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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오래된 기도」

  • 작성일 2010-01-04
  • 조회수 6,715




오래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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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시·낭송 / 이문재 -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으며,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함.

출전 / 『시와 사상』 2008년 가을호

음악 / 조성래

애니메이션 / 송승리

프로듀서 / 김태형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해보세요. 지금보다 조금 더 바깥에 테두리를 두고서. 모든 일의 처음을 생각하면서. 새잎 돋는 때처럼 막 생겨나는 마음을 갖고서. 내일에는 오늘보다 조금 더 넉넉하게 살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둘 사이에서 양편의 관계를 맺어줄 것을 생각해보세요. 외로움과 외로움을, 빛과 어둠을, 나와 당신을, 삶과 죽음을, 맨 앞과 끝을 함께 손잡아 주세요. 그렇게 삶의 시간을 천천히 들이마시는 거죠. 새해입니다. 7세기에 살았던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기쁜 일에 기뻐하고 나쁜 일에 슬퍼하되 지나치지 말라. 깨달아라, 어떤 리듬이 사람들을 붙들고 있는지를.” 행복하세요.

 

문학집배원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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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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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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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관리자
  • 201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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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7건

  • 익명

    기도가 어려운 것으로만 저에게 다가왔었는데... 이제는 편하게 기도할 수 있어 좋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2010-04-07 08:10:1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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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어제 낭독의 발견에서 문태준시인이 소개해주신 시입니다..아주 작은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이제 매 순간마다 행동으로 옮기고,어제 문태준시인이 말씀하셨던 것처럼,사랑에 표현에 인색하지 않기를.....스스로 다짐하여 봅니다.

    • 2010-02-17 14:00:48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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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5장의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과 연관되어 너무나 좋습니다. 이 시간도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 2010-01-31 19:17:3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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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하느님께 목숨을 바쳐 모든찰라를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 2010-01-10 11:56:0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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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명

    정말 감사합니다. 죽음이 친구임을 알고 살아가는 삶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알찬지요... 매순간 정말 기도를 하게 된답니다. 좋은 시 정말 감사합니다^^

    • 2010-01-06 21:12:00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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