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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눈보라」

  • 작성일 2008-12-29
  • 조회수 5,568





???? 눈보라

?????????????????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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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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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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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 - 황지우 : 195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나는 너다』『게 눈 속의 연꽃』『저물면서 빛나는 바다』『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함.????


● 낭송 - 장무영 : 배우. 연극 『위선자 따르뛰프』『세조』『갈매기』, 영화『비열한 거리』『숙명』『싸움』 등에 출연.

광주에 살면서 무등산 원효사 처마 밑에서 몇 번이나 이 시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무슨 벌 받으러 산에 들어온 사람처럼 눈보라 치는 풍경을 뺨이 얼얼하도록 바라보던 날도 있었지요. 미당은 내리는 눈발 속에서 “괜찮다…괜찮다…괜찮다…”고 영혼을 다독이는 목소리를 들었다면, 황지우 시인은 눈보라 속에서 짐승 같은 바람 소리를 들었나 봅니다. 이제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구절처럼, 돌아보면 눈길 위에 잘못 살아온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눈은 내리고 또 내려, 부끄러운 발자국들을 용서하듯이 내려,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허락합니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고.

 

2008. 12. 29. 문학집배원 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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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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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유연

    처음에는 가슴에 납덩이를 하나 얹은 듯 무겁고 아팠습니다. 그런데 시를 읽어가면서 그 납덩이는 이상하게 눈덩이처럼 녹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황 시인이 저 대신 1년을 고백성사해 주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용서되었고, 이제 보속으로 '다시 처음부터 걸어' 보려 합니다. 장무영 씨의 낭독도 절절하여 시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습니다. 시인 황지우 선생님, 집배원 나희덕 선생님, 낭독해 주신 장무영 선생님, 모두께 감사합니다.

    • 2008-12-29 09:45:25
    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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