 하고 살림을 합쳤어요. 자, 여기까지가 서론이에요. 서론이 좀 길었죠? 계속할게요.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어요. 행복한 신혼을 보내는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자상했어요. 목공 조수를 쓸 때에도 제 동의를 구할 정도였으니까요. 자기 도제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아가씨들도 많지만 여자를 조수로 두면 제가 싫어할 수도 있다면서 앳된 청년을 고르더라고요. 네, 스무 살짜리 총각을요. 그런 남편이 믿음직스러웠어요. 최소한 여자 문제로 속 썩일 일은 없겠구나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편의 이전 결혼생활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이혼을 한 게 아니라 글쎄, 전 부인이 스스로 목공소의 동아줄에 목을 매고 자살한 거라지 뭐예요. 아무리 알아보려고 해도 이유는 알 수 없었어요. 마음이 불안해졌어요. 그래도 남편한테는 모른 척했어요. 일단 모른 척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여자들은 티 안 나요. 남자들은 둔해서 그런 거 못 알아채요. 그사이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한 가지만 빼면. 조수 총각을 대하는 남편의 태도가 좀 이상했어요. 나를 대할 때처럼 자상하다 못해 심지어 고분고분하다는 인상까지 받았어요. 언뜻 보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조수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어요. 내가 몇 번 조수 총각을 불러서 주의를 줬는데도 둘은 별로 달라지는 것 같지 않았어요. 내가 불러서 주의를 줄 때 그 조수란 녀석이 내보인 눈빛도 무지 기분 나빴어요. 아주 음흉한 눈빛이었거든요. 내가 조금이라도 틈만 보이면 곧장 나를 덮칠 것만 같았어요. 그럼 남편한테는 왜 아무 말도 안 했냐고요? 왜 안 했겠어요, 수도 없이 했지. 하지만 남편은 내 입에서 조수 얘기만 나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대기자 26호 앞의 불이 꺼지고 대기자 38호 앞에 불이 들어온다. 얼굴만 비친다.
“그런 얘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지금부터 털어놓을 얘기가 실은 더 흥미진진할 수도 있어요. 소싯적에는 주로 유부녀들을 만나고 돌아다녔죠.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아마 만나기 쉽고 편해서 그랬는가 봐요. 누군가에게 이런 얘기를 늘어놓으면 남의 집 여자를 따먹는 쾌감 때문일 거라고 속단하기 일쑤죠. 꼭 그렇지만도 않습디다. 유부녀들과 만날 때면 그런 쾌감보다 그쪽 남편들에 대한 죄책감이 앞섰으니까요. 죄책감까지 억눌러 가면서 유부녀들과 만날 수밖에 없는 내 안의 이유가 뭘까 곰곰이 돌아본 적이 있어요.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대자면 그건 ‘유부녀’라는 말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나는 사타구니가 거뭇거뭇해질 무렵부터 유달리 ‘유부녀’라는 말만 나오면 심한 성적 자극에 시달려 온 같아요. 잡지 같은 데서 ‘유부녀’라는 활자와 마주치면 갑자기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제하기가 어려웠어요. 맥락상 전혀 야한 얘기가 아닌데도 ‘유부녀’라는 단어에서 온갖 음탕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죠.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어쩌면 남들한테도 그런 단어가 최소한 하나 이상씩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무튼 내 경우는 그랬답니다. 특정 대상이 떠오르는 것도 아닌데 그 막연한 말 하나가 나를 육감적으로 사로잡고 있었던 셈이지요. ‘유부녀’라는 말이 특정한 누군가를 떠올려 주는 게 아니었는데도 그 말만 나오면 질펀한 쾌락의 기대감으로 내 몸이 한껏 부풀어 오르다니 이렇게 털어놓기도 참 남사스런 노릇이라고 할밖에요. 그동안 사귄 유부녀들과는 이런저런 소모임 같은 데서 처음 만났어요. 그러느라 꽤 많은 소모임에 가입과 탈퇴를 반복해야 했죠. 한 모임에서 들이대었을 때 안 넘어오는 유부녀가 둘 이상 생기면 내 행실에 관해 안 좋은 소문이 나도니까 바로 탈퇴한 다음 또 다른 소모임에 가입하고. 그냥 만나는 일 말고 다른 악행은 없었으니까 속으로 나를 너무 욕하지는 마소. 제비족들마냥 우리 관계를 남편한테 폭로하겠다며 금품을 뜯어낸 적도 없고 더한 쾌락에 눈이 멀어 스리섬을 하자고 요구한 적도 없고 몸을 팔라고 시킨 적도 없으니까. 최소한 그 정도로 악질은 아니니까 애초에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를 거란 기대는 접는 게 좋아요. 이제 하려는 이야기는 내 첫 유부녀와의 만남에서 생긴 일이에요. 처음 만난 이후로 이어진 불륜행각은 이 자리에서 애써 늘어놓고 싶지 않아요. 말해 봐야 빤한 스토리거든. 그렇게 빤한 스토리라면 구태여 기억에서 끄집어낼 필요도 없었을 테고. 유부녀랑 모텔에 드나들며 금단의 욕정을 불사르고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거란 사랑의 다짐을 수없이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아 봐야 그저 권태로울 뿐이죠. 관계에 미래가 없으니까, 실제로는 아무것도 기약할 수가 없으니까 더 맹렬히 영원 같은 사랑 타령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로가 다 아는데 이 얼마나 공허하고 부질없는 노릇이냐고요. 시작은 그 유부녀의 남편한테 우리 관계를 들키면서부터예요. 그런데 그 남편이라는 작자가 홧김에 아내의 외도를 친정 부모한테 고해바친 거라. 당신네 딸년이 지금 바깥에서 어떤 놈팡이하고 실컷 놀아나는 중인데 이거 어쩔 거냐는 식이었겠지.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친정아비란 노인 양반한테서 급한 연락이 왔어요. 지금 바로 좀 보자더군. 그래서 나갔지. 지금 말투처럼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천연덕스럽지는 않았어요.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으름장이야 기본일 테고 그 이상 또 무슨 얘기가 나올지 조마조마하더군요. 나 원, 그동안 숱한 불륜 드라마나 소설이 세상에 쏟아져 나왔지만 불륜남이 불륜녀의 남편과 상대하는 장면은 봤어도 친정 부모랑 마주 앉는 상황은 또 처음이다 싶더군요. 그 상황을 내가 현실에서 실제로 겪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냐고요. 물론 처음에는 내 예상대로였어요. 얌전하고 정숙한 자기네 딸을 꼬드겨서 도대체 이게 무슨 짓거리냐며 쌍으로 호통을 쳐대두구만요. 사람들 많은 커피숍에서 보는 눈도 있는데 창피해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하지만 추궁과 해명이 오가고 차차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아주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특히 사위 이야기로 옮겨가니까 그 노친네들 눈빛에 슬그머니 저울질을 해보는 기색이……. 아이, 노친네들…….”
대기자 38호 앞의 불이 꺼지고 대기자 7호 앞에 불이 들어온다. 얼굴만 비친다.
“그런 얘긴 하고 싶지 않네요.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부터 털어놓을 이야기가 실은 더 흥미를 당길 수도 있을 텐데. 제 아내 이야기입니다. 아직 정식으로 이혼한 건 아니니까 일단 아내라고 해두죠. 아내는 조신하고 참한 여자였습니다. 제가 타오는 박봉에도 전혀 불만스런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그 적은 돈으로 살림살이를 알뜰하게 꾸려가는 데만 악착같았죠. 아무래도 제가 목공소에서 시다로 일하다 보니 봉급이 적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결혼하고 나서 얼마 있다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과만으로도 지칠 법한데 퇴근하고 돌아온 저한테 짜증 한 번 부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대신 공들여 차린 저녁 밥상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저는 그런 아내한테 늘 감사했습니다. 목공소 소장은 스스로를 예술가라 여기는 사람이었어요. 자기를 ‘소장님’ 대신 ‘마스터’라 불러 달라고 할 만큼 엉뚱하고 허세가 있는 편이었지만 성격이 자상했습니다. 시다랍시고 저를 함부로 부려먹지도 않았어요. 박봉이었지만 직장 생활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자상한 마스터한테 착실히 일을 배워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목공소도 버젓이 차리고 목공의 대가도 될 수 있을 거라는 꿈으로, 살아가는 데 활력이 넘쳤으니까요. 앞날의 내가 어떨지 그려 보며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곤 했답니다. 내일은 어떤 일거리가 들어와서 새로운 기술을 또 손에 익히게 될까 부푼 기대감 속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고요. 그렇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마음이 앞으로만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난날에 관해서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었고요. 지난날은 제가 앞으로 달려가는 데 거치적거리기만 하는 기억의 짐짝에 불과하다 싶었거든요. 저한테 시간이란 오로지 어떤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는 앞길만을 의미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렇게 지난날을 떠올려 다른 사람들한테 털어놓게 될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오죽하면 아내가 저한테 ‘당신은 왜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통 얘기하는 법이 없어?’ 하고 궁금해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과거가 없는 남자라서 그렇다고요. 그러자 아내가 깔깔거리더군요, 무슨 대답이 그러냐고 누구한테는 과거가 있냐면서요. 그렇습니다. 과거란 없습니다. 아내나 저나 정결하게 지금을 기점 삼아 앞만 보고 걸음을 내딛을 뿐이죠. 이 모두가 아내 덕이었습니다. 우리 아기를 낳아 키우며 집에서 든든히 버텨 준 덕에 저도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제 일과 꿈에 충실할 수 있었던 셈이지요. 하지만 여기까지는 곧 닥칠 불행의 서막이었습니다. 제가 불행의 서막이었다고 하니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아이의 갑작스런 죽음? 아닙니다. 아이는 지금도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뜻하지 않은 실직? 아닙니다. 저는 제 의사와 상관없이 일자리를 잃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다로 일하던 목공소를 물려받을 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결국…… 아내의 바람? 외도? 불륜? 그것도 아닙니다. 아내는 누군가와 바람을 피운 적이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어느 날 홀연히 집에서 사라졌습니다. 생떼 같은 젖먹이는 어쩌라고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손에 납치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다시는 자기를 찾지 말아 달라는 쪽지가 부엌에서 눈에 띄었거든요. 경찰에 신고도 해보았지만 별 무소용이었습니다. 가정사에 의한 단순 가출로 추정되는 이상 경찰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회신만 반복해서 날아오더군요. 제가 아는 아내는 남편과 젖먹이를 무책임하게 내팽개치고 자진해서 가출할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내를 찾아내는 일에 앞서서 우선 이유와 원인이라도 속 시원히 알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대강의 전말이 드러난 것은 마스터의 유서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내의 가출이 알려지고 나서 얼마 후 마스터는 목공소의 동아줄에 목을 매고 자살했습니다. 그때 남은 장문의 유서가 아내의 가출에 관한 수수께끼를 조금이나마 풀어 줄 듯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이 말만 듣고 섣불리 추측하듯이 아내는 마스터와 바람을 피운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걸고 쓴 누군가의 유서에 거짓말이 적혀 있을 리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내가 왜 제 발로 가정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
대기자 7호 앞의 불이 꺼진다.

* 대기자 45호의 고백은 레나 모제와 스테판 르멜의 책 『인간 증발』 가운데 한 에피소드에서 모티프를 따왔음.


미명 속에서 불현듯 소녀의 잠꼬대가 시작된다.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입안에서 음절이 뭉개져 멍멍하게 들려오는 소녀의 말소리. 대기자 세 사람의 시선이 소녀에게 모인다. 소녀, 계속한다.
“아 이 우 바 다 아 로 샤 아 나 우 이 난 아 이 마 다 라 나 니 마……. 형체로 따라다니는 게 아니야. 만약 형체가 있었다면 아 이 우 바 다 아 로 샤 아 나 우 이 난 아 이 마 다 라 나 니 마……. 나를 사로잡았거든. 어느 날 교회 주일학교에서 배운 어린이 찬송가를 흥얼거리는데 ‘하나님’의 자리에 ‘아라사’라는 이름이 들어왔어. 나는 그게 누군지도, 뭔지도 모르면서 찬송가 노랫말에 아라사를 대신 영접해야 했어. 그래, 이름이 먼저이고 그게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물론 그러든 말든 상관없었어. 나는 어딜 가든 누구한테나 ‘아라사’라는 말을 내뱉고 다녔거든. 심지어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이 우 바 다 아 로 샤 아 나 우 이 난 아 이 마 다 라 나 니 마 (노래) 아라사는 무엇일까요, 무엇일까요? 사람일까요, 짐승일까요? 무엇일까요? 아라사난 아라사……. 아 이 우 아 바 다 라 아 아 마 빠 로 샤 우 앙……. 아라사!”
대기자 세 사람, 한 음절씩 일제히 끊어서 따라 외친다.
“아 · 마 · 라!”
소녀가 말한다.
“아 이 그 거 아 이 거 아라사, 라고 외치란 말이야!”
대기자 세 사람, 한 음절씩 일제히 끊어서 따라 외친다.
“아 · 마 · 라!”
소녀, 한동안 음절이 뭉개진 말소리로 계속 뭐라고 웅얼웅얼하다 결국 잠꼬대를 그친다.
대기자 26호 앞의 불이 들어온다.
“저는 예티를 보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예티가 아니라 동물원을 탈출해서 숲 속에 잠입한 불곰이었어요. 녀석은 거기가 아직 동물원이라 여기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한테 달려들 엄두도 못 내고 계속 먹이만 받아먹었어요. 보기보다 순해요.”
대기자 26호 앞의 불 꺼지고 대기자 38호 앞에 불이 들어온다.
“먼 발치로 새스쿼치가 보였어요. 새스쿼치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제가 본 게 새스쿼치라고 확신했어요. 유심히 살펴보니 새스쿼치가 아니라 반달곰이었어요. 녀석은 나한테 반갑다는 듯 손짓해 보였어요.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확 달려들까 봐 당분간 거리를 두고 있기로 했어요. 음흉한 속셈을 누가 모를 줄 알고.”
대기자 38호 앞의 불 꺼지고 대기자 7호 앞에 불이 들어온다.
“제가 본 것은 그냥 사람이었어요. 말 그대로 사람, 호모 사피엔스. 나중에 다시 보니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자이언트판다였어요…….”
어둠 속에서 대기자 26호와 38호가 입을 모아 재빨리 끼어든다.
“아무리 자이언트라고 해봐야 판다는 곰이 아닌 것이지. 다시 해야 하는 것이지.”
대기자 7호,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자이언트판다는 사람처럼 말을 했어요. 알고 보니 암컷이었어요. 나중에는 사람인지 진짜 판다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어요. 그래서 일단 집으로 데려왔어요. 판다는 잔뜩 부풀린 목울대로 ‘우워 우워 아라사, 우워 우워 아라사’ 하고 울면서 지금쯤 애타게 저를 찾고 있을지도 몰라요.”
대기자 7호 앞의 불이 꺼진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 가운데 한 악장이 흘러나온다. 그 음악과 함께 관리인 박 씨가 손전등으로 자기 얼굴을 비추며 입장. 나머지 한 손으로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대기자 45호도 뒤따라 들어온다. 관리인 박 씨의 손짓에 따라 대기자 45호, 나머지 랜턴이 놓인 자리에 가서 다른 대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엎드려 눕는다. 어둠 속에서 대기자 세 사람, 새로 들어온 대기자를 흘금거린다. 나지막이 처음 뵙겠다는 인사말이 오간다. 관리인 박 씨, 곧바로 비닐봉지에 든 것을 각자에게 나눠준다. 옥수수 대궁이다. 물병은 없다. 이번에는 아무도 투덜거리지 않는다. 조용하다.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이제 먹을 수 있는 곡물이라고는 이거밖에 남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물도 바닥났어요. 어디서도 물을 못 구해요. 그래도 대궁을 잘근잘근 씹다 보면 거기서 물이 좀 나올 거예요. 그러니 당분간 수분 섭취는 괜찮을 겁니다. 의심들 하실까 봐 덧붙이는 말이지만 저희도 요새 그렇게 견디고 있어요.”
대기자 26호 앞의 불이 들어온다.
“여기서는 언제쯤 나가게 될까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당분간요. 당분간만 여기서 버티세요.”
대기자 38호 앞의 불이 들어온다.
“이제 나가면 뭘 하게 될까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겠죠.”
대기자 7호 앞의 불이 들어온다.
“저기 요새 바깥세상은 어떤가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여기랑 똑같아요. 저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이젠 옛말이죠.”
대기자 45호 앞의 불이 들어온다.
“상황이 계약조건과 많이 달라졌나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당분간은 계약조건대로 이행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어요, 당분간이요.”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아니, 명색이 관리인씩이나 된다면서 그렇게 무책임한 답변이 어디 있습니까?”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당분간은 관리인이라고 해서 책임 있게 들릴 만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여건이 못 되니까요.”
한동안 어둠과 침묵. 잠시 후 랜턴에 일제히 불이 들어온다. 네 사람은 무표정하게 옥수수 대궁만 우적우적 씹고 있다. 불이 나간다. 다시 불이 들어온다. 아무 말 없이 옥수수 대궁만 우적우적 씹고 있는 네 사람. 다시 불이 나간다. 한동안 어둠과 침묵. 야전침대 위의 소녀, 몸을 뒤척인다.
관리인 박 씨, 문득 손전등으로 대기자 26호를 비춘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지금 몇 시쯤이나 됐죠?”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38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딱 열두 시 정각이네요.”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7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저 시계, 가는 거 맞죠?”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45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저는 오늘 처음 와서 잘 모르겠네요.”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26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딱 열두 시 정각이라면, 정오인가 자정인가?”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38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자정인지 정오인지 모르겠어요. 전혀 분간이 안 가요.”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7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그럼 자정이자 정오겠네요.”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45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여기 시간과 저쪽 시간이 다른가요?”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26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여기 시간과 저쪽 시간이 서로 맞닿아야만 이 오랜 대기 상태에서 풀려나게 될지도 모르죠.”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38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이 오랜 대기 상태에서 우리가 풀려나야만 여기 시간과 저쪽 시간이 서로 맞닿게 될지도 모르고요.”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45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그런데 진짜로 지금 몇 시쯤이나 된 건가요?”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7호로 옮겨간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잠자코 숨 쉬고 있기로 해요.”
일제히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 이어지다 침묵.


소녀, 야전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춤주춤 관리인 박 씨에게 다가간다. 소녀의 몸을 덮고 있던 군복 야상이 바닥에 떨어진다. 소녀가 입을 연다.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이 우 바 다 아 로 샤 아 나 우 이 난 아 이 마 다 라 나 니 마…….”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네, 어디시라고요? 어디를 찾아오셨다고요? 아닙니다. 여기는 그런 데가 아니에요. 글쎄, 그런 중개소가 아니라니까요.”
소녀가 입을 연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이 우 바 다 아 로 샤 아 나…….”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네? 그럼 뭐 하는 데냐고요? 그건 알아서 뭐 하게요? 뭐 좋습니다, 정히 의심스러우시다면 분명하게 말씀드리죠. 여긴 불의의 사망자를 접수 받아 처리해 주는 대행업체입니다.”
소녀가 입을 연다.
“아 아 나 우 이 난 오 도 다 아 로 샤 아 이 우 바 다 아 로 샤 아 나…….”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네? 실종자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실종된 사람이 이런 데 와 있을 리가 없질 않습니까, 여기가 무슨 범죄조직도 아니고. 저희가 왜 그런 일을 할 거라 믿는 거죠? 아닙니다. 잘못 찾아왔어요. 여긴 그런 데가 아닙니다.”
소녀, 주춤주춤 야전침대로 물러나 거기 다시 눕는다. 그러는 사이 관리인 박 씨가 나지막이 웅얼거린다.
“아예 이 사무실을 폐쇄해 버리든가 해야지…….”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26호에게 향한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나를 찾아온 건가 봐.”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38호에게 옮겨간다.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틀림없이 나일 거야.”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7호에게 옮겨간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나를 찾아온 거라면 차라리 좋겠어.”
손전등의 불빛이 대기자 45호에게 옮겨간다.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지금도 나를 찾는 이가 누구일지 궁금하네.”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걱정 마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아니고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저기 언뜻 어떤 이름을 들은 것 같았…….”
관리인 박 씨가 그 말을 끊는다.
“그런 이름은 없습니다. 누구도 기억할 수 없는 이름이죠.”
그러고는 손전등으로 잠든 소녀와 그 발치에 떨어져 있는 군복 야상을 비춰 보인다. 관리인 박 씨, 군복 야상을 주워 입는다.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곧이어 이렇게 말한다.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이제 나가 봐야 할 시간입니다.”
관리인 박 씨, 퇴장.


대기자 26호 앞에 불이 들어온다.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이제 곧 날이 저물 거라 치자.”
대기자 26호 앞의 불이 꺼지고 대기자 38호 앞의 불이 들어온다. 대기자 38호가 말한다.
“새날이 밝을 수도 있다 치자.”
대기자 38호 앞의 불이 꺼지고 대기자 7호 앞의 불이 들어온다. 대기자 7호가 말한다.
“우리 말문이나 틉시다.”
대기자 7호 앞의 불이 꺼지고 대기자 45호 앞의 불이 들어온다. 대기자 45호가 말한다.
“꼭 그래야만 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잠시 후 일시에 불이 꺼진다.



4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둡다. 최소한의 불빛조차 없다. 공간은 떠오르지 않는다. 칠흑 같다. 부스럭거리는 대기자 세 사람의 인기척만 전해진다. 어디선가 솟아오른 고주파 노이즈가 어두운 공간을 가로지른다. 잠시 후 고주파 노이즈, 서서히 줄어든다.


“뭐가 좀 보이나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보여요. 아마라가 보여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들소를 말하는 건가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에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물소를 말하는 건가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에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버펄로? 참, 버펄로는 들소나 물소랑은 다른 건가?”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에요. 버펄로가 들소나 물소랑 다른지 어떤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버펄로 아니에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뭐가 보인다는 거예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아마라요. 아마라 자체가 보여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그건 어떻죠?”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형체가 없어서 말로 나타낼 수가 없어요. 말이 사라진 자리에서 생겨나는 형상이죠.”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사이.
“뭐가 좀 보이나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보여요. 아룸바가 보여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흑마를 말하는 건가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에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당나귀를 말하는 건가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에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노새? 참, 노새도 말의 한 종류 맞나?”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에요. 노새가 말의 한 종류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노새 아니에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뭐가 보인다는 건가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아룸바요. 아룸바 자체가 보여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그건 어떻죠?”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아룸바’ 같은 형체예요. 각자가 혼자서 ‘아룸바’ 하고 되뇌면 떠오를 각각의 형체가 바로 아룸바의 모습이에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사이.
“뭐가 좀 보이나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보여요. 아라사가 보여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예티 같은 불곰을 말하는 건가요?”
대기자 26호가 말한다.
“아니에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새스쿼치처럼 보이는 반달곰을 말하는 건가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에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자이언트판다인가요? 참, 자이언트판다가 아무리 자이언트라지만 곰에 속하는 짐승은 아니죠?”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에요. 자이언트판다가 곰에 속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이언트판다는 아니에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뭐가 보인다는 건가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아라사요. 아라사 자체가 보여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그건 어떻죠?”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뭔가 알 수 없는 게 막 움직여요. 움직여서 고정할 수가 없어요. 고정할 수가 없으니 형상에 관해서도 말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아라사는 분명 거기 있어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아직은 견딜 만하네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빛, 불, 물이 사라진 세상에서도 숨은 참 질기군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다행히 공기는 여전하니까요. 그래도 벌써부터 밀도가 희박해져 가는 게 느껴져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그럼 이제 숨도 아껴 쉬는 게 좋겠네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게다가 머지않아 무시무시한 추위가 몰려올 거예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그 추위가 지상의 모든 생명을 집어 삼키겠죠.”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보시다시피 어둠이 이미 모든 것을 지워 없앴어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단속적인 고주파 노이즈.
“쉿, 아이가 또 잠꼬대를 시작하려나 봐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고주파 노이즈가 한동안 이어지다 스르르 줄어든다.
“저 아이는 언제쯤 잠에서 깨어날까요?”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마지막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깨어나겠죠.”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저 아이가 깨어나는 게 이제 마지막이라는 신호일 수도 있겠네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삐걱하고 문이 열리더니 발소리가 난다.
“누구요? 박 아저씨?”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아니요. 저는 여기서 대기하도록 안내 받은 이 업체 계약자입니다.”
대기자 7호의 목소리이다.
“아, 그렇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캄캄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저도 캄캄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대기자 7호의 목소리이다.
“근데 박 아저씨는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박 아저씨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대기자 7호의 목소리이다.
“아, 왜 여기서 관리인으로 일하는 그…….”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아 네, 그 양반은 무슨 일 때문에 무척 바쁜 것 같더라고요. 어디서 대기하도록 안내만 받고 일단 저 혼자 왔습니다만.”
대기자 7호의 목소리이다.
“어둠 속에서 그래도 목소리는 잘 들리니 서로 말문이나 틉시다. 그래, 선생은 대관절 무슨 곡절로 여기까지 오셨소?”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꼭 그래야만 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대기자 7호의 목소리이다.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 가운데 한 악장이 흘러나온다. 다시 삐걱 하고 문소리가 난다. 누군가가 안으로 급히 걸어 들어온다.
“거기 다들 계시죠? 그동안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관리인 박 씨의 목소리이다. 계속한다.
“지루한 대기 상태에서 벗어나 이제 여기서 나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몇 시쯤이나 됐죠?”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딱 열두 시 정각일 겁니다.”
관리인 박 씨의 목소리이다.
“지금이 딱 열두 시 정각이면 정오인가, 자정인가?”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그것까지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고요.”
관리인 박 씨의 목소리이다.
“요즘도 시계가 가긴 가요?”
대기자 45호의 목소리이다.
“너무 어두워서 시곗바늘이 보이지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네요.”
관리인 박 씨의 목소리이다.
“계약조건을 철저하고 신속하게 이행하시는군요.”
대기자 7호의 목소리이다.
“정말 운이 좋으세요.”
관리인 박 씨의 목소리이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지금 문 밖에 중개인 몇 명이 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자, 그럼 이동하실까요?”
관리인 박 씨의 목소리이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봅시다.”
대기자 38호의 목소리이다.
“자고 있는 저 여자 아이는 어쩌나요?”
대기자 26호의 목소리이다.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니 지금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지요. 나중에 잠에서 깨면 그때 저희가 알아서 조치하려고요.”
관리인 박 씨의 목소리이다. 이어 무리지어 우르르 몰려 나가는 발자국 소리.


검붉은 빛이 새어들어 온다. 공간이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떠오른다. 한가운데 소녀가 누워 있는 야전침대와 열두 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는 벽시계만 보일 뿐 텅 빈 공간이다. 야전침대의 발치에는 군복 야상이 떨어져 있다. 소녀, 야전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러고는 안대를 벗으며 웅얼거린다.
“아, 도무지 잠이 안 와. 잠깐이라도 깊이 잠들 수만 있다면 정말 소원이 없을 텐데……. 그런데 왜 이리 주위가 온통 시뻘겋고 어두컴컴한 거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관리인 박 씨가 들어온다.
소녀가 말한다.
“누구세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이제야 잠에서 깼구나.”
소녀가 말한다.
“잠이 들지도 못했는걸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아무튼 됐다. 같이 나가자.”
소녀가 말한다.
“그런데 왜 이리 주위가 온통 시뻘겋고 어두컴컴하죠?”
관리인 박 씨가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아마도 지금 시각이 딱 열두 시 정각이라서 그럴 테지.”
소녀가 말한다.
“그런데 여기 같이 계시던 분들은 다 어디 갔어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무슨 소리냐?”
소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군복 야상을 가리키며 말한다.
“여기서 저랑 같이 대기하시던 분들 말이에요.”
관리인 박 씨가 군복 야상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이 옷가지는 또 뭐고 난 통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구나. 여기에는 원래부터 너 혼자밖에 대기하고 있지 않았는데.”
소녀가 말한다.
“내가 잠이 덜 깼나? 분명히 잠든 적이 없는데?”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자자,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얼른 나가자. 시간 없어.”
소녀가 말한다.
“나가서 이제 어디로 향하나요?”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밖에서 중개인이 널 기다리고 있어. 그 사람만 따라가면 돼.”
소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다.
관리인 박 씨가 말한다.
“네가 나가고 나면 이제 모든 게 다시 시작되겠지.”
그러면서 빨리 나가자고 채근하는 몸짓. 소녀는 발길을 옮기는 대신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 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 가운데 한 악장이 흐르면서 깊은 어둠이 또 한 번 공간을 잠식한다.













작가소개 / 서준환

2001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소설집 『너는 달의 기억』, 『파란 비닐인형 외계인』, 『고독 역시 착각일 것이다』, 『다음 세기 그루브』와 장편소설 『골드베르크 변주곡』, 『로베스피에르의 죽음』 등이 있다.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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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4-01
알파벅스

알파벅스 이원석 사라진 마을의 이름은 소몽笑夢이었다. 소몽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유속과 깊이가 적당한 계곡이 가까워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던 관광지로, 몇몇 주민들은 일찍부터 부업으로 관광객들을 재워 주며 얼마간의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촬영과 유명 연예인의 방문이 화제가 되어 마을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관광객이 늘어나며, 생업과 부업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살던 집을 개조해 전문적으로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종국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그 일로 먹고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같은 마을 주민들끼리 동종 업계 종사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자신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다른 집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소개받은 집에서는 소개해 준 사람에게 작은 보답을 하는 일종의 중개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동안 그들의 사회적 유대감이 혈족의 그것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소규모 민박집이 성행하던 어느 날 ‘물꼬리 펜션’이라는 이름의 첫 대형 독채 펜션이 문을 열었고 관광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넓고 쾌적한 시설, 안전한 보안과 차량 픽업 서비스 등은 특히 가족 단위 손님들이나 젊은 세대 단체 손님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읍에 하나 있는 2금융권 은행에는 대출 상담을 받는 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리하여 소몽리는 다시 한 번 변화의 바람에 휩쓸렸다. ‘물꼬리 펜션’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른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독채 펜션이 생겨났고,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펜션 단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를 이어 펜션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외지인이 지은 펜션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주민도 있었다. 관광객들은 해마다 늘어 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거라고 사회경제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숙박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여름 한철 외지인들이 쓰고 간 돈으로 겨울을 견뎌야 했다. 규모가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숙박객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고, 여름이면 집과 집 사이로 고성이 오가거나 주먹다짐이 일어나는 일도 빈번했다. 산을 잘 모르는 외지인들의 부주의한 행동도 골칫거리였다. 술을 먹고 입수하는 외지인은 해마다 몇 명씩 있었고 출입이 금지된 곳에 억지로 들어가 뱀에 물리거나 말벌에 쏘여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도 많았다. 몇몇 부덕한 업주들이 성수기 숙박 요금을 지나치게 올려 받아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상으로, 외지인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범죄의 빈도도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주민들은 ‘이래서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간혹 어린아이가 태어나도 가장 먼저 그런 것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법.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는 법. 그러나 영특한 아이들은 어른들

  • 관리자
  • 2024-04-01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김나현 1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원룸 안에서 그 냄새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결국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끓였다. 수프는 메인 재료가 양파와 토마토가 맞나 의심이 들 만큼 동그란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돼지고기에 붙은 비계 때문이거나 양파를 볶을 때 버터가 들어간 탓인 듯했다.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야.” 제 맛?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에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엄마의 기분에 따라 혹은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수프의 맛이었다. 그러고 보면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땐 소고기가 잔뜩 들어가곤 했다. 여유랄 게 없을 땐 몇 조각의 고기만 들어간 야채수프에 가까웠다. 그 수프는 마녀 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다이어트 음식으로 각광받기 훨씬 전부터 우리 집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다른 집 엄마들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특기로 내세울 때, 엄마는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주력으로 삼았다. 깊은 맛의 토마토 수프, 따뜻한 쌀밥,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면 특별히 다른 반찬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수프에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냉장고 안의 남은 재료에 양파와 토마토를 넉넉히 넣고 끓일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수프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가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종종 그것을 토마토가 들어간 양파 수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내가 먹어 본 어떤 수프도 엄마가 만든 수프 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웃들이 엄마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도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엄마의 장기이자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그 수프가 이제 내 신경을 건드렸다. 방 안에 겹겹이 쌓인 냄새 때문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떤 냄새든 밀폐되면 지독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주방 후드의 환풍기를 켜고 침대를 밟고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시자 어딘가 모르게 매캐함이 밀려왔다. 그건 이웃집에서 흘러온 담배 냄새 따위가 아니었다. 공기 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로변 오피스텔은 어쩔 수 없었다. 미세먼지가 있든 없든 주위는 옅은 안개에 휩싸여 흐릴 때가 많았다. “그만 내려와. 상이나 펴.” 접이식 탁자를 펼치고 엄마와 마주 앉으니 다섯 평 원룸이 꽉 차는 듯했다. 받침대에 냄비를 내려놓은 엄마는 할 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편안히 수프 맛을 음미하기에는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무슨 소리를 들을까 내심 마음을 졸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 집보단 낫지 않아?” 그 집은 방충망에 벌레가 자주 들러붙었다. 작은 날벌레도 아니고 엄지만 한 크기였다. 그게 집으로 날아 들어오곤 했다. 오래된 주택의 2층집에 딸린 셋방이었다.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부엌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여긴 화장실이 집 안에 있고 부엌도 딸려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줄곧 말이 없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에는 그 돈을 갖고 겨우 이런 곳밖에 구

  • 관리자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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