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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작성일 2017-11-01
  • 조회수 2,344

[단편소설]



하루



여성민





모래는 따뜻해. 밥이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야. 구름과 파도와 조개와 사람들이 걸어간 발자국도 따뜻해. 이 유리병을 좀 만져 봐. 해변의 모든 것이 다 따뜻하다구. 이토록 따뜻한 해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그건 모르겠지만. 다른 밥이 말했다. 모래는 정말 따뜻해.
뜨거운 모래를 밟기 위해 한낮의 해변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해변엔 언제나 저런 사람들이 있지. 무척 행복하고. 처음의 밥이 말했다. 해변의 술과 해변의 태양과 해변의 나무 의자에 잘 어울리는. 밥이 계속 말했다.
그렇고말고. 우리도 그중 하나잖아. 우리도 그중 하나야. 다른 밥이 말했다.
그래. 맞아. 우리도 그중 하나지.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젖은 해변에서 불가사리 한 마리가 움직여 유리병 속으로 들어갔다. 저거 봐. 놀라운걸.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보다가 유리병을 하나씩 꺼내 해변에 던졌다. 그중에는 비치발리볼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비치발리볼을 하던 사람들이 다시 비치발리볼을 하기 시작했다. 비치발리볼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염소 세 마리가 천천히 지나갔다. 한 마리는 불에 타고 있었다. 아름다워. 밥이 다른 밥의 말을 들으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해변에선 바라볼 수가 있다. 모든 것.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해변에 앉아 있었다. 그런 것 같았다. 그녀가 죽었어. 이 해변에서. 이 해변일 거야. 아무튼 해변이야. 밥이 말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총과 구름과 해변의 모닥불 같은 일. 우리는 추웠지. 다정하게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지. 우리는 멸치를 구워먹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녀가 죽었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다정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라고. 해변에선 다 그렇잖아. 해변에 오는 사람들은 다 그래. 다정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고.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도 않았어. 아니. 우리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어. 그냥 앉아 있었어. 다정하긴 했지. 정말 다정했어. 앉아서 멸치를 구워먹었을 뿐이야.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어. 사실이야, 밥. 너무 사실적이었어.
밥이 말했다.
슬프구나. 몹시 슬픈 얘기야, 밥. 하지만 밥.
다른 밥이 말했다. 조금 혼란스러워. 물론 나는 너를 신뢰해. 믿어. 내가 한 번도 너를 믿지 않은 적은 없어. 그건 너도 알아. 하지만 밥. 정확히 해두고 싶어. 너도 알겠지만 ‘사실이야’라는 말과 ‘사실적이야’라는 말은 달라. 조금 전에 네가 하려던 말은 ‘사실이야’였어, ‘사실적이야’였어? 밥이 물었다.
해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았다. 모래는 따뜻해. 구름도. 불가사리도. 그리고 밥이 말했다.
말한 그대로야. 사실이야. 너무 사실적이었어. 조금 전에 나는 그렇게 말하려던 거야, 밥. 말한 그대로. 나는 정말 궁금해. 궁금해서 미치겠어. 나는 왜 해변에서 울었던 걸까.
정말 울었어?
울었어. 그런 것 같아.
그런 날이 있지. 목적 없이 해변을 걷는 날. 지금도 우린 해변에 앉아 있잖아. 아름다웠어?
아름다웠지. 아름다운 여자였어. 유부녀였지만. 그러면 어때. 해변에 앉아 있는 여자는 모두 유부녀라고.
맞는 말이야. 해변에서 남자는 모두 울고 있지. 그리고 밥이 말했다.
불가사리만 없다면 좋을 텐데. 발에 걸려. 아름답긴 하지만.
해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신경 쓸 것 없어. 죽은 불가사리는 죽은 거야. 다른 밥이 말했다. 하지만 밥. 우리 여기에 왜 온 거야?
총을 사려고 왔지.
총을? 해변에? 그래서 샀어?
샀지. 조금 전. 여긴 총이 아주 많아. 해변이니까. 파라솔도. 모래도. 바람도. 파도도. 불가사리도. 호텔도. 캘리포니아 호텔. 캘리포니아도. 시카고도. 금붕어도. 구름도. 여긴 사람이 아주 많군.
해변이니까. 그리고 밥이 말했다. 다행이야. 모든 게.
그래. 정말 다행이야.


저 남자에게 물어보자. 뭐든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야. 밥이 말했다. 틀림없어. 저이는 뭐든 알고 있어.
어째서?
꽃을 들고 있잖아. 해변에서 꽃을 들고 있는 남자는 뭐든 알아. 더구나 그가 들고 있는 꽃은 마가렛이라구. 마가렛을 들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를 순 없어. 내 말을 믿어. 이 해변의 어디로 가야 총을 살 수 있는지 저이는 분명 알고 있을 거야.
오오! 정말이네. 다른 밥이 말했다. 확실히 저 남자가 들고 있는 꽃은 마가렛이 맞아. 신이 우리를 돕는 거야. 우리는 이 해변에 아주 오래 앉아 있었지만 마가렛을 들고 해변에 서 있는 남자는 처음 봤잖아. 해변으로 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마가렛이라니. 신은 우리 편이야. 신은 항상 우리 편이었어.
두 사람은 아주 기쁜 얼굴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가는 동안 날이 저물지 않으면 좋겠는데. 밥이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밥. 날이 저물 때 사람들은 아름다워. 마가렛 꽃도. 저길 봐. 해변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 지금은 저렇게 술을 마시며 미친 듯이 놀지만 날이 저물면 모두 일어나 해변에 서 있을걸.
네 말이 맞아. 나도 그런 모습 본 적 있어.
그것 보라고. 그리고 밥이 말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우리는 날이 저물기 전에 저 마가렛 꽃을 든 남자에게 갈 수 있어.
다행이야. 다른 밥이 말했다. 다른 밥이 말할 때 그들은 남자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밥은 생각했다. 해변이 가까워지자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렸다. 레드 제플린이야. 밥이 말했다. 이럴 수가 있나. 정말 레드 제플린이라구.
알아.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어. 이럴 수가 있나.
음악소리는 점점 크게 들렸다. 해변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밥. 그거 알아? 난 레드 제플린을 무척 좋아한다구. 사람들은 지미 페이지만 기억하지. 보컬은 지미 페이지가 아니야. 그의 이름은 로버트 플랜트야.
맞아. 로버트 플랜트. 나도 알아. 나도 그의 노래를 좋아해.
그런 줄은 몰랐네. 기분 좋은 얼굴로 밥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존이야.
어떤 존? 밥이 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알겠지만 레드 제플린은 네 명의 멤버로 구성 돼 있어. 보컬은 로버트 플랜트지. 그리고 두 명의 존이 있어. 건반을 치는 존과 드럼을 치는 존이 있다고. 건반을 치는 존은 베이스를 치기도 하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잘 모르겠군, 기억나지 않는군. 아무튼 레드 제플린에는 존과 존이 있어, 밥. 네가 좋아하는 존은 누구야?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 밥! 그건 너무 어려워. 누가 어떻게 존과 존을 구별할 수 있다는 거야. 나는 그냥 존을 좋아할 뿐이야. 사실이 그래. 밥은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어쩌면 화가 났다기보다는 슬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건 밥과 밥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린 거의 도착한 것 같아. 밥이 말했다. 마가렛을 든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레드 제플린의 노래가 귀를 집어삼킬 듯이 들렸다.
그래. 거의 다 왔군. 하지만 아직 조금 더 걸어야 해. 밥이 말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물어버리면 안 되는데. 저물어서 마가렛을 든 저 남자가 보이지 않으면 어쩌지.
말했잖아, 밥. 신경 쓸 거 없어. 저물었을 때 사람은 아름다운 거야. 짐승도.
밥이 말하는 동안 그들 사이로 염소 세 마리가 지나갔다. 염소들은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한 마리는 불에 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기쁜 얼굴로 두 사람은 마가렛을 든 남자 앞에 섰다. 남자는 두 손으로 마가렛 꽃을 들고 해변에 서 있었다. 모래가 따뜻해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마가렛을 안은 채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알아요. 해변의 모든 것이 따뜻해요.
그리고 밥이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보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어요. 하루 종일 걸었는데 걸어오는 내내 당신이 이 해변에 서 있는 것을 봤어요. 하루 종일. 당신은 마가렛을 들고 이곳에 서 있더군요.
맞아요. 나는 종일 마가렛을 들고 서 있었어요.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당신들은 종일 걸었군요.
네, 우린 종일 걸었죠. 날이 저물까 걱정하면서. 걸어오는 내내 마가렛을 든 당신을 봤죠.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리고 있어요.
마가렛을 든 남자가 말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토록 따뜻한 해변에서 다른 목적이 있을 수 없죠. 아름다운 여인이겠군요.
아름다운 여인이죠. 유부녀이지만.
해변에 나오는 여자들은 모두 유부녀인걸요. 다른 밥이 말했다. 다정한 여인이겠군요.
상냥하고. 다정하죠.
행운을 빌어요. 진심으로 행운을 빌게요.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밥이 말했다. 마가렛을 든 남자여! 우리는 이제 지쳤답니다. 너무 먼 길을 걸어왔거든요. 이 해변까지요. 총을 사려고요. 하지만 어디에서 총을 구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군요. 정말 알 수가 없어요. 찾을 수가 없어요. 해변인데도. 하지만 우리는 운이 좋았어요. 이렇게 당신을 만났으니까요. 당신은 마가렛을 들고 있고 마가렛을 들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모를 순 없으니까. 우린 아주 운이 좋죠. 우린 항상 운이 좋아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가렛을 든 남자가 말했다. 당신들은 아마 총을 사기 위해 이곳에 왔을 거라고. 해변이니까.
모래가 따뜻해요.
해변의 모두가 따뜻해요. 이토록 따뜻한 해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군요. 마가렛을 든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당신들은 잘 왔어요. 당신들은 총을 살 수 있어요. 이 해변의 어디에서나 총을 팔아요.
우리도 그렇게 믿지만 총을 파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밥이 말했다. 당신은 알고 있겠죠?
물론 나는 알아요. 당신들은 좀 기다려야 해요. 날이 저물기를.
마가렛을 든 남자가 말했다.
곧 총을 살 수 있어요. 저물면 사람들이 해변으로 나오니까요. 남자들은 모두 해변에 앉아서 울고요.
기다릴게요. 그리고 밥이 말했다. 내가 뭐랬어. 마가렛을 든 남자가 아무것도 모를 수는 없다고 했지? 밥, 우린 기다리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해서 마가렛을 든 남자는 해변에 계속 서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밥과 밥은 마가렛을 든 남자와 함께 해변에서 저물기를 기다렸다.
저기 시계를 파는 사람이 있군, 밥. 기다리는 동안 시계를 하나 사자. 기다리는 사람에겐 시계가 필요하지.
나도 그 생각을 했어. 시계를 사자.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저물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계를 사기로 결심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마가렛을 든 남자가 말했다. 여기 내게 시계가 있어요. 좋은 시계는 아니지만 이 시계를 가져가요. 기다리는 사람에겐 시계가 필요하죠.
이런!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친절하군요. 당신은 자상하고 우리는 당신에게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마가렛을 든 남자여.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에게도 시계가 필요해요. 기다리는 사람에겐 시계가 필요하니까요.
그러니까요. 마가렛을 든 남자가 말했다. 이리 와서 이 시계를 가져가요.
말했잖아요. 그럴 수는 없어요. 다른 밥이 말했다. 당신의 시계는 당신의 기다림을 위한 거예요.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시계를 사면 돼요. 간단하죠. 아주 간단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기다리는 사람에겐 시계가 꼭 필요해요. 마가렛을 든 남자는 고집을 부렸다. 밥과 밥은 남자의 친절함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쩌면 마가렛을 든 남자에게 모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남자의 시계를 얻었다.
고마워요. 마가렛을 든 남자여! 이루 말할 수 없군요.
그리고 다른 일들. 해변에서 할 수 있는 일들. 시시한 일들을 하며 기다렸다. 조개껍데기를 주웠고 따뜻한 모래 위에 누웠고 해변에 앉아 울었다.
밥. 주느비에브가 생각이 나.
베르니스와 주느비에브?
응. 베르니스와 주느비에브. 아이가 죽은 후에 남편 에를랭을 떠나 베르니스에게 온 주느비에브가 말하잖아.
불빛이 보여서 왔어요. 밥과 밥이 동시에 말했다.
내가 얘기했어? 해변에서 여자를 만났어.
오! 밥. 그런 일이. 나는 몰랐어.
사랑스럽고 예쁜 여자였어. 마가렛은 없었지만 우리는 다정했어.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지. 함께 멸치를 구워먹었어. 은빛 속에서 푸른빛이 반짝이는 멸치들을. 나는 정말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안고 있었어. 그녀도 그랬지.
해변에서?
해변에서.
그녀를 어떻게 만났지?
그녀가 왔어. 나는 앉아 있었어. 내게 말했어. 불빛이 보여서 왔어요. 그리고 우리는 정말 해변에 함께 앉아 있었어. 우리는 정말 다정했어. 그녀는 기꺼이 내게 안겼어. 나는 젖은 땅을 안고 있었지.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부터 육지인지 알 수 없도록 오래 전부터 섞여 있었던 거야. 우리는 그렇게 느꼈어.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기도 했지. 고백하자. 나는 마음먹었어. 정말 그랬어. 그녀가 내게로 걸어오기 전부터 이미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꼈거든. 나는 무릎을 꿇었지. 사랑해요. 미칠 것 같아요. 그녀는 기뻐했지.
그녀가 기뻐했어? 말해 봐, 밥. 정말 그녀가 기뻐했어?
기뻐했어. 그녀는 곧 대답할 것 같았어. 하지만 내게 안겨서 말했지.
시간이 없어요. 밥과 밥이 말했다.
그래. 그랬어. 시간이 없어요. 밥이 울었다.
이런. 슬픈 일이로구나. 안됐구나. 내가 그런 일을 겪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해. 어쨌든 다행이야. 지금 이 해변엔 불빛이 없어. 저물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불빛을 따라올 일도 없고 그녀를 사랑할 일도 없어. 시간이 없다고 말할 일도 없고 울 일도 없지.
그리고 다른 일들. 해변에서 하게 되는 일들. 시시한 일들을 하며 기다렸다.
밥, 저것 봐. 불가사리야. 불가사리가 있어. 그렇군. 밥, 저것 봐. 불가사리가 움직여. 불가사리가 해변으로 올라와. 온몸으로 꾸물꾸물 기어서 올라와. 이곳으로 올라와. 그렇군. 아름답군. 생각이 나, 밥. 생각나. 언젠가 나는 죽은 불가사리를 본 적이 있어. 내가 아주 어릴 때였는데 해변으로 올라와 죽어 있었어. 죽은 불가사린데도 부드러웠어. 내 몸보다 부드러웠어. 아기 몸을 만지는 것 같았어. 꾹 누르는 손가락에 소름이 돋을 만큼 부드러웠어. 아름답다. 불가사리. 저것 좀 보라구. 저걸 좀 봐. 사람들이 병을 던져. 여자가 유리병을 던져. 불가사리가 유리병 속으로 들어가고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몸은 별 모양인데. 조그만 유리병인데. 불가사리는 별이 다섯 개. 아름답다. 불가사리. 밥, 그거 알아? 불가사리는 모든 해양에 살아. 자웅이체지만 자웅동체도 있어. 몇몇 불가사리는 분열을 해서 늘어난대. 무성생식을 하는 거야. 제 몸을 분열해서 둘이 되고 넷이 되는 거야. 신기하지. 별불가사리. 작은별불가사리. 햇님불가사리. 빨강불가사리. 해바라기불가사리. 불가사리들이 올라와.
불가사리는 도무지.
아름답다.
불가사리는 도무지.
아름답다.
불가사리는. 불가사리는. 불가사리는 도무지.
불가사리는 시시해.
불가사리는 징그러워.
아름답다. 불가사리. 아름답다. 불가사리가 죽었어. 밥. 모두 죽어 있어. 불가사리가 다 죽은 것 같아.
죽은 것은 죽은 거지. 죽은 불가사리는 죽은 불가사리.
그리고 다른 얘기들. 해변에서 하게 되는 얘기들. 당연하고 시시하고 어쩔 수 없는 얘기들. 담배와 콜라와 섹스와 호텔과 캘리포니아 호텔, 캘리포니아, 시카고, 여수, 부산, 여수, 시베리아 나무와 보들레르를 얘기했다.
보들레르의 아버지가 화가였던 거 알아?
군인이었잖아.
그건 두 번째 아버지이고. 첫 번째 아버지는 사제였어. 환속한 사제였지. 못 견디고 뛰쳐나온 거야. 그리고 그림을 그렸어. 아마추어 화가였지만 열정이 대단했지. 보들레르가 미술평론을 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야.
그랬군. 화가였군. 저물기를 기다리며 밥이 말했다.
잔 뒤발을 사랑했지.
잔 뒤발을 사랑했지. 혼혈의 잔 뒤발.
아름다웠겠지.
아름다웠겠지. 보들레르가 사랑한 것은 잔 뒤발의 아름다움은 아니었어. 무너지는 선을 사랑했던 거야.
무슨 말이야.
보들레르의 아버지는 보들레르에게 선의 아름다움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해주었어. 선이라는 것은 그런 거잖아. 형태를 버리면 무너지는 거잖아. 그녀의 육체가 어땠는지 그녀의 영혼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그녀를 하나의 선으로 이해했으니까. 사랑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어. 무너지면 무너지는 대로 아름답다고 느꼈지. 종교라든지 법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형태잖아. 보들레르는 버렸지. 시도 그래. 리듬이라든지 각운이라든지. 버렸지. 저무는 순간과 같은 거야. 여기 해변이 있잖아. 우린 저물기를 기다리고 있지. 지금 우리가 보는 해변은 색과 형태와 선으로 된 해변이야. 밥, 이걸 이해할 수 있어?
물론, 이해하지. 이해하고말고. 바다는 넓고 깊고 파랗고. 등대는 둥글고 솟아오르고 빨갛고. 그런 얘기잖아.
그래, 맞아. 바로 그런 얘기야. 저물면 색은 사라져. 형태와 선만 남아.
이해할 수 있어. 저물기를 기다리며 다른 밥이 말했다. 저물겠지. 형태와 선만 남겠지. 그런데 밥, 우리는 물론 기다리고 있지, 그런데 밥, 나는 걱정돼. 기다리는 동안 저물면 어떡하지? 해변도, 사람도, 마가렛을 든 남자도, 아! 마가렛을 든 남자여! 그리고 조개도, 불가사리도, 파라솔도, 집도, 총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어떡하지? 형태. 내게 안겨 있던 형태. 밥은 걱정하고 있었다. 밥은 슬퍼 보였다.
신경 쓸 것 없어. 슬픈 밥을 달래며 다른 밥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저물면 형태는 사라져. 선만 남지. 물론 최후에는 선도 사라지겠지만. 형태는 사라지고 선이 남아. 그때가 가장 아름다워. 그래서 사람들은 해변으로 오는 거야. 우린 기다리는 거야. 이제 곧 사람들이 해변으로 나올 거야. 해변과 사람들이 함께 아름다워지겠지. 우린 총을 사겠지. 해변. 해변에 앉아 있는 사람. 총. 그러면 되는 거야. 모래는 따뜻하고. 이토록 아름다운 해변. 최후의 선을 보며. 우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있지.
한 번 더 말할 수 있지.


총을 살 수 있겠죠? 이곳에서 총을 살 수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 총을 살까.
미안하군요. 밥이 말했다. 우리는 총을 팔지 않아요.
맞아요. 우리는 총을 팔지 않아요. 다른 밥이 말했다. 여기는 해변이에요. 총을 사려면 총을 파는 집으로 가야죠. 아니면 보리밭으로 가든지.
하지만! 여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너무 빤히 바라보아서 밥과 밥은 왠지 부끄러웠다.
그렇게 바라보시니 부끄럽군요.
그럴 필욘 없는데. 여자가 말했다. 정말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아름다운 여자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두 사람은 괜히 부끄러워졌다. 부탁이에요. 내 얘기를 좀 들어줘요.
그럴게요. 우리는 당신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걸요. 우리는 이 집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나는 먼 길을 걸어 왔어요. 총을 사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들이 바로 총을 파는 사람들이라고 들었어요.
여자는 지쳐 보였다. 그런 것 같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사실은 그런 일이 자주 있죠. 우선 들어와요. 물이라도 마시고 잠시 쉬면서 생각하는 게 어때요. 어쩌면 우린 함께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여자는 망설였고 무언가 생각했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식탁에 앉아 여자가 집을 둘러보았다. 집이 예쁘네요. 여자가 말했다. 해변에 있는 집은 다 예쁘죠. 부끄러워하며 밥이 말했다. 밥은 감자를 깎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여기서 바라보는 해변이 특히나 아름다워요. 바로 저 길을 따라서 왔어요. 해안선.
물을 좀 마셔요. 감자를 깎던 밥이 손을 털고 일어나 물을 따라 주자 여자가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다.
컵이 예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슬퍼 보이죠? 물을 마시고 여자가 탁자에 내려놓은 컵을 만지며 말했다.
많은 사람이 사용한 것이라 그럴 거예요. 그중엔 슬픈 사람도 있었겠죠. 감자를 깎던 밥이 말했다. 행복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부끄러워하며 밥이 말했다. 밥이 깎던 감자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마음이 좀 놓여요. 이제 여자는 컵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따뜻한 물을 줘서. 지쳤거든요. 정말 마음이 놓여요.
여자가 컵을 끌어안자 두 사람도 마음이 놓였다.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따뜻한 컵을 끌어안은 여자는 아름답고 지쳐 보였다.
먼 길을 왔군요.
먼 길을 왔죠.
해변에서 왔군요.
해변에서 왔어요. 아주 먼 길을 걸었어요.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죠. 불빛을 따라서 왔어요. 총을 사기 위해서. 어떤 총을 살까 생각하면서. 그리고 여자가 말했다. 총을 살 수 있겠죠?
말했잖아요. 우리는 총을 팔지 않아요. 이 집은 총을 파는 집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을 팔죠? 이상하다는 얼굴로 여자가 물었다. 총을 파는 집에서 총을 팔지 않으면 무엇을 팔죠?
카레요. 감자를 깎던 밥이 말했다.
우리는 카레를 팔아요. 감자와 당근을 넣은 카레를 팔죠. 이 집은 카레를 파는 집이에요. 자, 당신도 골라 봐요. 어떤 카레가 좋을지. 당신에게는 돈을 받지 않을게요. 물론 우리는 돈을 받죠. 이 집은 카레를 파는 집이고 우리는 카레를 파는 사람들이니까요. 사람들은 우리가 만든 카레를 좋아해요. 우리는 돈을 받고요. 당신에겐 그냥 드릴게요.
왜요?
먼 길을 왔으니까요. 우리에겐 좋은 재료가 있고.
고맙군요. 정말 고마워요. 저는 총을 사려고 왔어요. 그리고 이 집은 총을 파는 집이라고 들었어요. 당신들은 총을 파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왜 내게는 카레를 팔죠?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조금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슬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집은 총을 파는 집이 아니에요. 우리는 총을 판 적이 없어요. 심지어 총을 본 적도 없어요. 밥이 말했다. 우린 카레를 팔아요. 밥이 말했다. 맛있는 카레죠. 감자를 깎던 밥이었다.
혼란스럽군요. 여자가 말했다. 혼란스럽네요. 잠시 후에 여자가 말했다. 정말 혼란스럽군요.
혼란할 것 없어요. 당신은 먹고 싶은 카레를 생각하면 돼요. 배가 고프지 않나요.
배가 고파요. 사실은 배가 고파요.
그것 봐요. 당신은 지쳤어요. 자, 먹고 싶은 카레를 골라 봐요. 다행히 우리는 감자도 많고 당근도 아주 많아요. 당신은 감자를 넣은 카레를 고를 수도 있고 당근을 넣은 카레를 선택할 수도 있어요.
고맙지만. 여자가 말했다. 나는 총을 사려고 왔을 뿐이에요.
알아요. 우리는 당신에게 맛있는 카레를 대접하고 싶은 것뿐이구요. 우리는 평생 그렇게 살았어요. 맛있는 카레를 만들기 위해 아침이면 장을 보고 감자와 당근을 깎고 주방의 불 앞에서 하루를 보내죠. 배고프지 않아요?
배고파요. 조금. 거 봐요. 당신은 배가 고플 거예요.
이제 여자는 배가 고팠다.
당신은 지쳤어요.
알아요. 나는 지쳤어요. 조금. 거 봐요. 당신은 지쳤다구요.
이제 여자는 지쳤다.
말해 봐요. 당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감자를 듬뿍 넣은 카레를 해드릴게요. 이 감자를 봐요. 아주 싱싱하다고요. 수확한 지 얼마 되지 않아요. 맛있을 거예요. 당근을 넣은 카레를 고를 수도 있어요. 이 당근도 붉고 싱싱하죠. 원하는 걸 말해요.
총이요. 총이요. 총이요.
아! 밥.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방법이 없잖아. 한 번 더 말해야지. 사실대로.
여자가 울었다. 여자가 울어서 밥과 밥은 왠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떡하면 좋지, 밥. 나는 왠지 부끄러워. 밥이 밥에게 말했다. 나도 그래. 부끄러움을 느껴. 너무 아름다운 분이라서. 그렇지?
말했잖아. 부끄러워.
미안해요. 울지 말아요. 우리가 자꾸 미안해져요. 당신을 돕고 싶지만. 우린 카레밖에 모르는걸요.
정말이에요. 당신을 돕고 싶어요.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그러나 그럴 수는 없어요.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어요. 사실을 말할게요. 우리는 카레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이 집은 카레를 파는 집이고요. 총을 사려면 총을 파는 사람에게 가야죠.
보리밭으로 가든지.
보리밭! 여자는 지쳐 보였다. 하지만! 아름답고 지친 여자가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당근 밭에 갈 거야. 같이 가겠어? 밥이 물었다.
아니. 나는 집에 있을래. 현관에 떨어진 신문을 주워들며 다른 밥이 말했다.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당근은 집에도 많아.
알고 있어. 하지만 당근 밭에 가야 해. 아침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야.
좋을 대로 해. 나는 신문이나 읽을래.
그럼 할 수 없지. 밥이 문을 열고 나갔다. 여름의 미지근한 저녁 공기 대신 시원한 바람이 열린 문으로 들어왔다. 달콤한 바람이었다. 밥의 못마땅한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도 못마땅했다. 집에도 많다니까.
밥은 신문을 읽었다. 해변의 소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신문을 두어 장 넘기고 있을 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밥을 찾고 있어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가방을 뒤적였다. 땀을 많이 흘렸다.
어떤 밥이요?
그렇게 되묻자 남자가 밥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늦은 오후였다. 곧 어둠이 내릴 것처럼 보였지만 빛이 남아 있었다.
그냥 밥이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아주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내가 밥이에요. 남자가 안도하는 얼굴로 어깨에 멘 가방을 열었다. 우편배달부였다. 다행입니다. 언덕을 오르느라 고생을 좀 했어요. 밥을 찾아왔거든요.
잘 찾아왔어요. 내가 바로 밥이죠.
대답하며 밥이 잠시 남자가 오른 언덕을 바라보았다. 언덕 아래 해변이 보였다. 해변의 소음이 들렸다. 달콤한 바람도 그쪽에서 불었다.
땀을 많이 흘리시는군요.
어쩔 수 없어요. 어려서부터 그랬으니까. 게다가 이놈의 가방이 좀 무거워야 말이죠.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남자가 말했다. 나는 편지를 전해 주기 위해 왔어요. 이 편지를 꼭 전해 주어야 해요. 그게 내 일이니까. 밥에게요.
이제 당신은 쉴 수 있어요. 내가 바로 밥이에요.
잘 됐군요. 하지만 쉬진 못해요. 전해야 할 편지들이 많아서 나는 또 언덕을 내려가야 해요. 언덕을 내려갈 때는 바람도 느끼며 갈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뭐예요. 자, 여기 편지를 받아요. 바로 이 편지가 밥에게 온 편지거든요. 친애하는 밥에게. 맞죠?
어떤 밥이요?
친애하는 밥이요. 남자가 말했다. 여기 그렇게 쓰여 있잖아요. 친애하는 밥에게. 그러니까 이 편지는 밥을 위한 거예요. 당신을 위한 편지죠.
아니요. 밥이 말했다. 아닌 것 같아요.
아니라굽쇼. 남자가 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당신이 밥이랬잖아요.
예. 나는 밥이죠. 하지만 내 편지가 아닌 것 같아요.
어째서요. 장난 말아요. 더운 날.
장난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밥이지만 친애하는 밥은 아니에요. 그냥 밥이죠.
친애하는 밥이 아니라구?
맞아요.
그렇다면 이거 난감한걸. 우편배달부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땀을 계속 흘렸다. 겨우 밥을 찾았는데 친애하는 밥이 아니라니. 그럼 어쩌란 말이요.
글쎄요. 아!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이 집엔 다른 밥이 있어요. 그는 지금 당근 밭에 가 있죠. 내가 가서 데리고 올게요. 혹시 모르니까요. 집에 당근이 잔뜩 있는데도 당근 밭에 있다고요.
그리고 밥이 남자를 세워 둔 채 집을 나섰다. 언덕을 내려가 사라졌다. 밥은 당근 밭에 앉아 있었다. 당근들 사이에 앉아 가만히 있었다.
밥,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당근을 뽑지도 않고. 그냥 앉아 있잖아.
집에도 많으니까.
그러니까. 왜 당근 밭에 온 거야.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생각을 좀 했어.
무슨 생각을?
그냥 당근을 생각했어. 당근은 밝아. 당근 밭에 앉아 있으면 그 생각을 하게 돼.
그렇군.
정말이야, 밥. 너도 그걸 알아야 해. 당근은 참 밝아.
알아. 알고 있어.
다행이군. 당근 밭에 앉아 있던 밥이 말했다. 너도 그걸 알아야 해. 그래서 밥과 밥은 당근 밭에 앉아 있게 되었다. 그런데 밥, 당근 밭으로 찾아온 밥이 당근 밭에 앉아 있던 밥에게 말했다. 집에 같이 가야겠어. 손님이 왔거든.
밥이 밥을 데리고 언덕을 올라왔다. 남자는 여전히 가방을 멘 채 땀을 흘리며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밥이 남자에 대해 설명했다.
맞아요. 당신은 절대 헛걸음하지 않았어요. 나도 밥이에요.
잘 됐어요. 여기 이 편지를 봐요. 남자가 밥에게 말했다. 가방에서 꺼낸 편지였다. 잘 봐요. 여기가 32번지 맞지요?
여기는 32번지가 맞아요.
여기 밥에게! 라고 되어 있지요?
밥에게! 라고 되어 있군요.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친애하는 밥에게.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수신인의 이름을 그렇게 적었어요. 자, 이제 말해 봐요. 누가 이 편지를 받을 친애하는 밥인지.
우린 둘 다 밥이에요. 당근 밭에서 온 밥이 말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친애하는 밥은 아니에요.
내가 이미 말했잖아요. 당근 밭에서 밥을 데려온 밥이었다. 둘 다 밥이지만, 친해하는 밥은 없어요. 나는 결코 친애하는 밥이 아니에요. 얘도. 그렇지, 밥?
물론이지. 나는 친애하는 밥이 아냐. 밥이지만.
당근 밭에서 온 밥이었다.
남자가 땀을 흘렸다. 난감해 하는 것이 보였다. 좋아요. 알았어요. 이 마을에 다른 밥이 있나요? 가방을 바꿔 메며 남자가 물었다.
없어요. 이곳에 다른 밥은 없어요. 이 마을 어디에도 다른 밥은 없어요. 우리뿐인걸요.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당신들에게 이 편지를 주고 갈게요. 어쨌든 당신들은 밥이고 이 마을에 당신들 외에 다른 밥은 없으니까요. 나는 편지를 꼭 전해 주어야만 해요.
미안해요. 그럴 순 없어요.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지만 우린 그 편지를 받을 수 없어요. 말했잖아요. 우리 중 누구도 당신이 찾는 밥이 아니에요. 친애하는 밥은 여기 없어요.
이렇게 곤란하기는 처음이군. 남자는 정말 곤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물이라도 좀 마실 수 있을까요. 정말 덥네요.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말이에요.
우리도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들어오세요.
밥과 밥을 따라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편지들이 들어 있는 가방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연거푸 물을 몇 컵 마셨다. 당근 밭에서 온 밥이 시원한 물수건을 내주었다. 남자가 땀을 닦으며 주방을 바라보았다. 냄새가 좋군요.
손님이 하나도 없는걸요. 벌써 며칠째 손님이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그러지 마, 밥. 그분을 귀찮게 하지 마. 그건 그분 잘못이 아니야.
알아. 고개를 돌려 빛이 들어오는 유리창을 밥이 바라보았다. 꼭 전해 주어야 하는데. 빛이 들어오는 유리창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곧 해가 질 텐데.
그리고 해가 졌다.
아름답군요. 그 시계를 좀 볼 수 있을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실례 될 일이 없죠. 그냥 시곈데.
남자가 탁자를 끌어 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왔다. 어떤 밥이 풀어서 건네 준 시계를 탁자에 올려놓고 남자가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시계예요. 내게도 시계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어려서부터 시계를 좋아했죠. 아버지에게 혼이 나곤 했어요. 나는 시계만 보면. 말을 끊고 남자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시계만 보면. 밥과 밥이 조용히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시계를 분해해 봐도 될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남자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눈은 여전히 시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례 될 것까지야 없죠. 우리도 미안하던 참인데.
고마워요. 남자가 가방에서 공구를 꺼냈다. 시계를 여는 납작한 오프너와 스크루드라이버와 핀셋과 루페와 골무를 꺼냈다. 남자가 시계의 뚜껑을 열고 시계를 분해했다. 크라운을 이탈시키고 바늘을 뽑고 문자판을 떼어냈다. 나사를 풀고 시계의 무브먼트를 분해했다. 태엽과 브리지와 밸런스 휠과 앵커와 기어를 해체했다. 친애하는 밥! 시계를 분해하며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밥은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친애하는 밥! 남자가 또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밥은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를 바라볼 뿐이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시계를 분해했다. 탁자는 남자가 해체한 부속들로 가득했다. 빌어먹을 친애하는 밥! 남자가 또 말했지만 어떤 밥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지. 밥이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다른 밥이었다. 친애하는 밥은 없는걸.
기다릴 수가 없는데. 미안해요. 기다릴 수가 없어요. 나는 이제 밥을 찾으러 가야 해요. 빌어먹을 친애하는 밥.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가방을 메고 남자는 밤이 되어서야 떠났다. 탁자에는 분해된 시계가 그대로였다.
어쩌지. 밥이 말했다.
조립해야지.
나는 조립할 줄 몰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시계를 열어 본 적도 조립해 본 적도 없어.
어떻게든 되겠지. 시계에도 시계의 플롯이라는 게 있겠지.
그럴까.
그럴 거야. 그리고 어지러운 탁자를 보며 밥이 말했다.
불가사리 같아.


모래는 따뜻해. 바람도. 슬픔도.
따뜻해.
저기 나무를 싣고 가는 트럭이 보여? 보여. 트럭이 흔들릴 때마다 나무와 잎이 흔들려. 잎을 털어내며 달리는 것 같아. 멸치 떼 같아. 맞아. 멸치 떼야. 나무가 아니었어. 멸치 떼를 싣고 가는 트럭이었어. 트럭이 멸치 떼를 몰고 있어. 밥, 보고 있어? 보고 있어. 저기 사람들을 싣고 가는 트럭이 보여? 보여. 사람들이 모두 흰 모자를 쓰고 있어. 사람들이 한 손으로 흰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하는군. 누구에게 인사를 하는 걸까. 저거 봐. 다시 흰 모자를 쓰고 있어. 오리처럼. 오리 같아. 오리였어. 트럭이 오리들을 싣고 호텔로 들어가고 있어. 밥, 보고 있어? 보고 있어. 밥, 저기 양파와 햄과 늙은 오리들과 한 다발의 전선과 장갑차를 싣고 가는 트럭이 보여? 보여. 보고 있어.
먼지가 날리고 있어.
보여.
사랑은 어떻게 끝나는 걸까.
어떻게든. 끝나겠지.
해변에 술집이 많았다.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나와 해변의 나무 의자에 앉아서 마신 술을 토했다. 술을 토한 사람들이 다시 해변의 술집으로 하나씩 둘씩 걸어 들어갔다. 이 술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저 술집으로 들어가면 저 술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이 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무 의자에서 사람들이 바뀌었다. 해변에선 다 그래. 그래서 해변에 오는 거야. 두 밥이 해변의 의자에 앉아 말했다. 멸치를 구워먹는 사람들이 있군. 모닥불도. 말했잖아. 그래서 해변에 오는 거라구. 알아, 밥. 보기에 좋아서 하는 말이야. 그냥 보기에 좋아. 바람도 시원하고. 정말 좋아.
나도 그래. 정말 좋구나. 의자에 앉은 밥이 말했다. 하지만. 걱정이 돼. 총을 살 수 있겠지?
총을 사기 위해 가는 거잖아. 당연히 살 수 있지. 의자에 앉은 다른 밥이 말했다.
서두르자.
그래, 서두르자.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해변으로 걸어갔다. 보기에 좋구나.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밥이 말했다. 해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해변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런 것 같았다. 언덕을 내려가다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들었다. 해변에서 들려오는 노래였다. 듣기에 좋구나. 밥이 말했다. 노래를 듣던 밥이었다. 두 사람이 잠시 멈춰서 레드 제플린의 노래를 듣고 있을 때 존과 존과 존이 두 사람 앞을 지나갔다. 그중에 하나는 드럼을 치고 있었다. 하나는 베이스를 쳤다.
하나는 불에 타고 있었다.
안녕! 존. 밥이 멀어지는 존에게 인사를 했다.
어떤 존에게 인사를 한 거야?
그냥 존이지. 존이면 돼. 무슨 상관이겠어.
그래, 맞아. 밥이 말했다. 서두르자.
존과 존과 존이 사라진 후에 밥과 밥은 서둘러 해변으로 갔다. 거의 해변에 닿고 있었다. 언덕 아래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달콤했다.
세상에! 손가락이 타는 것 같아.
모래는 말할 수 없이 따뜻했다. 여자와 남자들이 섞여 비치발리볼을 하고 있었다. 건장한 남자가 때린 공이 하늘 높이 올라가는 중에 해변이 저물어서 공도 어두워지더니 이윽고 형태가 보이지 않았다. 비치발리볼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목을 꺾고 하늘을 보며 공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어두워진 공기처럼 어두워진 공은 내려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따뜻한 모래에 앉아 하늘을 보며 기다렸지만 더 어두워졌을 뿐이다. 진짜 어두워졌나 봐. 한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말하는 사이, 말할 수 없이 어두워졌다. 여자가 말하는 사이, 목을 꺾고 있던 얼굴들도 공의 형태로 어두워지며 해변에서 하나씩 사라졌다.
술집이 많았다. 술을 먹던 사람들이 술집에서 나와 해변을 향해 걸었다. 멸치를 구워먹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해변에 서 있었다. 저것 봐. 저걸 좀 봐. 불가사리들이 모두 해변으로 올라와 있었다.
죽은 불가사리들이야.
죽은 불가사리지. 불가사리야.
불가사리지.
그리고 저물었다.
아주 빨리.
사람들이 해변에 서 있었다.
오리도.
어두워져서 오리가 장갑차로, 장갑차가 드럼 치는 존으로, 드럼 치는 존이 한 무더기 염소로 보였다. 사람과 트럭과 나무와 오리와 양파와 햄과 장갑차와 해변이 한 무더기로 보였다. 한 무더기 안에서 오리와 염소가 밀고 싸우고 올라탔다. 간신히 구별할 수 있었지만 그조차 어두워져서 해변에 서 있는 한 무리 유부녀들이 드럼으로, 오! 주느비에브, 다정하고 상냥한 유부녀, 그조차 어둡고 희미해져서 트럭과 사람과 오리와 캘리포니아, 시카고, 캘리포니아 호텔과 존, 드럼 치는 존, 해변에서, 해변에서, 존, 건반도 치고 베이스도 치는 존, 양파와 햄과 바람과 모래와 보리밭, 해변의 불빛들, 해변의 흔한 것들이 함께 어두워지고 함께 무너지고 함께 사라졌다. 한 무더기로 사라졌다. 최후의 해안선처럼.
그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시한 일들. 말하지 않아도 아는 해변의 일들. 흔한 일들.
가령.
해변에 불가사리가 많았다. 사람들이 던진 유리병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저물고 어두운 해변에서 유리병들이 한 번씩 빛났다. 저것 봐. 빛나고 있어. 밥이 말했다.
마가렛처럼.
그렇구나. 그렇구나. 다른 밥이 말했다. 마가렛처럼.
말할 수 있을까. 밥이 말했다. 한 번 더 말할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 다른 밥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
밥과 밥이 해변에 앉아 울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 아름다운 일이 없었다.














작가소개 / 여성민

2010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소설)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
시집으로 『에로틱한 찰리』가 있다


《문장웹진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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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벅스 이원석 사라진 마을의 이름은 소몽笑夢이었다. 소몽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유속과 깊이가 적당한 계곡이 가까워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던 관광지로, 몇몇 주민들은 일찍부터 부업으로 관광객들을 재워 주며 얼마간의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촬영과 유명 연예인의 방문이 화제가 되어 마을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관광객이 늘어나며, 생업과 부업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살던 집을 개조해 전문적으로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종국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그 일로 먹고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같은 마을 주민들끼리 동종 업계 종사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자신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다른 집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소개받은 집에서는 소개해 준 사람에게 작은 보답을 하는 일종의 중개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동안 그들의 사회적 유대감이 혈족의 그것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소규모 민박집이 성행하던 어느 날 ‘물꼬리 펜션’이라는 이름의 첫 대형 독채 펜션이 문을 열었고 관광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넓고 쾌적한 시설, 안전한 보안과 차량 픽업 서비스 등은 특히 가족 단위 손님들이나 젊은 세대 단체 손님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읍에 하나 있는 2금융권 은행에는 대출 상담을 받는 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리하여 소몽리는 다시 한 번 변화의 바람에 휩쓸렸다. ‘물꼬리 펜션’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른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독채 펜션이 생겨났고,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펜션 단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를 이어 펜션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외지인이 지은 펜션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주민도 있었다. 관광객들은 해마다 늘어 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거라고 사회경제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숙박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여름 한철 외지인들이 쓰고 간 돈으로 겨울을 견뎌야 했다. 규모가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숙박객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고, 여름이면 집과 집 사이로 고성이 오가거나 주먹다짐이 일어나는 일도 빈번했다. 산을 잘 모르는 외지인들의 부주의한 행동도 골칫거리였다. 술을 먹고 입수하는 외지인은 해마다 몇 명씩 있었고 출입이 금지된 곳에 억지로 들어가 뱀에 물리거나 말벌에 쏘여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도 많았다. 몇몇 부덕한 업주들이 성수기 숙박 요금을 지나치게 올려 받아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상으로, 외지인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범죄의 빈도도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주민들은 ‘이래서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간혹 어린아이가 태어나도 가장 먼저 그런 것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법.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는 법. 그러나 영특한 아이들은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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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1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김나현 1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원룸 안에서 그 냄새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결국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끓였다. 수프는 메인 재료가 양파와 토마토가 맞나 의심이 들 만큼 동그란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돼지고기에 붙은 비계 때문이거나 양파를 볶을 때 버터가 들어간 탓인 듯했다.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야.” 제 맛?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에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엄마의 기분에 따라 혹은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수프의 맛이었다. 그러고 보면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땐 소고기가 잔뜩 들어가곤 했다. 여유랄 게 없을 땐 몇 조각의 고기만 들어간 야채수프에 가까웠다. 그 수프는 마녀 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다이어트 음식으로 각광받기 훨씬 전부터 우리 집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다른 집 엄마들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특기로 내세울 때, 엄마는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주력으로 삼았다. 깊은 맛의 토마토 수프, 따뜻한 쌀밥,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면 특별히 다른 반찬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수프에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냉장고 안의 남은 재료에 양파와 토마토를 넉넉히 넣고 끓일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수프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가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종종 그것을 토마토가 들어간 양파 수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내가 먹어 본 어떤 수프도 엄마가 만든 수프 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웃들이 엄마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도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엄마의 장기이자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그 수프가 이제 내 신경을 건드렸다. 방 안에 겹겹이 쌓인 냄새 때문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떤 냄새든 밀폐되면 지독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주방 후드의 환풍기를 켜고 침대를 밟고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시자 어딘가 모르게 매캐함이 밀려왔다. 그건 이웃집에서 흘러온 담배 냄새 따위가 아니었다. 공기 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로변 오피스텔은 어쩔 수 없었다. 미세먼지가 있든 없든 주위는 옅은 안개에 휩싸여 흐릴 때가 많았다. “그만 내려와. 상이나 펴.” 접이식 탁자를 펼치고 엄마와 마주 앉으니 다섯 평 원룸이 꽉 차는 듯했다. 받침대에 냄비를 내려놓은 엄마는 할 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편안히 수프 맛을 음미하기에는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무슨 소리를 들을까 내심 마음을 졸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 집보단 낫지 않아?” 그 집은 방충망에 벌레가 자주 들러붙었다. 작은 날벌레도 아니고 엄지만 한 크기였다. 그게 집으로 날아 들어오곤 했다. 오래된 주택의 2층집에 딸린 셋방이었다.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부엌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여긴 화장실이 집 안에 있고 부엌도 딸려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줄곧 말이 없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에는 그 돈을 갖고 겨우 이런 곳밖에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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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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